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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1008화 (1,008/1,064)

1008화

[하하하하!]

전의와 살의로 가득한 호쾌한 웃음이, 그것을 들을 수 있는 모든 것의 머릿속에 환청처럼 메아리쳤다. 그의 뒤를 바짝 붙어 따르는 흐릿한 형태의 유령 기수들은 그들이 지나간 자리에 지독한 한기만을 남기며 전장을 누볐다.

그들의 창과 칼은 피를 뿌리지 않았다. 이가로프를 비롯한 몇몇 영혼들은 물리력을 행사할 수 있었지만 그렇다 한들 그들의 본질은 형태 없는 영혼이었다. 영혼인 그들이 물리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그만한 힘의 소모가 필요했다. 하지만 그들의 전투는 이제 막 시작됐다. 이가로프는 벌써부터 힘을 빼고 싶지 않았다.

웅-!

본래라면 날카로운 절삭음과 뒤따르는 비명이 있었을 터. 그러나 지금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피도 튀지 않았다. 그의 손에 들린 창이 사실은 그의 마음이 빗어낸 허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애석하군.]

모든 것이 무너졌던 그날로 다시 돌아온 듯하나, 역동했던 그 육신은 썩어 흙이 된 지 오래다. 남은 것은 이 지독한 원한과 미련 뿐.

[형제들이여. 쓸데없이 힘을 빼지 마라. 우리가 상대해야 할 적은 따로 있다.]

입 없는 것들은 손을 쓸 가치도 없다. 아마도 들짐승 같은 것들이 변이한 것들이리라. 특별한 능력 하나 없이 몸뚱이 하나만 믿고 들이대는 것들. 그런 것들이니 거인왕도 놈들에게 소리 낼 수 있는 입을 허락하지 않은 것일 터.

가진 거라고는 오직 튼튼한 몸뚱이 하나뿐인 것들이라 영체인 자신들에게 피해를 줄 능력 따위는 없다. 반대로 이쪽도 놈들에게 피해를 주기 힘들기는 하지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다. 어차피 저런 하찮은 것들에 쓸 힘은 없으니.

구워어어-!

반면에, 저런 입 달린 것들은 다르다. 저것들은 특별하다. 어느 정도는 영적인 존재라 할 수 있으며, 저것들은 영체인 자신들에게 충분히 피해를 입힐 수 있다.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지만 보는 순간 느낄 수 있었다. 저것은 자신들에게 위협이 된다는 것을. 그리고.

[가자! 형제들! 복수의 시간이다!]

미련이 빚어낸 허상에 지나지 않는 이 검이, 저것들의 피를 뽑아낼 수 있으리라는 것을.

* * *

종종 시끄럽게 굴던 이가로프가 그의 수하들과 함께 사라지고 나니 군터의 내면은 비로소 고요를 되찾았다. 이가로프가 시끄럽게 구는 것이 거슬린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는 이런 고요함이 썩 마음에 들었다.

“…….”

군터가 눈을 감았다. 그러자 그의 곁을 지키고 선 병사 몇몇이 움찔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이 급박한 상황에 낮잠이라도 자려는 듯 눈을 감으니 이상하게 보였을 터. 하지만 그뿐이다. 속으로야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겉으로 그것을 드러내지는 않는다. 그들은 철저하게 훈련받은 이들. 맹목적인 복종은 그들이 최우선적으로 지키고 따르는 미덕이었다.

와아아아-!

저 멀리. 사실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오는 함성. 눈에 보이지 않아도 저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훤히 보이는 듯했다. 기분 탓이 아니라 실제로 그러했다. 군터의 초월적인 기감은 그것을 가능케했다.

‘가장 크게 밀린 건 동쪽.’

반면에 가장 선전하는 쪽은 역시 북쪽. 줄카의 활약으로 적의 기세가 한번 주춤했고, 뒤이어 당도한 자이드라 멕시스의 군대 덕분에 북쪽은 일단 승기를 잡았다고 봐도 무방한 상황이었다.

또한 의외로, 남쪽의 상황도 상당히 괜찮았다. 보리스가 퇴로를 지키다가 중상을 입고 전장을 이탈하자 일선 지휘관들부터 시작해 병사들까지 전의가 최고조로 솟아오른 상태였다. 저런 상태가 계속 유지되지는 못할 테지만, 어쨌든 현재로서는 보리스의 희생 아닌 희생 덕에 남쪽의 병력은 상당히 선전하고 있었다.

