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2화
사람이든 괴물이든, 초월자들의 전장에는 얼씬거릴 엄두도 내지 못했다. 간혹 길을 잃었거나 눈이 먼 것 같은 괴물들이 접근하기도 했지만 그런 움직임도 결국 병사들과 용아에 막혔다.
그렇기에 이 마물이 처음이었다. 그런데 마물은 명백히, 아간투스베록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군터는 마물이 바람처럼 움직이고 나서야 깨달았다.
콰앙!
마물이 아간투스베록을 들이받았다. 말 그대로, 온몸을 던져서. 명백한 공격이었고, 적의의 표출이었다.
[감히!]
마물은 거인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거대해진 아간투스베록보다도 훨씬 컸다. 그러나 그렇게 거대한 마물이 온몸으로 부딪쳤음에도 아간투스베록은 살짝 밀려나는 것에 그쳤다. 그는 자신보다 월등히 큰 마물을 그대로 붙들어 내동댕이쳤다. 그러고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곧바로 달려들어 마물을 짓밟았다.
마물은 별다른 저항도 하지 못한 채 망가져갔다. 살점이 뜯겨 나가고, 뼈가 으스러졌다. 아무리 반쯤은 영체인 존재라고 해도 육신이 저 정도로 망가진다면 상당한 타격일 수밖에 없다.
[시작일 뿐이다.]
줄카가 씩씩대는 아간투스베록을 비웃었다. 마물의 난입 덕에 숨 돌릴 틈을 벌게 된 그는 균열에서 또 다른 검을 뽑아 들며 말을 이었다.
[그렇게 황제를 비난하면서 그가 한 일을 똑같이 하지 않았나. 이제 너 같은 놈들이 점점 더 몰려들겠지. 감당해야 할 거다.]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네놈은 신경 쓸 필요 없다. 어차피 보지 못할 테니까.]
아간투스베록이 차갑게 웃으며 줄카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가 한 걸음을 뗌과 동시에 또 다른 기척들이 그들의 전장으로 들어섰다. 아간투스베록의 걸음이 멈췄고, 그의 인상이 조용히 구겨졌다.
이번에도 역시 마물들이었다. 두 마리. 하나는 입에서 침을 질질 흘리고 있었고, 다른 하나는 몸뚱이가 반 정도 무너진 채로 불길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주제를 모르는 것들이 왜 이리 많은지 모르겠군.]
아간투스베록이 방향을 틀었다. 그는 입에서 침을 흘리고 있는 마물에게 먼저 짓쳐 들어갔다. 마물은 자신을 향한 명백한 적의에 재빠르게 반응했다. 식물의 줄기 같게도 촉수 같게도 생긴, 여러 갈래로 퍼진 팔이 아간투스베록을 향해 움직였다. 그러나 아간투스베록은 자신을 후려치고 휘감으려드는 마물의 팔을 두 손으로 붙들고 찢어발겼다.
[네놈들은 굴종하면 그뿐이다. 싫다면 사라지던가.]
이 하찮은 놈이 어떤 존재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본모습을 잃고 영락한 터라 알아보기가 쉽지않은 것도 있고, 쓰러뜨린 놈들을 일일이 기억하는 취미도 없기 때문이다.
[네놈들을 놔둔 건 어쩔 수 없었기 때문이야.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승자로서 패자에 대한 처우마저 자유롭게 할 수 없었다. 저주스러운 황제 놈 때문에 말이다. 놈은 영적인 힘을 지닌 것들을 제국의 발판으로써 최대한 이용하려 했다. 그런 구상 자체도 역겨웠지만, 자신의 마땅한 권리마저 침해당한다는 생각에 조용히 이를 갈았었다.
[이제는 아니야.]
이놈들을 내버려두었던 건 본의가 아니었다. 지금 자신의 도구로써 쓰인 놈들에게 감정은 없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다시 이를 드러낸다면 이번에야말로 승자의 권리를 행사하리라.
우드드득!어지간한 사람의 몸통 굵기만한 촉수, 혹은 줄기들이 그의 손에 갈기갈기 찢어졌다. 이놈도 덩치 값을 하는지 제법 힘을 썼지만 그의 앞에서는 아무 소용없었다.
거인은 한때 이 세상을 지배했던 위대한 종족. 그 혈통과 힘을 이은 그의 앞에서 힘을 논하는 건 무의미했다.
가로막는 것들을 모조리 찢고 부수며, 아간투스베록은 마물의 몸통 바로 앞까지 순식간에 다다랐다. 그런데 그와 동시에, 아간투스베록의 등 뒤에 흐릿한 형체가 유령처럼 나타났다. 그 움직임은 아간투스베록조차 순간적으로 신경이 곤두서게 할 정도로 은밀했다.
그러나 알아차리는 것이 아주 조금 늦었을 뿐, 반응은 신속했다. 아간투스베록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꼬리를 휘둘렀다. 마물의 일렁이는 몸이 채찍 같은 꼬리에 반으로 갈라졌다. 하지만 갈라진 몸에서는 피도, 힘의 편린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마치 처음부터 허상이었던 것처럼 흩어졌을 뿐.
