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7화
본인은 이만하면 어디 가서도 주눅들지 않는 얼굴이라고 떠들어대지만, 어떻게 봐도 평균 정도라고 생각했던 얼굴이 지금은 보고 있기가 힘들 정도로 망가져 있었다.
‘그러게 내 말을 들으셨어야지.’
도대체가 말을 들어 먹지를 않는다. 칼밥 먹는 인간들의 공통점일지도 모른다. 남의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듣다가 결국 화를 당하는 꼴이 말이다.
뭐…그래도 원했던 바는 확실하게 이뤘으니 저 꼴이 되어서도 그리 억울하지는 않을 터였다. 그의 소식을 들은 군사들의 사기가 상당히 올라가 있었으니. 그들은 작은 주인의 쾌유를 위해 기도하거나, 그의 이름을 외치며 무기를 들어올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이냐는 말이지.’
그럴 일은 없어야 하겠지만, 만약 회복하지 못하고 이대로 죽어버린다면 그들의 마음을 얻었다 한들 어디에 쓸 것인가. 모든 것은 살아있어야 의미가 있는 것이다.
“…….”
거무죽죽하게 변한 사제와 의사들의 얼굴을 다시 일견했다. 분노와 두려움이 뒤섞인 얼굴이다. 전자야 별것도 아닌 어린 놈이 자신들을 억압했으니 당연히 역정이 난 것이겠고, 후자는…혹시나 일이 잘못됐을 때 자신들에게 돌아올 추궁에 생각이 닿은 것이겠지.
‘그래. 이게 맞아.’
저들이 얼간이들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저들에게는 공자를 치료할 능력이 없다는 것. 저들이 하는 행위는 그저 억지로 숨을 붙들어 놓는 정도다. 그마저도 완전히 붙드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놓아 보내고 있다는 것이 더 문제고.
이건 치료가 아니다. 그저 무기력하게 꿇어 앉아 신의 자비, 혹은 은혜를 기대하며 기도나 하고 있는 꼴이지. 로우렌은 그 따위 불확실성에 기대고 싶지 않았다. 그는 신에게 손을 뻗는 것은 최후의 최후에, 다 포기한 상황에서나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 전까지는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해야 한다. 그것이 설령 무모하거나, 의미 없게 느껴지는 일일지라도.
다시 한번 마음을 굳힌 로우렌이 돌아보지도 않은 채 입을 열었다.
“반대는 하지 않겠지?”
“…….”
로우렌의 뒤편에 다가온 그라모트가 굳게 입을 다물었다.
동생이 난동을 부리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뒤늦게 달려온 그는 공자의 상태를 제 눈으로 확인하고는 머리가 복잡해졌다.
보리스 공자의 상태는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훨씬 악화되어 있었다. 의술에는 문외한인 그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절대안정이 필요하다고 하여 경계병을 세워 두기만 했을 뿐, 치료실에는 들어가지도 않은 채 마음만 졸이며 기다렸다. 그런데 지금 확인한 결과는 저렇다.
동생이 왜 이 난리를 피웠는지 알 것 같았다. 저들에게 계속 맡겨두었다가는 오늘 죽을 것을 내일 죽는 정도로 미루는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터.
“어쩔 셈이냐.”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봐야지.”
그라모트가 고개를 저었다.
“그것으로는 부족해. 나는 설득할 수 있어도, 저들은 설득하지 못할 거다.”
그 말에 로우렌의 시선이 그라모트의 뒤쪽으로 향했다. 일반적인 병사들과는 확연히 차이가 나는 무장을 한 십 수 명의 병사들이 차가운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성주 직속 친위대. 크렘보르의 후계자가 빈사 상태에 빠졌으니 저들의 눈에 살기가 도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술사 나짐.”
“음?”
“그자가 연구하고 있는 것이 있어. 난 거기에 한 번 걸어볼 생각이야. 어차피…이대로는 답이 없으니까.”
나직하지만 충분히 힘이 실린 목소리였다. 그라모트의 뒤쪽에서 날 선 시선을 보내는 이들도 충분히 들을 수 있을 만큼.
“술사에게 뭘 어쩌겠다는 말인가.”
