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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1010화 (1,010/1,064)

1010화

오-오오오오!

웅장하게 퍼지는 울음. 그것은 얼핏 듣기에는 주변의 적들을 위압하는 것 같았지만 이가로프는 그 울음에서 전혀 다른 면을 느꼈다.

울음. 말 그대로 울음.

한때는 신, 혹은 그에 준하는 신령한 존재로서 이 땅을 누볐을 존재가 지금은 백치의 괴물이 되어버렸다. 몰락도 이토록 비참한 몰락이 있을까. 저토록 비통하게 울부짖는 것도 당연하다. 백치가 되어 사고는 할 수 없어도 감정은 존재할 테니.

따지고 보면 자신과 비슷하지 않은가. 물론 자신에게는 잊지 않은 원한과, 복수를 행할 기회가 남아있다는 점에서 저 이름 모를 옛 존재보다는 나았지만.

[안타깝군.]

원수에게 모든 것을 잃고, 이지마저 상실한 채 원수의 꼭두각시가 되어야 한다니. 끔찍한 말로다. 어쩌면 자신에게도 찾아올 수 있었던.

동질감과 연민이 느껴진다. 그리고 그 이상의 긴장감이 사고를 잠식한다.

이성이 날아가 백치가 되었으나 그 힘만은 여전히 위협적이다. 저 정교함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사나운 공격. 저것은 분명 자신과 동지들에게 충분히 직접적인 피해를 입힐 수 있다. 그러니 잔챙이들을 상대할 때와는 다르게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어지간하면 피해가고 싶었지만, 이미 저 존재는 자신들을 의식하고 있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위협적인 존재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낀 것이다.

[벌써부터 발목을 잡힐 수는 없지.]

원수의 얼굴은 아직 보지 못했다. 만만치 않은 상대라고는 하지만, 기껏해야 꼭두각시에 불과한 것에게 애를 먹어서야 쓰겠는가.

이가로프의 영체가 불처럼 이글거렸다. 비록 육신은 오래 전에 썩어 문드러졌을지라도, 그의 영혼과 정신은 생전 마지막 불꽃을 태우던 그 순간보다 더 강하게 거듭났다.

[돌파하라!]

평범한 사람의 눈에는 흐릿한 연기 같아 보이는 유령 기수들이 마물을 향해 돌격해 들어갔다. 선두의 이가로프가 마물의 꼬리를 아슬아슬하게 피하며 그의 마음이 빚어낸 허상의 검으로 마물의 허리를 베었다.

쇠붙이로 된, 실존하는 검이 아니었기에 피가 튀는 일도 없었다. 그러나 피 한 방울 튀지 않았음에도 마물이 전신을 꿈틀거렸다. 그리고 그 작은 틈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이가로프의 뒤를 따르던 유령기수들이 마물을 수없이 찌르고 베었다.

이가로프의 첫 일격을 제외하고, 나머지 유령기수들의 공격은 마물에게 유의미한 피해를 입히지는 못했다. 오히려 성질만 돋우는 꼴이 되어 마물이 더 격렬하게 날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정교함이 없는 공격은 그저 몸부림일 뿐. 이가로프의 지휘 하에 유령기수들은 마물을 착실하게 공략해갔다. 마물은 그들에게 있어 충분히 위협적인 존재였지만, 홀로 수백의 전사들을 당해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것도 하나처럼 호흡이 맞는 수백이라면 더더욱.

한동안 흉성을 토해내던 마물이 그 거대한 몸뚱이를 땅에 누이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 *

쿵!

천둥소리 같다. 그런데 천둥이 쉴 새 없이 몰아친다. 아까부터 계속.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실비아는 짐작도 할 수 없었다. 괴물들이 몰려왔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게 전부.

“하아.”

보리스가 중태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보러 가고 싶지만 그녀는 이곳에서 옴짝달싹 할 수가 없었다. 저 방문만 열고 나가도 문 앞을 지키고 있는 병사들이 그림자처럼 따라붙을 것이며, 이 건물을 나가려고 하면 곧장 그녀를 제지할 것이다.

‘도대체가.’

나는 이곳에서 뭘 하고 있는 걸까.

