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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1013화 (1,013/1,064)

1013화

“내가…죽다 살은 건가?”

나짐의 입술이 슬쩍 씰룩였다. 나름대로 말을 골라보려고 한 것이었으나, 마땅히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한 그는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죽다 살아나셨습니다.”

어째서 의사도, 사제도 아닌 나짐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가. 짐작되는 이유는 하나뿐.

“다른 방도가 없었던 모양이지.”

“예. 공자께서는 죽어가고 계셨습니다. 아무도 손을 쓸 수가 없었지요.”

“그럼 자네가 날 살린 게로군.”

“…….”

“그래. 어떤가?”

“예?”

“잘 된 것 같은가?”

“아…우선, 그…어떠십니까? 기분이라든지, 몸 상태라든지.”

“좋아. 머리가 복잡하기는 하지만 몸 상태는 괜찮아. 솔직히 놀랍군.”

“놀랍다니요?”

“마지막에 내가 어떻게 당했는지 기억하고 있으니까.”

“아…….”

뿔이었는지, 어금니였는지, 칼날 같은 것이 가슴을 갈랐다. 아니, 찔렀나? 너무 삽시간에 벌어진 일이었고, 피로가 적잖이 쌓였던 터라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느낀 충격과 아찔한 고통을 떠올려보면 상당한 중상을 입었으리라는 것은 분명했다. 의사도, 사제도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그래. 다른 방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자신이 이 어두컴컴한 연구실까지 온 것이겠지.

“아무튼, 그러시다니 다행입니다. 잘 된 것 같군요.”

“확신은 없었던 모양이지?”

“아…그것이, 사람에 대한 실험까지는 아직 마무리 짓지 못했던 터라.”

“추궁하는 것이 아니야. 자네는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지.”

등도 떠밀렸을 테고.

어쩔 줄 몰라 하는 나짐에게서 눈을 뗀 보리스는 차분히 몸 상태를 점검했다. 아직도 굳어 있는 것 같은 두 손을 천천히 쥐었다 폈다, 눈을 감았다 떴다 하며 감각을 끌어올렸다.

“좋군.”

점점 자연스러워지는 몸의 움직임을 확인하며, 보리스는 자신의 몸 상태가 좋은 정도를 넘어 최고라 할 만한 수준임을 확신했다. 몸의 활력이 그야말로 넘쳐 흘렀다. 그것은 단순히 힘이 넘쳐흐르는 것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너무 좋아. 그래서 걱정이 될 정도야. 부작용은 없나?”

“유해의 기운을 과도하게 받아들였을 때, 몸에 변이가 일어나거나 광증이 도지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특별한 부작용은 없었습니다. 무, 물론 공자님께 시술할 때는 최대한 조심스럽게…….”

“나는 미치지도 않았고, 뿔이나 꼬리가 생기지도 않았다. 그럼 괜찮은 거겠지. 맞나?”

“그, 그렇다고 볼 수 있습니다.”

술사라 그런지 말 한 마디를 해도 분명하지가 않다. 여지를 둔다고 해야 할까. 저런 모습이 탐구자로서는 덕목이라 할 만한 것인지는 몰라도, 보리스의 눈에는 빠져나갈 구멍을 파 놓는 영악한 두더지의 그것처럼 보였다.

* * *

“조심하십시오. 지금은 괜찮으신 것 같아도 당분간은 안정을 취하시면서…….”

보리스가 부축도 없이 멀쩡하게 걸어 나오고, 그 뒤를 나짐이 초조하게 따라붙었다.

“공자님.”

“쾌차하셨군요. 성공한 모양이지요?”

그라모트, 로우렌 형제가 주인의 안위를 살폈다. 친위대 병사들은 몇 걸음 떨어져 그들의 해후를 지켜보았다. 몇몇 병사들은 표정 관리를 하는 와중에도 안색이 밝았다. 비록 내색은 하지 않지만, 그들 역시 작은 주인에 대한 나름의 애정과 충성심을 갖고 있는 것이다.

“…….”

그리고 그 중 한 명.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석상처럼 서있던 사내, 할렌. 지금은 울티노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 그의 눈길이 보리스와 그라모트, 로우렌에 번갈아 닿았다.

그러던 그때.

콰앙!

아찔한 굉음과 함께 건물 전체가 크게 흔들렸다. 무너지는 것이 아닐까 싶었으나 건물은 무너질 듯 흔들리면서도 끝끝내 버텨냈다. 하지만.

우르르-

돌이 땅을 구르는 것 같은 소리. 하지만 그보다 훨씬 큰 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 어두컴컴하던 실내에 점점이 빛이 드는가 싶더니, 곧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뭐…….”

