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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1015화 (1,015/1,064)

1015화

처음 마주했을 때부터 알았다. 이 녀석과는 도저히 섞일 수 없겠구나. 나와는 안 맞는 녀석이구나.

차라리 눈길을 줄 가치도 없는 녀석이었다면 무시하고 넘어가던가, 아니면 짓밟아 없애버리기라도 했을 터인데. 안타깝게도 그럴 수가 없었다. 녀석은 자신과 대등한 존재였으며, 보기 싫다고 등 돌릴 수도 없는 처지였다. 똑같이 목줄에 묶인 사냥개 신세였기 때문이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지.]

고대하기도 했었고.

“전하. 생각보다 많습니다.”

카니악이 혀를 내둘렀다. 바글바글한 괴물들도 괴물들이지만, 그 뒤에 확연히 눈에 띄는 마물들을 본 직후였다. 거리가 멀지만, 그래도 그것들이 일반적인 마물이 아님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것들의 존재감은 그만큼 압도적이었다. 온갖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카니악조차 긴장감을 숨기지 못할 만큼.

[그래. 많군.]

줄카는 평소와 같았다. 적당히 여유롭고, 적당히 부드럽다. 도저히 대적과의 전투를 앞둔 모습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후련하십니까?”

카니악은 그의 주인이 저기 있는 거인과 얼마나 부딪쳐왔는지 잘 알았다. 바로 얼마 전에는 끝장을 보기 직전까지 가기도 했었다. 내심 차라리 그때 끝을 보았다면 나았을 거라는 생각도 조금 했다.

‘아니지. 지금이 더 근사한가?’

무대는 중요하다. 이기든 지든, 얼마나 더 그럴듯한 무대 위에 올랐느냐가 승자와 패자의 가치를 결정 지으니까.

그런 의미에서는 차라리 그때 어영부영 끝난 것이 다행이었을지도 모른다. 덕분에 지금 여기서 다시 맞부딪칠 수 있지 않나. 비록 황량한 북쪽 땅에서의 결전이지만, 여러모로 그림이 그럴 듯하다. 성전이니, 신의 뜻이니 하는 헛소리는 제외하더라도 말이다.

“그나저나 의외로 조용하군요. 떠들려면 얼마든지 떠들어댈 수 있었을 텐데요.”

이 쪽에도 군주가 있지만, 저 쪽에도 군주가 있다. 만약 아간투스베록이 자신의 신분을 밝힌다면 지금 눈이 뒤집힐 정도로 사기충천해 있는 병사들은 당황할 것이다. 신의 사도와 같은 군주가 자신들의 편에 있으니 당연히 이 싸움은 성전, 같은 단순한 논리로 두려움을 잊어온 그들인데 저 쪽에도 군주가 있다면? 그들의 간단명료한 명분은 뿌리에서부터 흔들리게 되리라.

그저 자신을 밝히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아간투스베록은 잠잠했다. 그는 심지어 괴물들과 마물들을 앞세우며 이 쪽의 명분을 더욱 공고히 세워주기까지 했다.

[잔재주는 필요 없다는 거겠지.]

아간투스베록의 오만함은 그와 대등한 존재들 가운데에서도 독보적인 수준이다. 그와 오만함은 떼어놓을 수 없는, 말 그대로 한 몸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자신의 실력에 절대적인 자신감을 가지고 있다. 필시 지금도 구질구질하게 입을 놀리느니 그냥 힘으로 짓누르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터였다.

알기 쉬운 놈이다. 그래서 더 위협적이고.

상대하는 모두가 놈의 행보를 예측한다. 그런데도 놈은 굽히지도, 돌아가지도 않는다. 부딪치는 모든 것을 부수고 굴복시키며 지금까지 온 놈이다. 그와 오랫동안 대립해온 줄카도 그 실력만은 인정했다.

[준비해라.]

“준비라고 할 것이 있겠습니까. 아까부터 명령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안면 가리개의 눈구멍 사이로 강렬한 붉은 빛이 일렁였다. 줄카는 피식 웃으며 하늘을 한번 올려다보았다.

어둠이 걷히고 있었다. 조금만 더 지나면 해가 뜨기 시작할 터.

[딱 좋군.]

“예?”

[가자.]

오늘, 길었지만 별볼일 없는 이야기 하나가 끝이 날 것이다.

[마무리를 지어야지.]

“그러시지요.”

그의 피를 받은 전사들이 붉은 눈을 빛내며 뒤따랐다. 언제나 그랬듯, 줄카는 이번에도 선두에 섰다. 건방진 덩치 녀석이 먼저 움직이지 않으니, 하는 수 없이 이쪽이 가는 수밖에.

“신께서 이끄신다!”

“성전에서 죽는 자, 신의 나라에 부름 받으리라!”

군주와 그의 수하들이 앞으로 나서니, 광신으로 무장한 군대의 함성이 더욱 커졌다.