코누디스의 망령. 그 미치광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지금 저 괴물들을 이끌고 온 것은 그 자다. 그렇게 보면 자신이 이 도시를 위험에 빠뜨렸다고도 볼 수 있으리라.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실비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도저히 가만히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 물론 일어섰다고 해서 뭔가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쿵!

캄캄한 어둠. 저 멀리서 보이는 은은한 붉은 빛. 실비아의 가슴은 여전히 불안하게 뛰었다.

* * *

전투에서 지리적 이점의 중요성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크다. 그리고 이 지리적 이점에는 군이 위치해 있는 자리 외에 지리에 대한 정보 또한 포함되어 있다. 즉, 전장의 지리를 얼마만큼 잘 파악하고 있느냐를 의미한다.

그런 면에서, 군터는 누구보다도 확실하게 지리적 이점을 취하고 있는 셈이었다. 그는 솔롬의 성주이며, 새롭게 거듭난 이 도시의 설계자였다. 외성 구역을 주 전장으로 결정한 것도 그였으며, 전투의 양상을 그린 것 역시 그였다.

[해야 할 일을 해라.]

일단의 병력을 거느리고 뛰쳐나온 그가 마주친 시체 무리에게 명을 내렸다. 그와 마주치기 전까지 방향 잃은 적의와 살의를 발산하며 방황하던 시체 무리는 본능 위에 새겨진 각인 같은 명령에 그대로 순종했다.

아간투스베록의 방해 때문에 당초의 계획이 틀어지기는 했지만, 그렇다 한들 이 움직이는 시체들은 군터의 창조물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접촉한 시체 무리 정도는 어느 정도 손쉽게 통제할 수 있었다.

그러나 군터는 알았다. 저 순종이 그리 오래 가지는 못하리라는 것을. 지금만 해도 시체들이 조금 멀어지자 확고부동한 것 같았던 통제력이 조금씩 흐트러지는 것이 느껴졌다. 억지로 유지하려 들면 못할 것은 없었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

도시 전체의 기운이 불안정하다. 혼탁하게 뒤엉켜 있어 기감마저 평소 같이 뻗어 나가지 못하고 있다. 또한 그 정확성조차 때때로 불투명해지기도 했다. 기감을 시야라고 한다면, 잠에서 막 깬 것처럼 시야가 흐릿하다고 할까. 게다가 이런 증상은 점점 더 심해지고 있었다.

답답함. 이런 감정, 아니 느낌을 얼마만에 느껴보는 것인지.

하지만 괜찮다. 어차피 눈에 안개가 끼는 것이 자신만은 아닐 테니.

쿵!

마지막까지 발악하던 마물이 기어이 쓰러졌다. 자욱한 먼지가 일며 건물 한 채가 무너지는 것 같은 요란한 굉음이 터져 나왔다. 마물의 머리 한 가운데에는 크다고도, 작다고도 할 수 없는 창 한 자루가 박혀 있었다.

하지만 이 마물의 마지막을 장식한 것은 머리에 박힌 창 한 자루가 아니었다. 마물은 머리 한 가운데에 창이 박히고도 멀쩡하게 날뛰었다.

‘역시 일반적인 생물체와는 달라.’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보아, 이 마물이라는 것들 대부분에게는 딱히 급소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다. 이것들은 그 자체로 거대한 기운의 덩어리라고 할 수 있었으며, 이것들을 쓰러뜨리기 위해서는 그 거대한 기운 자체를 없애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심장을 찌르든, 목을 베든 소용이 없었다. 마물들에게 있어 육체란 그저 그들의 기운을 형상화 한 형태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기에, 이 마물을 쓰러뜨리는 데 있어 어딘가 어정쩡한 모습으로 퍼져 있는 수하들의 공 역시 적지 않았다. 그들은 군터가 만든 마물의 빈 틈을 착실하게 공략했고, 마물의 기운을 소진시켰다.

그러니 알게 모르게 무력감을 드러내는 그들에게 너희의 공로도 적지 않았노라 이야기해주어도 괜찮을 것이다. 그러나.

군터는 그러지 않았다. 아니, 그럴 겨를이 없었다.

콰앙!

2층 건물 하나를 통째로 무너뜨리며 모습을 드러낸 마물 한 마리와, 허공에서 뚝 떨어져 내린 마물 한 마리 때문에.