고개를 들었을 때. 그들은 보았다.

천장이 있어야 할 곳에서 끔뻑거리는 커다란 무언가. 그리고 그 주변에서 불어오는, 바람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끈적하게 느껴지는.

“이런 빌어먹을!”

로우렌이 기겁하며 뒷걸음질 치고, 그라모트가 검을 뽑아 들었다. 나짐은 주저앉았으며, 보리스는 가만히 서서 미간을 찌푸렸다.

* * *

그것은 거대한 괴물, 아니 마물이었다. 천장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마물의 머리 같은 것이 대신 자리하고 있었는데, 일반적인 생물이라면 응당 있어야 할 눈과 입 등이 없었다. 그것들이 있어야 할 것 같은 자리에는 잔잔한 수면에 돌멩이가 계속 떨어지는 것처럼 파장 같은 것이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었다.

우르르-

바닥으로 떨어져야 할 건물의 잔해가 바로 그 파장으로 빨려 들어갔다. 마치 저 마물이 건물을 먹어 치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것은 착각이 아니었다. 평범한 이들은 보지 못하는 것이 보리스의 눈에는 보였다.

‘운명이라는 놈도 참으로 얄궂군. 이제 막 깨어났거늘.’

빨려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마물보다 훨씬 작은 또 다른 괴물들이 게걸스럽게 돌조각이며 가루 같은 것들을 마구잡이로 먹어 치우고 있었다. 수백, 수천 마리. 어쩌면 그 이상의 자그마한 괴물들은 거대한 마물을 축소시켜 놓은 것 같은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오겠군.’

지금 그들이 있는 곳은 지하다. 그런 곳으로 달빛과 바람이 흘러 들어오고 있다.

“나를 노린 건가?”

“…그럴지도 모르겠군요.”

로우렌이 이토록 굳어 있는 것은 처음 보았다. 재미있지만, 안타깝게도 지금은 느긋하게 감상할 여유가 없었다. 이미 천장은 반쯤 날아갔고, 작은 괴물들은 먹이를 쫓는 개미들처럼 점점 밀려오고 있었다.

“보이나?”

“…보입니다.”

나짐은 굳어 있었다. 로우렌과는 달랐다. 로우렌이 긴장과 두려움으로 굳은 것이라면, 나짐은 영혼이라도 빠져나간 것처럼 보였다. 힘이 들어가서 몸이 굳은 것과 시체가 되어 굳은 것의 차이라고 할까.

맥 없는 대꾸에서 지금 그가 느끼고 있는 절망감을 가늠할 수 있었다. 혹시나 했던 기대가 꺾이는 순간이었지만, 그래도 보리스는 물었다.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방법이 있나?”

“…제가 여쭙고 싶습니다. 공자께서는 크렘보르의 작은 주인이시니 이럴 때를 대비한 비장의 수단 같은 것이.”

“그런 게 있었으면 몸에 구멍이 나기 전에 사용했겠지.”

머리가 있으면 당연히 떠올릴 수 있을 것을 굳이 물어보는 걸 보니, 지금 나짐은 반 백치가 된 것이 분명했다. 절망감에 이성이 상당 부분 먹혀버린 것이겠지.

짤막한 한숨을 내쉰 보리스가 친위대 병사 중 한 명에게 손을 뻗었다.

“검을 다오.”

“공자님. 몸을 피하십시오.”

“도망치라는 거냐?”

“죽다 살아나는 건 한번이면 족하지 않겠습니까? 설마 또 고집을 부리시려고요?”

로우렌이 빈정거렸다. 다른 때였다면 무례를 지적했을 그라모트 역시 이번만큼은 침묵으로 동생의 말에 힘을 실었다.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던 보리스가 다시 입을 열려던 순간. 낯선 얼굴의 사내가 앞으로 나섰다. 그는 허리춤의 검을 뽑아 들었는데, 칼집을 다 나오기 전까지는 분명 검이었던 그것이 완전히 칼집을 벗어나자 길쭉한 도끼창이 되었다. 그것을 본 보리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법구라고?’

친위대가 아무리 성주 직속의, 솔롬 제일의 무력 집단이라고 하더라도 법구를 소지할 정도로 부유한 이들은 아니었다. 특히 저런, 척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법구를 일개 장교에게 하사한다는 것은 재물이 그야말로 썩어 나는 수준이 아닌 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누구지?’

