1024화
땅이 흔들렸다. 수백, 수천의 괴물들이 뭔가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일제히 한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두 발로, 네 발로, 심지어 사지가 잘려나가 조금 전까지 땅을 기던 것들조차 필사적으로 꿈틀거리며 어딘가로 향하려 했다.
“이게 무슨 일이지?”
보리스가 그답지 않게 멍청한 얼굴을 하고서 어정쩡한 자세로 굳었다. 방금까지 그와 사투를 벌이던 괴물들이 갑자기 등을 보이고 어디론가 달려갔다. 처음에는 도망치는 것인 줄 알았지만, 곧 주변에서도 같은 일들이 벌어지는 것을 보고 그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죽기 살기로 뒤엉켜 싸우던 것들이 등을 베이는 와중에도 허겁지겁 달려다가는 꼴이 기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충격적이었다. 거침없이 돌아서는 꼴이 꼭, 마치 이곳에서의 싸움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는 것 같아서.
만약 정말 그런 것이라면, 지금까지 필사적으로 아등바등한 자신은 뭐가 되는가. 문득 보리스는 스스로가 초라해지는 듯해, 살았다는 안도감보다는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기이한 감정이 스멀스멀 고개를 들었다.
“어찌 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기회입니다! 서두르시지요!”
로우렌이 쾌재를 불렀다. 그는 이 알 수 없는 상황에 대해 이해하기를 포기한 듯했다. 깊이 생각할 때가 아니라고 판단한 것인지, 아니면 이미 한참 전부터 다 놔버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괴물들이 우르르 어디론가 몰려가면서 그들에게 생환의 기회가 열린 것은 분명했다. 로우렌은 지체 말고 움직일 것을 주장했다. 보리스도 일단은 같은 생각이었기에 그라모트, 울티노와 함께 선두에서 길을 열었다. 이 순간에도 그는 몸을 살피라는 수하들의 말을 무시하며 가장 앞에서 칼을 휘둘렀다. 로우렌은 그 모습을 보며 더는 입 아프게 떠들어대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저 무모함과 고집, 용맹 사이에 어중간하게 걸쳐진 성미는 가히 불치병이라 할 만했다.
“흐아압!”
뒤따르는 수하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보리스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는 싸우면 싸울수록 점점 힘이 끓는 자신의 몸에 감탄하며, 약간의 희열까지 느끼고 있었다.
피곤하지 않다. 힘들지 않다. 중간중간 전력을 쏟아내고 나면 약간의 탈력감이 찾아오지만 곧 언제 그랬냐는 듯 멀쩡히 회복된다. 보리스는 자신이 갓 죽다 살아난 것이 맞는지 의아할 지경이었다.
‘이건…정말 대단하군.’
보리스는 바보가 아니었다. 그러니 자신의 이 이상할 정도로, 아니 확실히 이상한 몸 상태가 어찌 가능한 것인지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술사 나짐이 그에게 한 치료, 혹은 시술의 힘이겠지.
효과가 있기를 기대하고 시술을 한 것이겠지만, 그래도 너무 효과가 좋지 않은가. 다만 보리스는 그에 대해 의심하거나 두려워하기보다 그저 이 순간을 만끽하기로 했다. 좋지 않은가. 지치지 않는 몸이라니.
푹!
어깨에 박힌 부러진 발톱을 뽑아냈다. 누런 발톱 끝에 피가 살짝 묻어 있었다.
“음.”
괴물들이 전부 움직인 것은 아니었다. 아직도 많은 괴물이 기현상에 영향을 받지 않은 채 난폭하게 날뛰어대고 있었다. 괴물 상당수가 어디론가 사라진 것은 틀림없지만, 여전히 보리스 일행의 앞길이 쉽지만은 않은 이유였다.
‘이건 마치…각인 같군.’
각인 중 그런 것들이 있다. 체내의 기운을 인위적으로 끌어모아서 상처를 빠르게 치유하는 기능을 가진. 그러나 그런 것들은 필연적으로 후유증을 동반한다. 본래 균등하게 나뉘어 있어야 할 기운을 한데 끌어 쓰는 것이니 자연히 힘이 빠져나간 다른 쪽에서 어떤 식으로든 부작용이 나타날 수밖에 없는 거다.
“공자님. 괜찮으십니까?”
“그래.”
방금 상처가 났고, 방금 아물었다. 큰 상처는 아니었다지만 이 정도면 상처가 생기자마자 아물었다고 봐도 좋으리라. 상술한 치유의 기능을 가진 각인들조차 이 정도 수준의 치유력을 보이지는 못한다. 게다가 현기증이라든가, 다른 어떤 부작용도 지금 당장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나짐.”
“예, 옛!”
술사 나짐은 전투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아 일행의 중간 즈음에 섞여 이동하고 있었다. 코를 찌르는 악취에 눈살을 찌푸리고 있던 그는 보리스의 부름을 듣자마자 황급히 뛰어나왔다.
“이거 대단하군.”
“예? 아…….”
