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7화
콰앙!
카니악은 타고난 전사였다. 얼굴에 솜털이 다 사라지기도 전에 이미 부족에서 손 꼽히는 전사로 이름을 알렸고, 성년이 되었을 때는 이미 인근의 부족들에게까지 최고의 전사로 인정받았다. 사냥에서도, 전투에서도 그는 늘 최고였다.
그런 카니악이 오만해졌던 것은 필연이었다. 당시의 그는 자신이 오만하다고 생각지 않았다. 주변의 모든 이들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고.
하지만 달콤한 착각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세상은 넓고, 하늘 위에는 또 다른 하늘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후, 그는 자신이 그저 특별한 존재 중 하나에 불과함을 알게 되었다.
충격적이기는 했지만, 그뿐이었다. 넘어설 목표가 있다는 것은, 적어도 그에게 있어서는 꽤나 흥분되는 일이었으므로.
쿵!
그의 전 상관 아라얀. 처음 봤을 때부터 붉은 눈을 하고 있던 그는 카니악이 줄곧 따라잡기를 바랐으나, 결국은 따라잡지 못한 첫 번째 목표였다. 절대 그렇게 허무하게 스러질 리 없다고 믿고 있었기에, 그의 조용한 최후는 카니악에게 있어서도 꽤나 큰 충격이었다.
“커헉!”
첫 번째이자 현실적인 목표가 아라얀이었다면, 궁극적이자 비현실적인 목표는 말할 것도 없이 그의 주인이었다. 그에게 힘과 저주를 동시에 선물해준 주인.
그러나 그를 진지하게 노릴 수는 없었다. 그의 몸과 영혼에 스며들어 하나가 되어버린 피가 그런 발칙한 생각을 허락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카니악은 미련을 버릴 수가 없었다. 그 미련은 투쟁심이었며, 그가 태어날 때부터 지닌 본능이었기에.
“하아…하아…….”
그렇기에 이 순간이 너무나 즐겁다. 비록 반격다운 반격 한 번 못해보고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볼썽사납게 나뒹굴기 바쁘지만…그래도 이것이야말로 그가 오랫동안 상상만 해왔던 순간이었다.
[즐거운가?]
물론.
안타깝게도 육성으로 시원하게 대꾸는 못했다. 입으로 새는 힘도 아껴야 하기 때문이었다. 카니악은 지금 이 순간을 조금이라도 길게 가져가고 싶었다.
‘턱없이 부족하군.’
알고 있었다. 피가 제지하지 않았더라도 결코 닿을 수 없으리라는 것을.
하지만 될 것도 포기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안 되는 것을 알면서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우직하게 부딪치는 이들도 있다. 카니악은 명백히 후자였다.
누군가는 미련하다, 어리석다 하겠지. 상관없다. 그가 귀 기울이는 소리는 밖이 아니라 안에서 들려왔으니.
“음…….”
최대한 입을 다물려고 했는데 앓는 소리가 절로 입술을 비집고 새어 나갔다. 카니악은 느긋하게 걸어오는 상대를 보며 생각했다.
‘더럽게 크군.’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자신과 걸어오는 상대, 오직 둘 뿐. 그런데 그 자그마한 세상 속에서 상대는 너무나 거대했다. 그 그림자가 온 땅을 뒤덮고, 그 형체 때문에 해가 가렸다.
물론 이것은 환상이다. 알고 있다. 거대한 존재감이 빚어낸 허상일 뿐이다. 하지만 기가 막히는 것은, 이게 다 실제가 아니라는 것을 아는데도 이 빌어먹을 환상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는 거다. 마치 무지막지한 악몽에 잡아 먹힌 것 같았다.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지독한 악몽에.
하지만 악몽에 갇힌 것은 그 혼자만이 아니었다.
“하하하핫!”
시뻘겋게 타오르는 불꽃에 날아드는 부나방들처럼, 상대가 안 될 줄 알면서도 덤벼드는 전사들. 그들은 카니악의 수하이자 동료였고, 동족이었다. 그들이 있기에 카니악은 이 악몽 속에서도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다.
“후우. 후우.”
쫓기듯 삼킨 두 번의 호흡. 바닥까지 떨어졌던 활력이 조금은 돌아오는 듯했다. 어쩌면 전투의 희열에 취한 몸이 착각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아무래도 좋다. 중요한 건 방금까지는 돌덩이처럼 굳어 꿈쩍도 하지 않던 몸이 지금은 그래도 움직이기는 한다는 거다.
그런데 그게 한계였다. 움직이기는 하지만 고작해야 꿈틀거리는 수준이었다. 이 정도로는 싸움을 이어갈 수 없다.
“으아아아아아아!”
쩌적-!