이 정도면 알아먹을 줄 알았다. 비록 공식적으로 맡고 있는 관직은 그리 대단치 않지만 그래도 보리스 공자의 측근으로서, 그 할렌의 아들로서 나름대로 이름값이 있는 그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제아무리 콧대 높은 친위대라고 해도 간혹 의견이 부딪칠 일이 있으면 대부분은 그의 체면을 생각해주곤 했다.
그런데 저 심심하게 생긴 친위대 병사는 그럴 생각이 없는 듯했다. 아니, 병사가 맞는 건가? 행색은 일반 친위대 병사들과 다를 바가 없는데 표정과 태도 같은 것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지금의 목소리 역시 지극히 사무적이고 건조했다. 이쪽의 배경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이봐.”
평소 같았으면 아무리 불쾌한 일이 있더라도 머릿속으로 먼저 감정을 추슬렀을 테지만, 지금은 그러기가 힘들었다.
“눈이 있으면 보게. 저자들에게 공자님의 치료를 더 맡긴다고 해도 달라질 것은 없어. 그렇다면 공자님이 아직 살아 계실 때 뭐라도 해봐야 하지 않겠나? 그리고 자네가 아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공자님이 이대로 돌아가시면 가장 곤란한 사람 중 한 명이야. 절대 공자님이 이대로 돌아가시게 두지 않아.”
“…….”
“시간이 없어. 그러니 당장 문제될 것이 없다면 좀 비켜주겠나? 어차피 자네들도 계속 공자님을 지킬 것 아닌가. 내가 허튼 짓을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 그때 손을 쓰던지 말던지 마음대로 하고.”
제대로 설득이 됐는지 어쨌는지, 무뚝뚝하게 서 있던 친위대원이 말없이 길을 열었다.
“고맙군.”
퉁명스레 쏘아붙인 로우렌이 대기하고 있던 병사들에게 손짓했다.
* * *
“이게…….”
술사 나짐의 눈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로우렌이 이해한다는 듯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네.” “불운한 사고였지.”
“어…그래서, 제게 원하시는 바가 혹시.”
술사는 기본적으로 멍청할 수가 없다. 세상과 세상을 구성하는 온갖 신비를 머리에 담아야 하는 만큼 어리석은 술사라는 것은 뜨겁지 않은 불만큼이나 말이 되지 않는, 애초에 성립 자체가 안 되는 말이다.
그럼에도 나짐이 이렇게 모자란 모습을 보이는 것은 그만큼 크게 당황했기 때문이었다. 무리도 아니지 않은가. 조용하던 연구실에 갑자기 무장한 인원 십 수 명이 흉흉한 기세를 풍기며 들이닥치면 술사가 아니라 술사 할아비라도 놀랄 수밖에 없을 터였다.
“공자님의 이야기는 들었겠지.”
“…물론입니다. 이곳에 있으면서도 바깥의 소식에는 계속 귀를 열어두었으니까요.”
“그래. 불운한 사고였지. 솔롬의 솜씨 좋은 사제와 의사들이 모두 달려들어서 며칠 밤을 새웠네만…안타깝게도 소용이 없더군. 공자님의 상태만 더 나빠졌을 뿐.”
“…….”
“이제 내가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알겠지.”
“하지만, 아직 연구가 끝나지 않았습니다. 설령 다 끝났다고 해도 무턱대고 공자님에게 시도해보는 것은…….”
“이보게.”
로우렌의 두 손이 나짐의 양 어깨를 붙들었다. 로우렌의 차갑게 번들거리는 두 눈이 나짐의 눈과 마주쳤다.
“그런 것은 나도 아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다른 방법이 없어. 있어도 나는 떠오르지 않는군. 자네는 알고 있나? 그럼 말해주게. 타당하다 싶으면 내 따르지.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잠자코 따라주게.”
나짐이 마른침을 꿀떡 삼켰다. 상대는 이미 결심을 굳혔다. 지금 여기서 무슨 말을 한들 그는 듣지 않을 것이다. 만약 여기서 더 안 된다고 버티면 저 뒤에 있는 자들이 나설지도 모르지.
“하아.”
이 순간. 나짐은 보리스 크렘보르와 가까워진 것을 후회했다. 밝게 빛나는 앞날이 기다리고 있으리라 기대하며 손을 잡았건만, 이런 곤경에 맞닥뜨리게 되다니.
“너무 걱정 말게. 이미 이론적으로는 충분히 연구가 진행됐다고 하지 않았나?”