“효과가 너무 좋아서 조금 머리가 복잡하기는 한데, 그마저도 지금은 아무래도 좋을 정도야. 지치지 않고, 상처도 순식간에 아문다. 이래도 되는 건가 싶을 정도로 대단해.”
“요정왕의 힘이기 때문입니다. 요정만 해도 지금 시대에는 전설적인 존재들로 여겨지는데, 하물며 그런 요정들의 왕이 남긴 것이지요. 일부라고 해도 그 힘은 권능이라 하기에 손색이 없을 겁니다.”
“그런가? 요정왕도 초월자라 할 수 있는 존재인가?”
“그건…잘 모르겠습니다.”
너무 뛰어난 힘에 대해 변론하듯 떠들던 나짐은 보리스의 마지막 물음에는 말끝을 흐렸다. 아무리 그가 시술에, 요정왕의 힘에 긍정적으로 이야기하려 해도 초월자는 또 다른 문제였다. 일개 술사에 불과한 그가 감히 함부로 떠들어댈 수 없는 주제인 것이다.
보리스는 나짐의 작아지는 말소리를 부정으로 해석했다. 아마 틀리지 않을 것이다. 보리스는 자신이 받아들인 유해의 주인이 일찍이 군주 아간투스베록에게 패하여 봉인되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만약 요정왕이 초월자였다면 그리 비참한 신세가 되지는 않았을 터였다.
‘여전히 감도 안 잡히는군.’
날이 나간 검을 두 번이나 바꿨음에도 여전히 손아귀에는 힘이 넘친다. 지친다는 것을 잊어버릴 것만 같았다. 두렵지는 않아도 버겁게 느껴지던 괴물들이 이제 더는 눈에 차지 않았다. 보리스는 아주 잠깐이지만, 이것이 부친이 보는 세상인가 싶었다. 모든 것이 쉽고, 눈에 차지 않는.
쿵!
몸 전체를 던지는 바윗덩어리 같은 괴물. 보리스는 놈의 움직임을 처음부터 끝까지 바라보며 대응했다. 두 발자국을 옆으로. 그 후에 막 떨어져 내린 놈의, 가장 연약해 보이는 뒷목을 있는 힘껏 베었다. 칼날은 그의 기대대로, 짐작대로 수월하게 박혀 들어갔다. 뼈까지 끊어내지는 못했지만 큼지막한 몸뚱이가 크게 흔들릴 정도의 깊은 상처. 보리스는 깊이 박힌 검을 회수하는 대신 등 뒤에 매고 있던 양손 도끼를 들었다. 그리고 흔들리는 괴물의 머리, 그중에서도 정수리로 추측되는 부분에 힘껏 휘둘렀다.
이 모든 것이 너무나 쉬웠다. 체력은 그렇다 치고, 눈도 좋아진 건가? 아니면 몸이 더 날래졌나? 뭐가 됐든, 보리스는 전 같았으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상대했어야 할 괴물들을 숨 한번 흐트러지지 않고 숨통을 끊어갔다. 그 과정은 갈수록 더 간결해지고, 더 빨라졌다. 보리스는 자신이 점점 더 강해지고 있다고 느꼈으나, 실은 그저 자신의 새로운 몸에 익숙해지고 있을 뿐이었다. 보리스는 그것을, 괴물 네 마리를 더 쓰러뜨리고 난 후에야 깨달았다.
‘상쾌하다.’
피, 그것도 괴물들의 피를 뒤집어쓴 채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 우습기는 하지만 보리스는 정말 상쾌하다고 생각했다.
마치 눈에 뭔가 끼어서 흐릿하기만 하던 시야가 이제야 말끔해진 것 같았다. 정작 흐릿하던 때에도 흐릿하다 여긴 적이 없었건만, 지금 와서 돌이켜보니 그때는 확실히 흐릿했다. 아니, 그때의 자신은 눈 뜬 맹인이나 다름없었다.
‘너무하는군.’
자신이 초월자가 아님을, 어쩌면 그 근처에도 이르지 못했음을 안다. 하지만 그럼에도 지금의 자신은 이전의 자신과는 비할 수 없었다. 과장을 조금 보태자면, 다른 사람으로 새로 태어난 것 같았다.
자신감을 넘어서는 어떠한 감정에 휩싸인 보리스는 더 적극적으로 싸워나갔다. 일행은 처음에는 기세 좋게 뒤따랐지만 머지않아 입에서 단내를 토하며 조금씩 멀어지는 보리스의 등을 황망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대체…그 유해라는 것이 저 정도인가?”
안색이 창백해진 로우렌이 안색이 노래진 나짐에게 물었다.
“후우욱. 사실, 사람에게 시술한 것이 처음이니…후욱. 단언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같은 종이라도 힘을 받아들이는 데 편차가 있는 것을…확인했지요. 지금 보이시는 모습을…후욱. 보면. 공자께서…힘을 받아들이는 데 특별히 적합한 분이실 수도 있겠습니다.”
“그래. 더 말하지 않아도 좋네.”
로우렌이 말을 짜내다시피 하는 나짐을 보며 혀를 찼다. 이 허약한 술사는 더 물었다가는 정말 숨이 넘어갈 것 같았다.
