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3화
아간투스베록은 그의 이름이 아니었다. 다른 것들이 그를 그 이름으로 부를지라도, 그 스스로는 단 한 번도 그것이 자신의 이름이라 여긴 적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 이름은 저주스러운 황제가 제멋대로 붙인 것이기 때문이다.
이름은 중요하다. 강대한 존재의 이름은 그 자체로 힘을 지닌다. 어찌 보면 한 존재의 본질을 규정하는 가장 큰 요소일지도 모른다.
그에게도 이름이 있었다. 지금은 기억하는 이조차 없지만, 한때는 세상을 떨쳐 울렸던 이름이.
그때가 그리운 것은 아니다. 흘러간 과거에 미련을 두는 것만큼 꼴사나운 것도 없다. 그는 단지 원통할 뿐이었다. 이렇게 영락한 자신이 너무나 부끄럽고, 견딜 수 없을 만큼 증오스러워서.
쿵!
징그러울 정도로 들러붙는 놈을 떨쳐내니 뱀 눈깔이 기다렸다는 듯 덤벼들었다. 놈의 뼈 칼을 손등으로 비스듬히 쳐내고 왼 주먹을 날림으로써 응수했다. 그러자 놈은 기다렸다는 듯 팔꿈치로 주먹을 찍었다. 주먹보다는 팔꿈치가 더 위력적이라는 고정관념. 전형적인 인간의 싸움 방식이다. 벌써 오래전에 인간을 뛰어넘었으면서, 이놈은 아직도 그때의 방식을 고수했다. 나름대로는 잊지 않기 위한 발버둥이겠지만, 그가 보기에는 미련한 고집에 불과했다.
우득!
그렇지 않은가. 용이라 해도 거인의 육신에는 미치지 못한다. 하물며 온전한 것도 아닌 놈이 알량한 수작을 부려봐야 손으로 하늘을 가리는 꼴밖에 되지 않는다. 주먹과 부딪친 팔꿈치에서 듣기 좋은 소리가 나며, 놈의 몸이 미세하게 비틀렸다. 몸을 빼려는 거다. 뼈가 부러진 것 정도는 금방 회복할 거라는 계산이다. 다른 것은 몰라도 용의 회복력 하나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으니까.
[어림없다.]
놈을 붙들었다. 빠져나가려고 휘두르는 뼈 칼을 팔뚝으로 막았다. 가죽이 깊게 갈라지고 피가, 생명이 새어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제대로 힘이 실린 공격이 아니었음에도 그 위력은 무시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러니 경멸하면서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니, 사실은 반대다. 인정하기에 경멸할 수밖에 없는 거다.
콰득!
팔을 내주고 놈을 붙잡았다. 붙든 손아귀에 힘을 실으니 붙들린 어깨가 역시 좋은 소리를 내며 으스러졌다. 회복력이 뛰어나다고 해도 내구성 자체는 그리 대단한 수준이 아니다. 마음만 먹는다면 이대로 찢어발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상대는 이 뱀 눈깔 하나가 아니었다.
기다렸다는 듯 뒤통수에서 느껴지는 서늘한 감각. 그는 아쉬움을 삼키며 뱀 눈깔을 놓아주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적과 부딪쳤다.
쾅!
주먹과 창이 부딪치며 나는 소리라고는 볼 수 없는 굉음. 그가 인상을 찌푸리며 한 발 뒤로 물러났다.
힘에서 밀린 것이 아니다.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단지 오물처럼 껄끄러운 기운이 파고들까 싶어 미리 대응한 것일 뿐.
뱀 눈을 한 호적수에 비할 바는 아니나, 이놈 역시 무시할 수 없다. 난적이라면 난적이다. 이런 놈이 버티고 있는 줄 알았다면 준비를 좀 더 해왔을 것을.
[신기한 놈이군. 살아 숨쉬는 놈이 어떻게 이런 힘을 다룰 수 있지?]
마치 차가운 얼음 연못 속에 피어오르는 불꽃 같다. 얼음이 녹든, 불이 식든 둘 중 하나는 해야 하는데 공존할 수 없는 둘이 멀쩡하게 공존한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허나, 그는 알고 있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말이 얼마나 공허한 것인지. 이 세상은 한때 자신을 지배했던 거인을 몰락시켰으며, 말도 안 되는 조화를 여러 차례 거듭하면서 끝내는 열등한 것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방조했다. 그것만 봐도 이 세상에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지 않은가.
