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6화
솔롬을 포위한 괴물들이 본격적으로 성벽을 넘어 들이닥쳤다. 그 모습이 마치 작은 구멍으로 흘러 들어가는 물결을 보는 듯했다.
줄카와 용아가 맹위를 떨치고 있는 북쪽을 제외한 나머지 전장은 일방적이었다. 아간투스베록이 직접 도시로 진입하면서 그런 흐름은 더욱 가속화됐다.
콰직!
검붉은 거검이 괴물의 머리를 갈랐다. 어지간한 사람은 그냥 드는 것도 힘겨울 것 같은 거대한 검이 살과 뼈를 예리하게 갈라버리는 광경은 섬뜩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아름다웠다. 천부적인 자질을 지닌 이가 평생 동안 재주를 갈고 닦아야 간신히 이를 수 있을까 싶은 경지가 거검이 움직이는 매 순간마다 엿보였다.
부웅-!
거검이 허공을 한 번 그으니 검신에 덕지덕지 달라 붙어있던, 일부는 반쯤 굳어 있던 핏물이 모두 떨어져 나갔다.
검이 다시 본래의 색을 되찾자, 줄카는 다시 기계적인 살육을 이어갔다. 사나운 바람이 일면 어김없이 살점과 핏물이 튀었다.
그 어떤 거대하고 사나운 괴물도 절대 그에게 먼저 덤벼들지 않았다. 오히려 주춤거리거나 도망치듯 거리를 벌리기만 했다. 하지만 줄카는 그의 눈에 띄는 모든 괴물들에게 달려들어 철저히 도륙했다.
이렇게까지 생각없이 마음껏 날뛴 것이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개운한 마음은 없었다. 야성이 온전한 것도 아니고, 겁에 질려 이리저리 치이기만 할 뿐인 괴물들은 제대로 된 적이라 할 수 없다. 고작해야 움직이는 허수아비 정도일까. 뭐, 허수아비치고는 조금 질기긴 하다만.
그런데 어느 순간 이 지저분한 것들의 몸부림이 거세졌다. 저 아래 쪽에서 엉덩이 무거운 놈의 기척이 선명해짐과 동시였다.
[여기까지군.]
아무런 신호도 보내지 않았지만, 적당히 흩어져서 전투에 열중하던 붉은 눈의 전사들이 조용히 모여들었다. 개중에는 투구의 안면 가리개까지 걷어 올린 이들도 있었다. 자그마한 돌이 솟아난 것처럼 우둘투둘한 그들의 피부는 어떻게 봐도 정상적인 사람 같지가 않았다.
눈도 눈이지만, 이런 독특한 외관 때문에 어지간해서는 모습을 감추는 그들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곳에서는 달랐다. 괴물들만 가득한 전장의 한복판이라서가 아니라, 진작에 줄카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언질을 주었기 때문이다.
“카니악 부…대장은 아직이군요.”
[멀쩡하다.]
복잡하고 지저분하게 뒤엉킨 판이긴 하지만 거리가 가까운 만큼 카니악과 그와 함께 움직이는 전사들의 존재는 뚜렷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은 거의 멀쩡했으며, 숨을 돌리면서 때를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그리 갈급하지 않은 듯하군.]
그의 전사들과 마찬가지로 붉은, 그러나 훨씬 더 찬란하게 빛나는 두 눈이 저 먼 곳 어딘가를 향했다.
* * *
주름진 얼굴이 전장의 바람을 맞으며 부들부들 떨렸다. 얼굴만 그런 것이 아니라 그의 몸 전체가 그랬다. 이 정도의, 한기라고 할 수도 없는 것에도 이렇게 예민하게 굴 정도로 그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 사실 이곳까지, 어떻게든 시간을 맞춰 올 수 있었던 것도 기적 같은 일이었다.
‘아니. 기적 따위가 아니다.’
자연스레 머릿속에 떠올린 생각을 즉각 부정한다. 기적이라고? 그렇게 속 편한 말로 넘기기에는 너무 억울하다. 이곳까지 올 수 있었던 건 더 없는 간절함과 절박함 때문이다.
‘그 모자란 놈들로는 안 돼.’
아집도, 노욕도 아니다. 확신이다. 가문은 자신이 필요하다. 아직도 말이다.
“하아. 하아.”
숨이 차다. 달리지도 않는 말 위에 엉덩이만 붙이고 있는데도 그랬다. 몸이 가볍게 흔들릴 때마다 세상이 흔들리는 듯했다.
‘내가 아니면 안 돼.’
