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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1014화 (1,014/1,064)

1014화

그는 태어날 때부터 지배자였다. 누구도 그에게 그런 것을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그는 자연스레 알 수 있었다. 가벼운 발걸음에 밟혀 죽는 개미 같은 것들이 자신과 동등한 존재일 리는 없지 않나.

그는 세상이 그에게 부여한 자신의 운명에 순응했다. 그의 힘에 이끌린 추종자들과 함께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무너뜨리고 정복했다. 그에게 있어 숨쉬듯 자연스러웠던 그것을 세상은 위업이라 부르며 칭송했다.

돌이켜 생각해 보아도 좋은 시절이었다. 그때의 그는 아간투스베록이라는 잡스러운 이름으로 불리지 않았다. 그 시절의 그는 이름이 없었다. 누구도 그를 이름으로 부르지 못했기에, 누구도 그의 이름을 궁금해하지 않았다.

[거인이여! 잔혹하고 추악한 거인이여-! 나를 기억하는가!]

응축된 분노와 결연함이 느껴진다. 필시 그의 앞에서 무너져간 패배자 중 하나일 터. 그런 놈이 왜 이곳에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그것도 별로 궁금하지는 않다.

[내가 하찮은 것들을 기억해야 할 이유가 있느냐.]

무수한 패배자들 역시 패배하기 전까지는 승리자였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그들은 꺾였고, 자신들을 꺾은 상대를 곱씹으며 설욕의 순간을 꿈꿀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패배자들의 사정일 뿐. 그들의 구질구질한 미련은 승리자가 뒤를 돌아봐야 할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그들 역시 꺾이기 전, 그들의 발치에 무릎 꿇은 자들을 지나치며 그랬을 것이다. 나아가는 자들은 다가올 것들에만 눈길을 줄 뿐, 뒤처진 것들은 지나치는 순간 모두 잊는다. 지나간 것에 미련을 두어서는 나아가는 발걸음에 힘이 실릴 수 없기 때문이다.

[망령들이로군.]

허공을 부유하는 일단의 기마대가 모습을 드러냈을 때. 그는 조소했다.

여전히 기억은 나지 않는다. 망령이 된 지금도 사람의 형상을 유지하고 있는 것을 보아 생전의 모습을 형상화 한 듯했다. 그러나 생전의 모습이 아니라 깃발을 들고 있었더라도 그가 패배자들을 기억해내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아아-!

망령들은 막아서는 것들을 그대로 지나치며 다가왔다. 그는 실망하지도, 분노하지도 않았다. 애초에 백치들이 저런 멀쩡한 놈들을 제대로 막을 수 있으리라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러서라. 쓸모없는 것들.]

그의 나직한 호령 한 번에 무수한 괴물들이 황급히 길을 열었다.

* * *

[이제야 보이는군.]

전의를 상실한 괴물들이 양옆으로 비켜서니 원수에게로 이어지는 길이 열렸다. 변함없이 오만한 거인이 자신을 지키는 병력을 스스로 흩어 놓은 것이다.

이가로프는 환히 웃으며 뻥 뚫린 길을 질주했다. 그러나 그가 길을 반쯤 주파했을 때, 땅이 뒤집히고 허공이 뒤틀리며 열이 훌쩍 넘는 강대한 존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널리고 널린 괴물들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는 막대한 존재감을 과시하는 그것들은 뭉뚱그려 마물이라 칭하는 것들보다도 더 거대하고 강력하게 느껴졌다.

[언제까지 뒤에 숨어있을 생각인가!]

숨어있는다? 그런 것이 아님은 이가로프도 알았다. 이 얄팍한 도발은 어떻게든 원수를 끌어내기 위한 발버둥.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속은 원수에게 철저히 읽혔다.

[오래 전에 썩어 문드러진 것들을 굳이 다시 봐야 할 필요가 있겠나.]

경멸 섞인 비웃음. 더 이상은 도발조차 불필요하다 느낀 이가로프가 그의 영혼을 불사르며 길을 열었다. 강대한 마물들이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큼지막한 손아귀를 피하고, 저주의 힘이 섞인 안개를 돌파했다.

몸이 가렵다. 무수한 벌레가 달라붙어 살점을 갉아먹고 있는 것 같았다. 물론 비유다. 그에게 살점 붙은 몸 따위는 없으니까.

[이 정도로는 어림도 없다!]

마물의 손아귀가 그를 뒤덮었다. 바위도 부술 수 있을 것 같은 거센 힘이 몰아쳤다.

콰드득!

이가로프의 영체가 힘없이 으스러졌다. 영혼의 잔재는 마물이 발하는 둔중한 파동에 밀려 사방으로 흩날렸다. 바람을 맞은 꽃가루처럼 그렇게 흩날리다가, 다시 하나로 뭉쳤다.

