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9화
본래 계획대로라면 솔롬 전역에 깔린 죽음의 기운은 그의 통제 하에 적을 대적하는 데 쓰여야 했다. 수백, 수천 이상의 시신들이 일어나 아간투스베록의 의지에 따르는 괴물들과 맞서 싸우는 것. 그것이 그가 그리고자 한 그림이었다.
그러나 그 계획은 틀어졌다.
준비는 부족하지도, 잘못되지도 않았다. 도시 곳곳에 설치해 놓은 뼈의 탑들은 제 역할을 충분히 했다. 그것들은 식어가는 육신에서 흘러나온 뒤 곧 흩어지려는 죽음의 기운을 붙들어 놓았고, 군터의 의지에 따라 움직였다. 군의 형식으로 비유하자면 일종의 하급 장교의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그것들이 제 역할을 해준 덕에, 군터는 뼈의 탑들에 모인 기운에만 신경 쓰면 됐다. 물론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으나 도시 전체에 손을 쓰는 것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이론적으로는 가능할 것 같았다. 실제로도 힘의 소모는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모든 것은 계획대로 흘러갔다. 하늘이 울부짖는 것 같은 거센 포효가 울려 퍼지기 전까지는.
[건-방진-놈!]
그 포효 한 번에 모든 것이 틀어졌다.
그어어어-
시체들이 일어났다. 족히 수천. 그 이상의 시체들이 식어버린 몸뚱이를 일으켰다.
시체들을 일으켜 세우기는 했다는 점에서 절반 정도는 성공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절반의 성공은 곧 절반의 실패를 의미한다. 그의 의지대로 움직여야 할 힘의 흐름은 길을 잃은 것처럼 헤맸고, 명확히 적을 인식하고 일어나야 했을 시체들은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아간투스베록의 괴물들, 솔롬의 병사들, 눈에 보이는 살아 움직이는 모든 것들이 시체들의 적이었다.
“꼬인 것 같군.”
피칠갑을 한 무장 하나가 다가왔다. 병사들이 그를 제지하려 했으나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위압적인 기세 때문에 직접 몸에 손을 대지는 못했다. 그는 군터에게서 몇 걸음 떨어진 곳에 멈춘 채 다시 물었다.
“이제 어쩔 거요?”
붉게 빛나는 두 눈이 답을 묻는다. 방금까지 살육에 살육을 이어온 전사의 눈에는 섬뜩한 살의와 광기가 넘실거렸다.
“이걸 위해서 지금까지 여기서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던 것 아니오?”
“예를 갖춰라!”
괴인의 불손한 태도에 이를 악물고 있던 친위대 장교 하나가 기어이 검을 뽑아 들었다. 그러나 괴인, 카니악은 그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 군터의 답만을 기다렸다.
[그랬지.]
짤막한 한 마디가 모두의 머릿속에 울렸다. 그 소리를 들은, 카니악을 제외한 모두가 순간 움찔거렸다. 그들은 방금 자신들이 들은 소리가 군터가 낸 것이 맞는지, 혹은 순간적으로 머리가 어떻게 되어서 환청을 들은 것인지 혼란스러워했다.
[하지만 괜찮다. 이렇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니까.]
거짓을 섞을 수 없는 소리에는 담담한 진실만이 담겨있다. 사뭇 전투적이었던 카니악의 기세가 조금은 누그러졌다.
“그래서?”
[싸워야지.]
상대는 군주 아간투스베록. 거인의 피를 이었네 어쩌네 하는 이야기 따위는 뒤로 미뤄도 좋다. 그는 그 자체로 세상에 드문 괴물이다. 그런 괴물을 상대할 때는 이런저런 가능성을 충분히 열어 둬야 한다. 심혈을 기울인 계획이 뜻대로 흘러가지 않은 점은 유감스럽지만, 괴물을 상대하려면 감수해야 하는 부분이다.
“내 주인께서 곧 당도하실 거요.”
[내가 나서길 바라고 온 것 아닌가.]
카니악의 입매가 슬쩍 꿈틀거렸다.
“놈은 이미 그대를 의식하고 있을 거요. 그대가 나서든 나서지 않든, 놈은 곧 그대를 찾아올 테지.”
[없는 말재주를 짜낼 필요는 없다. 네가 무어라 떠들어대든 나는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일 테니.]
“물론 그러시겠지.”
무성의한 군례를 취한 카니악이 휙 몸을 돌렸다. 어정쩡하게 검은 빼든 친위대 장교나, 다른 이들도 멀어지는 그를 제지하지 않았다.
