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9화
사람의 형태를 벗어 던진 자와 줄카가 연이어 충돌했다. 얼핏 보기에 둘은 백중세였다. 줄카는 힘에서 밀렸지만 힘대결을 철저히 피하면서 지연전술을 펼치고 있었다.
‘나쁘지 않아.’
아간투스베록일 것이 확실한 거대한 괴물은 덩치에 걸맞은 막강한 힘을 과시하며 줄카를 몰아붙이고 있었다. 괴물처럼 변하기 전. 사람의 형상을 유지하고 있을 때와는 전투 방식이 완전히 달랐다. 도끼를 휘두르며 보여줬던 정교함이 지금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끓어오르는 힘에 취한 것인가? 군주씩이나 되는 초월자가?
‘그럴 리 없지.’
절정에 이른 기교보다 막강한 힘으로 밀어붙이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고 판단했을 수도 있다. 그게 아니면 과시 내지는 기분을 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뭐가 됐건, 단순히 힘에 휘둘리는 것은 아닐 것이다.
쾅!내지른 주먹 한방에 땅이 파였다. 대체 어느 정도의 힘이어야 저런 짓이 가능할까. 또 얼마나 단단한 몸뚱이여야 저런 짓을 벌이고도 아무 일 없다는 듯 다시 움직일 수 있는 걸까.
줄카는 단 한번의 공격도 허용하지 않고 버티는 중이었지만, 어디까지나 버티는 데 그칠 뿐이었다. 반격다운 반격은 시도하지도 못하고 계속해서 밀리기만 했다.
저게 전력인가? 그런 것 같기도, 아닌 것 같기도 했다. 계속 밀리는 중이지만 한계에 다다랐다는 느낌은 없으니 뭔가 숨겨둔 수가 있는 것 같기는 한데, 그것도 확실하지는 않다. 일전에 가볍게 겨뤄 보기는 했지만 그때는 적당히 서로 가늠해보는 정도에서 끝냈었으니까.
[느긋하군.]
느닷없이 머릿속에 울리는 책망의 한 마디. 군터는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태연히 대꾸했다.
[오래된 사이라고 하지 않았나. 쌓인 것도 많다고 했고.]
[배려 고맙군. 하지만 보다시피 상황이 썩 좋지 않아.]
[그래 보이는군.]
[내가 먼저 꺾이면 나만 곤란한 게 아닐 터.]
[그래. 그럴 것 같아.]
은근한 재촉에도 군터는 이동 속도를 높이지 않았다. 엄밀히 따지면 그는 가만히 있을 뿐이고, 그를 태운 말이 움직이는 것이었지만 그 말이 그의 뜻대로 걸음을 한다는 점에서 그는 줄카의 말처럼 마지막까지 느긋하게 여유를 부린 셈이었다.
* * *
[왔군.]
그 존재도,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다는 것도 진작 알고 있었다. 무려 초월자의 존재감 아닌가. 모를 수가 없다. 다만, 놈은 의아할 정도로 여유를 부렸다. 끼어들려고 했으면 한참 전에 끼어들 수 있었을 텐데, 어찌 싸우는지 구경이나 하겠다는 듯 기어오다시피 다가왔다.
[어떤 놈인지 궁금했지.]
생기가 없는 말 위에 탄 녀석. 표정 없는 얼굴이나 제법 튼튼해 보이는 몸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의 주의를 끈 것은 놈을 둘러싼 짙은 죽음의 기운이었다. 살아있는 존재라면 가까이 할 수 없는 그 힘을 놈은 숨 쉬듯 자연스럽게 통제하고 있었다.
[딱 좋을 때 도착했군.]
마침 새로운, 엄밀히 말하면 오랜만에 되찾은 힘에 대한 적응을 마친 참이었다.
[그럼 한 번 볼까.]
어지간한 건물 만한 크기의 몸이 눈을 쫓기 힘들 정도로 빠르게 움직였다.
* * *
쾅!
군터는 눈깜짝할 사이에 날아든 공격을 창대를 세워 막았다. 막고, 튕겨져 나가면서야 방금 그 채찍 같던 것이 꼬리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렇게도 쓸 줄 알았던 거였나.’