‘그나저나…….’
로우렌의 눈이 졸아들었다. 공자야 어떻게든 좋게 이해하고 넘어간다 쳐도, 눈에 밟히는 것이 하나 더 있었다. 거의 달리다시피 하며 괴물들을 뚫고 나가는 보리스와 비교해도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오히려 너무 차분해서 여유까지 느껴지는 사내.
‘아무리 친위대라 해도 저 정도 실력자가 이제껏 무명이었을 리가 없다.’
그의 형은 언젠가 매사에 생각이 너무 많은 것도 병이라고 했었다. 로우렌 본인도 그 말을 어느 정도는 인정했다. 이런 상황에, 차고 넘칠 정도로 활약하고 있는 전사를 상대로 이런 의심을 품는다는 것은 확실히 합당치 않다. 그걸 알지만, 그래도 로우렌은 의심을 거둘 수가 없었다. 병이라고 해도 좋다. 하지만 본래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은 종종 엉뚱한 데로 튀기 마련 아니던가.
‘이상해. 너무 이상하다.’
갑작스레 뚝 떨어진 무명의 실력자? 열 번 양보해서 그럴 수 있다고 치자. 하지만 다른 친위대 병사들의 반응이 문제였다. 로우렌은 저 울티노라는 자가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직후부터 울티노 본인뿐 아니라 다른 친위대 병사들도 신경 써서 살폈다.
그리고 곧, 한 가지를 알아차렸다. 울티노가 활약하면 활약할수록, 친위대 병사들이 묘한 반응을 보인다는 것을.
이쪽이야 외부인이니 그렇다 치지만, 저들은 다르지 않은가. 같은 친위대 동료였다. 게다가 울티노가 그들의 상관이니, 저들은 분명 이전부터 울티노와 손발을 맞춰왔을 터였다. 그런데 그들이 보이는 반응은 전혀 예상 밖의 것이었다. 그들이 울티노를 낯설고, 미심쩍게 여기는 듯하다면 너무 과한 해석일까?
“하!”
문득, 로우렌은 헛웃음을 머금었다. 순간 내가 왜 이러지 싶었다. 지금이 이런 시답잖은 의심이나 하고 있을 때인가? 죽느냐 사느냐가 달린 순간이다. 의심스러운 구석이 있든 없든 간에 저 울티노라는 자는 아군의 중요한 전력이니, 일단은 덮어두고 볼 일이다. 그런데, 왜일까? 다 알고 있음에도 자꾸만 저 자가 눈에 밟히는 까닭은.
그, 울티노는 보리스 공자와 함께 선두에서 괴물들의 피를 뿌렸다. 그런데 그렇게 목적지에 닿기 전까지는 절대 멈추지 않을 것처럼 거침없이 나아가던 그가 한순간 갑작스레 걸음을 멈췄다. 그러자 보리스도 덩달아 멈춰 섰다. 얼핏 전투의 열기에 취해버린 것 같았던 보리스였지만, 그리고 그게 아주 틀린 추측은 아니었지만 그런 와중에도 등 뒤를 지켜주는 아군의 존재를 의식하고 있던 그였다. 그런데 갑자기 등 뒤가 허전해지니 그로서도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일인가.”
“…….”
울티노는 답하지 않았다. 다만 슬쩍 고개를 돌리며 주변을 둘러볼 뿐이었다. 그 모습이, 보리스의 눈에는 아주 느릿하게 보였다. 보리스는 그 행동이 끝나기도 전에 그것이 뜻하는 바를 깨달았으며, 깨달은 즉시 외쳤다.
“뭉쳐라!”
일행이 즉시 뭉쳤다. 친위대 병사들이 보리스의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보리스는 그들에게 나짐을 비롯한, 숨을 헐떡대고 있는 이들을 지키라 명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명한다고 해도 그들이 자신의 명령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을 것을 알았기에 곧바로 체념했다.
“느껴지십니까.”
울티노의 나직한 물음. 보리스는 고개를 저으려다가 순간 멈칫했다. 아주 희미하게, 신경을 간질간질하게 긁는 것 같은 감각이 있었다.
“이상하긴 한데, 모르겠군. 자네는?”
“…….”
울티노는 검을 고쳐 쥐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그의 가라앉은 시선이 향한 곳. 좁은 길목에서 일단의 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떠돌이 나그네처럼, 골목의 그늘 속에서 걸어 나온 그들은 고작해야 여섯밖에 되지 않았다. 그런데 느낌으로는 그 배 이상은 되는 것 같았다. 로브를 눌러 입었음에도 한눈에 들어오는 큰 체구들 때문은 분명 아니었다.
“적이군.”
“도망치는 무리인가?”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아. 우리는 우리의 일을 하면 된다.”
그들은 자기들끼리 뭐라 주고받더니, 곧 섬뜩한 눈길을 보내왔다. 그 시선에 적의는 담겨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 시선을 받은 순간, 온몸의 신경이 곤두섰다.
괴물은 아니다. 하지만 아군도 아니다. 그렇다면?
“전투 준비!”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