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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1020화 (1,020/1,064)

1020화

콰직!

목이 반쯤 잘린 상태에서도 쉼없이 발버둥치던 괴물이 뇌가 곤죽이 되고서야 움직임을 멈췄다. 보리스는 잔경련을 일으키는 괴물을 걷어차고서 괴물의 머리를 깊숙이 찌른 검을 뽑아냈다. 그리고 그제야 숨을 돌리며 주변을 살폈다.

그라모트와 로우렌, 그 외에도 모두가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특히 로우렌이 인상을 있는 대로 찌푸리면서 칼질을 해대는 모습은 꽤나 생경했다. 자신은 몸 쓰는 데는 소질이 없다며 일찌감치 무술과는 거리를 두었던 로우렌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살아남기 위해 그 어렸을 적의 기억을 필사적으로 더듬고 있었다.

이제 와 생각해보면, 사실 로우렌의 소질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다만 자신이나, 형제인 그라모트와 비교했기에 빛이 바랬을 뿐. 냉정히 따져봤을 때 로우렌의 소질은 평범하거나 그보다 조금 나은 정도는 됐다. 꾸준히 단련했다면 지금 그의 등 뒤를 지켜주고 있는 병사들 정도의 수준에는 이를 수 있었을 터. 하지만 뭐, 이제 와서 그런 생각을 해봐야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아아아-!

마지막 단말마를 토한 괴물이 쓰러졌다. 확실히 주둥이가 뚫린 놈과 막힌 놈의 차이는 컸다. 존재감도 그러했고, 전투 능력도 그러했다. 주둥이가 뚫린 놈은 평범한 괴물 열, 어쩌면 그 이상보다도 더 위력적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런 놈이 또 하나 쓰러졌다. 무뚝뚝한 친위대 장교. 저 자가 누구의 도움도 없이 홀로 쓰러뜨렸다. 울티노라고 했던가? 처음 봤을 때부터 보통내기는 아니라고 직감했지만, 그의 솜씨는 보리스가 어렴풋이 직잠했던 것 이상이었다.

‘어찌 저런 자가 이제껏 무명이었을 수가 있지?’

물론 친위대의 특성상 다른 조직들에 비해 이런저런 비밀이 많을 수밖에 없다. 그들은 성주 직속이며, 그들을 관리하는 것도 성주인 부친이 직접 하기 때문이다. 그 구성원의 면면이나 조직 체계 같은 것은 외부에 알려진 바가 극히 적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저 정도 솜씨라면 어떻게든 소문이 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보리스는 울티노라는 자가 친위대에 있었는지도 몰랐다. 아마 이번 기회가 아니었다면 앞으로도 쭉 몰랐을 터.

슬쩍 숨을 헐떡이는 로우렌을 살피니, 그 역시 가라앉은 눈으로 울티노 쪽을 곁눈질하고 있었다.

그때, 울티노가 부러진 창을 내던지고 보리스에게 다가왔다.

“놈들의 기세가 흐트러졌습니다.”

“기세?”

로우렌이 표정을 구겼다. 뜬구름 잡는 소리라고 생각한 듯했다. 얼마 전의 그였다면 보리스 역시 로우렌과 비슷한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군기가 어쩌고 기세가 어쩌고 하는 이야기는 예전부터 늘 이해하기 힘든 분야였으니.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죽다 살아났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의 안에 깃든 유해의 영향일까.

사실 눈을 뜬 직후부터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눈에 보이는 것 외에,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하게 느껴지는 무언가가 정신을 간지럽혔다. 죽다 살아나서 아직 정신이며 감각이 온전치 않은 것이라 여기며 무시했지만, 그 간질간질한 감각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 뚜렷해지기만 했다.

이제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보리스는 자신이 새로운 감각에 눈을 떴음을 확신했다. 그렇기에 그는 울티노가 한 말도 곧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괴물들의 기세가 바뀌었다. 여전히 사납지만, 조금 전까지는 눈이 뒤집혀 죽기 살기로 덤벼드는 듯했다면 지금은 단순히 적의를 드러내는 정도였다. 어떤 면에서는 기세가 한풀 꺾였다고 볼 수 있었다.

“빠져나가려면 지금이 적기입니다.”

“으음.”

울티노는 괴물들의 기세가 꺾인 틈을 타 치고 나가자고 주장했다. 반면, 로우렌은 정반대의 의견을 내놓았다.

