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1화
군터의 주 전술은 늘 하나였다. 적장을 치는 것.
많은 전략가들이 흔히 군을 동물로 비유하곤 했다. 그 이유는 다 다르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으니, 동물이든 군대든 머리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다. 그러나 군터는 처음 전장에 나설 때부터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기 위한 가장 쉽고 빠른 방법을 본능적으로 인지하고 행했다.
승리로 향하는 지름길. 그 길을 가장 손쉽게 가기 위한 방법이 스스로 선봉에 서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늘 가장 위험한 자리를 마다하지 않았다. 혹자는 늘 가장 먼저 적의 창칼을 맞는 그를 보며 감탄하거나, 칭송하거나, 우려하곤 했다. 하지만 군터는 단 한 번도 그런 것을 의식하며 움직이지 않았다. 출세에 대한 욕망으로 들끓던 어린 시절을 제외하면, 그의 모든 행동은 효율을 좇은 것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 이 싸움을 끝내는 가장 쉬운 방법은 적장을 잡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만은 군터도 확신이 없었다. 비록 직접 대면한 적은 없으나, 간접적으로 여러 번 그를 접한 군터는 상대의 힘을 얼추 가늠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래서 더욱 확신할 수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물러날 생각은 없다. 이곳은 그의 땅이었고, 상대는 침략자였으니. 하지만 애초에 이것은 그의 싸움이 아니었다. 지금에 이르러서야 어쩌다 보니 당사자 중 하나가 되었다지만, 시작은 그렇지 않았다.
‘서두를 필요는 없지.’
흉포한 두 존재가 서로를 향해 으르렁거리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그들이 먼저 서로 피를 보겠다면, 굳이 이쪽이 먼저 나서서 끼어들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군터는 그를 막아서는 마물들을 하나하나 해치워갔다. 느리지도, 그렇다고 빠르지도 않게.
* * *
본래 솔롬은 군사 목적으로 축조된 성이었다. 그랬던 성에 크렘보르의 깃발이 꽂히면서 일개 군사 요새에 불과했던 성은 몇 차례의 대규모 공사를 통해 제대로 된 도시로 거듭나던 중이었다. 비록 아직 외곽지역은 뼈대만 간신히 세운 수준이기는 했지만, 그 규모만은 어지간한 도시들에 비교해도 부족함이 없었다. 크렘보르 가문의 역사를 시작하고, 이어가기 위해 초기 설계부터 도시의 규모만은 넉넉하게 구상한 탓이었다.
그렇기에 지금, 일찌감치 주민들을 소개한 외곽지는 황량한 전장이 되어 무수한 군대의 각축장으로 쓰이고 있었다. 수천의 병사와 그 이상의 괴물들이 한꺼번에 뒤엉켜 싸우는 와중에도 비좁다는 느낌은 전혀 없었다.
“각하. 아군이 적을 밀어내고 있습니다.”
“…….”
자이드라 멕시스는 수하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그 역시 같은 곳에서 전장을 살피고 있었으나, 그의 눈에는 수하가 보는 것 같은 명확한 그림이 보이지 않았다. 점점 타들어가는 생명 속에서, 쇠퇴하는 것은 몸의 기력만이 아니었다. 보이는 것, 들리는 것을 비롯한 신체의 모든 감각이 놀라울 만큼 급격하게 저하되고 있었다.
“그렇군.”
그래도 그는 필사적으로 초조함을 숨기고, 평소와 같은 모습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사실 그 정도가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여기 석상이라도 된 것처럼 가만히 앉아서, 그의 병사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조금이라도 더 눈에 담는 것이.
“슬슬 움직여도 될 것 같군.”
“예? 하오나 아직은.”
“내 병사들이 죽어 나가는데 여기서 가만히 지켜 보고만 있는 것도 못할 일이다.”
따지고 보면 저기 있는 병사들 모두, 자신의 연명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 있는 것이었다. 물론, 그걸 가지고 이제 와 새삼 마음의 가책을 느낀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다. 저들은 멕시스에 충성을 맹세했으니, 멕시스를 위해 싸우고 죽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니 더더욱 실패할 수는 없다.’
저들의 충성이 당연한 것이라고 해서, 그 충성을 받는 당사자까지 당연하게 여겨서는 안 된다. 책무는 섬기는 자에게도, 섬김 받는 자에게도 존재한다.
* * *
“밀어붙여!”
뱅패로 벽을 세운 병사들이 호령에 맞춰 발을 굴렀다. 흉성을 토하던 괴물들은 그 정연한 기세에 조금씩 뒤로 밀려났다.