그건 맞다. 이론적인 연구는 충분히 진행됐다. 애초에 유해의 힘이 워낙 확실했기에 사실 연구라고 할 것도 없었다. 나짐이 한 일이라고는 유해의 힘을 확인하고 혹 부작용 같은 것이 일어나지는 않는지 면밀히 살펴본 것뿐이었다.
유해의 힘은 확실하다. 몇몇 실험에서는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니 상태가 좋지 않다는 보리스 공자에게도 효과는 있을 터였다. 그런데 문제는, 아직까지 유해의 힘을 사람에게 적용시켜본 적은 없다는 거였다. 머리는 아닐 거라고 하지만, 혹시 모르는 일 아닌가. 혹시라도 심각한 부작용 같은 것이 일어난다면?
‘별 수 없나.’
나중 일이 걱정된다고 거절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말은 부드럽지만 목소리나 기색은 전혀 그렇지 않은 로우렌도 그렇고, 그의 뒤에 있는 무장병들도 그렇고. 여기서 거부라는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알겠습니다. 그럼.”
“걱정 말게. 공자님께서 쾌차하시면 자네의 공이 가장 커. 마땅히 포상이 따르겠지.”
“예에.”
오늘이 오기 전에 들었다면 정말 가슴 뛰는 말이었을 텐데, 지금은 아무런 감흥도 없었다. 포상도 목이 붙어 있어야 의미가 있는 것 아니겠는가.
돌아서는 나짐의 발걸음이 무거웠다.
* * *
피아가 구분이 되지 않는 복잡한 전장에서 가장 중요한 건 내가 살아남는 것이고, 그 다음은 아군을 죽이지 않는 것이다. 적을 죽이는 것은 그 다음의 문제다. 내가 죽지 않고 아군이 죽지 않아야 적을 상대할 수 있지 않겠는가? 내 검이 동료의 목을 자르고, 동료의 도끼가 내 어깨를 찍는다면 그것만큼 비극적인 일이 또 어디 있을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광기가 가득한 전장에서는 이성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다. 그렇기에 전장의 한복판에서도 지휘관의 목소리를 듣고, 그대로 따를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훌륭한 군인이요 군대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간단해. 사람이 아닌 것들은 모두 죽이면 된다.”
그런 면에서, 이 전투는 상당히 쉬웠다. 일단 한눈에 적이 누구인지 구분이 된다는 점에서 말이다.
내려진 명령 또한 명쾌하다. 사람이 아닌 것은 다 적이라니. 이 이상 간단할 수는 없다.
와아아아-!
물론 흉포한 괴물의 군세에 제 발로 달려들기는 쉽지 않다. 본능적인 두려움이 정신을 갉아먹는 것이 당연하다. 만약 그들에게 믿는 구석이 없었다면 타라냐드의, 멕시스의 병사들은 지금처럼 호쾌하게 함성을 내지르며 달려나가지 못했을 터였다.
“줄카 전하께서 함께 하신다!”
저곳에 그가 있다.
전설적인 이름.
제국의 군주.
그들이, 그들의 아비가, 할아비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제국을 수호하며 제국의 적들을 무찔렀던 초월자.
그와 함께 적에 맞선다는 것. 그 사실 자체만으로도 병사들은 무한한 용기와 힘을 얻었다. 설령 이 전투에서 목숨을 잃는다고 해도 신의 왕국으로 올라갈 수 있으리라는 맹목적인 믿음이 그들의 마음을 돌처럼 단단하게 굳혀주었다.
만약 지금부터 맞서야 하는 적이, 저 괴물의 군세가 누구의 것인지 그들이 알았다면 이야기는 상당히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자이드라 멕시스는 병사들에게 그것까지 알려주지는 않았다. 일개미들은 저곳에 꿀이 있다는 것만 알면 된다. 가는 도중에 뭐가 도사리고 있는지, 꿀이 누구의 것인지는 알 필요 없다.
“춥군.”
모피 담요를 옷처럼 두르고 있음에도 몸이 덜덜 떨렸다. 그러자 호위 무관이 즉시 자그마한 화로를 가져왔다.
자그마한 언덕 위. 맹렬히 달려나가는 군사들을 내려다보며, 자이드라 멕시스는 옅은 입김을 뱉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