“산개!”

지시 없이도 병사들은 재빠르게 거리를 벌렸다. 마물들에게서도, 동료들에게서도.

군터는 자신에게 시선을 고정한 두 마리 마물을 보며 가볍게 호흡을 가다듬었다.

‘묘하군.’

지금 나타난 두 마리를 포함해 지금까지 그가 마주친 마물들이 모두 다섯 마리. 많은 것인지 적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군터는 어쩐지 자신이 마물들과 마주친 것이 우연 같지 않았다. 뭔가, 마물들이 자신을 찾아온 것 같은.

‘그렇다 해도 이상할 것은 없지.’

이 마물이라는 것들. 이성이 날아가 짐승처럼 변했다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더 뚜렷해진 부분이 있다.

본능.

짐승이 피 냄새에 이끌리듯, 이것들 역시 무언가에 이끌려 자신의 앞에 나타났다면?

‘너무 일찍 풀어줬나.’

이 순간. 군터는 이가로프와 그의 무리를 놓아준 것을 살짝 후회했다. 그들이 있었다면 마물들을 상대하기가 좀 더 수월했을 테니까.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가로프의 인내심은 이미 한계에 달한 상태였으니까. 목줄에 묶인 개의 눈이 돌아가기 직전이었다고 할까. 게다가.

“후우.”

조금 수월해질 수 있었던 것뿐이다. 이가로프와 그의 무리가 없다고 해도, 힘만 센 백치 둘을 상대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다만 이런 식이라면…….’

기감이 흐려졌다지만 그렇게 흐려진 감각 속에서도 강대한 존재감은 여전히 빛을 발했다. 북쪽에 하나. 남쪽에 하나.

군터는 그중 남쪽의 빛을 향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계속 지체된다면 적장과의 조우는 꽤나 늦춰질 터.

‘상관없지만.’

어차피 이 싸움은 줄카와 아간투스베록, 두 군주의 싸움이었다. 군터는 굳이 따지자면 둘의 싸움에 휘말린 것이었고. 그러니 그들의 만남에 끼지 못한다고 해도 아쉬울 것은 없었다. 아니, 조금은 아쉬운가?

쾅!

어지간한 거목보다 두꺼운 팔? 앞다리? 뭐가 됐든 간에 묵직한 것이 떨어져 내렸다. 제법 느릿하고, 그 이상으로 정직한 공격은 상념에 잠긴 상태에서도 가볍게 피할 수 있을 정도로 무뎠다. 하지만 그 힘만은 굉장했고, 한편으로는 특별했다.

웅-!

이명. 순간적으로 몸의 균형이 흐트러지고 시야가 흔들렸다. 마물이 발산하는 기이한 기운이 방금 그 공격과 동시에 폭발적으로 부풀어 올랐다.

감각을 흐리는 능력은 제법 흔하니 새로울 것은 없다. 그렇지만 이 정도로 과격하게, 감각을 망가뜨리는 수준의 능력은 드물다. 이 정도면 평범한 병사들을 상대로는 거의 절대적인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 인간은 육체적인 감각이 전투 능력의 거의 전부라고 봐야 할 정도로 연약한 생물이니까.

하지만.

콰직!

큼지막한 양날 도끼가 땅을 찍은 마물의 앞발을 단숨에 베었다. 바로 지금과 같은 상황을 위해 직접 챙겨온 중병(重兵)이었다.

‘상대가 안 좋았군.’

육체의 감각에 의존하지 않은 지 오래된 군터에게 있어서는, 이런 능력 따위 저 멀리 있는 날파리의 날갯짓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했다는 거다.

그어억-!

앞발 하나가 썩둑 잘려 나간 마물이 신경질적으로 몸을 움직였다. 고통보다는 분노. 사지 중 하나가 잘렸다면 전후가 바뀌어야 마땅하건만, 마물은 그렇지 않았다. 이놈 역시 눈에 보이는 몸뚱이는 별 의미가 없다는 뜻.

“다른 놈을 맡아라!”

그렇게 외친 군터가 재차 도끼를 치켜 들었다. 위압적인 것을 넘어 흉악하게까지 느껴지는 커다란 도끼날에는 피 한 방울 흐르지 않았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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