무언가가 갈라졌다. 시원하게 한바탕 비명을 지른 카니악은 그제야 몸이 뜻대로 움직이자 씩 웃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동료들이 시간을 벌어주고 있다. 아마 저것들은 나름대로 자신들만의 싸움을 벌이는 거겠지만, 카니악의 입장에서는 그랬다. 지금 이 순간 신경 써야 할 것은 자기 자신 뿐이다. 지독한 이기심을 발휘하여 자신 외 모든 것을 잊고 온전히 자신에게만 집중해야 조금이라도 더 오래 버틸 수 있다.
쾅! 쾅!
용감하게 달려드는 이들은 달려들었던 것보다 더 빠르게 나가떨어졌다. 간혹 좀 더 버티는 자들도 있긴 했으나 그들의 말로는 튕겨져 나간 이들보다 더 비참했다. 그들은 허리가 반으로 잘리거나, 머리부터 사타구니까지가 양단되어 피와 살점을 쏟으며 죽어갔다.
‘잔혹하군.’
효율적이지 않다. 산 것을 죽이기 위해서는 목을 치거나 심장을 찌르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저 공포스러운 자가 힘조절을 실수했을 리는 없다. 칼질하는 법을 모를 리는 더더욱 없고.
그러니 저건 고의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다. 다만 심리전은 아닐 것이다. 그런 식으로 적을 꺾으려 들 자가 아니니까.
“퉤!”
가래를 뱉으려 했는데 웬 핏덩이가 튀어나왔다. 카니악이 군데군데 찌그러지고 깎여 나간 철퇴를 힘주어 쥐었다.
“비켜!”
전투에서 한 발자국 떨어져 있는 동안에도 전혀 식지 않았던 열기가 다시금 훅 치고 올라왔다. 카니악의 부릅 뜬 두 눈이 흐릿한 궤적을 쫓았다. 끊어진 듯 이어지는 흐릿한 선. 저 선을 놓치는 순간 죽는다. 속으로 숫자를 세던 카니악은 그 선이 그가 가늠하던 거리까지 다가온 순간 재빠르게 치고 들어갔다.
쾅!
일합. 손이, 두 팔이 통째로 굳는다. 그리고 온 몸으로 번져간다. 마치 석화의 저주라도 맞은 것처럼.
‘어림없지!’
막힌 것이 상관없다는 듯 재차 방향을 바꿔 움직이는 선. 카니악은 모든 감각을 선의 궤적에 집중시켰다.
쾅!
가까스로 따라가는 것이 고작. 그마저도 조금씩이지만 밀리고 있다. 아니.
‘조금이 맞나?’
피가 튀었다.
막았다고 생각했는데, 가슴 한복판에 굵직한 선 하나가 그어졌다. 흩날리는 갑옷 파편에 점점이 묻은 붉은색이 순간적으로 현실감각을 앗아갔다.
‘벌써 뒤쳐졌군.’
그에게 미래를 보는 능력 따위는 없었지만, 카니악은 어째 다음 순간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더 많은 피와 살점이 튀겠지. 어쩌면 어디 한 군데가 잘려 나갈지도 모르고.
‘제기랄.’
움직여라. 움직여!
다시 한번, 단단한 무언가가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쩌적! 쩌저적!
“으아아!”
비명 같은 기합. 그 괴성이 터져 나온 순간. 한참이나 뒤쳐졌던 호흡이 거짓말처럼 다시 제 자리를 찾았다. 그리고 동시에, 놓친 듯했던 궤적이 다시 카니악의 눈에 들어왔다.
쾅!
또 다시 일합.
[역시 제법이다.]
인정받은 건가? 이 무지막지한 작자에게? 하지만 기쁘지는 않다. 여전히, 저 위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태도가 짜증스럽기만 할 뿐.
‘한 방 먹여주지.’
피가 튀었다. 그의 피는 아니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동료들이 흘린 피이리라. 카니악은 한 방 먹여주겠다는 각오를 더 단단히 다졌다.
카니악은 기회를 노렸고, 그 기회는 기대했던 것보다 빨리 찾아왔다. 그의 용감하고 무모한 동료들 덕분이었다.
“커억!”
몇 명이나 당한 걸까. 둘? 셋? 지금까지 형제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던 이들이 죽어 나가고 있다. 그런데 이상할 정도로 감정의 동요가 없다. 그것마저 사치이기 때문일까. 지금 보이는 것은 그 형제들이 목숨 바쳐 만든 실낱 같은 한 줄기 틈 뿐.
바로 그 실낱 같은 틈을 따라, 카니악이 끄트머리가 잘려 나가 첨단이 칼처럼 변한 철퇴를 내질렀다.
푸욱!