* * *

하-하하하핫!

용혈은 보물이다. 비록 관점에 따라 심각한 결점, 혹은 부작용이라 할 만한 부분이 있기는 했으나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세상에 드문 보물이었다.

왜 안 그렇겠는가? 용혈을 받아들인 자는 기본적으로 노화를 잊는다. 거의 평생 동안 육체의 전성기를 구가할 수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사람은 낼 수 없는 초인적인 능력을 얻는다. 괴력이나 짐승 같은 민첩함 같은 것은 그 일부에 불과했다.

이러한 보물이기에, 줄카는 아무에게 용혈을 하사하지 않았다. 오직 그가 눈여겨본 전사들에게만 그의 피를 나누어 주었다. 그러므로, 지금 그와 함께 질주하고 있는 전사들은 모두가 그의 눈에 든 자들이었다.

그들은 적게는 수십년, 많게는 수백 년 동안 그를 섬겼다. 인종, 국적, 신앙 등 온갖 부분에서 다양한 그들이었지만 그런 그들에게도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그 공통점이란, 그들 모두 전사의 심장을 가졌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모두 가장 치열한 투쟁의 순간에 가장 큰 함성을 지르는 이들이었다. 그래. 바로 지금 같은 순간에.

콰직!

줄카의 대검이 괴물의 목을 잘랐다. 목이 잘린 놈이 버둥거리며 엉겨 붙으려 했으나 뒤따르던 카니악이 그의 길쭉한 철퇴로 괴물을 시원하게 다져버렸다.

“전하! 이거, 답답한데 벗어버려도 되겠습니까?”

[여기까지 와서 뭘 묻고 있나.]

“하하핫! 그럼, 이번만!”

카니악이 핏물에 흠뻑 젖은 투구를 벗어 던졌다. 그러자 그의 맨 얼굴이 드러났다. 붉게 타오르는 두 눈. 가뭄을 견딘 땅처럼 갈라진 검고 푸르스름한 피부.

예전, 용아의 본모습은 본 이들은 그들이 저주받았다고 했다. 불사의 축복을 받은 대신 그 무게를 짊어진 거라고도 했다. 다른 소리들도 많았지만, 어쨌거나 그들이 해대는 말은 결국 용아가 더는 사람이 아니라는 거였다.

그들의 두려움 가득한 헛소리 덕분에 그들은 두꺼운 전신갑옷과 투구로 스스로를 숨겨야 했다. 이 제국은 인간 아닌 존재의 활보를 용납하지 않았으니까. 대전쟁의 영웅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이 황제가 정한 규칙이었다.

“좋구만!”

붉은 눈동자가 세로로 찢어졌다. 길쭉하고 뾰족한 혀가 입 주변에 묻은 피를 핥았다. 무기를 잡은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본래도 전사의 심장을 지닌 이들이었다. 거기에 신비로운 피의 부추김까지 더해지니 그들의 전의는 미치광이의 광기와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달아올랐다.

“으랏차아아!”

한번 내지른 창에 괴물 한 마리의 머리가 꿰뚫리고, 그 뒤에 있던 놈의 모가지가 걸렸다. 전사는 그걸로도 모자라 세 마리 째까지 밀어 쓰러뜨리고 나서야 창에서 손을 놓았다. 마음 같아서는 창을 회수하고 싶었으나, 안타깝게도 달리는 말을 멈추거나 늦출 수는 없었다. 그는 아쉬운 마음을 삭이며 창을 쥐었던 손으로 안장에 걸린 도끼를 쥐었다. 그리고 어느새 말머리 높이까지 뛰어오른, 개 새끼인지 너구리 새끼인지 모를 놈의 정수리에 도끼날을 박아주었다.

‘짜증나는군.’

손맛이 구리다. 제대로 찍은 것 같고, 실제로도 날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숙이 파고들었는데도 느껴지는 것은 어정쩡한 손맛 뿐.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놈들.’

휩쓸리고 이용당하는 것들이니 불쌍하다고 해야 할 터인데, 동정심은 들지 않는다. 누가 누구를 동정한단 말인가. 어차피 꼭대기에 선 자들이 아닌 이상, 남의 뜻대로 휘둘리는 신세일 뿐인데.

도끼가 춤을 췄다. 다섯 마리인가 여섯 마리인가 머리를 쪼개 놨을 때 도끼 날도 쪼개졌다. 나름 명장이라는 놈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물건이었는데 말이다. 하긴, 도끼를 만든 녀석의 아들도 지금쯤 무덤에 묻혔거나 묻히기 직전일 테니 이해할 만하다.

‘잘 가라.’

오랫동안 써온 도끼에게 작별 인사를 고하고, 이번에는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갔다. 검을 쓸 생각이었다.

쾅!