* * *
“자리를 지켜! 등을 보이지 마라!”
밑에 부하를 거느린 장교가 되고 나면 가장 먼저 배우게 되는 것이 있다. 갈라진 목에서 목소리를 짜내는 법. 누구도 따로 가르쳐주지 않지만 결국 어떻게든 배우게 되어 있는 것.
또한 그것은, 대신 목소리를 내줄 수하를 거느릴 정도로 높이 올라가지 못한 채 어영부영 나이만 먹어가다 보면 은퇴를 고려하게 되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했다. 힘껏 소리치면서 부하들을 지휘해야 하는데 더는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면 누구라도 여기까지인가? 하는,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데 지금. 그런 처지는 이미 한참 전에 넘어섰음에도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시어문드는 비릿한 냄새와 맛이 느껴지는 목을 억지로 쥐어짜며 고래고래 소리쳤다.
“시체든, 괴물이든 상관없다! 눈앞에 보이는 것에만 집중해! 서로 어깨를 맞대고 버티면 그 어떤 적이라도 우리를 넘어서지 못한다!”
일선에서 병사들을 독려하며 지휘하는 것은 그의 방식이 아니었다. 그는 주로 넓은 그림을 보며 방향을 제시하는 쪽이었다. 직접 전투에 뛰어들어 칼을 휘두른다거나, 목 아프게 소리치는 것은 본래 그의 방식과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질 겨를이 없었다. 소리칠 수 있는 누구라도 소리치고, 칼을 휘두를 수 있는 누구라도 휘둘러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간신히 유지하고 있는 이 전선이 순식간에 무너져버릴지도 모르니.
“전방에 시체 수십…아니, 그 이상!”
“방패 들어! 성수 남은 것 없나?”
“없습니다!”
“빌어먹을! 칼 집어넣어! 철퇴, 도끼, 창도 좋다! 잘 들어! 밀쳐내거나, 아예 부숴버려야 한다! 목을 잘라내도 대가리 따로 몸뚱이 따로 움직이는 것들이야!”
장교들 중에서도 경험이 많은, 시체들과도 드잡이질을 해본 적이 있었던 이들이 목청껏 소리쳤다. 시어문드는 자신 대신 목을 혹사해주는 수하들을 보며 연신 침을 삼켰다. 핏덩이를 삼키는 것 같은 더러운 감각에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저 시체들.’
눈치 빠르고 일 잘 하는 수하들 덕에 잠시나마 숨을 돌리는 동안, 시어문드는 점점 가까워지는 시체들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익숙하다. 시체도 익숙하고, 움직이는 시체도 평범한 것들보다는 아니지만 어쨌거나 익숙하다. 그의 상관은 사령술의 대가였기 때문이다. 물론 그의 상관은 단 한 번도 스스로 그런 말을 하거나, 내색을 한 적이 없었지만…시체를 수백 구 이상 일으켜 세우는 사령술사를 대가라 하지 않으면 뭐라 하겠는가.
‘뭔가 잘못됐어.’
우연일 수도 있다. 저쪽에도 사령술사나, 그와 비슷한 무언가가 있어서 시체들을 일으켜 세운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기에는 이상한 것이, 저 시체들은 괴물들에게도 덤벼들었다. 주변에 살아있는 존재가 있다면 그게 사람이든 괴물이든 가리지 않았다. 그런 것을 보면 설령 적이 일으킨 것이라 해도 전부 뜻대로 되지는 않은 것 같지만…….
그런데 그건 반대의 경우도 해당되는 이야기 아닌가.
‘그 탑.’
거기에, 걸리는 것도 있었다.
갑자기 내려왔었던 명령. 최대한 은밀히 만들라던 그것. 저 멀리 떨어진 야만스러운 족속들이 믿는 미신 따위가 생각나는 그 흉물스러운 탑. 정말 야만인들의 마을에나 한 두 개 정도 있으면 딱 어울릴 것 같은 물건을 갑작스레, 그것도 전투를 코앞에 두고 만들라는 명령을 들었을 때 시어문드는 그답지 않게 반문했었다. 이게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이냐고.
‘딱히 알려주고 싶지 않으신 것 같아 그냥 넘어갔었지.’
상관의 명령에 토를 다는 것은 최대한 지양해야 한다. 정 납득하지 못하겠더라도 한 번이면 족하다. 그 이상은 불충이고 불경이다. 특히 시어문드는 그의 상관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에 당황스러운 명령에도 묵묵히 따랐다.