이른 나이에 가주 자리를 이었다. 다 자라지도 않은 어깨에 짊어진 무게를 견디며, 그 어떤 선조보다도 더 오랫동안 가문을 이끌었다. 그 세월이 대단히 훌륭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래도 부족하지는 않았다고 자부했다.
위험한 시절이다. 짧지 않은 가문의 역사를 통틀어도 이토록 위태로운 시절이 있었던가 싶을 정도다. 수백 년을 군림해왔으며, 영원토록 그러할 거라 믿었던 황제가 사라지고 그 이름만 이었을 뿐인, 한참 부족한 작자들이 제위를 차지하겠다 흉험한 전쟁을 벌이고 있다.
사실 전쟁은 그리 큰 문제가 아니다. 바람에 휩쓸리는 것은 대개 작고 약한 조약돌과 들풀들이다. 거암과 거목들은 어지간해서는 위태로워지는 경우가 없다.
오히려 문제는 전후다. 승자가 됐건 패자가 됐건, 전후의 처세가 향후 가문의 100년 미래를 좌우할 것은 너무도 자명하다. 하지만 그 처세라는 것은 칼날 위에 서는 것과 같아, 한 번만 실수해도 파국을 맞기 십상.
그 위태로운 줄타기를 자식놈들에게 맡길 수 있을까?
흥하기는 어려우나 망하기는 쉽다. 지금껏 수 없는 피와 노력으로 지켜낸 가문이 송두리째 무너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니, 그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여기까지 왔다.
“이제야…보이는구나.”
크다고 하기에도, 작다고 하기에도 애매한 도시. 불그스름한 폭풍이 그 도시를 집어삼킬 것처럼 매섭게 몰아치고 있었다.
“각하. 저건…정말로.”
“그래.”
자기 나름대로는 표정관리에 힘쓰는 듯하지만, 그의 예리한 눈에는 그 안쓰러운 노력마저 훤히 보였다.
주저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두려움도 조금 보인다. 이 녀석에게서는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한 적 없었던 생소한 모습들이 보이니 조금은 재미있기도 했다.
‘무리도 아니지.’
타박할 필요는 없다. 저런 광경을 보고 전의를 드러내는 자가 있다면 그건 용감한 것을 넘어 정신에 뭔가 문제가 있으리라 진지하게 의심해봐야 할 것이다.
구워어어어-!
몰아치는 붉은 폭풍. 폭풍에 휩쓸리는 수천, 수만 마리는 되어 보이는 이질적인 생명체들. 괴물이라 하기에 부족함이 없지만, 여기까지 오면서도 꽤나 보았던 괴물들과는 또 달랐다.
이전에 보았던 것들이 제멋대로 날뛰는 야수의 느낌이었다면, 저것들은 누가 봐도 군대, 내지는 확실하게 목줄이 잡힌 짐승들 같았다. 그리고 그 목줄의 주인이 누구인지는…이미 알고 있었다.
“두려운가?”
“…두렵습니다. 두렵지 않다면 거짓이겠지요. 부끄럽습니다만, 차라리 몰랐다면 더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까지 듭니다.”
“이해하네.”
누가 그렇지 않을까. 지금부터 상대해야 할 적은 어떤 이들에게는 신이라고까지 불리는 존재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이쪽에도 그런 존재가 있다는 것이지만.
“역시 병사들은 모르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생각했기에 아랫것들에게는 알리지 않았다. 진실을 아는 이는 몇 되지 않는다. 그의 측근이라 할 수 있는 이들 몇몇뿐이니.
“전투는 맡기겠네.”
“맡겨주십시오. 반드시 실망시켜드리지 않겠습니다.”
잠시 후. 사내가 앞으로 나아갔다. 부관에게서 뿔나팔을 받아 든 그는 두어 차례 길게 나팔을 불고는 철로 된 가면으로 얼굴을 가렸다.
“자! 가자! 이것은 성전이다!”
멕시스의 깃발을 든 군대가 장엄한 고동과 함께 천천히 발걸음을 내디였다.
* * *
타라냐드 군의 참전은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 자이드라 멕시스의 수명이 끄트머리에 다다랐고, 연명을 갈구하던 그는 기어이 줄카에게까지 손을 내밀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도 모른 채로 용의 피를 얻고자 한 것이다.
어리석다고 생각지는 않았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모든 생명의 본성이며, 그걸 극복하지 못했다고 해서 비웃음을 살 이유는 없다.
어쨌거나, 용의 피를 위해 자이드라 멕시스는 그의 군대를 거느리고 이 동쪽 땅까지 왔다.
[참으로 적절한 순간에 나타났군.]
이가로프는 그렇게 말했지만 군터는 생각이 달랐다.