그런데 그 순간. 그의 몸이 붕 떠올랐다. 말의 구슬픈 비명이 느릿느릿하게 귓가를 스쳤다. 허공에서, 그는 자신을 날려버린 놈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들소 같이 생긴 놈. 두 다리와 도마뱀 같은 꼬리로 몸을 지탱하며 사람처럼 두 팔을 늘어뜨린 놈이었다. 놈의 길쭉한 뿔이 말의 앞가슴을 꿰뚫고 있었다.

‘빌어먹을 놈이!’

쿵!

무거운 갑옷을 입고 있는 데다, 갑작스러운 충격에 튕겨 나간 터라 착지도 불안정했다. 거의 추락하다시피 내려앉은 그가 엉거주춤 몸을 일으켰다. 소 대가리의 괴물이 기다렸다는 듯 달려들었다. 말의 피로 흠뻑 젖은 뿔을 들이밀면서.

콰앙!

괴물과 사람, 아니 사람의 형상을 한 또 다른 괴물이 격돌했다. 챙강! 하는 소리와 함께 부러진 검의 파편이 튀었다. 검과 뿔이 부딪쳤는데 검이 부러진 것이다.

“하!”

어이없다는 듯 웃은 그가 맨손으로 괴물의 뿔을 붙잡았다. “흐읍!” 그가 기합소리를 내며 본격적으로 힘을 쓰기 시작하자 그대로 그를 밀어붙일 것 같던 소 대가리 괴물이 우뚝 멈춰 섰다. 온 몸에 힘줄이 솟고, 불 같은 콧김이 쉬지 않고 뿜어져 나왔다. 그럼에도 전사는 밀리지 않았다. 그의 얼굴에 이미 자리잡고 있던 균열이 몇 배로 번져갔다. 저적! 하고 갈라지는 소리가 나기도 했다. 그 자글자글한 균열 사이로 불그스름한 빛 같은 것이 흘러나왔으나, 전사는 그것을 인식하지도 못했다.

“크하핫!”

대치는 오래 가지 않았다. 전사의 얼굴이 온통 붉은 빛으로 물들 즈음, 괴물은 신음인지 비명인지 모를 괴성을 토하며 조금씩 밀리기 시작했다. 그러다 우세를 점한 전사의 호쾌한 웃음이 터져 나온 직후에는 아예 몸까지 크게 기울었다.

구어어억-!

괴물에게는 입이 있었다. 그 입에서는 이제껏 흉포한 괴성만이 터져 나왔었다. 자신의 힘을 과시하고, 마주한 적들을 위협하는 괴성만이.

그러나 지금 흘러나오는 것은 고통과 분노의 울음이었다.

퍼퍽!

전사의 주먹이 괴물의 목과 가슴 언저리를 거칠게 두들겼다. 순식간에 대여섯 번을 타격한 직후, 칼처럼 세운 손끝이 달아오른 괴물의 가죽을 깊숙이 파고들었다.

“크흐!”

깊숙하게 파고든 손이 다시 빠져나왔을 때, 그 손에는 거칠게 펄떡이는 심장이 들려 있었다. 심장을 뜯기는 와중에도 격렬하게 저항하던 괴물의 몸이 덜컥 멈춘 것은 붉게 물든 손이 빠져나옴과 동시였다.

전사의 입가에 시원한 미소가 걸렸다. 이미 입 주변으로도 길쭉한 균열이 수도 없이 번져 있어 입이 어디까지인지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였지만, 그래도 그의 웃음은 더없이 시원해 보였다.

으적!

크게 벌어진 입이 괴물의 심장을 크게 베어 물었다. 시원한 웃음에 만족감이 더해졌다.

* * *

[처음부터 본색을 드러내는군.]

저 광경을 보라. 대체 어느 쪽이 괴물인가. 그 간사한 놈이 한 짓거리 중에 그나마 잘한 것을 꼽으라면 저것들의 목에 목줄을 채운 것이리라.

널리고 널린 헛똑똑이들 중에는 용에 대해 이상한 환상을 가진 놈들이 적지 않다. 용이 신의 다른 모습이라느니, 신성한 사도들이라느니 하는 헛소리들이 대표적이다.

단언컨대 용이라는 것은 그저 괴물일 뿐이다. 그 무엇보다 흉측하고 흉포한, 위험하기 짝이 없는 괴물 말이다. 마땅히 멸절되어야 마땅한.

뭐, 괜찮다. 이번 기회에 씨를 말리면 되니까. 직접 할 수 있게 됐으니 차라리 잘 됐다.

[슬슬 마중을 나가야겠지.]

그의 시선이 잠깐 뒤쪽 하늘을 향했다. 처음에 비해 눈에 띄게 홀쭉해진 그릇이 보이자, 그가 짧게 혀를 찼다.

(다음 화에서 계속)

군터

월산홍 장편 소설

(주)조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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