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2화
용혈이라고 하기에 그저 영롱한 붉은색 액체 같은 것을 상상했었다. 용이라는, 신비로운 것들 가운데에서도 전설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초월적인 존재의 것이라고 해도 어쨌거나 피는 피 아닌가.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결코 그의 상상력이 빈곤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을 실재로 눈으로 본 순간. 이전까지 막연하게 품어왔던 상상들은 깔끔하게 사라졌다.
그것은 액체가 아니었다. 그래도 영롱하게 빛나는 붉은색이기는 했다. 붉은 보석. 정말 그러했다. 보는 순간 알 수 있었다. 저것은 그 어떤 아름다운 보석도 초라하게 만드는 보물 중의 보물이라는 것을.
그는 두 손을 뻗어, 천천히 그에게 다가오는 붉은 보석을 받아들였다. 그것이 그의 두 손에 내려앉는 순간. 변화가 시작됐다.
시작은 손이었다. 주름지고 색이 바랜 손이 세월을 되돌렸다. 주름이 사라지고, 혈색이 돌아왔으며, 힘이 샘솟았다.
심장의 울림이 거세지고 등이 펴졌다. 백발이었던 머리가 옅은 갈색으로 물들어갔다. 아주 오래 전. 철없었다 회상하곤 했던 그 시절처럼.
“아…아.”
기쁨? 기쁨일까? 원하던 것을 얻었으니 기뻐하는 것이 당연한데, 자이드라 멕시스는 지금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 진정 기쁨인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머리가 뜨겁다. 몸이 다 뜨거우니 머리도 뜨거운 것인가. 아니. 그건 아니다. 뜨거운 몸뚱이 가운데에서도 유독 머리가 뜨끈하게 느껴지니.
평생 경험한 적 없는 극도의 흥분이 몰아친다.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 만큼.
머릿속이 새까맣게 타버리는 것은 아닐까 싶은 두려움마저 일기 시작한 순간.
[보기 좋군.]
아?
시뻘건 불구덩이에 큼지막한 얼음덩이가 떨어졌다. 아찔하던 정신이 한 순간에 제자리를 찾았다. 자이드라 멕시스가 재빨리 눈을 감았다 뜨니, 처음 있던 그 자리에 여전히 같은 모습으로 서 있는 사내가 보였다.
“이…이건.”
그런데 이상한 것은, 사내가 너무나 커 보인다는 거였다. 분명 눈에 보이는 모습은 동일한데, 그 모습을 보는 그의 마음은 전혀 달랐다. 겉잡을 수 없는 경외. 당장이라도 무릎을 꿇고 저 사내의 발에 입을 맞춰야 할 것만 같은…….
“전하. 이건 혹시 전하께서…….”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것은 대체.”
[자네가 받아들인 피 한 방울은 내게서 비롯된 것이지. 그러니 자연히 내게 이끌리는 것이야. 이것은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것이네. 자네 스스로 다스리는 수밖에.]
“…….”
자이드라 멕시스는 사내, 줄카에게서 시선을 뗐다. 아니, 떼려 했다. 그런데 눈이 떨어지지 않아 그냥 감아버렸다.
‘거짓은 아니다.’
머릿속을 울리는 소리에 거짓은 없다.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지만 느낄 수 있었다. 얼음에 한번 손을 대면 그것이 차갑다는 것을 알 수 있듯, 이 소리 또한 그랬다. 이것은 목을 통해 내는 잡스러운 소통이 아니다. 마음과 마음이 닿는 소통의 본질 그 자체인 것에 거짓은 섞일 수 없다.
‘내가 다스려야 하는 것이야.’
몇 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그가 보았던 몇 안 되는 용아들은 제법 사람답게 굴었다. 그들의 군주에게 복종했지만 그것이 충성스러운 군인이나 하인 이상의, 노골적으로 표현해 광신자 같은 모습은 아니었다는 거다. 그들 역시 용혈을 받아들인 자들일 터.
‘그렇다면 나 또한 할 수 있지.’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리고 자신의 상태를 확인했다. 굳이 눈으로, 거울로 확인하지 않더라도 자신의 변화를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숨이 차지 않는다. 몸이 가볍다. 힘이 넘친다. 안개가 가득 찬 것 같았던 머리가 더 없이 맑게 느껴진다. 눈을 감기 전 시야 끄트머리에 보였던 두 손에 주름이 사라진 것도 확인했다.
무엇을 더 의심하겠는가. 자신은 새로운 삶을 얻은 것이다. 거기에 이 삶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는, 어쩌면 영원히 사그라지지 않을 불멸의 삶일지도 모른다.
가슴이 뛴다. 한창 때의 젊은이, 그 이상으로 들끓는 열의와 패기를 도저히 주체할 수가 없다.
[만족스러운가?]