촉수인지 줄기인지를 팔처럼 휘둘러대던 마물 같이 보다 현실 세계에 뚜렷하게 존재하는 놈이 있는가 하면, 이놈처럼 영체에 가까운 형태로 존재하는 놈도 있다. 껄끄럽기로 따지자면 후자가 조금 더 껄끄럽지만, 그렇다고 해도 변하는 것은 없다.
[어리석은 것!]
거인은 존재 자체만으로도 세상의 주목을 끄는 존재다. 완력은 말할 것도 없고, 영적인 힘 또한 여느 초월적인 존재들 못지 않다. 그 혈통을 이은 아간투스베록 또한 그랬다. 그는 평범한 창칼로는 상처 하나 입힐 수 없는 영체도 나뭇가지 부수듯 손쉽게 부숴버릴 수 있었다. 과장을 조금 보태자면, 그에게 있어 영체와 비영체는 차이가 없는 수준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이렇게.
쾅-!
주먹질 한방에 존재 자체를 부숴버릴 수 있는 것이다.
* * *
전력을 실었다. 줄카에게도 몇 번 쓰지 않았던 온 힘을 다한 일격. 과하게까지 느껴질 만큼 힘을 쓴 것은 이성적인 판단 때문이 아니었다. 어떻게 봐도 이 질척거리는 패배자 놈이 자신에게 위협이 될 가능성은 없다.
그럼에도 이렇게 힘을 쓴 것은, 놈에게서 어딘가 꺼림칙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떠한 경계를 넘어서게 되면 본능이 이성보다 우선된다. 이성의 판단은 논리적인 사고의 단계를 거쳐야 하지만, 본능은 세상의 흐름을 직접적으로 감지하기 때문이다. 일단 나타나기만 한다면 본능의 울림은 그 무엇보다 우선된다.
지금이 바로 그랬다. 그는 이 질척거리는 패배자에게서 영문 모를 꺼림칙함을 느꼈고, 그 즉시 전력으로 놈을 분쇄했다.
충분하다고, 그걸로 끝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생각은 틀리지 않은 듯했다. 산산이 부서져 흩어지는 듯했던 흐릿한 형체가 녹아 내리기 시작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무슨.]
분명 감각이 있었다. 전력을 실은 주먹이 목표에 닿았을 때. 상대의 본질을 강력하게 후려치는 느낌이 확실히 들었다. 설마 환각이었던가? 아니, 그럴 리가.
[무슨 수작을 부리는 거냐.]
초월자의 감각을 속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불가능이라고 단언하지 않는 것은 단 한 번이지만 속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상대 역시 초월자였으며, 무엇보다 철저히 방심하고 있던 탓이었다. 그때의 수치스러운 경험 이후, 아간투스베록은 상대를 경시할지언정 스스로의 방비는 늘 철저히 해왔다.
그런데 지금. 그것도 초월의 영역에는 발도 디디지 못한 잡것에게 속았다고?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보다는 차라리.
[뭐하는 놈이냐.]
분명 이 주먹으로 부쉈다. 감각은 뚜렷하다. 그러니 이 지저분한 놈은 방금 그 놈이 아니다.
흔하지는 않지만 아주 가끔 그런 놈들이 있다. 한 몸뚱이에 하나가 아니라 둘, 혹은 그 이상이 들어있는 놈들. 원래 그런 놈들도 있고, 본래는 하나였으나 어떠한 힘이나 술수에 의해 다른 놈이 몸속으로 들어와 자리를 잡는 경우.
이놈도 필시 그런 놈이리라. 보통 그런 놈들은 어떤 식으로든 티가 나기 마련인데 자신이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이 조금 이상하기는 하나, 상관없다. 안에 몇 놈이 있든 모조리 부숴버리면 그만이니.
[허망한 질문이로군.]
작지만 뚜렷한 의성. 그 안에 담긴 감정 역시 명백하다. 시답잖은 분노 나부랭이. 그러나 그 감정과 의지가 제대로 느껴진다는 점이 놀라웠다. 영락한 놈들은 이 정도의 이성을 지니지 못했으니까. 설마 그 짧은 시간 동안에 이 정도로 회복한 것인가? 만약 그런 것이라면, 이놈의 이름은 기억 속에 남아 있어야 했다. 그 정도로 강력한 존재를 기억하지 못할 리 없지 않은가.
[허망한 그 알량한 복수심이다. 정신을 차렸다면 내게 덤벼들 것이 아니라 도망을 갔어야지.]
하찮은 놈들은 대개 어리석다. 이놈만 해도 그렇지 않은가. 이미 온전한 처지였을 때도 패하여 영락했으면서, 온전치도 않은 지금 복수한답시고 어설프게 이를 드러내는 꼴이라니.
[다시 잠들어라.]
이번에는 다시는 깰 일 없는 잠에 빠져들게 해주리라. 그리 마음먹으며 세차게 포효했다. 갈고리처럼 굽힌 모든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그 열 개의 손가락을 허공에서 꿈틀대며 들러붙어오는 잔해를 향해 발톱처럼 휘둘렀다. 열 가닥의 광풍이 몰아치며 치우고자 한 모든 것들이 휩쓸렸다.
