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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1021화 (1,021/1,064)

1021화

이지를 상실한 백치. 강대한 존재의 뜻에 휩쓸려 맹목적으로 싸우고 죽이기를 반복하던 괴물들의 눈에 빛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혼란이었다. 눈앞에 쓰러진 병사에게 흉측한 앞발을 휘두르려던 괴물이 순간 멈칫하더니 갑자기 고개를 흔들어댔다. 죽음을 직감하고 질끈 눈감았던 병사는 아무런 고통도 느껴지지 않자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그때까지도 괴물은 계속 머리를 흔들어대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어쩐지 허둥대는 것 같아 보였다.

놀랍고, 그 이상으로 당황스러운 상황에서 병사는 본능과 경험으로 움직였다. 어찌 된 것인지는 모르지만 이 빌어먹을 괴물 놈이 틈을 보이고 있지 않은가. 그는 반쯤 놓쳤던 검을 더듬거리며 고쳐 쥐고, 젖 먹던 힘까지 다해 휘둘렀다. 괴물의 시선이 다시 그에게 향했을 때, 그의 검은 이미 놈의 목줄기를 베어가고 있었다.

푸욱!

괴물의 가죽이 튼튼했던 것인지, 아니면 바닥까지 쥐어짜냈음에도 힘이 부족했던 것인지 검은 괴물의 목 중간 즈음에서 어중간하게 멈췄다. 그래도 다행히 그 정도만 해도 괴물에게 치명적이었고, 병사는 단단히 박힌 검에서 손을 뗀 채 무사히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허억. 허억.”

죽음의 강에 목 언저리까지 몸을 담갔다가 가까스로 기어 나왔다. 녹초가 된 몸에 순간적으로 긴장까지 풀리자 형언할 수 없는 탈력감에 현기증마저 일었다.

그것이 그에게는 다행이었다. 바로 그 탈력감 덕에, 억누른 숨을 토한 다음 순간에 다가온 죽음을 느낄 새도 없었으니.

우직!

거목과 같은 다리가 병사의 머리를 짓밟았고, 병사는 납작한 고깃덩어리가 되어 땅을 파고 들었다.

쿵!

지금 이 도시에 널리고 널린 괴물들과는 외형에서부터 차원을 달리 하는, 그 존재감만으로도 주변을 고요하게 만드는 마물. 그 마물들의 눈에도 이제는 빛이 감돌고 있었다.

아무런 적의도, 살의도 없이 하찮은 존재 하나를 짓뭉갠 마물은 소란스러운 도시를 찬찬히 눈에 담았다.

이곳은 어디인가. 자신은 왜 이곳에 있는가.

스스로를 잊은 존재에게는 이런 의문 자체가 낯설었다. 그는 자연적인 존재였으며, 그의 정신과 행사는 그 자체로 세상의 현상이자 규칙이었다. 그러니 스스로 의문을 품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모든 것을 잃고, 잊었지만 자신이 어떠한 존재인가에 대한 의식만은 여전히 어렴풋하게나마 존재했다. 그렇기에 그는 더욱 혼란스러웠다.

그런 와중에, 지금까지 그를 움직여온 악의의 편린이 흘러 들어왔다.

분노.

잊힌 존재는 본래 그가 가져서는 안 될 감정을 품었다. 꼭두각시가 되어 움직일 때와는 달랐다.

구오오오-!

그가 피와 살점으로 질척거리는 발을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그가 품은 분노에 방향은 없었다. 그가 품은 것은 불이었으니, 태울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 태울 터였다.

* * *

싸움에 몰입했다 하여 눈과 귀가 닫힌 것은 아니다. 그들과 같은 존재는 그러려고 해도 그럴 수 없었다. 그들의 감각과 인지는 세상에 닿아 있으니, 보고 싶지 않아도 보고 듣고 싶지 않아도 들어야 했다. 좋은 코를 지녔기에 악취에 고통받을 수밖에 없는 짐승들처럼, 그들 역시 그러했다.

[목줄을 놓쳤군.]

