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터-1016화 (1,016/1,064)

1016화

용아는 괴물의 군세를 난폭하게 밀어붙였다. 성전을 외치며 두려움을 내던진 군대가 뒤를 받치니 그들의 진격은 멈추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쿵!

하지만 그들의 앞에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졌을 때, 거침없던 진격은 자연스레 멈췄다. 광기 어린 전의를 풀풀 풍기며 살육을 이어가던 용아들조차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본능이었다. 지금까지 그들이 마음껏 찢어발겼던 것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상대라는 것을, 그 어느 때보다 날카롭게 곤두선 본능이 알려주었던 것이다.

“뭘 멍청하게 서 있나!”

카니악이 멈춰선 수하들을 밀치며 앞으로 나섰다.

숨이 막힐 것만 같은 불길한 기운. 어지간하면 칼을 뽑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건 전의를 품는 것과는 다른 이야기였다. 구정물에 발 담그는 것을 꺼려한다고 해서 겁쟁이라고 볼 수는 없듯이.

더러운 구정물은 어지간하면 피하고 싶은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필요하다면, 그럴 이유가 있다면 발을 담그지 못할 것도 없다.

카니악이 그의 철퇴를 고쳐 잡았다.

숱한 적들의 머리를 깨부순 애병이다. 묵직해서 손맛이 확실하고 튼튼하다. 사람은 물론, 어지간히 단단한 놈들의 뼈를 부숴도 상하는 일이 없다.

쾅!

그러나 네 개의, 대가리인지 혹인지 모를 것을 덕지덕지 달고 있는 마물을 후려쳤을 때. 카니악은 느꼈다.

방금의 일합. 마물의 흐느적거리는 몸짓은 육안으로 보기에는 허술하기 짝이 없는, 공격 같지도 않은 공격이었다. 그러나 그로 인해 일어난 파동은 음습하고 거칠었다. 휩쓸린다면 절대 좋은 꼴을 보지 못할 것이 확실했다.

거침없이 나선 것 같아도 모든 집중력을 끌어올리고 있었던 카니악은 그 파동에서 한 발자국 벗어나는 데 성공했고, 마물의 빈틈을 노려 전력을 실은 철퇴 한 방을 선물해주었다. 평범한 적이라면 이 한 방으로 끝이다. 그러나 상대는 괴물조차 귀엽게 보이는 마물이었기에, 많이 양보해서 따끔한 맛 정도를 보여주는 정도면 만족하려 했다. 그런데.

‘말도 안 될 정도로 튼튼한 놈이군.’

분명 후려친 건 이쪽인데, 왜 이쪽이 인상을 쓰며 밀려나야 하는가. 놈의 몸뚱이가 모두 쇳덩이로 이루어졌다 해도 이럴 수는 없다.

‘아. 그런 건가.’

카니악은 겉보기에는 앞뒤 안 가리는 저돌적인 전사 같고, 실제로도 그런 면모가 있기는 하지만 그는 본질적으로 뛰어난 전사였다. 그리고 뛰어난 전사란, 단순히 힘만 센 이를 뜻하지 않는다. 진정으로 뛰어난 전사는 승리를 위해 온갖 기지를 발휘할 줄 아는 이를 의미하며, 카니악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아무리 몸뚱이가 튼튼하다 해도 이럴 수는 없다. 하지만 결과가 이렇게 나왔다면, 이미 벌어진 현실을 부정하기 보다는 다른 가능성을 떠올려야 한다.

‘저렇게 생겨 먹은 주제에 영체란 말이지.’

정확히는 영체의 속성을 일부 가진 것이겠지만, 어쨌거나.

“성가신 놈들이군.”

다른 놈들도 마찬가지일까? 그렇다면 전략을 수정해야 한다. 카니악은 뒤따라 달려들려는 수하들을 제지하고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평범한 방식으로는 안 된다. 물론 영체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물리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것으로 보아 두드리고 두드리다 보면 결국은 저놈도 상처를 입을 것이다. 아니면 다른 방식으로 싸워도 되고. 방법은 많다. 까다로워서 그렇지.

하지만 그렇게 해서 언제 저놈을 해치울 수 있을까. 당장 보이는 것만 해도 열 마리가 훌쩍 넘고, 모습을 감추고 있는 놈들도 있다고 가정하면 더 답답해진다.

‘간결하게 가야지.’

카니악의 두 눈이 붉게 충혈됐다. 피가 쏠리고 있음이 느껴진다. 끓고 있는 거다. 그의 격앙된 감정에 맞춰서 말이다.

용아는 모두 용의 피를 받았다. 그러나 똑같은 칼을 쥐었다고 해도 뛰어난 전사의 손에 들린 칼은 열 명의 목을 벨 수 있는 무기가 되고, 겁 많은 애송이의 손에 들린 칼은 적을 베기는커녕 제 손이나 베는 애물단지가 된다.