친위대. 장교라는 것까지는 알겠다. 친위대의 구성원은 어지간하면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고려하면, 친위대의 장교임이 분명한 자의 얼굴이 눈에 익지 않다는 것은 확실히 이상했다.

“일단 피하시지요!”

그라모트와 로우렌이 그의 양 팔을 붙잡았다. 보리스는 쏟아지기 시작한 마물들과, 그것들에게 달려드는 낯선 사내의 뒷모습을 마지막으로 눈에 담았다.

* * *

“대장님!”

“울티노 대장님! 명령을!”

할렌은 ‘울티노? 그게 누구지?’ 하면서 따가운 외침을 무시하다가 곧 그 이름이 자신의 새로운 이름이었음을 떠올리고 고개를 슬쩍 꺾었다.

“보이지 않는 작은 것들이 있다. 집중한다면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최대한 그것들과 접촉하지 않도록 거리를 벌리면서 마물의 신경을 분산시켜라.”

지금의 몸뚱이가 이전의 몸뚱이보다 나은 점 한 가지는, 말을 길게 해도 된다는 것이었다. 듣기 싫은, 철판을 긁는 것 같은 목소리가 아니기에 길게 늘이거나 크게 소리쳐도 문제가 없다. 즉, 지휘를 하는 데 있어 더 편하다.

“알겠습니다!”

무턱대고 보이지 않는 적이 있다고 하는데도 의심하지 않는다. 상관의 명령에 복종하도록 훈련받은 훌륭한 군인이면서, 동시에 감각 역시 나쁘지 않은 녀석들이라 그렇다. 아마 녀석들 중 한두 명 정도는 저 작은 것들을 흐릿한 형태로나마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녀석들의 기감이 특출나서가 아니라, 그만큼 저것들의 존재감이 크고 뚜렷하기 때문이었다.

‘힘들군.’

거추장스러운 옷을 입은 느낌이다. 당장이라도 벗어 던지고 싶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이 불편한 옷은 그의 주인이 그를 위해 마련해준 그릇이니까. 아무리 근사한 내용물도 그릇을 벗어나면 쏟아져 가치를 상실하고 마니까.

꾸욱!

손에 쥔 창. 편리하기는 한데 믿음직하지는 않은 물건이다. 형태변환이라는 쓸 만한 능력이 부여되기는 했으나, 무기 자체의 질은 일반적인 무기보다 조금 나은 정도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살을 가르고 뼈를 깎는 정도야 무리 없이 해내겠지만, 그 이상은 기대하기 힘들 터.

‘많기도 하구나.’

예전, 본래의 이름으로 불렸던 시절의 기억을 떠올렸다. 무수한 적을 앞에 두고 심호흡을 하던 그 순간. 그 느낌.

그가 과거를 떠올린 그때, 울티노의 얼굴이 거세게 꿈틀거리더니 전혀 다른 얼굴로 바뀌었다. 그것을 눈치 채지 못한 채, 할렌은 이제 막 바닥에 내려앉은 괴물들을 향해 창을 휘둘렀다.

* * *

잔챙이들은 넘겼다. 대신 위협이 될 만한 녀석들과 먼저 덤벼드는 녀석들만 상대했다. 그렇게 처리한 것이 족히 백 마리는 넘었다. 하나같이 만만치 않은 녀석들이었기에 허투루 상대할 수 없었고, 덕분에 시간의 흐름을 잊을 수 있었다. 아마 그러지 않았다면, 조급함을 참지 못했을 것이다. 대체 언제쯤 원수와 대면할 수 있는 것일까, 하면서.

전투에만 전념할 수 있었기에 기다릴 수 있었고, 덕분에 초조함을 느낄 새도 없이 마주할 수 있었다.

[드디어.]

저 앞에, 원수의 기척이 느껴진다.

[거인이여! 잔혹하고 추악한 거인이여-! 나를 기억하는가!]

들을 수 있는 자들에게는 쩌렁쩌렁하게 들렸을 일갈이 터지자 저 앞에서 심드렁한 대꾸가 더 크게 울려 퍼졌다.

[내가 하찮은 것들을 기억해야 할 이유가 있느냐.]

[하하하!]

여전히 오만하다. 이가로프는 그것이 오히려 기뻤다.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그가 간직한 복수심이 여전히 그대로이듯 원수 역시 그때 모습 그대로였다.

이제 다른 말은 필요 없으리라. 숙원을 풀 때가 도래했으니.

[길었다! 길었던 기다림은 오늘로써 모두 끝내리라!]

망국의 왕자와 그의 전사들이 불타오르는 잔해와 무수한 적들을 넘어 원수를 향해 돌격해 들어갔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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