“예. 아주. 만족스럽군요.”
아직 눈은 뜨지 않았다. 태양과 눈을 마주치다 두 눈이 타버린 어리석은 이가 되지 않기 위해, 그는 아직 감은 눈을 뜨지 않았다.
[이제 무엇을 할 생각이지?]
“이 삶이 전하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전하께서는 대적과 결착을 내실 생각이시지요. 그러니…일단은 계속 싸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을 의도하고 피를 내준 것이다. 물론, 그 역시 알고 있었다. 알았지만, 다른 선택지가 없었기에 받아들인 것이다.
이미 뜻한 바를 이루었다. 그러니 이제는 지키기만 하면 된다. 얻은 것을 바로 잃지 않도록.
“이제 저는 제 방식대로 싸우겠습니다.”
[그리 하게.]
거대한 존재감이 사라진 후. 자이드라 멕시스는 그제야 천천히 눈을 떴다.
“각하.”
“내 모습이 어떤가.”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흔치 않은 일이다. 일단 물음을 던지면 어떻게든 답을 짜내는 이들이었으니까. 그것이 신하의 태도라 배워온 이들이니까.
그런데 이렇게 답을 기다리게 한다는 것은, 그만큼 그들이 충격을 받았다는 뜻일 것이다. 지금 자신의 모습이, 그만큼 충격적이라는 것이리라.
자이드라 멕시스는 그것이 만족스러웠다.
“이 자리에 거울이 없는 것이 안타깝군.”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수하 한 명이 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땅에 꽂은 후에 힘을 주어 부러뜨렸다.
“직접 확인하시지요.”
그리고 그렇게 부러뜨린 검을 조심스레 그에게 건넸다.
헛웃음을 머금은 자이드라 멕시스가 부러진 검신을 건네어 받았다. 그리고 비친 자신의 얼굴을 확인했다.
반질반질한 검 속. 흐릿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젊은이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만 그 젊은이의 눈은 그의 기억과 달리 붉은 색이었다.
“허. 허허허.”
“감축 드립니다!”
“감축 드립니다!”
자이드라 멕시스는 한동안 멍하니 서서 부러진 검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홀린 듯 바라보았다.
* * *
바람이 변했다.
물론 바람은 여전히 서쪽에서 동쪽으로 불고 있었고, 적당히 잔잔했다. 그러니, 눈에 띄게 뭔가 변한 것은 아니었다. 다른 누군가에게 설명하라면 설명할 수도 없다. 이것은 그저 그의 느낌일 뿐이었으니.
“…….”
그러나 군터는 자신이 느낀 바람의 변화가 전장 전체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이라 확신했다.
‘북쪽.’
자이드라 멕시스가 이끄는 타라냐드군이 줄카와 합류했으리라. 그들은 북쪽의 적을 충분히 밀어낼 것이고, 어쩌면 이미 밀어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지금쯤 자이드라 멕시스와 줄카가 접촉했을 수도 있다. 자이드라 멕시스는 대가를 요구할 것이고, 줄카는 인색하게 굴지 않을 터.
‘그렇다 한들 또 다른 목줄을 찰 뿐이지.’
당사자들은 부인할지도 모르지만, 군터가 보기에 용아들은 줄카에게 목줄이 잡힌 충직한 개에 지나지 않았다. 주인 없이는 달리지도, 물지도, 심지어 숨 쉬지도 못하는 충성스러운 짐승들.
자이드라 멕시스는 자진해서 목줄을 목에 걸었다. 다른 방도가 없었는지 어쨌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여기까지 온 이상 그는 발을 빼지 못한다. 결국, 이 싸움의 끝을 줄카의 곁에서 함께 보게 되리라.
줄카는 싸움을 피하지 않는다. 그가 북쪽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어디까지나 전략적인 판단 하에 이루어진 일. 기다리던 군대가 당도했으니, 이제는 자신의 적수와 맞붙기 위해 움직이겠지.
‘어떻게 할까.’
먼저 나서지는 않는다. 그것은 남의 싸움에 내 피를 먼저 흘리고 싶지 않다는 얄팍한 계산에서 나온 판단이었다. 같은 적을 두었기에 줄카와 손을 잡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와 줄카가 친구가 된 것은 아니었다. 일시적인 동맹일 뿐.
그렇다. 일시적이다. 지금의 적을 처리하고 나면 그 후에는 어찌 될지 모를.
‘나답지 않군. 아니…정말 그런가?’
나다운 게 무엇인가. 군터는 잠깐 고민했다.
지금 손을 잡은 줄카도, 맞서 싸우고 있는 아간투스베록도 모두 그와 대등하거나 그 이상일지도 모르는 존재들이다. 얕잡아 볼 수도,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도 없는.