모든 초월자는 특별하다. 이 시대에는 특히 더 그렇다. 그렇다면 이런 놈이 하나쯤 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터.
쉽지 않다. 사실 그는 이곳으로 오기 전, 너무 쉽게 끝나버리면 어쩌나 하는 걱정을 했었다. 숙적에 대한 적의는 긴 세월 동안 쌓인 만큼 거대했지만, 우습게도 그런 만큼 너무 간단하게 끝나버리지 않기를 바랐다. 적어도 싸움다운 싸움을 하고, 시원하게 마무리 지을 수 있기를 바란 것이다.
늘 그랬듯, 이번에도 오만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힘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비록 전부 되찾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차고도 넘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찌 알았겠는가. 일이 이렇게까지 어려워질 줄이야. 그것도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애송이에 의해서.
‘재미있군.’
그는 웃었다. 이렇게 시원하게 웃은 것이 얼마 만인지 모른다. 그는 자신이 웃고 있다는 것을, 어깨가 들썩이고 나서야 뒤늦게 알아차렸다.
[좋아. 아주 좋다.]
그는 특별한 존재였다. 처음 이 세상에 나올 때부터, 그는 자신이 특별한 운명을 지니고 있음을 자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특별한 존재였으며, 세상을 굽어보는 강자였다. 그가 보는 세상은 세상에 살아 숨 쉬는 절대다수가 보는 세상과 전혀 달랐다. 보이는 것이 다르니 생각하는 방식이라든지 가치관 같은 것도 자연히 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 있어 세상 모든 것은 가치 있는 것과 가치 없는 것, 그 둘로 나뉘었다. 물론 그 둘을 나누는 것은 오롯이 그의 판단이었다.
[독버섯 같은 놈이로군.]
아니. 너무 약한가? 그럼 독사 정도로 해두자. 이빨에 독을 듬뿍 묻히고 아가리를 벌린 독사.
그 날카로운 독니는 주의해야 하지만, 바꿔 말하면 독 묻은 이빨만 주의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이빨만 피해도 되고, 아예 아가리를 벌릴 생각도 못하도록 대가리를 눌러버려도 된다.
방법은 많다.
* * *
“…….”
욱신거리는 몸을 바로 움직이려고 하니 턱에 걸리기라도 한 것처럼 덜컥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뒤늦게 올라오는 극심한 통증을 느낀 다음에야, 군터는 왼쪽 다리가 약간 이상하게 뒤틀려 있음을 알아차렸다. 방금 그 무지막지한 일격을 받아내면서 다리에 이상이 생긴 듯했다.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쉰 군터가 뒤틀린 다리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으득! 하는 소리가 나며,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정상으로 돌아왔다.
‘한참이나 부족하군.’
군터가 어두운 눈으로 전방, 여전히 격렬하게 날뛰고 있는 거인을 응시했다.
거인은 줄카와 마물들을 번갈아 상대하고 있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쉬지 않고 계속 싸움을 이어가고 있었음에도 여전히 힘이 넘쳐 보였다. 거기에 외관상으로는 그렇게 눈에 띄는 부상도 없었고.
난적. 그야말로 난적이다. 홀로 저 괴물과 맞섰더라면 승산을 점치는 것이 무의미했을 것이다.
‘아직도.’
전투에 집중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끈을 찾기 위해 눈에 불을 켰었다. 그러나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 대체 얼마나 은밀하게 숨겨둔 것인가. 이쯤 되면 그 끈이라는 것이 존재하기는 하는 것인지 의심이 들 정도다.
구어어어―!
줄카가 집중 공격을 받는 와중에 금세 기력을 되찾은 마물이 다시 덤벼들었다. 저 마물, 다른 것은 몰라도 방어력과 회복력만큼은 끔찍할 정도였다. 아간투스베록이 응수할 때마다 몸 일부가 터져나가는 와중에도 굴하지 않고 계속해서 덤벼들고 있었다.
[장군.]
마물의 집념 어린 사투를 지켜보는데, 머릿속에서 익숙한 울림이 퍼졌다.
“…….”
놀라지는 않았다. 어느 정도는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어쩌다 저런 꼴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짐작하고 있겠지.]
답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답할 수가 없었다. 지금 들려오는 이 말은 대화가 아닌 일방적인 전달이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내색하지 않고 이어지는 말을 계속 듣는 것뿐이었다.