“놈들의 공세가 느슨해졌습니다. 호위 병력이 당도할 때까지 버티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보리스가 나짐의 연구실로 간 것을 아는 이는 몇 되지 않지만, 그 몇 안 되는 이들이 지금쯤 소식을 전했을 터였다. 괴물들이 이곳으로 쏠리는 것을 그쪽에서도 알아차렸을 테니, 조금만 기다리면 병력을 보낼 것이 분명하다. 빠져나가더라도 그들의 합류를 기다렸다가 빠져나가는 것이 낫지 않겠냐는 것이 로우렌의 생각이었다.

“전장의 상황은 시시각각 변한다. 지금이야 놈들의 기세가 난잡하지만, 이 상태가 얼마나 오래 갈지는 몰라.”

“같은 논리로, 우리가 움직이자마자 놈들이 돌변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그런데 위험을 무릅쓰고 움직이여 할 이유가 있나?”

“머리가 비어 있던 놈들이 생각이라는 것을 하기 시작했다.

“뭐……?”

“싸움 방식이 다채로워졌다는 말이다. 이제 놈들은 무작정 달려들기만 하지 않아.”

아주 약간의, 그것도 목청이 우렁찼던 마지막 놈에게서만 엿볼 수 있었던 변화였지만 울티노는 그 미세한 변화에 심상치 않음을 직감했다.

마지막 그 놈만이 특별했던 것일까? 그럴지도 모르지만, 그랬으면 좋겠지만 아닐지도 모른다. 어차피 전체적인 전황을 모르는 상태에서 어느 쪽을 택하든 확률은 반반이다. 그렇다면 감이 이끄는 대로 움직인다고 한들 문제될 것은 없으리라.

“판단은 공자의 몫입니다.”

울티노는 자신이 할 말을 다 한 뒤 네가 선택하라며 한 발 뒤로 물러났다. 그런 그를 보며, 보리스는 순간 희미한 기시감을 느꼈다. 그러나 잠깐 그 영문 모를 느낌을 더듬어보아도 달리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머물러 숨을 돌리느냐, 당장 움직이느냐.’

울티노가 마지막에 말한, 놈들이 머리를 쓰기 시작했다는 주장은 무턱대고 믿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하지만 만약 놈들에게 지능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라면, 놈들이 대놓고 지능적으로 굴기 전에 먼저 움직여야 하리라.

‘하긴, 원군이 무사히 당도한다는 보장도 없지.’

방금 싸움으로 쌓인 피로. 꽤나 무겁게 느껴지던 몸이 벌써 기운을 되찾았다. 조금은 부담스럽게 느껴질 정도의 활력이 온 몸에 가득하다. 그 때문일까? 보리스는 이대로 가만히 앉아 상황에 자신을 맡기고 싶지 않았다.

“가지.”

로우렌이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보리스는 못 본 척하며 무기에 들러붙은 살점과 굳은 피 등을 떼어내고 있는 울티노에게 다가갔다.

“솜씨가 상당하더군. 내 나름대로 귀를 열고 지냈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내가 왜 여태 그대의 이름을 듣지 못했을까.”

“이름을 날릴 만한 재주는 아닙니다.”

“과한 겸손은 미덕이 아닐세. 차라리 독에 가깝지. 당사자에게나, 다른 이들에게나.”

“…….”

“지금 우리가 이렇게 여유를 부릴 수 있는 것도 자네와 자네 동료들 덕이지. 크렘보르의 후계자로서 그대들의 노고를 치하하겠네.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물론 그렇겠지. 하지만 공을 세웠으면 상을 받아야 마땅한 것 아니겠나. 마음 같아서는 지금 바로 두둑하게 상을 내리고 싶지만, 상황이 여의치가 않군. 어쩔 수 없이 조금 뒤로 미뤄야겠어. 아니지. 어떤 면에서는 더 잘 된 것일지도 모르겠군. 자네들이 세울 공이 이게 끝이 아님을 믿고 있으니까.”

“약속드리지는 못하겠군요. 다만 제가 공자님보다 늦게 쓰러지는 일은 없을 겁니다.”

또 한 번, 보리스는 흐릿한 기시감에 사로잡혔다. 순간 미간을 좁힌 그는 혹여 자신의 이런 반응이 괜한 오해를 일으킬까 싶어 의식적으로 표정을 관리했다.

“상당히 투박한데, 그 어떤 씩씩한 말보다도 더 듬직하게 들리는군.”

이런 방식의 화법. 그리 어색하지는 않다. 한때는 이런 식으로 말하는 사내들과 부대끼며 지냈으니까.

‘그래. 그런 자들이었지.’

부친과 닮은 자들. 한때는 그런 자들이 득실거렸다. 기억나는 얼굴이 여럿 있는데, 이제는 보지 못하는 자들이 태반 이상이었다. 죽은 자들도 있었고, 은퇴한 자들도 있었다. 그때는 군인이라면, 전사라면 그런 거칠고 꾸밈없는 모습을 지닌 것이 당연한 것이라 여겼었다. 그런데 나중에 더 많은 것을 보고, 알게 된 후에 돌아보니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실은 당연하지 않은 것임을 알게 됐다. 부친과, 그를 닮은 그런 이들은 흔치 않았다. 아니, 별종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드물었다.