[부끄러운 줄 알라!]

영혼으로 빚은 창이 거대한 마물을 찔렀다. 한 영혼의 원한과 집념, 전의가 응집된 창은 한때 신이라 불렸던 존재마저 비틀거리며 물러나게 할 정도로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이가로프의 일격에 밀려난 마물에게 유령기수들이 기다렸다는 듯 달려들었다. 마물은 사납게 저항했지만 이미 기세가 주춤한 상태에서 개떼처럼 들러붙는 유령기수들을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영혼으로 빚은 창칼은 쇠로 된 창칼처럼 살을 가르고 피를 뽑아내지는 못했지만, 그럼에도 오히려 더 위협적이었다. 유령기수들의 무기는 마물의 본질에 상처를 입혔다.

이가로프는 수하들의 활약을 지켜보며 잠깐 뒤로 빠졌다. 조금 전 영체를 흐트러뜨렸다가 다시 구성했던 것은 그에게도 큰 부담이었다. 방금 같은 시도, 두 번은 힘드리라. 만약 한다면 정말 마지막을 각오하고 해야 할 것 같았다.

그어어어-!

유령기수들은 마물을 마무리 짓지 못했다. 뒤이어 덤벼든 다른 마물들 때문이었다. 녀석들 사이에는 동료애는커녕, 동료라는 의식조차 없는 것 같았지만 놈들은 명확한 적을 앞에 두고 눈을 돌리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이가로프 쪽에서는 충분히 곤혹스러웠다. 하나라면 방금처럼 몰아붙이겠지만, 그 수가 열이 넘어간다면. 그래도 감당할 수 있을까?

‘아니. 불가능하지.’

열이 아니라 다섯. 아니, 셋만 되어도 버거울지 모른다. 그나마 저놈들이 서로 협력할 줄 모르는 백치라는 점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맞서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뚫고 지나가는 것이라면.

[형제들! 우리는 서로가 서로의 발판이 될 것이다!]

긴 말은 필요 없다. 그의 뜻은 한 마디로 모두에게 전해졌고, 오직 이 순간만을 위해 견디고 달려온 망국의 전사들은 행동으로 그들의 결의를 증명했다.

쾅!

일반적인 괴물과 구분해야 할 정도로 강대하고 위험하여 마물이라 이름 붙였다. 그런데 지금 이가로프와 그의 전사들을 막아선 것들은 그런 마물들과도 구분되어야 할 정도로 강대했다. 그것들이 한번 움직일 때마다 반드시 하나 이상의 유령기수가 부서지고 흩어졌다.

[형제들이여! 멈추지 마라!]

험준한 산을 하나 넘으면 또 다른 산이 앞을 가로막았다. 이가로프는 그 산들을 계속해서 넘고, 또 넘었다. 어느 순간부터, 그는 모든 것을 잊었다.

앞으로. 그저 앞으로.

[훌륭해.]

어느 순간. 더는 산이 앞을 가로막지 않았다. 대신 까마득한 하늘이 나타났다.

[인정하지. 하찮은 것들 중에서는 네가 가장 나았다.]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왜 이곳에 있는가.

모든 것을 잊었던 이가로프는 퍼뜩 떠올렸다.

[그거 참 감격스럽군. 그렇다면 상으로 네 목을 내주는 것은 어떠한가.]

그래. 이곳까지 힘겹게 다다른 이유. 그것은 오직 복수를 위해서.

[하찮은 것들 중에서라 했다. 보잘것없기는 매한가지야.]

드디어 마주했다.

[그건 이제 보면 알 터!]

하지만 할 수 있을까? 아니, 닿을 수 있을까?

결전에 임하기 전의 이런 의문은 스스로를 좀먹을 뿐이라는 것을 알지만, 어쩔 수 없이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이가로프는 분노에 눈이 먼 맹인일지언정 백치는 아니었다. 그렇기에 마침내 마주한 원수와 자신의 차이를 실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사실, 알고 있었다. 어찌 모르겠는가? 고국이, 고향이, 그의 모든 것이 무너지던 그날. 그때 보았던 원수의 힘은 세상에 내린 신의 징벌, 그 자체였다. 아득할 정도의 차이는 분노보다는 절망을 선사했고, 그때의 그 끔찍한 기억은 그토록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낙인처럼 그의 정신 깊숙한 곳에 남아 있었다.

그러니 모를 수가 없다. 비록 원령이 되고, 나름 신비의 영역에 걸친 힘을 손에 넣었다고는 하지만 그럼에도 격차는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을.