꼬리가 달려있다는 것은 알았다. 하지만 줄카와의 싸움에서는 단 한 번도 꼬리를 사용하지 않았기에, 이렇게 괴물처럼 변이하기 전까지 아간투스베록에게 꼬리는 없었기에 익숙하지 않은 신체부위에 어색함을 느끼는 것이라 짐작했었다.
그런데 착각이었다. 방금 그 공격은 평범하게 주먹을 휘두를 때보다 더 빠르고 위력적이었으며, 자연스러웠다.
콰각!
땅을 디딘 두 발이 깊은 고랑을 만들었다. 공격을 막은 창이 우웅 소리를 내며 울부짖었다. 엄청난 힘이다. 방금 그 공격은 지금까지 상대했던 그 어떤 마물의 일격보다도 강력했다. 적어도 신체능력만 놓고 봤을 때, 지금의 아간투스베록은 명백히 마물들보다 우위였다.
지능과 이성 없이 본능으로만 움직였던 탓에 상대하기가 수월했을 뿐, 마물들의 능력은 상당한 수준이었다. 초월자의 기준으로 봤을 때도 상당한 수준이었다는 말이다. 만약 그것들에게 지닌 힘을 온전히, 최대한으로 발휘할 수 있는 지능과 이성이 있었다면 상당한이라는 표현조차 턱없이 부족했을 터.
콰앙!
그런데 이놈은 신체능력만으로 마물들 이상이다. 그마저도 전력이 아닐지도 모른다. 아니, 몰아치는 와중에 보이는 여유를 보아하니 확실히 어느 정도 여력이 있는 것 같았다.
[혼자 감당할 만한 놈이 아니다. 이제는 알겠지.]
[그래.]
줄카는 조금 전 군터가 그랬던 것처럼 싸움에서 한 발자국 벗어나 여유롭게 관망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틈이 보이면 언제든 끼어들 수 있다는 듯 기세를 날카롭게 유지하고 있어, 아간투스베록은 군터를 몰아붙이면서도 은근히 줄카 쪽을 의식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 덕에 군터도 밀리고 있긴 하지만 그럭저럭 버틸 수 있었고.
하지만 그것도 이제 끝인 듯했다.
[눈치싸움은 여기까지 하지.]
단순한 주먹질. 그에 맞서 내지른 창.
날카로운 창 끝과 주먹이 부딪쳤는데 둔탁한 소리와 함께 창이 주욱 밀려났다. 창에 찔린 주먹에는 상처 하나 없었다. 돌덩이 같은 피부에 흠집 하나 생기지 않았다는 소리다. 군터는 나직이 혀를 찼다. 도대체 저게 어떻게 되어 먹은 몸뚱이란 말인가.
터무니없을 정도로 단단한 몸뚱이도 문제지만, 부딪칠 때마다 순간적으로 숨이 멎을 정도의 힘도 문제였다. 이렇게 힘으로 밀려본 것이, 그것도 이렇게 깔끔하게 밀려본 것이 얼마만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과연 이것이 제국의 역사를 이룩했다는 자의 힘인가 싶었다. 당황스럽고 속이 답답해지는데 입꼬리는 연신 꿈틀거렸다.
충격이 계속해서 누적되는 와중에도 몸에 활력이 돌았다. 이미 최고조에 도달했다고 생각한 감각이 그 이상으로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상대의 움직임에 반응하는 정도를 넘어 예측, 아니 예지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신기하고도 즐거운 순간이었다. 모든 것이 자신의 뜻대로 굴러가는 것 같다는 기분까지 들 정도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스치기만 해도 몸이 으스러질 것 같은 공격이 눈앞을 스쳐가는 것을 보며, 군터는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챙!흘렸다. 완벽하다고 해도 좋을 정도다. 그런데도 몸 전체가 크게 뒤로 밀렸다. 절정의 기교로도 압도적인 힘의 차이를 완전히 메울 수는 없었다.
하지만 괜찮다. 그 홀로 이 괴물을 상대하는 것은 아니었으니.
[영악한 놈!]
군터를 몰아붙이던 아간투스베록이 훌쩍 몸을 뺐다. 그와 거의 동시에 줄카의 대검이 소리 없이 떨어져 내렸다. 아간투스베록이 곧장 몸을 뺐으나 미처 피하지 못한 검 끝이 그의 팔뚝을 스치고 지나갔다.
‘완벽했다.’