[이곳에 몰려든 녀석들 모두 영혼 깊숙이 원한을 품고 있소. 비록 영락하여 모두 잃었다 해도 그 원한만은 여전히 살아있지. 이곳에 원수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만 해도 반응할 거요.]
콰앙!
마물이 쓰러졌다. 또 한 번 몸뚱이가 여러 갈래로 찢긴 채 널브러졌다. 그리고 다시 안개처럼 흐릿하게 변하며 사라졌다. 그에 아간투스베록이 노성을 뱉으니 하늘에서 수십의 벼락이 동시에 내리치는 것 같은 굉음이 터져 나왔다. 단순히 귀만 아프고 끝나는 정도가 아니었다. 주변의 모든 것이 그의 포효에 휩쓸려 부서지고, 밀려났다. 보이지는 않지만, 육신을 재구성하려던 마물 역시 그 영향을 받았으리라.
군터의 머릿속에 울리던 마물, 아니 이가로프의 말도 흐릿해졌다.
[바람을 일으켜주시오. 피 냄새가 퍼지면 눈이 뒤집힌 짐승들이 모두 몰려올 거요. 그렇게 되면 저 저주스러운 거인을 쓰러뜨릴 길을 찾을 수 있을 터.]
아간투스베록의 발밑이 푹 꺼졌다. 육안으로는 그렇게 보였다. 하지만 영적인 시각으로 보면 아간투스베록이 서 있는 공간이 순간적으로 전혀 다른 공간으로 바뀌었을 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군터는 그 전혀 다른 공간이, 줄카가 검을 뽑아 들 때마다 나타났던 균열 너머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저 음산하면서도 위압적인 느낌. 틀림없었다.
[무리하는군. 슬슬 급해진 모양이지.]
아간투스베록의 분위기가 일변했다. 저것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줄카가 제대로 힘을 쓰려는 모양이었다. 아간투스베록의 표현을 빌리자면, 무리를 해서라도 말이다.
‘피냄새를 퍼뜨린다.’
그러거나 말거나, 군터는 그의 머릿속에 울렸던 마지막 말을 곱씹었다. 이가로프라고 해야 할지, 이가로프였던 마물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그가 남긴 마지막 말에 거짓은 느껴지지 않았다. 설령 그것이 이가로프가 아닌 일개 마물이라고 할지라도, 놈이 아간투스베록에게 지독한 원한을 품고 있음은 확실해 보였다. 그렇다면 놈의 마지막 말은 충분히 고려할 만한 가치가 있다.
피는 지금도 흐르고 있다. 아간투스베록의 넘치는 투기, 그의 존재감 자체가 진한 피나 다름없다.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널리 퍼뜨리냐는 것인데, 다른 이라면 몰라도 지금의 군터에게 그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지금 그는 솔롬 전역의 기운을, 일부라고 할지라도 통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된다 해도 손해 볼 것은 없지 않은가.’
어차피 밀리고 있는 싸움이다. 게다가 점점 더 밀릴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번쯤 판을 흔드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후우.”
가늘고 길게 뻗은 숨결이 한껏 달아오른 공기에 스며들었다. 솔롬 곳곳에 자리한 뼈의 탑들이 그의 의지에 공명했다. 비록 아간투스베록의 간섭 때문에 통제력이 처음만 못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의지를 일으키는 정도는 충분히 가능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도시 곳곳에 세운 뼈의 탑은 죽음의 기운을 받아들이고, 전달하기 위한 것이었다. 뼈의 탑이 다룰 수 있는 것은 오직 죽음의 기운뿐인 것이다.
뚝―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지금 군터가 든 창끝에는 아간투스베록의 일부가 묻어 있었다. 일반적인 피와는 다른 무언가. 그것은 주인에게서 떨어져 나와, 점점 색을 잃어가고 있음에도 여전히 강렬한 힘을 간직하고 있었다.
군터는 그것을 죽음으로 물들였다. 그리고 그의 통제력이 닿는 모든 뼈의 탑에 흩뿌렸다. 나뉘는 만큼 희미해질 테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더 좋다. 희미한 잔향만으로도 눈이 뒤집힐 정도라면 얼마나 감각이 뛰어난 놈들일 것이며, 얼마나 지독한 원한을 품은 놈들일 것인가.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