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8화
‘멋지군.’
소리 내어 말하지는 않았다. 자신의 작은 중얼거림이 저 사나운 초월자들의 귀에 들릴지도 모른다는 걱정보다는, 주변의 수하들처럼 흔하디 흔한 구경꾼이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괴물 놈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아라.”
“옛!”
사실 이렇게 지시할 필요도 없었다. 괴물들은 지금도 두 초월자에게서 조금이라도 더 멀어지기 위해 난리를 치고 있었으니까. 이성이 날아가고 본능만 남은 녀석들이기 때문일까? 놈들의 반응은 격렬했다. 아니, 격렬하다는 말로도 부족했다.
자이드라 멕시스는 허리를 뻣뻣하게 곧추세웠다. 말 위에서, 두꺼운 모피 외투 대신 적당한 무게감이 느껴지는 갑옷을 걸친 채.
얼마 전까지는 간절한 상상에만 그쳤던 일이다. 이 자그마한 움직임 하나조차 불가능했던, 그야말로 죽음을 목전에 뒀던 몸뚱이. 그 몸뚱이에 갇힌 채 나날이 가늘어지는 숨결에 절망하던 노인. 그것이 자신이었다.
꾸욱!
손아귀로 전해지는 건틀릿의 딱딱한 촉감이 반갑기 그지없다. 이 감촉이 너무나 그리웠다.
[만족스러운가?]
“…….”
갑작스레 머릿속에서 울리는 소리에 순간 자이드라 멕시스의 얼굴이 굳었다. 그는 뒤쪽에서 다가오는 일단의 무리를 발견하고서야 다시 여유를 찾았다.
“오셨는가.”
얼마나 많은 적을 베며 이곳까지 온 것인가. 상대의 거무튀튀한 몸에서는 역하고 불길한 냄새가 지독할 정도로 심하게 풍겼다.
“만족스럽냐고 물었지? 물론 만족스럽네. 이런 기분은 내 평생 처음 느껴보는군. 마치 세상이 달라진 것 같아.”
물론 세상은 달라지지 않는다. 세상을 바라보는 자신이 달라졌을 뿐. 알지만, 알면서도 그렇게 느낄 정도로 자이드라 멕시스가 느낀 기쁨은 컸다.
[그렇게 죽음이 두려웠나?]
“죽음이 두려웠던 것이 아니네. 내가 떠난 후가 두려웠던 거지.”
공허한 두 눈이 움직였다. 그 눈동자 속에 비치는 또 다른 두 눈은 질 좋은 루비처럼 붉고, 찬란했다.
* * *
군터는 당당해 보이는 자이드라 멕시스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달라졌다. 전에 알던 그 자이드라 멕시스가 아닌 것 같았다. 사람 자체가 바뀐 것처럼 느껴졌다. 물론 그것은 있는 그대로의 느낌이다. 실제로 그가 알던 자이드라 멕시스라는 사람은 이제 없으니까. 지금 눈 앞에 있는 자는 이름만 같은 전혀 다른 존재다.
이자를 뭐라고 해야 할까. 어정쩡한 초월자? 노예? 이제 이자는 스스로를 결정지어야 하리라. 무엇이 될 것인지, 무엇이 되고 싶은지.
“가는가?”
[여유롭군.]
“…….”
[그자가 죽으면 너도 죽는다.]
“역시 그런가. 어렴풋이 짐작, 아니 느끼고는 있었네만…역시 그렇군.”
군터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는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말을 타고, 두 초월자들의 전장으로 느릿하게 나아갔다.
“자네는 왜 이곳에 있는가? 이 도시에 아무런 애착도, 미련도 없지 않나?”
우스운 일이었다. 그를 곁에서 항상 지켜봐 온 이들이 모르는 것을 얼굴 몇 번 본 적 없는 자가 훤히 꿰뚫어 보고 있으니.
[아니.]
자이드라 멕시스는 정확히 짚었다. 군터는 그가 세웠다 해도 과언이 아닌 이 도시에는 미련이 없었다. 그의 미련은 이 도시가 아니라, 이 도시에서 살아갈 그의 자식들에게 있었으니.
그렇기에 자이드라 멕시스의 물음에 아니라고 즉답할 수 있는 것이다.
“모르겠군. 정말 모르겠어. 전에도 그랬지만, 지금은 더 모르겠군. 이렇게 새 삶을, 영생을 얻었는데도 여전히 모르겠단 말이지. 아, 그렇지. 불완전한 영생이로군. 그래서 그런 건가?”
자이드라 멕시스의 목소리는 그의 겉모습처럼 젊고 힘이 넘쳤다. 어딘가 고양되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전에도 이런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 하지만 관심을 두지는 않았네. 위험하다고 생각했고, 그런 복잡하고 위험한 세상과 얽히지 않아도 충분하다고 생각했거든. 하지만 이렇게 되고 나니…나도 욕심이라는 것이 생기는군.”