이것이 사람의 군대와 괴물들의 차이였다. 하나하나만 놓고 보면 괴물들의 전투능력이 월등하나, 괴물들은 사람처럼 수십 수백이 하나가 되어 싸울 수 없었다. 그들에게는 군기도, 협동심도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게다가 그들은 일반적인 군대가 아니었다. 누가 봐도 흉물스럽고 사악한 괴물들. 그것들을 상대로 인간의 터전을 지킨다는 자부심.
“신께서 보고 계신다!”
“신께서 함께 하신다!”
그들에게 있어 이것은 성전이었다. 그 옛날 황제가 일으켰던 것과 같은 성스러운 전쟁. 이 싸움에서 죽는 자는 곧장 신의 나라에 당도할 것이며, 살아남는 자는 후세에까지 길이 전해질 영광을 얻으리라.
“도포는 끝났나?”
“예! 부족함 없이 발랐습니다!”
“좋아. 비켜!”
사납게 생긴 무장이 커다란 활을 들고 정면을 노려보았다.
“알아서들 피해라!”
마지막 순간 크게 외친 그가 시원하게 시위를 당겼다. 활에 어울릴 만큼 큼직한 화살 한 대가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허공을 갈랐다. 시위를 떠난 화살이 움직이는 궤적을 따라 붉은 선이 그어졌고.
화르륵!
가느다란 붉은 선에서 시뻘건 불길이, 종이를 적신 잉크처럼 삽시간에 번져 나갔다. 불길에 휩쓸린 괴물들이 일제히 몸을 뒤로 뺐고, 방패의 벽은 그 빈틈을 놓치지 않고 더욱 밀어붙였다.
“클클클. 말 못하는 괴물 놈들이라도 뜨거운 맛은 아는 모양이지?”
화살을 쏜 무장이 비릿하게 웃으며 활을 내려놓았다. 방금 그가 쓴 활은 어지간한 힘으로는 시위도 제대로 당기지 못하는 강궁이었다. 그 역시 한 발을 쏜 것이 한계라, 지금 그의 두 팔은 볼썽사납게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계속해서 밀어붙여라. 한번 뜨거운 맛을 봤으니 이제 놈들도…….”
콰직!
기세 좋게 명령을 이어가던 그의 말이 뚝 끊겼다. 그의 머리와 상반신 일부가 허공에서 갑작스레 나타난 괴물의 입속으로 사라진 탓이었다.
“괴…!”
“장군!”
괴물은 허공에서 나타났고, 허공에서 머물렀다. 날아다니는 것과는 달랐다. 그것의 모습은, 난다기 보다는 떠있다는 표현이 더 적합해 보였다. 그것의 몸은 뱀처럼 길쭉했으며, 그런 외관만큼 재빨랐다. 찔러오는 창칼을 유유히 피하며 모습을 감춘 그것은 다시 한번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모습을 드러냈고, 동시에 세 명의 병사를 집어삼켰다.
“으아앗!”
“제기랄! 자리를 지켜!”
그것은 재앙이었다.
진형도, 대열도 모두 눈에 보이는 적을 상정하고 형성하는 것. 방패가 향하는 방향도, 시선이 향하는 방향도 모두 적이 있는 쪽인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전혀 예상치도 못한 곳에서 적이 출현한다면?
등 뒤의 불안에서 초연할 수 있는 이는 흔치 않다. 아무리 철저하게 훈련된 군인이라고 해도 머리 위에서, 등 뒤에서 갑자기 나타나는 괴물을 신경 쓰지 않을 수는 없다.
전방의 대열이 흔들리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나마 완전히 무너지지 않고 흔들리는 수준에 그칠 수 있었던 것은 우습게도 목이 터져라 외치는 장교들 때문이 아니라, 바로 앞에 버티고 있는 괴물들 덕분이었다. 뒤쪽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다 한들 바로 앞에 있는 흉물스러운 것들은 말 그대로 당면한 위협인 것이다. 후방에서 일어난 사고까지 신경 쓰는 것은 지금의 그들에게 있어서는 사치였다.
“질리는군.”
“대체 몇 마리나 있는 거야.”
“말할 시간에 움직여.”
후방에,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 난데없이 출현하는 마물들은 확실히 위협이었다. 재수없게 고위 지휘관이 휩쓸리기라도 하면 군 전체가 휘청거릴 정도의 타격이었고. 그러나 그렇게 재수없는 경우는 얼마 되지 않았고, 날뛰는 마물들은 곧 사냥당했다. 답답해 보일 정도로 육중한 전신갑옷을 입은, 붉은 안광을 뿜어내는 일단의 전사들에게.