지금 나타난 것이 아니다. 이미 가까운 거리에 도착해 있었을 것이다. 먼저 자리를 잡은 채 신호를 기다리거나, 모습을 드러낼 적절한 순간을 가늠하고 있었던 것이겠지.
[반격의 시간인가.]
[아직이다.]
모자라다. 정확히 셈을 한 것은 아니나 느낌이 그랬다. 아직은 부족하다.
[장군. 그대의 견해를 존중하지만 이러다가는 아무것도 남지 않을 거다.]
아간투스베록의 괴물들은 솔롬의 외곽을 철저하게 무너뜨렸다. 아마 의도한 것은 아닐 테지만 자연스레 그리 되었고, 되고 있다. 모든 것을 태우는 불꽃처럼, 그것들은 보이는 모든 것을 파괴하며 시시각각 안쪽으로 밀고 들어오고 있었다
이가로프의 말처럼, 이대로라면 도시 전체가 파괴의 물결에 휩쓸리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이다.
[감정적이군.]
[물론 그렇지! 갇혀 있었을 때도, 그대에 의해 풀려난 이후로도 줄곧 이 순간만을 고대해왔네. 감정적이지 않을 수가 없지! 우리의 원수가…우리의 적이 바로 저기에 있는데! 장군. 그대는 물론 이해하겠지.]
당연히 이해한다. 아니, 이해하는 것과는 조금 다르다. 이가로프의 감정이, 그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져 오니 이해보다는 완전한 공감에 더 가까울 것이다.
[그래. 그렇다면 원하는 대로 해라.]
[그게 무슨 말이지?]
[이해했을 텐데.]
군터가 감옥의 문을 열었다. 이가로프와 그의 수하들을 가두고 있던 감옥의 문. 오직 그만이 열고 닫을 수 있는 영혼의 감옥이 그 문을 활짝 열었다. 이가로프는 그것을 곧장 감지했고, 곧 전율했다.
이유는 묻지 않았다. 아무려면 어떠랴. 방금 말했듯, 그는 이 순간만을 위해 참고 기다려왔다.
[하하하! 하-하하하하!]
자유를 얻은 영혼이 세상으로 뛰쳐나왔다. 흐릿한 기수의 형체가 계속해서 불어났다. 그 선두에는 뒤따르는 기수들보다 훨씬 뚜렷한 영혼이 있었다.
[장군.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다! 비록 우리 모두가 모두 스러져 사라진다고 해도 말이야.]
[은혜 같은 것은 없다. 서로 필요에 의해 협력했을 뿐이니.]
[그런가? 그러면 그렇다고 해두지. 하하하!]
기마라고 해도 실상은 그저 영혼이 부유하는 것뿐. 말이니 기수니 하는 것은 그저 그들이 구현해낸 이거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렇다면 뭐 어떠랴. 적어도 눈으로 보이는 광경은 제법 그럴싸했다.
[가자! 그토록 고대하던 순간이 마침내 도래했구나!]
이가로프와 그의 수하들이 허공을 질주했다.
* * *
로우렌은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몰골로 비틀대며 나온 의사를 붙들었다.
의사라고 해도 그보다 나이를 배는 더 먹은 데다, 높으신 분들의 주치의도 겸하는지라 어지간한 귀족 이상의 대우를 받는 자였다. 조금 전까지는 로우렌도 형식적으로나마 존대를 했었다.
“우리 솔직해지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서늘한 두 눈은 이미 이런저런 것들을 따질 생각이 없어 보였다.
“차도가 있기는 한 건가? 아니.”
“그…일단은.”
“확실하게 말해.”
로우렌이 의사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여차하면 칼이라도 빼들 것 같은 흉흉한 기세에 피로에 절은 의사가 즉각 눈을 내리깔았다.
“다시 일어나실 수는 있는 건가?”
“지금으로서는 그 무엇도 확신할 수 없습니다. 일단 저희는 최선을………”
“…집어치워.”
로우렌이 덜덜 떠는 의사를 거칠게 밀어 넘어뜨렸다.
그는 뒤편에 서 있던 병사들과 함께 닫힌 문을 열고 들어갔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공자님은 지금 안정을……!”
안에서 보리스를 돌보던 사제와 의사들이 언성을 높였으나 로우렌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다들 수고 많으셨소. 지금부터 공자님은 내가 모실 테니 그대들은 나가서 각자 일들 보시오.”
“그게 무…….”
“가시오. 당장. 더는 내 인내심을 시험하지 마시고.”
로우렌의 시선이 시체처럼 누워 있는 보리스에게 닿았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