자이드라 멕시스는 연설을 하듯 목소리에 힘을 주며, 점점 멀어지는 군터에게 소리치듯 말했으나 군터에게는 그의 목소리가 닿지 않는 것 같았다. 그래도 자이드라 멕시스는 계속 외치다가, 군터가 작은 점처럼 보일 즈음에야 입을 다물었다. 흐릿하지만 만족스러워 보이는 웃음을 머금은 채.
* * *
두 초월자의 싸움은 밖에서 보기에는 퍽 기묘하게 보였다.
그들은 가만히 서서 서로를 마주보다가 한순간 흐릿해졌고, 동시에 귀를 아프게 하는 굉음이 터져 나왔다. 그러고 나면 둘은 방금까지 서 있던 곳과는 전혀 다른 곳에서 또 가만히 서서 서로를 마주보았다.
그 반복이었다. 심지어 그들이 흐릿해지는 간격이 꽤 길었던 터라 간간이 터지는 굉음이 아니었다면 그들이 무엇을 하는지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해볼 만한 것 같나?]
[글쎄. 아직은 모르겠군.]
만약 주변에 그들 말고 다른 이가 있었다면 그들의 대화를 들었을 것이고, 곧 겁에 질려 어디로든 도망쳐버렸을 것이다. 심약한 자라면 미쳐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들의 대화는 그들의 영혼 속에서 흘러나온, 조금의 정제도 숨김도 없는 진의 그 자체였으니까. 초월자들이 품고 있는 증오, 분노 등이 온전히 드러났을 때, 그것을 접한 평범한 사람이 온전하기는 거의 불가능했다.
[친구를 기다리고 있나? 이곳의 주인. 그 음침한 녀석을?]
[망상이 심한 줄은 알고 있었지. 그래도 이 정도인 줄은 몰랐군.]
아간투스베록과 줄카의 입매가 동시에 비틀렸다. 그와 동시에 그들은 다시 맞붙었다.
커다란 검과 도끼. 성인 남자가 한 번은 제대로 휘두를 수 있을까 싶은 육중한 무기를 그들은 한 손으로 쥐고 다루었다. 마치 팔을 휘두는 것 같은 가벼운 휘두름 한 번에 세찬 바람이 일고 땅가죽이 벗겨졌다.
쿵! 쩌적!
줄카의 대검이 땅을 찍으니 땅이 길쭉하게 갈라졌다. 아간투스베록이 훌쩍 몸을 날리며 도끼를 휘두르니 그 궤적을 따라 순간적으로 거뭇한 선 같은 것이 번졌다 사라졌다.
[들리나. 잡스러운 것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내게 분노하고 있지만 아무것도 못하는군. 내게 분노하는 것 이상으로 나를 두려워하기 때문이지. 이것이야말로 올바른 이치다. 강자 앞에서 약자가 숨죽이는 것. 그것은 이 세상이 처음 만들어졌을 때부터 존재해온 단 한 가지의 규칙이지.]
[그렇다면 네가 지금까지 얌전한 개 노릇을 해온 것도 그 규칙을 따른 것이겠군. 안 그런가?]
[예전이었다면 네 그 천박한 불손함에 크게 노했겠지. 하지만 이번만큼은 너그러이 넘어가겠다. 그것도 이게 마지막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야.]
너그러이 넘어가겠다고 했으나, 아간투스베록의 기세가 크게 일어났다. 그가 한 번 가볍게 발을 구르자 땅이 뱀처럼 꿈틀대더니 곧 줄카를 향해 빠르게 뻗어갔다.
[네놈은 늘 그랬지. 망상은 자유라지만 그래도 조금 심하지 않나.]
쿵!
줄카가 마주 발을 굴렀다. 그러자 꿈틀거리던 땅이 곧바로 잠잠하게 가라앉았다. 아간투스베록의 눈썹이 신경질적으로 꿈틀거렸다.
[그렇군. 자유로워진 것이 나만은 아니라는 게지.]
본래 이 땅을 노닐어야 할 정령들. 질서를 유지하고 외부의 존재와 무질서를 배척하는 것들은 지금 이곳에 없었다. 두려움에 질려 모습을 감춘 것이다. 그 덕에 움직이기가 한결 쉬워졌지만, 애석하게도 그건 저쪽도 마찬가지.
[언제까지 꽁꽁 숨겨둘 건가.]
[뭐라?]
[열쇠. 손에 넣은 것 아니었나? 그러니 자신 있게 얼굴을 들이민 것이라 생각했는데. 혹시 기껏 손에 넣은 열쇠가 망가지기라도 할까 두려운 건가? 여전히 생긴 것 같지 않게 생각이 많은 놈이군. 내가 네놈의 핏줄을 믿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다. 네 그 영악함과 신화 속 거인의 모습은 영 어울리지가 않아.]
그 순간. 아간투스베록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그래 그렇게 원한다면야.]
* * *
우득! 우드득!