쾅!
통짜 쇠로 된 철퇴가 마물의 길쭉한 몸통을 후려쳤다. 이번에도 역시 유유히 빠져나가려던 마물은 불의의 일격에 비명까지 토하며 비틀거렸다. 그렇게 비틀거리는 와중에도 허공에서 떨어지지는 않았지만, 연이어 날아온 쇠사슬에 몸이 얽혀버리자 끝내 추락하고 말았다.
“당겨!”
마침내 마물이 추락했다. 그런데 굵직한 나무 몇 그루를 이어 붙여 놓은 것 같은 덩치에도 불구하고 마물이 땅에 떨어질 때는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심지어 먼지도 일지 않았다.
“여기는 네가 있을 곳이 아니야.”
거뭇한 형체가 마물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큼직한 도끼가 마물의 머리를 반으로 갈랐다. 피는 튀지 않았다. 대신 흐릿한 연기 같은 것이 단면을 따라 피어 올랐다.
“돌아가라.”
마물의 머리를 가른 도끼는 뭉툭했다. 도끼라기보다는 몽둥이라고 해야 할 정도. 실제로도 그것은 병기라 할 만한 물건이 아니었다. 전투보다는 제사나 의식에 사용되는 법구였다.
“후우.”
머리가 쪼개진 마물이 완전히 사라지자, 그는 그제야 몸을 일으켰다.
마물이라 뭉뚱그려 부르지만, 이들은 본래 신령스러운 존재였다. 일반적인 날붙이로는 대적하기 힘든 상대였고, 그것은 본래보다 한참이나 쇠락한 지금도 마찬가지. 그렇기에 이들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싸워서 쓰러뜨리기보다는 돌려보내는 편이 낫다.
‘안 그런 놈들도 있지만, 모든 일은 효율적으로 해야지.’
유감스럽게도 자신처럼 효율적으로 일을 처리하는 놈들은 많지 않았다. 적이라면 일단 싸워서 끝장을 봐야 한다는 정신나간 무투파 놈들이 많은 것도 있고, 이런 법구의 수가 적은 것도 있다. 뭐, 신경 쓸 필요는 없다. 어련히 다들 알아서 잘 할 테니까.
“어이, 제군.”
“예, 옛?”
하마터면 통째로 마물의 입 속으로 사라질 뻔한 젊은 장교가 주저앉은 채로 고개를 들었다.
“이것들은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 자네들은 자네들이 할 일을 하도록.”
“…알겠습니다.”
이런 비슷한 일들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마물들, 그리고 입 달린 괴물들에게 몇 번이고 불의의 일격을 당하면서도 타라냐드군은 착실히 괴물들을 몰아붙였고.
“전하.”
이미 한 차례 전화(戰火)가 휩쓸고 간 자리에서, 자이드라 멕시스는 드디어 그가 고대하던 만남을 이루었다.
[왔군.]
“부름을 받았으니, 마땅히.”
백발의 노인은 상대에게서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그의 앞에 있는 상대에 비한다면 보잘것없는 시간이겠지만, 그래도 평생 동안 온갖 인간군상을 봐온 그였다. 그 경험은 그에게 통찰력이라는 것을 선물했고, 그 덕에 그는 이제껏 사람을 대하며 실수를 해본 적이 드물었다.
그러나 이번은 다르다. 왜냐하면, 지금 그의 앞에 선 자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네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느냐?]
“알고 있습니다.”
[네가 아는 것은 일부에 불과하다.]
“그렇다 한들, 그것은 차차 알아가도 늦지 않습니다. 지금 제게는…시간이 없기 때문이지요.”
메마른 목소리가 조용히 흘러 나간다. 그를 수행하는 몇 안 되는 군관들의 얼굴은 굳다 못해 창백하게 변해 있었다. 그들 역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가 누구인지. 이 자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멕시스의 이름은 제법 길게 이어져왔지. 네 선택 덕분에 그 역사도 희미해지겠군.]
“제가 곧 멕시스입니다.”
그러니 희미해지지도, 사라지지도 않는다.
그 말에 줄카가 처음으로 감정을 드러냈다.
웃음. 그러나 그 웃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자이드라 멕시스는 알지 못했다.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그의 시선은 상대의 손. 정확히는 그 손 위에 있는 자그마한 붉은 보석만을 향했다.
[후회하지 않기를 바라지. 그렇다 해도 결국 후회할 테지만.]
붉은 보석이 떠올랐다. 노인의 마음을 희롱하듯, 그것은 천천히 그를 향해 다가왔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