* * *
생각지도 못한 일이지만, 마물들의 연이은 출현은 군터와 줄카에게 상당한 행운으로 작용했다. 단순히 숨을 돌리게 되었다는 점 뿐만 아니라, 아간투스베록이 진정으로 감정의 동요를 보이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끝 모를 오만은 놈의 본질 그 자체다. 개미, 그보다 못한 벌레처럼 여기던 것들이 계속해서 자신에게 이를 드러내니 그것만으로도 놈은 노할 수밖에 없다.]
군터는 아간투스베록을 보며 어느 순간부터 자신도 모르게 품고 있던 초월자에 대한 고정관념이 깨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초월자가 감정을 잃은, 혹은 잊은 존재라고 생각했다. 자신도 그렇고, 줄카도 그랬다. 쿠엘단은 조금 다르기는 했지만 단 한 번 대면했던 당시 군터는 그에게서 집념과 광기를 느꼈다. 그런 것은 일반적으로 말하는 감정과는 거리가 있는 것이니, 그 역시 감정이 온전하다고 느끼지는 못했다.
군터는 초월자가 감정이 없는 존재이며, 그것은 고독에서 비롯된다고 보았다.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상대가 없이 홀로 남은 사람이 말을 잊어가는 것과 비슷하다. 말을 할 상대가 없다면 자연히 말을 잃지 않겠는가. 땅을 기는 벌레들을 보며 일방적으로 말을 붙이지 않는 이상에야 말이다.
대등하다고 느끼는 존재가 없기에, 세상에 홀로 존재한다고 느끼기에 초월자들은 고독할 수밖에 없다. 그들의 감정을 움직일 만한 존재가, 사건이 없기에 그들은 점차 감정을 잊어간다. 그것이 군터가 나름대로 내린 결론이었다.
그런데 아간투스베록은 그런 추측을 완전히 부숴 놓았다. 그는 대단히 감정적이었다. 오히려 일반적인 사람보다도 더 감정적인 것 같았다. 비록 그 감정이 움직이는 방향이 한정되어 있기는 하지만, 어쨌거나 저 감정은 거짓이 아니다.
[적당한 때에 개입하겠다.]
줄카는 아간투스베록이 마물을 마무리하도록 놔둘 생각이 없는 듯했다. 조금 전에야 숨을 돌릴 시간도 필요하고, 마물이 당장은 아간투스베록만을 적대한다 해도 언제 이쪽을 향해 덤벼들지 모르니 관망하기만 했었다. 그러나 지금, 아간투스베록이 감정적으로 틈을 보이는 지금은 끼어들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설령 저 마물이 갑자기 태도를 바꾼다고 해도 상관없다. 지금 아간투스베록이 보이고 있는 저 자그마한 틈을 조금이라도 크게 벌릴 수 있다면.
군터는 줄카의 말에 답하지 않았다. 그는 아간투스베록의 손짓에 위태롭게 흩어지는 마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저 마물에게서 기시감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뭐라 딱 잘라 말할 수 없는 묘한 느낌이.
* * *
콰앙-!
이걸로 네 번.
거센 풍압이 전면을 휩쓸었다. 이번에도 역시 거뭇한 형체는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하지만 곧, 좌측 허공에서 멀쩡한 모습으로 다시 나타났다.
이쯤 되니 분노보다는 의아함이 앞섰다. 대체 왜지? 왜 저놈은 아직도 존재할 수 있는 것인가.
[몇 놈이나 되는 거냐.]
아직 존재한다는 것도 그렇지만, 그것보다 더 놀라운 것은 놈이 멀쩡해 보인다는 것이었다. 처음과 달라진 것이 전혀 없었다. 외관상으로도 그렇고, 기감으로 느껴지는 힘의 크기도 그러했다.
타격이 없었던 것인가? 하지만 분명 해치웠다. 네 놈이나!
[보기 좋군. 그 뻔뻔한 낯짝에 그런 표정도 생길 수 있는 거였나.]
이제 조롱의 주체가 바뀌었다. 아간투스베록이 노성을 토하며 땅에 두 손을 박았다. 대지의 기운이 그의 뜻에 따라 뭉치고, 곧 날카롭고 거대한 뿔이 되어 허공에 이제 막 형체를 완성한 마물을 꿰뚫었다. 다섯 번째.
[소용없다는 것을 알 때도 되지 않았나? 네놈의 그 잘난 힘으로는 우리를 어쩌지 못해.]
[넌 누구냐.]
아간투스베록이 땅에 박은 손을 회수했다. 그의 눈은 이제 타오르지 않았다. 얼음처럼 차갑게 변한 눈이 또 다시 전혀 다른 곳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마물을 향했다.
[무엇을 묻고 있나. 당연히 네놈의 대적자이자 복수자지.]
아간투스베록은 대꾸하지 않고 가만히 마물을 노려보았다.
하나의 형체. 그러나 저 안에 상당히 많은 놈들이 존재한다. 이제는 보이는 듯도 했다. 건방진 껍데기 뒤에 늘어서 있는 흐릿한 그림자가.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