어디선가 들려온, 또 어디선가 불어온 분노를 감지한 줄카가 아간투스베록을 조롱했다. 그러나 그의 조롱은 아간투스베록의 심기에 작은 생채기 하나 만들지 못했다.

[놓친 것 같나?]

조롱이 조롱으로 돌아왔다. 줄카는 답하지 않았다. 잔잔하지만 뜨겁게 이글거리는 눈으로 노려볼 뿐.

[놓은 것이야. 더는 쥐고 있을 필요가 없으니까.]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보다 더 싸움에 집중하기 위해 힘을 끌어 모았다. 때문에 꼭두각시들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했고, 몇몇 놈들의 목줄이 풀려버렸다. 지금은 몇 놈에 불과하지만, 그런 놈들은 점점 더 많아질 것이다. 그리고 끝내, 모든 놈들이 풀려나겠지.

그것을 전력의 상실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아간투스베록은 개의치 않았다. 진심으로 말이다. 왜 아니겠는가? 짐승들을, 그것도 화가 잔뜩 난 놈들을 목장 안에 몰아넣었으니 이제 놈들은 보이는 대로 양과 소를 물어 뜯을 것이다. 그것으로 족하다. 짐승들이 어떻게 날뛰는지, 날뛴 후에 어찌 굴 것인지는 고려 사항이 아니다.

줄카는 진정으로 만족스러워하는 아간투스베록을 바라보다가 한 마디를 툭 던졌다.

[전부터 궁금했지.]

가깝다는 표현이 상대에 대해 얼마나 아는지에 따라 쓰이는 것이라면, 가장 가까운 이는 친구보다는 적일 것이다. 원수라 할 수 있을 정도의 적이라면, 거의 옆에 딱 붙어있는 사이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그만큼 의식하게 되기 때문이다. 알게 되기 때문이다. 일거수일투족은 물론, 머릿속에 뭐가 들었는지도 궁리하게 된다. 그것은 짝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보기 위한 노력, 그 이상이다.

줄카와 아간투스베록. 두 초월자의 사이가 바로 그러했다. 그들은 서로를 끊임없이 의식했으며, 어떻게 하면 상대를 쓰러뜨릴 수 있을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넌 늘 분노해왔지만, 그 분노에는 이유만이 존재할 뿐 목적은 없어. 그래. 마치 떼쓰는 아이와 같지.]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도 싸움은 이어졌다. 거대한 힘과 힘이 부딪치는 싸움. 그러나 그 싸움은 부딪치는 힘에 비해 거짓말처럼 평온했다. 그들의 공방은 약속된 합을 맞추는 것 같이 안정감이 있었다.

[이해가 가지 않아.]

[마찬가지다. 나 또한 네놈이 이해되지 않는다.]

아간투스베록이 다시 한번 조소했다.

[황제는 이제 없다.]

[놈의 창조물은 아직 건재하지.]

제국. 백치 같은 것들이 주절대기를 인류의 가장 위대한 창조물. 기록이 존재한 이후로, 이런 거거대한 국가는 존재하지 않았다. 국가는커녕 도시 두어 개를 다스리는 데도 어려움을 겪던 인간들이 불과 두어 세대만에 이런 거대한 집단을 구축하리라 그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제국의 성립은 그 자체로 기적이다. 당장 황제 스스로 신의 사도를 자처한 부분을 제외하고 봐도 그랬다. 그건 마치 메마른 돌밭에서 집채만 한 거목이 자라난 것과 같았다.

황제의 궐기, 세상의 끝을 볼 기세로 이어졌던 정복 전쟁. 그 모든 역사는 지금까지도 영광스러운 전설로서 전해졌다. 제국의 신민이라면 모두가 자랑스럽게 여기는 승리의 역사.

그러나 정작 그 역사의 주역 중 주역이라 할 수 있는 아간투스베록은 그가 이룩한 역사를 부정하고 조롱했다.

[목줄을 차고 끌려다녔을 뿐이지. 그게 자랑스러운가?]