사실 그는 그 흉물스러운 탑이 비밀스러운 동맹과 관련된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사람의 형상을 하고서 신에 준하는 대접을 받는 그들이라면 뭔가 평범한 사고방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무언가가 있지 않을까 싶었다. 어쩌면 그들이 보여주는 기적 같은 능력에 필요한 것일지도 모르고.
그렇게 대충 이해하고 넘어갔었다. 그런데.
‘그런데…이건.’
막연한 느낌에 불과했다. 그런데 그 막연함을 붙들고 잠깐 상념에 잠겨 있으니 곧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하지만 급박한 전황 때문에 그냥 넘어갔던 부분들이 떠올랐다.
‘그러고보니.’
그의 상관은 전투가 벌어졌을 때 뒤에서 지휘만 하는 부류의 지휘관이 아니다. 그는 모든 전투에서, 그 누구보다 앞장서서 싸운다. 이번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성벽 위에서 병사 수십이 지켜야 하는 자리를 홀로 감당했었다. 그러다가…….
‘장군께서는 지금 어디 계시지?’
앞장서서 싸운다고 해서 지휘에 손을 놓은 것이 아니다. 그의 상관은 적의 목을 베면서도 수천 명을 자기 몸처럼 정교하게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시어문드는 그런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직접 옆에서 보기 전까지는 알지 못했다.
외성벽을 의지해 적의 1차 공세를 최대한 막아낸다. 그 후에 병력을 최대한 온존하여 2차 방어선까지 물러난다. 그 와중에 외성 외곽지에 배치한 함정 등으로 적의 병력을 가능한 한 많이 갉아먹는다.
여기까지는 정석이었다. 비록 느닷없이 허공에서 나타난 몇몇 특별한 괴물들 때문에 퇴각 과정에서 크게 피해를 입기는 했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장군이라면, 그분이라면 어떻게든 대응하셨을 거다.’
이건 막연한 추측이 아닌, 확신이다. 그간 군터 크렘보르라는 사람을 옆에서 지켜봐 온 경험이 있기에 할 수 있는 확신.
그런데 그는 조용했다. 워낙 혼란스러운 전장이니 소식이 닿지 않은 것일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해도 너무 조용했다.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것인지.’
선 자리에 따라 보이는 것이 달라진다고 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제 자리에서 보이는 것에 부족함을 느낀 적이 없던 시어문드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부족함을 넘어 막막함까지 느껴졌다. 뭐가 보여야 그걸 토대로 머리를 굴려볼 텐데, 지금은 그 역시 명령에 따라 방패를 들고 있는 저 병사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눈앞의 상황에 끌려 다니며 그때그때 최선을 찾을 뿐이었다.
‘무력하기 짝이 없어.’
무력감. 지금 그가 느끼고 있는 감정을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딱 그것이었다.
* * *
괴물과 사람, 시체가 뒤엉켜 싸우는 전장의 상황은 이전보다 훨씬 더 난잡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단순히 제3의, 세력 아닌 세력이 등장했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솔롬 전체를 들었다 놨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그 포효. 아니, 괴성. 그것이 지나간 후, 안 그래도 사납던 괴물들이 더욱 사나워졌다. 그 전까지의 괴물들이 사납게 달려드는 정도였다면 이제는 아예 미쳐 날뛰는 수준이었다.
쾅!
지상에서 들려오는, 그럼에도 지하실 전체가 떨릴 정도의 충격에 나짐은 순간 몸을 떨었다. 본격적인 시술 전이라 다행이었다. 만약 시술 중에 이런 일이 발생했다면, 그래서 자칫 실수라도 저질렀다면…….
‘생각하기도 싫군.’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다스린 나짐이 조심스럽게 용기를 기울였다. 연한 녹색 빛이 도는 용액이 큰 용기에서 작은 용기로 흘러 들어갔다. 그는 작은 용기가 반 정도 찰 때까지 기다렸다.
“후우.”
작은 용기의 절반. 이 정도면 충분하다. 실험에서는 이 반의 반 정도 되는 양으로 다 죽어가던 토끼가 소생했었다.
사람에게 쓰는 것은 처음이다. 최대한 신중해야 하지만 상태가 좋지 않다. 당장 숨이 넘어간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다. 그러니 일단은 어느 정도 과감해질 필요가 있다.
‘행운이 필요하겠군. 내게도, 저자에게도.’
그의 시선이 녹색 빛을 발하는 용기를 떠나 석재 침상 위에 시체처럼 누워 있는 사내를 향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