이것은 경각심이다. 머리가 정강이에나 닿을까 싶은 강아지와 송아지만한 늑대를 대하는 태도가 다를 수밖에 없듯, 군터 역시 그와 대등한 존재를 상대로는 본능적으로 조심스럽고 신중한 태도를 견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군터는 그것이 잘못되었다 생각하지 않았다.
물론 아간투스베록, 그자에게서 받아낼 빚은 부족함 없이 받아낼 것이다. 줄카에게 선수를 양보했지만, 개입할 틈도 없이 모든 일이 끝나버릴 리는 없다. 둘은 오랫동안 으르렁거려온 호적수였으니까. 군터가 둘의 존재를 의식하듯, 그 둘 역시 서로를 오랫동안 의식해왔을 것이다.
빠르지도, 늦지도 않게. 그렇게 마주할 것이다.
생각을 정리하며, 군터는 마물의 몸뚱이에 깊숙이 파고든 그의 창을 쑥 뽑았다. 파고들 때처럼 빠져나올 때 역시 걸리는 것 하나 없이 부드럽게 빠져나온 창에는 피 한 방울도 묻어 있지 않았다.
[그-어-]
그래도 한때는 이 땅을 앞마당처럼 누볐을 강대한 존재가 지금은 힘만 센 짐승 같은 꼴이 되어버렸다. 분노와 두려움, 고통에만 반응하는 백치 같은 짐승이.
군터는 쇠락한 존재에게 안식을 선물했다. 그 방식은 무척이나 거칠었지만, 이게 그가 아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물론 다른 방법을 알았다고 해도 눈 뒤집힌 짐승 같은 것들을 위해 번거로움을 감수하지는 않았을 테지만.
[해야 할 일을 해라.]
길을 잃고 헤매던 시체들이 방향을 잡았다. 이제 그것들은 살아있는 것들 중에서도 사람이 아닌 것들을 향해서만 달려들 것이다. 얼마 동안은 말이다.
‘점점 더 약해지고 있다.’
군터의 눈썹이 미미하게 꿈틀거렸다. 거리가 조금 벌어지기 무섭게 시체들에 대한 자신의 통제력이 흔들리기 시작함을 느낀 것이다.
아간투스베록. 그자가 도시의 중심으로 다가오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의 힘이, 그의 영향력이 도시 전체의 흐름을 뒤집어 엎고 있다.
카아아아악-!
저 멀리, 흉측한 괴성이 크게 울려 퍼졌다. 마물, 그리고 마물은 아니지만 평범한 괴물들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사나운 것들이 더더욱 미쳐 날뛰고 있다. 거인의 기운이 그것들의 광기를 부추기고 있는 거다.
* * *
“내가…….”
흐릿한 시야에 익숙한 얼굴이 들어왔다.
“정신이 드십니까?”
얼굴은 익숙한 것 같은데 목소리는 그렇지가 않다. 제대로 들리는 것이 아니라서 그럴까? 목소리가 그대로 들리는 것이 아니라 메아리치는 것처럼 울려서 들렸다. 무슨 말을 하는지 제대로 알아듣기가 힘들 정도였다.
익숙한 얼굴, 낯선 목소리는 몇 번이고 뭐라고 말을 했다. 보리스는 그것을 알아들으려고 노력했지만 그래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나는…분명.’
보리스는 결국 알아들을 수 없는 목소리를 뒤로 한 채 기억을 더듬었다. 마지막 기억. 의식이 끊기기 전에 보았던 것.
‘그래. 그랬지.’
끝도 없이 몰려드는 괴물들을 막아내고 있었다. 아군의 퇴로를 확보하기 위해서. 모든 것이 힘겹지만 그럭저럭 잘 흘러가고 있을 무렵. 갑작스레 그 놈이 나타났다. 아무런 예고도, 징후도 없이.
놈의 접근을 너무 늦게 알아차렸다. 평소 같았으면 하지 않았을 실수였다. 변명하자면, 그때는 너무 지쳐 있었고 신경 써야 할 것도 많았다.
‘놈에게 당했지. 그 뒤로는 기억이 없어.’
그렇다면 저자는 의사인가? 아니면 사제?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공자님. 들리십니까? 공자님. 움직이실 수 있겠습니까?”
움직일 수 있냐고? 그게 무슨 말인가. 그야 당연히.
보리스가 몸에 힘을 주었다. 누워 있는 자세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얼마나 오랫동안 누워있었던 것인지 몸이 제법 굳어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어떻게 상반신을 일으키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몸을 반쯤 일으키자, 흐릿했던 시야가 점점 맑아졌다. 익숙하다고 막연히 생각했던 얼굴도 조금 더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자네는…나짐?”
“예. 나짐입니다 공자님.”
의사도, 사제도 아니었다. 익숙하다고 생각했던 얼굴은, 일찍이 그가 거두었던 술사 나짐이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