전장에서 기세는 말할 것도 없이 중요하다. 기세는 불과 같아서, 한번 타오르기 시작하면 순식간에 겉잡을 수 없을 정도로 번지기도 한다. 하지만 불이란, 더 이상 태울 것이 없으면 자연히 사그라지기 마련.

피와 살로 된 육신을 지닌 이상, 어쩔 수 없는 한계라는 것이 존재한다. 마음만은 천 명의 적도 무찌를 수 있을 것 같지만, 실상은 두엇 정도를 상대하고 나면 팔다리가 후들거리기 십상인 것이다.

실제로, 선전하고 있는 남쪽조차도 서서히 밀리는 중이었다. 오직 줄카가 있는 북쪽만이 밀리지 않으면서 치열하게 맞붙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머지않아 북쪽을 제외한 외성 전지역이 적의 수중에 떨어지게 될 터. 그 순간을 최대한 늦추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지만. 그럼에도 여기까지인 듯했다.

[시작하겠다.]

거리가 거리인 만큼 들리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느낄 수는 있을 것이다. 그것으로 족하다.

이것은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는 일종의 효시였다.

* * *

“어?”

한 병사가 얼떨떨한 얼굴로 어깨를 떨었다. 그러자 근처에 있던 동료 병사가 반응했다.

“왜?”

“아니. 뭔가…들리지 않았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들리지. 아주 잘 들리지. 저 소리가 어떻게 안 들려?”

저 너머에서 들려오는 전투 소리. 덕분에 수시로 귀가 먹먹해진다. 그런데 들리니 마니, 무슨 헛소리를 하고 있는 건가.

“아니.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면 뭐.”

“방금. 뭔가, 덜그럭거리는 것 같은 소리가.”

“덜그럭? 그건 또 무슨.”

혀를 차며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낸 병사가 말을 이어가려던 순간. 그에게도 들렸다. 방금 동료가 이야기한 대로, 뭔가 부딪치는 것 같은 소리. 그걸 굳이 표현하자면 덜그럭거린다는 말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뭐지?’

병사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소리가 그쪽에서 난 것 같다고 느껴서가 아니었다. 왜인지는 모른다. 그저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왜 이런 흉물스러운 것을 만들어놨는지, 왜 이것을 굳이 지키고 있어야 하는지, 처음 명령을 받았을 때부터 지금까지 의아하고 한편으로는 불만스러웠던 구조물이 눈에 들어왔다.

뼈로 된 탑. 신전의 사제들이 봤다면 입에 거품을 물었을 것이 분명한 흉물스러운 구조물. 처음 봤을 때도, 그 이후로도 의도적으로 자세히 살피지 않으려 했다. 아무래도 꺼림칙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처음 봤을 때의 모습이 어땠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았다.

‘똑같은 것 같은데.’

아닌가? 조금 더 칙칙해졌나? 하지만 그건 아직 하늘이 어두워서 그런 것 아닐까?

온갖 생각들이 순식간에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주체할 수 없는 온갖 생각에 정신이 팔린 덕에, 병사는 자신의 가슴이 어느 순간부터 미친 듯 두근거리고 있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어…어?’

그것을 알아차린 순간. 갑자기 숨이 가빠졌다. 누군가 코와 입을 틀어막고 있는 것처럼.

‘연기?’

탈 것도 없는 앙상한 뼈조각으로 만들어진 탑에서 거뭇한 무언가가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있었다. 잘못 봤나 싶어 눈을 두어 번 깜빡였으나 환각이 아니라는 것만 확인했을 뿐이었다.

“으…….”

기묘한 탈력감이 온몸을 뒤덮자 병사가 휘청거렸다. 참기 힘든 현기증까지 덩달아 밀려오니 제대로 서 있을 수가 없었다. 그의 동료 역시 마찬가지였는지 우스꽝스러운 꼴로 반쯤 쓰러지고 있었다.

‘이게 대체.’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기절하기 직전처럼 아찔한 순간. 그는 이 모든 것이 바로 이 뼈의 탑 때문임을 확신했다. 처음 봤을 흉흉한 외관 때문에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말로 표현하기 힘든 거리낌도 있었다. 그때는 그 이유를 흉흉한 외관 때문이라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었다. 이제야 그 이유를 알겠다.

‘장군. 어째서.’

비록 병졸에 불과하나 눈치가 없지는 않다. 그는 이 탑을 만들고 지키라 한 것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모두들 쉬쉬했지만 이 탑의 축조자가 그들의 장군, 군터 크렘보르라는 것을 모르는 이는 없다.