어떤 면에서는 순진하다고 할 수 있고, 어떤 면에서는 무식하다고 할 수도 있다. 그것이 군인으로서 미덕인가 묻는다면 답하기 어렵지만, 이리 재고 저리 재는 생각 많은 자들보다 담백하게 느껴지는 것만은 사실이다.

꽤나 오랫동안 그런 자들을 보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 이름도 얼굴도 낯선 자에게서 그런 오래된 느낌을 받았다. 너무 오랜만이라 그런 것인지, 언뜻 그립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 * *

초월적인 존재가 셋이나 뒤엉켜 싸우고 있으니, 그 여파는 그들이 직접 발을 디디는 범위를 한참이나 뛰어넘어 일대 전체에 미쳤다. 그들은 세상에 그들만 존재하는 것처럼 사납게 날뛰었다. 그들이 부딪칠 때마다 천둥 소리에 버금가는 굉음이 터져 나왔고, 빗나간 공격이 땅을 찍을 때마다 둔중한 울림이 주변까지 뒤흔들었다.

살육에 눈이 뒤집힌 것 같은 괴물들도 본능의 경고 때문인지 그들의 전장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그러니 바로 그 괴물들과 드잡이질을 해야 하는 용아나 병사들도 자연히 그들의 싸움을 방해하지 않았고.

콰앙-!

지금까지의 굉음이 하늘에서 울려 퍼지는 천둥 소리에 버금갔다면, 방금 터져 나온 충격음은 천둥 소리보다도 더 크고 격렬했다.

줄카의 눈이 완전한 핏빛으로 물든 순간, 싸움의 양상이 뒤바뀌었다. 그가 균열너머에서 뽑아 든 검은 아간투스베록의 말도 안 될 정도로 단단한 육체와 부딪쳤음에도 전혀 밀리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조금이지만 밀어내기도 했다.

[좋아. 좋아!]

넘실거리는 전의 사이에 기쁨. 환희에 가까울 정도의 기쁨이 느껴졌다. 이제 더 이상 힘만 내세워서는 우위를 점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을 터인데, 아간투스베록은 여전히 저돌적으로 달려들었다. 그에 반해 줄카는 충분한 힘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그 힘을 내세우는 대신 기교로써 아간투스베록을 상대했다.

바로 그 차이 때문에, 줄카는 조금씩 아간투스베록에게 우위를 점해갔다. 그리고 그에 따라, 아간투스베록의 강철 같은 육체에 가느다란 선이 하나둘씩 생겨나기 시작했다.

핏-

그러다 마침내, 제법 길쭉하게 그어진 선에서 무언가가 흘러나왔다. 피라고 하기에는 힘든,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무언가가.

그와 동시에, 아간투스베록의 두 눈에서 강렬한 안광이 뿜어져 나왔다.

[아끼지 마라! 아무리 발악한들 결과는 변하지 않아. 그렇다면 차라리 후회라도 없도록 모두 끌어내!]

사납게 넘실거리던 기세가 폭발적으로 솟구쳤다. 지금까지는 가벼운 장난이었다는 것처럼, 끝없이 솟구친 기세가 하늘을 찌르고 뒤덮었다.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실제로 그러했다. 만약 기감이 어느 정도 발달해 이 현상을 목도할 수 있는 이가 있었다면 이 순간 기절하거나 미쳐버렸으리라.

너무나 난폭해서 사악하게까지 느껴지는 전율스러운 기운이 하늘과 땅을 휩쓸었다. 그 범람하는 기운의 파도를 맞으며, 군터조차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이건 좀 심하군.’

목줄이 풀렸다는 표현을 이제야 이해했다.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으-아아아아!]

제 기운을 주체하지 못하는 것처럼 거친 포효를 내지른다. 이 순간만큼은 줄카도 움직임을 멈췄다. 폭풍 앞에 선 방랑자처럼 우두커니 서서, 그의 숙적이 본모습을 드러내는 광경을 그저 지켜만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서 있는 곳과 제법 떨어진 곳에서는.

그르륵-!

빛 없는 눈을 한 채, 맹목적으로 도시 안쪽을 향해 나아가던 몇몇 괴물들이 발을 멈췄다.

그러다 하늘과 땅을 뒤흔드는 포효가 도시 전체를 울릴 즈음. 그늘 속에 잠긴 것 같았던 눈에 희미한 빛이 떠올랐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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