하지만 그래도 여기까지 왔다. 패할 것을, 실패할 것을 알면서도.

[오만한 놈! 직접 나서라!]

원수는 노예처럼 땅을 기는 거대한 마물 위에 있었다. 자신을, 모든 것을 내려다보면서 오만하게 서 있었다.

[내가 왜?]

오만한 자의 조롱에, 이가로프는 더 지체하지 않았다. 어차피 기회는 한 번 뿐.

[오만한 것은 네가 아닌가.]

시야가 뒤집혔다. 이가로프는 무언가가 자신을 침식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저항하려고 했으나 음습한 무언가는 이미 그와 하나가 된 것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보잘것없기는 매한가지라 하지 않았나.]

이렇게 끝인가? 이렇게 허망하게?

겉잡을 수 없이 스스로를 잃어가며, 하다 못해 저주라도 퍼부으려고 했건만 그마저도 할 수 없었다.

* * *

하찮은 도전자를 조소하고 있던 아간투스베록의 기색이 일변한 것은 갑작스러운 역풍이 불어오기 시작한 그 순간이었다.

콰앙-!

벼락 수십 개가 한번에 내리 꽂히면 이 정도 될까 싶은 굉음과 함께, 저 멀리 몇 채의 건물이 일제히 으스러졌다. 거대한 마물의 몸뚱이가 부딪치는 모든 건물을 짓뭉갠 것이다.

이것은 성전이다-!

타라냐드를 위하여!

제국이여 영원하라-!

족히 수천은 되는 목소리가 하나로 합쳐져 웅장한 울림을 자아낸다. 상대를 주눅들게 하고, 아군의 사기를 북돋는 전투의 함성이다. 저 함성 하나만으로도 저것이 제법 잘 조련된 군대임을 알아볼 수 있다.

[타라냐드라. 뭘 기다리는가 했더니.]

타라냐드에서 여기까지 군대를 보낼 이유는 없다. 그러고보니 타라냐드의 총독이 오늘내일 한다고 했던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이후의 그림은 자연스레 그려졌다. 부나방의 구차한 발버둥이라. 뭐, 그거야 아무래도 좋다.

[빈둥대지 말고 움직여라.]

검은 덩어리가 꿈틀거렸다. 수십의 원령을 삼키고 한껏 비대해진 녀석은 배부른 짐승처럼 늘쩡거리다가 움직이라는 일갈을 듣고 나서야 느릿하게 방향을 바꾸었다.

이것은 성전이다-!

신께서 이끄신다!

수천 명이 떠들어대는 소리를 듣고 있던 아간투스베록이 조소를 머금었다.

성전이니 신이니, 웃기지도 않는 소리를 듣고 있자니 대충 뭐라고 구워삶은 것인지 짐작이 갔다.

[성전이라.]

마침 그림도 좋지 않은가. 인간의 도시를 급습한 괴물의 군세라니. 이 정도로 어울리기도 쉽지 않다. 한창 전쟁을 벌일 당시에도 이 정도의 전투는 드물었다.

[좋지.]

저 하찮은 것들이 말하는 신이 누구인가. 성전은 또 무엇인가. 스스로도 알지 못할 말들을 얼간이처럼 되뇌면서 죽을 자리로 찾아오고 있지 않은가.

[기왕 내 앞에 섰다면 최후까지 맞서라!]

흩어졌던 괴물들이 집결했다. 원령들을 마무리한 마물들이 그의 앞에 도열했다. 그리고 그 즈음, 무수한 잔해 너머에 제국과 멕시스의 깃발을 든 군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 * *

“각하. 명령을.”

똑같이 깍듯한 목소리지만 자이드라 멕시스는 같은 목소리 속에서 이전과 다른 감정을 느꼈다.

그것은 경외였다. 필시 자신의 붉어진 두 눈과, 수십 년 전으로 돌아간 육신에 대한 경외이리라.

유치하지만, 그것이 적잖이 만족스러웠다. 새로 태어나더라도 이런 기분을 느낄 수 있을까? 아마 아닐 것이다.

“우리는 앞서지 않는다.”

저 앞에 보이는 적. 명백히 지금까지 마주한 것들과는 다르다. 머릿수도 머릿수거니와, 척 보기에도 심상치 않아 보이는 마물이 적잖이 눈에 띄었다.

공을 세우기 위한 싸움이 아니다. 괜한 욕심을 부릴 필요는 없을 터.

“그러니 기다려라.”

기왕이면 저쪽이 먼저 달려들어주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아도 상관없다. 이쪽에도 먼저 나서 줄 이들은 있으니.

(다음 화에서 계속)

군터

월산홍 장편 소설

(주)조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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