뾰족한 쇠붙이가 뜻한대로 파고들어간 그 순간. 카니악은 그 순간 그의 평생에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었던 희열에 전율했다.
그런데.
서걱!
‘어?’
시계(視界)가 어긋났다. 철퇴를 쥐고 있던 팔뚝이 어긋났다. 뒤늦게 튀어 오르는 피와, 허공을 찌른 뒤 천천히 떨어져 내리는 철퇴.
[오만한 놈 같으니.]
오만? 내가?
의문을 품을 새도 없이, 카니악은 전력으로 몸을 날렸다. 벼락이 그가 서 있던 자리를 때렸다. 벼락이라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만큼 빠르고, 그만큼 파괴적인 한 줄기 선이 벼락 외에 또 있을 리 없으니.
그러나 그곳에 떨어진 것은 무식할 만큼 커다란 도끼였다. 한 손으로 그것을 쥔 거인은, 다른 한 손에 쥔 흉물스러운 몸뚱이를 쓰레기 버리듯 내던졌다.
“허윽!”
카니악이 뼈가 드러난 팔을 붙잡고 뒷걸음질쳤다. 열기로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것만 같았던 머리에 갑작스레 설원의 밤바람이 몰아쳤다.
그 고통 덕분에, 카니악은 비로소 그를 지배하고 있던 환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와 거인만이 존재했던 세상에 다시 많은 것들이 들어 찼다. 널리고 널린 시체들. 사방에서 들려오는 온갖 소리들. 그리고 살을 에는 추위.
“커헉!”
갑자기 목구멍에서 핏물이 쏟아져 나왔다. 도로 삼킬 엄두도 나지 않을 만큼 뜨거운 핏물이었다.
‘아…한심하기는.’
실패했다. 도저히 변명거리도 떠오르지 않을 만큼 처참하게.
좌절감이나 분노 같은 감정은 조금도 일지 않았다. 너무 깔끔하게 실패했기 때문일까.
[이제야 주제파악이 끝났나 보군.]
거인이 다가온다. 무엇보다 확실한 죽음이다. 카니악은 부여잡고 있던 팔에서 손을 떼고 주변을 훑었다. 그러다 손잡이와, 그 위 밑동만 조금 남은 부러진 칼을 집어 들었다.
우습고, 꼴불견이라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그래도, 마지막까지 무기를 붙들고 싶었다. 그것이 전사에게 가장 어울리는 마지막 모습이라고 평생 동안 믿어왔기 때문이다.
‘초라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이건 좀 심하구만.’
창대만 남은 창도 이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걸음을 옮길 힘조차 남지 않았는데.
“흐흐.”
내 마지막은 어떤 모습일까 가끔 상상하곤 했었는데, 역시 상상은 상상일 뿐이었다. 이렇게 초라하고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될 줄이야.
[고개를 숙여라. 천한 놈.]
다시 한 번 벼락이 떨어진다. 처음부터 끝까지 눈을 떼지 않은 덕에, 카니악은 자신을 향해 꽂히는 벼락을 자세하게 관찰할 수 있었다.
그것은 너무나, 소름이 끼칠 정도로 매끄러운 한 개의 선이었다. 한 순간 위에서 나타나 아래로 그어지는 한 줄기 선.
이 단순한 선 하나에 어떻게 이런 힘이 담길 수 있는가. 그가 보기에 이것은 무도(武道)도 뭣도 아니었다. 이건, 이런 건…….
웅-
끝났다. 라고 생각했다. 어떻게 해도 피할 방법은 없었으니까.
카니악은 피하지 못했다. 그런데 선은 그를 지나치지 않았다.
콰앙-!
선 대신 거대한 무언가가 눈 앞에 뚝 떨어졌다. 카니악은 조금 늦게, 그러니까 연기가 자욱하게 일어날 즈음에야 그것이 마물이었던 것의 몸뚱이임을 알아차렸다.
영혼도, 생기도 모두 사라진, 크기만 할 뿐인 몸뚱이의 위. 손잡이만 남을 정도로 깊숙이 틀어박힌 검을 쥔 자.
그를 보고 나서야, 카니악은 비린내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 * *
[배짱이 두둑하군.]
거인, 아간투스베록은 자신의 앞에 나타난 호적수를 조소했다.
[노예들만 앞세운 채 뒤에 숨어있는 줄 알았더니.]
줄카가 마물의 머리에서 검을 뽑아 냈다.
[드디어 정신이 나간 모양이군. 사실 나는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만.]
두 초월자의 시선이 마주치고, 동시에 그들만이 존재하는 작은 세계가 열렸다. 세상과 완전히 격리된 그 작은 세계에서, 그들은 서로를 향한 악의를 마음껏 드러냈다.
[길었지.]
[그래. 길었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그들은 서로를 향해 몸을 날렸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