‘어째서.’

병사는 마지막까지 돌아오지 않는 물음을 속으로 되뇌며 눈을 감았다.

* * *

[음?]

거인왕이 반응했다. 그러자 그를 태우고 움직이던 거대 괴물이 움직임을 멈췄다.

[이건 뭐지?]

줄카가 모습을 드러냈을 때도, 일단의 잡것들이 나타났을 때도 특별한 반응은 보이지 않았던 그였다. 그런데 지금은 달랐다. 그는 인상까지 찌푸려가며, 도시 전체에 흐르기 시작한 기이한 기운을 감지했다.

기이하다 했지만 사실은 익숙한 기운이다. 전장에서 가장 흔히 느낄 수 있는 것이니 모를 수가 없다.

이것은 죽음의 기운이다. 전장에서 죽음의 기운이 느껴지는 것은 당연하다. 강에는 물이 흐르는 것이 자연스럽듯이, 이상할 것 하나 없다. 그러나.

강에 물이 흐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물이 흐르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주변 일대를 다 쓸어버릴 정도로 범람한다면, 그것마저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일 아니겠는가.

우-우우!

거칠게 범람하기 시작한 죽음이 도시 전체를 뒤덮었다. 숨이 끊기고 몸이 식으면서 육신을 떠나고, 자연스레 흐려져가던 영혼들이 광란의 포효를 토하기 시작했다. 그 귀곡성을 그는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아니, 단순히 듣는 수준을 넘어 볼 수도 있었다.

[발칙한 놈이군.]

지금 이곳. 이곳에서 세계의 규칙이 흔들리고 있다. 무력하게 흘러가던 영혼들이 혼란스럽게 배회하며, 식어버린 몸뚱이에 제멋대로 깃들었다. 죽었던 것들이 일어난다. 바람에 부딪친 안개가 걷히듯, 자연스럽게 사라져야 할 죽음의 기운들이 강제적인 어떠한 힘에 이끌리고 있다.

보면서도 믿기 힘들다. 이제껏 온갖 기이하고 신비로운 것들을 봐 왔지만, 이 순간 그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또 색달랐다.

[알고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다만.]

누가 벌인 짓인지는 짐작이 간다. 군터 크렘보르라고 했던가. 한가락 하는 놈인 것은 익히 짐작했지만, 설마하니 이 정도였을 줄이야. 이거 참. 생각지도 못한 복병이 아닌가.

자신만의 힘으로 이런 일을 벌이지는 못했을 것이다. 아마 특별한 준비 덕에 가능한 일이었을 터. 하지만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이 정도라면 초월자라고 봐도 무방하다.

[재미있군. 재미있어.]

본래 이 세상은 오밀조밀하게 짜여 있다. 조금의 흠도 없는 완벽한 구조물이라고 봐도 될 정도다. 땅이 있어야 할 곳에는 땅이 있고, 하늘이 있어야 할 곳에는 하늘이 있으며, 기둥이 서야 할 곳에는 어김없이 기둥이 세워져 있다.

그렇기에 세상 곳곳에 깃든 정령이나 신들은 좀처럼 제 자리를 벗어나는 일이 없다. 제 자리를 벗어나 움직이는 떠돌이를 환영하는 일 또한 없다. 만약 이 땅의 질서가 멀쩡한 상태에서 이런 식으로 규칙을 뒤틀려 했다면 놈은 이 땅의 온갖 힘에 억제당하고 구속받았을 터. 제 발등을 찍는 꼴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예외다.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할 신도, 정령도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발칙한 놈이로다.]

지닌 힘에 비해 연약한 것들의 특징이 있다. 눈치가 빠르다는 거다. 놈들은 제 놈들에게 위협적인 존재를 본능적으로 알아차리고 피한다.

[내 앞에서는 결코 방자하게 굴 수 없을 것이다.]

실로 오랜만에 느끼는 고양감. 오래 전에 떨어져 나갔던 일부가 다시 하나로 합쳐지고, 세상 모든 것을 찍어 누를 수 있을 것 같은 전능감에 전율이 인다.

기분 탓이 아니다. 실제로 그러하다. 옛적, 마주치는 모든 것을 무릎 꿇리고 부숴버렸던 그 시절의 그는 실제로 그러했다.

[건-방진-놈!]

거인의 포효가 천둥처럼 울려 퍼졌다. 뱀처럼 음산하게 퍼져가던 죽음의 안개가 거센 폭풍을 마주하며 위태롭게 흔들렸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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