금방의 기습은 아간투스베록의 호흡을 완전히 앗아가는 일격이었다. 그런데 그런 완벽한 기습에도 기어이 반응했다. 반응한 것 자체도 헛웃음이 나올 것 같은데, 심지어 살짝 베인 것이 전부였다. 견고한 성채 같던 외피에 새겨진 한줄기 얕은 선. 피 한 방울 흐르지 않는, 상처라고 할 수도 없는 생채기.
군터가 그 희미한 선을 눈에 담는데, 이번에는 줄카가 나섰다. 약간은 흥분한 것 같은 아간투스베록을 상대로 먼저 거리를 좁히고 나선 것이다.
정석적인 차륜전. 그것을 모를 리 없을 터인데, 아간투스베록은 순순히 줄카와 맞붙었다. 군터의 눈에는 그것이 여유로 보였다. 전투 중의 여유. 강자만이 부릴 수 있는 사치.
[틈을 노려도 좋지만, 그것보다는 열쇠를 찾아라.]
머릿속에 줄카의 말이 울렸다.
[열쇠?]
[놈은 목줄을 일부나마 풀었다. 열쇠를 찾지 못했다면 불가능한 일이지. 하지만 목줄을 완전히 풀기 위해서는 봉인지로 가서 의식을 치러야 한다. 놈은 그러지 못했고, 때문에 저런 이도 저도 아닌 꼴이 된 거다.]
저것이 이도 저도 아닌 꼴이라. 군터는 새삼 진정한 초월자들의 위용을 실감했다. 자신도 초월자라고 할 수 있었지만, 그와 저들 사이에는 수백 년이라는 세월의 간극이 있었다.
[그리 멀지 않은 어딘가에 열쇠가 있을 거다. 놈은 그 열쇠를 이용해 목줄을 느슨하게 만들었지. 하지만 푼 것이 아니라 느슨해졌을 뿐인 목줄은 다시 놈의 목을 조일 것이야. 그때가 되면 놈은 다시 열쇠를 사용하려 하겠지. 그때가 기회다.]
[목줄을 찾아서 없애라는 말인가.]
[그럴 수 있다면 좋겠지. 하지만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괜찮다. 놈이 열쇠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기만 하면 돼.]
목줄이 헐거워지지 않은 아간투스베록은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는 투였다. 하기야, 줄카와 아간투스베록은 오랜 앙숙이자 호적수라고 하지 않았던가. 같은 조건이라면 밀리지 않을 거라는 자신감 정도는 당연한 것이리라.
[놈과 이어져 있는 선을 느껴라. 인위적이지 않은 자연스럽고 본질적인 연결이다.]
줄카의 말을 들은 군터는 즉시 그의 모든 기감을 아간투스베록에게 집중했다. 그러나 말도 안 될 정도로 사납고 강력하게 소용돌이치는 기운 외에 별달리 느껴지는 것은 없었다.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줄카가 아는 것을 아간투스베록이 모르겠는가. 그 역시 줄카가 무엇을 노릴지 짐작했을 테니, 전력으로 열쇠의 존재를 숨겼을 터.
[느껴지지 않는다.]
[그래. 지금은 그렇지.]
[흔들어야겠군.]
[힘들게 설명할 필요가 없어 좋군.]
결국 원점이다. 끈을 찾고, 열쇠를 찾기 위해서는 일단 상대를 흔들어 놔야 한다.
[반드시 틈이 생길 거다. 놓치지 마라.]
줄카의 기세가 급변했다. 가장 큰 변화는 그의 대검에서부터였다.
우득! 우드득!
예기와 윤기가 돌던 검신에 수십 줄기의 금이 생겨났다. 그 상태로 아간투스베록의 주먹과 부딪치자 대검은 기다렸다는 듯 산산이 부서졌다. 그런데 그렇게 부서진 검의 파편들이 소용돌이에 휩쓸린 것처럼 춤을 추더니 곧 흐릿해지며 줄카의 몸으로 스며들었다.
쾅!
주먹과 주먹이 부딪쳤다. 주먹의 크기 차이만 해도 최소 다섯 배 이상. 그런데 방금까지 검을 쥐고 있던 작은 손, 작은 주먹은 몇 배나 더 큰 주먹을 상대로도 조금도 밀리지 않았다. 그 말인 즉, 주먹을 날린 줄카도 밀리지 않았다는 말이다.