꼬리 내린 개. 자유를 잃었음에도 순응할 뿐인 한심한 놈.

아간투스베록이 보는 줄카는 딱 그랬다. 자신과 대등한 존재라는 것을 알기에, 그렇기 때문에 더욱 경멸하게 되는 것이다.

[밟아 죽여주지.]

충만한 힘. 오랜만에 되찾은 힘에 아직도 적응이 되지 않았다. 움직임 하나하나에 힘의 낭비가 적지 않고, 움직임 자체도 영 효율적이지 않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저 하찮은 놈을 으깨버리기에는 충분하리라.

아간투스베록이 몸을 던졌다. 두 다리와 꼬리까지 동원해 최대한의 힘으로 몸을 날렸다. 그에 몸이 화살처럼 빠르게 날아간다. 그에 맞서 줄카가 또 다른 검을 균열 너머에서 뽑아 들었다.

저게 무엇인지 알 것 같다. 필시 용의 유해, 아마도 뼈일 것이다. 그것을 검으로 가공하여 휘두르니, 저 검 자체에 용의 힘이 깃들었다 봐도 무방하다.

용의 힘을 품은 저 검은 자신의 튼튼한 몸에 상처를 내기에 충분하다. 제대로 맞는다면 중상을 각오해야 할 터.

그러나 아간투스베록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언제나처럼 힘 대 힘으로 맞선다. 상대가 강하다면, 더 강한 힘으로 짓누르는 것이 그의 방식이다.

쾅!

주먹과 검이 부딪쳤다. 튕긴 것은 검이나, 상처입은 것은 주먹이다. 강철 같은 살가죽이 갈라지고 피가 튀었다. 잔뜩 분노한 채, 겁먹은 채 주변을 맴돌던 정령들의 시끄러운 비명이 들려왔다. 강대한 초월자의 피는 그 자체로 힘이다. 그 힘이 무질서하게 튀어대고 있으니 정령들이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이다.

[꺼져라! 벌레 같은 놈들!]

거대한 힘과 악의를 담은 일갈이 터져 나왔다. 발광하던 정령들이 폭풍에 휩쓸린 들풀처럼 그의 일갈에 밀려 모습을 감췄다. 동시에 아간투스베록이 재차 몸을 날렸다. 튕겨 나간 검을 막 회수하고 있던 줄카와 그의 눈이 마주쳤다.

여전히 침착하다. 힘의 차이를 확실히 느꼈을 터인데도.

그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림이 없는, 최고의 수준에 이른 전사의 눈이다.

[그래. 그게 마음에 안 든다는 거다.]

처음 봤을 때부터 놈은 저런 눈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 못마땅하게 여기면서도 내심으로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 역시 초월자이기 전에 전사였기 때문이다. 마음 속에 자신만의 칼 한 자루를 공고히 세운 존재는, 그 자체만으로 존중할 수밖에 없다.

그 역시 칼 한 자루를 마음 안에 간직해둔 터였다. 끄트머리에 다다른 전사 간의 싸움이란, 그 두 자루 칼이 서로 부딪침을 의미한다.

그래. 바로 지금처럼.

쾅!

또 한 번 주먹과 검이 부딪쳤다. 이번에는 정면으로 부딪치지 않았다. 찔러온 칼의 옆면을 주먹으로 후려치고, 억지로 만든 틈을 우악스럽게 비집고 들어갔다. 훤히 드러난 옆구리에 주먹 한 방을 날리니, 이번에는 줄카가 맨손으로 그 주먹을 받아냈다. 바위마저 갈라놓을 막대한 힘을 반쯤 편 손으로 비스듬히 흘려낸 것이다. 아간투스베록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기교만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다. 주먹과 손이 닿는 순간 이질적인 힘이 작용했다. 술법과는 다른 방식으로 세상에 작용하는 힘. 아마도 용의 힘이겠지. 그래도 상관없다.

그아아아아-!

마물에게서나 들을 수 있을 법한 포효를 내지르며, 아간투스베록이 재차 몸을 날렸다. 서로의 팔이 닿는 거리에서 몸을 날리니 제대로 힘이 실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거리가 사라졌다는 것, 그것이 중요했다.