용의 피가 지닌 힘은 거대하고 강력하다. 그 힘을 얼마나, 어떻게 끌어내는지는 오롯이 피를 하사받은 당사자의 기량에 달려있다.

‘박살내주마. 살점 하나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짓이겨주지.’

전의의 수준이 아니다. 원념이며, 나아가 저주다. 카니악은 그가 품을 수 있는 최대한의 분노와, 온갖 부정적인 감정을 끌어올렸다. 심장이 터질 듯 두근거리고, 피가 끓었다. 끓는 피 때문에 몸이 타는 듯 뜨거워졌을 때. 카니악은 건틀릿의 이음매를 풀었다.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꽉 쥐고 있던 주먹에서 가느다란 핏줄기가 흘러나왔다.

치이익-

그 피가 그의 철퇴를 적셨다. 쇳덩이 위에 피가 묻었을 뿐인데 타는 듯한 소리와 함께 회색 연기가 피어 올랐다.

“후우.”

길게 내뱉은 한숨. 입김 대신 나온 것은 시커먼 연기였다. 유황과 비슷하지만 그보다 더 지독한 냄새가 나는.

“자 그럼, 다시 해볼까.”

마물은 반응하지 않았다. 하지만 카니악은 놈이 상당히 조심스러워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감이 좋은 녀석이다. 하긴, 저 정도 되는 녀석의 감이 무디다면 오히려 그게 더 이상하다. 아무리 백치가 되었어도, 초월적인 감각은 그대로인 거다.

“크아아!”

마물의 그것보다 더욱 흉흉하게 빛나는 붉은 안광. 피에 젖은 철퇴가 마물의 앞발을 내리찍었다. 맥없이 튕겨 나갔던 직전과 달리 이번에는 철퇴가 마물의 비늘인지 가죽인지 모를 것을 으스러뜨리고 그 안에 숨은 살을 뭉갰다.

그륵!

마물이 몸을 틀었다. 고통 때문에 나온 반응은 아니었다. 카니악은 무언가 자신을 덮쳐오는 것을 느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확연하게 느껴지는 힘의 파동. 정면에서 맞으면 무사하지 못하리라.

“으아압!”

카니악은 피하지 않았다. 대신 방금 아래로 뚝 떨어진 철퇴를 온 몸으로 휘둘러 정면으로 맞부딪쳤다. 무리한 움직임 때문에 몸이 삐걱댔지만, 육신의 한계는 그의 움직임을 제한하지 못했다. 갑옷 곳곳에 난 미세한 연결고리, 숨구멍 사이로 붉은 빛이 뿜어져 나왔다. 불타는 두 눈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 강렬한 빛이었다.

콰직!

힘과 힘의 충돌. 카니악의 철퇴는 마물이 쏘아 보낸 힘의 파동을 깨부쉈고, 부숴진 파동의 조각은 카니악을 할퀴고 지나갔다.

“끄아아아!”

카니악이 처절한 비명을 내질렀다. 고통은 익숙하지만 이런 종류의 고통은 익숙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영혼이 깎여 나가는 고통은 그 누구라도 익숙해질 수 없다.

쾅!

비명을 토하던 카니악이 저 멀리 튕겨 나갔다. 또 다른 마물이 온몸으로 그를 들이받은 것이다. 카니악과 처음 맞붙던 마물에 비하면 어미와 새끼처럼 보일 정도로 크기 차이가 심했지만, 풍기는 기운만은 전혀 밀리지 않았다.

“이놈!”

카니악을 따라 자기 무기에 피를 바른 붉은 눈의 전사들이 사납게 달려들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다른 마물들도 흉포한 포효를 내지르며 맞부딪쳐 왔다.

쾅!

마물들은 기본적으로 거대했다. 가장 작은 마물이라 해도 소 몇 마리를 합쳐 놓은 것 같은 크기였다. 그 압도적인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힘은 무시무시했다. 그런데 붉은 눈의 전사, 용아들은 그런 마물들의 공격을 어떻게든 버텨냈다.

못해도 수십 년 이상 단련해온 기술. 거기에 초인적인 신체능력까지 더해지니 그들은 그들보다 몇 배, 몇 십 배는 거대한 마물들을 상대로 하나의 전사가 보일 수 있는 모든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쏴라!”

공성용은 아니지만, 그에 준하는 위력을 가진 노포가 일제히 화살을 발사했다. 아무런 신비의 힘도 지니지 않은 일개 화살은 마물들에게 제대로 된 피해를 입히지 못했지만, 그들의 몸을 잠깐 멈칫하게 만들 수는 있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틈은 마물들과 근접전을 벌이고 있는 용아들에게는 큰 힘이 되었다. 적어도 한 번 숨을 고르거나, 마물들이 멈칫하며 생겨난 실낱 같은 빈틈을 노릴 수는 있었으니까 말이다.

“으아아아!”