[드디어 시작이군.]
아간투스베록이 이죽거리며 몸을 회전시켰다. 어지간한 거목보다 굵고 긴 꼬리가 채찍처럼 날아들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줄카도 피하지 않았다. 아니, 피하기는커녕 오히려 날아드는 꼬리에 몸을 날렸다. 두 손으로 꼬리를 막고, 붙들어 휘둘렀다.
크어어어-!
이번에는 아간투스베록도 조금은 당황했는지 여유로운 의성(意聲)이 아니라 괴물의 포효가 터져 나왔다. 두 다리로 땅을 내리누르듯 짓밟고, 사나운 기운을 폭발시켰다. 꼬리를 붙든 줄카를 그대로 짓뭉갤 기세였다.
바로 그때. 틈을 노리던 군터가 끼어들었다. 쾌속하게 내지른 창이 아간투스베록의 훤히 드러난 옆구리를 찔렀다.
[놈!]
분노에 휩싸인 두 눈이 순간 군터를 향했다. 하지만 눈빛 따위에 움츠러들 군터가 아니었다. 그의 창은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아간투스베록의 옆구리를 찔렀다.
콰각-!
아간투스베록의 몸은 말 그대로 강철보다도 더 단단했다. 줄카의 완벽했던 기습도 흠집 같지도 않은 흠집 한줄기만을 남기는 데 그쳤다. 어찌 보면 괴력보다도 더 성가신 것이 저 창칼도 안 박히는 외피였다.
뚫을 수 없다. 군터는 그렇게 결론지었다. 줄카의 검이든 자신의 창이든, 이 강철보다 더 단단한 껍질을 뚫고 상처를 내는 것은 무리일 듯했다.
그래서 포기했다. 대신, 깎아버리기로 했다.
우직!
창 전체에 짙게 뭉쳐 있던 죽음의 기운이 암석 같은 외피를 할퀴었다. 당연히 흠집 하나 남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거무스름하던 외피 일부가 색이 바랜 것이다. 집중해서 보지 못하면 눈치채지 못할 만큼 미미한 변화였지만, 애초에 그것을 노린 군터는 그 작은 변화를 곧장 눈치챘다.
‘통한다.’
여느 살아있는 것들과 싸울 때처럼 접근해서는 답이 나오지 않는다. 하여 그는 전투방식을 영체를 상대할 때처럼 바꾸었다. 힘으로 몰아붙이는 것이 아니라 기를 이용해 본질에 피해를 입히는 식으로.
한번 시도나 해보자는 생각이었지만, 보아하니 제대로 짚은 것 같았다. 어쨌든 미미할지라도 성과가 바로 나타나지 않았나.
[너! 지저분한 것이!]
작지만 확실한 성과. 아간투스베록도 그 작은 변화를 느꼈는지 곧장 반응을 보였다.
[좋아. 잘하는군.]
분노한 아간투스베록이 즉각 군터에게 달려들려 했지만, 줄카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가 아간투스베록의 주먹과 부딪쳤던 그 주먹을 옆으로 쭉 뻗자 허공에 수십 줄기의 균열이 생겨났다. 그리고 그 수십 줄기의 균열들에서 또 다시 각기 수십, 수백 개의 균열이 새로이 생겨났다.
마치 김이 잔뜩 낀 거대한 유리를 보는 듯했다. 균열이 생겨난 부분만 김이 닦여져 유리 너머가 비치고, 그렇게 보이는 일부만으로도 순식간에 압도되는 느낌.
저것은 무엇일까. 거대한 형체들이 수두룩하게 보였다. 그런데 그것이 무엇인지는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집중해라. 절대 놓치지 마.]
오직 그에게만 들리는 줄카의 한 마디. 군터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아간투스베록으로부터 거리를 벌렸다. 아간투스베록은 반응하지 않았다. 언제 군터에게 분노했냐는 듯, 그의 모든 주의는 줄카를 향해 있었다.
콱!유리 너머로 손을 집어넣은 줄카가 무언가를 붙들고, 잡아당겼다.
그것은 나뭇가지 같기도 하고, 길쭉한 쇠붙이 같기도 했다. 그러나 유리를 온전히 다 통과해 넘어왔을 때. 그것은 어엿한 대검 한 자루가 되어 있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