몸과 몸이 부딪친 순간. 길게 늘어져 있던 꼬리가 채찍처럼 움직였다. 아직은 조금 어색하게 느껴지는 부위지만, 그래도 손과 손에 쥔 검 정도의 차이였다. 뜻대로 찌르고 휘두르는 것 정도는 숨쉬듯 자연스럽게 할 수 있었다.

그의 주먹이 바위를 쪼갠다면, 그의 꼬리는 두꺼운 쇠판이라도 찢어버릴 수 있는 힘이 있었다.

[아직도 힘이 주체가 안 되나?][좀 떨어지지 그래.]

여전히 여유가 느껴진다. 이제 곧 팔 한 쪽은 내놔야 할 놈이 허세를…….

[좀 떨어지지 그래.]

아니. 허세가 아니다. 그것을 느낀 순간 몸에 살짝 힘을 뺐다. 그때 등 뒤에서 느껴지는 흉험한 기세.

줄카를 노리던 꼬리가 반대로 움직였다. 등 뒤에서 날아들던 창과 그의 꼬리가 충돌했다.

쾅!

밀어냈다. 힘 자체는 별볼일 없다. 그러나 꼬리 끄트머리에서부터 불쾌한 기운이 번지는 것이 느껴졌다. 한 방울의 물이 종이를 적셔가듯, 불쾌한 기운이 멈추지 않고 퍼져 나갔다.

당장 위협적이지는 않다. 하지만 확실히 거슬린다.

기껏 좁힌 거리를 버렸다. 줄카를 밀쳐내고 몸을 추스른 아간투스베록의 눈길이 뒤편으로 향했다.

[그렇게 죽고 싶은가?]

[말을 이상하게 하는군. 먼저 내 땅에 쳐들어온 건 너다.]

[시건방진 놈.]

솔직히, 예상하지 못했다.

제법 하는 놈인 줄은 짐작했지만, 그래도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물론 여전히 대등하다 여기지는 않는다. 하지만 낮춰보거나 무시할 정도는 아니다.

[그래.]

즐겁다. 넘쳐흐르는 힘이 가늠하기 힘든 고양감과 전의를 안겨준다. 도저히…참을 수가 없다.

[그렇게 원한다면야!]

거인이 방향을 바꿨다. 이번에는 껄끄러운 힘을 쓰는 애송이가 목표였다.

* * *

힘의 차이는 명확하다.

군터는 냉정하게 전세를 판단했다.

자신은 견제 정도는 가능하나 치명적인 공격을 가하기에는 부족하고, 줄카 역시 억지로 끌어올린 힘으로 맞서고 있을 뿐 진정한 의미에서 대등하게 맞서지는 못한다.

지금은 어떻게든 균형을 맞추고 있지만, 결국 시간 문제다. 아간투스베록의 힘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점점 더 강해지는 것 같았다.

진정한 의미의 초월자란 이런 존재인가? 이 정도면 생명이 아니라 재해라고 봐도 좋을 정도다.

[전투에 매몰되지 마라. 방법은 하나뿐이다.]

줄카의 경고는 무의미했다. 군터는 아간투스베록의 흉악한 공세에 맞서면서도 계속해서 그에게 연결된 끈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단지 성과가 없었을 뿐.

콰앙-!

흔들리는 땅을 벗어나 몸을 날렸다. 따라붙으려던 아간툿스베록을 줄카가 저지했다. 덕분에 군터는 잠깐이나마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음?’

느껴지지 않는 것을 느끼기 위해 집중하던 와중. 그의 감각에 찾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 느껴졌다.

‘이건.’

눈을 한 번 깜빡이고, 길게 숨을 뱉은 후. 감각의 끄트머리에 걸렸던 그것이 시야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마물. 그것도 이제껏 봤던 놈들과는 뭔가 달라 보이는 놈이었다.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그것의 시선은 줄카와 맞붙고 있는 아간투스베록을 향한 듯했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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