육신은 영혼을 담는 그릇이다. 영혼이 없다면 육신은 알맹이가 없는 껍데기에 불과하며,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한다.
이런 논리에 따라, 불멸을 꿈꾸며 신비를 탐구하는 구도자들 사이에서 육신의 가치는 종종 그리 대단하지 않다는 식으로 이야기되곤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육신은 어차피 시간이 흐르고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쇠락할 수밖에 없는, 말하자면 한계가 명확한 것이었다. 그러니 그들로서는 한계가 명확한 육신보다는 영속적인, 그들이 그토록 갈구하는 불멸성을 일부 지녔다고 여겨지는 영혼을 더 중히 여기는 것이 당연했다.
그런 그들은 틀리지 않았다. 그들의 입장. 그러니까 유한한 삶을 지닌 사람의 입장에서는 말이다.
사람의 육신은 한계가 명확하다. 날 때 작고 약했다가, 늙어서 또 다시 작고 약해진다. 그리고 결국 죽음을 맞이해 흙으로 돌아간다.
그것이 그들의 한계다. 대다수 살아있는 것들의 한계이기도 했다.
하지만 정말 극소수의 특별한 존재들은 달랐다. 영혼과 육신. 일반적으로 비유되는 내용물과 그릇의 관계를 넘어선 특별함을 지닌 존재들.
거인은 그 중 하나였다. 특별한 존재들 가운데에서도 특별하고, 강력한 존재들 가운데에서도 강력한 존재.
그들의 육신은 단순한 껍데기가 아니다. 그들에게 있어 육신이란 그들의 강대한 영혼이 형상화 된, 동전의 이면 같은 것.
우드드득!
아간투스베록의 육신이 뒤틀렸다. 뼈가 허물어지고 살가죽이 찢어지며, 무언가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줄카는 지금 쳐야 하나 잠시 고민했지만, 결국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허물을 벗느라 무방비 상태가 된 것 같은 뱀이 실은 회심의 독니를 숨겨두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분명 지금 친다면 득보다는 실이 많을 터였다.
그리고, 사실 궁금하기도 했다. 그렇게 오만하게 굴던 놈이 아닌가. 그렇게나 자부하는 거인의 혈통이라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지 한번 직접 보고 싶었다.
[역시 감이 좋아. 내심 쉽게 가나 했는데 말이지.]
아간투스베록은 점점 더 거대해졌다. 안 그래도 고개를 꺾어 올려다봐야 할 정도로 컸던 덩치가 배, 아니 그 이상 더 커졌다. 몸에 걸치고 있던 갑옷은 진즉 망가져 흘러내렸고, 내의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제 거인이라는 말이 진정 어색하지 않을 만큼 거대해진 아간투스베록은 옷 대신 거무스름한 돌 같은 피부로 몸을 가렸다. 칼은커녕, 노포의 화살마저 박힐까 싶을 정도로 단단해 보이는 피부였다.
[부족해. 아직도 온전하지 않아. 열쇠는 열쇠일 뿐이기 때문이지. 느슨해졌다고 해도 완전히 벗어 던지기 전까지는 거추장스러울 수밖에 없는 게야.]
아간투스베록의 거대한 몸이 일순간 사라졌다. 줄카의 눈이 졸아들었고, 그가 처음으로 검을 두 손으로 쥔 채 번개처럼 빠르게 휘둘렀다.
콰드득-!
줄카의 몸이 뒤로 주욱 밀려났다. 땅에 무릎 언저리까지 박힌 두 발이 깊고 긴 고랑을 만들어냈다.
[너와는 서로가 완전히 자유로워진 상태에서 끝을 보고 싶었다. 어떤 변명도 필요치 않게 말이야.]
[지금에 와서 말인가.]
[내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 텐데. 슬슬 두려움이 느껴지는가 보군.]
하나는 맞고, 하나는 틀렸다.
서로가 자유로워진 상태에서 끝을 보고 싶었다는 아간투스베록의 말은 진실이었다. 하지만 두려움이 느껴지냐고?
[내가 사냥한 그 녀석은 이 세상에 남은 마지막 용이었지.]
짧지 않은 삶을 통틀어 가장 빛나던 시기였다. 자신의 이야기는 거기서 끝났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 생각은 지금도 여전했다.
[그때의 난 놈보다 약했다. 그러고 보니 지금 상황과 비슷하군.]
[아니. 다르다. 나는 그 놈처럼 어리석지 않으니까.]
[두고 보면 알겠지.]
줄카가 땅에 깊숙이 박힌 그의 두 발을 빼냈다.
힘의 차이는 확연하다. 방금 그 아찔할 정도의 충격. 그런 것을 마지막으로 느껴봤던 때가 언제였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 정도의 힘의 차이가 전부라면 해볼 만하다.
‘그럴 리 없겠지만.’
그가 몸을 날렸다. 한번 받았으니, 이번에는 돌려줘야 하지 않겠는가.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