육중한 무쇠 도끼가 묵직한 타격음을 내며 틀어박혔다. 도끼를 휘두른 전사의 몸이 살짝 앞으로 기울자, 뒤편에 있던 동료가 그의 어깨를 밟고 높이 뛰어올랐다. 동료의 어깨를 밟고서 비상하는 새처럼 높이 뛰어오른 전사는 최고점에 다다라, 수십 개의 끔뻑이는 눈알 중 하나에 칼을 쑤셔 박았다.

캬아아아-!

마물이 온몸을 뒤틀며 발광했다. 마물의 눈을 찌른 전사는 깊숙이 박힌 칼을 버려 두고 훌쩍 뛰어내렸다.

쿵! 쿵!

수십 개의 눈알. 그 중 하나를 찔렀을 뿐이다. 물론 어느 정도 고통이 있긴 했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저렇게까지 난리를 칠 정도인가 하면 고개가 갸웃거려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마물은 심장을 찔리기라도 한 것처럼 요란하게 몸부림쳤다. 그리고 그 몸부림은 실제로 엄청난 고통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효과 확실하구만.”

칼을 버리고 뛰어내린 전사가 비릿한 웃음을 머금었다.

칼에 묻힌 그의 피. 그 안에 담긴 것은 지독한 원념이자 저주였다. 용의 피가 본래 지닌 독기에 원념마저 더해지니 그것이 저주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아직 멀었어! 멈추지 마!”

동료들을 다그치며, 전사는 다시 혀를 깨물었다. 그는 땅에 떨어져 있는 굵직한 화살을 집었다. 그리고 역시 일반적인 화살보다 훨씬 큰 화살촉 부분에 울컥 흘러나온 피를 뿜었다.

그어어어-!

발광하는 마물에게 달려드는 동료들이 보였다. 전사는 길쭉하지만 앙상해 보이는 화살 한 대를 들고 동료들의 뒤를 따랐다.

* * *

“크허어…….”

시뻘건 불길 속에서 한참을 뒹굴면 이런 느낌일까. 어느 순간부터는 뜨겁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그저 참기 힘들 뿐.

카니악이 그의 철퇴를 지팡이처럼 짚고 몸을 일으켰다.

생각지도 못한 잡놈에게 튕겨져 나간 뒤로도 그는 굴하지 않고 싸움을 이어갔다. 싸움 상대는 계속해서 바뀌었다. 껍질을 뒤집어쓴 놈을 두어 번 두들기다가, 다음에는 새인지 뱀인지 모를 것과 드잡이질을 했다. 가장 가까이 보이는 놈을 공격했고, 날아드는 공격을 받아쳤다. 정신없이, 본능에만 의존하며 쉬지 않고 움직였다. 그 뿐만 아니라 모든 용아들이 그랬다.

“으아아아!”

그리고 마침내. 한 마리를 끝장냈다. 머리의 반이 으깨진 상태로도 멀쩡히 움직이던 놈을 후려치고 또 후려쳐서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었다. 대체 이 한 마리를 쓰러뜨리는 데 얼마나 고생을 한 것인가.

와아아아-!

죽여! 죽이라고!

전황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다. 이제는 타라냐드군도 전투에 합류했다. 괴물과 마물, 인간과 인간 아닌 것들이 뒤엉켜 싸우는 전장에는 처절한 살육 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 이거지.’

순간 옛날의 기억이 뇌리를 스쳤다. 그의 부족을 급습했던 제국의 군대. 그 시대에 침략자의 출현은 일상이었고, 살아남기 위한 투쟁은 매년 돌아오는 사냥철과 같았다.

두려움도, 망설임도 없이 맞섰다. 적의 무장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았지만 얼추 머릿수가 비슷하니 해볼 만하다고 판단했었다. 실제로도 틀린 판단은 아니었다.

그때. 도저히 당해낼 수 없었던 괴물을 마주하기 전까지, 평생 겪어본 적 없었던 싸움을 경험했다. 소름이 가시지 않을 만큼 격렬하고, 그 이상으로 처절했던 싸움.

절대 잊을 수 없었다. 그 뒤로도 그에 못지 않은 싸움을 여럿 경험했지만, 그래도 못지 않았을 뿐이지 그 이상은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지옥의 한가운데에 선 것 같은데, 기분이 썩 나쁘지 않다. 흥분하고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이것은 쾌감인가?

쾅!

상념이 끊겼다. 그의 몸은 다시 한 번, 발에 채인 작은 돌멩이처럼 시원하게 날아가 볼품없이 땅을 굴렀다.

“으…아…….”

조금 전 잡놈에게 치였을 때 이상의 충격. 순간적으로 숨이 막히고, 온몸이 부서질 것 같은 고통에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었다. 그런 고통 속에서도 튕기듯 몸을 일으킨 것은 오랜 훈련이 만든 습관 덕이었다.

[그래. 너는 기억이 나는군.]

“하.”

거칠게 머릿속을 흔드는 일방적인 의지. 카니악은 자신도 모르게 실소했다.

(다음 화에서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