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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1005화 (1,005/1,064)

1005화

저들이 과연 공자를 치료할 수 있을까? 자신 없어 보이는 얼굴만 봐도 비관적인 생각이 고개를 든다. 하지만 저들이 치료할 수 없다면 이 도시의 누가 공자를 치료할 수 있겠는가. 일단은 기도를 하든, 눈을 감든, 참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아무튼…그대들의 덕이다.”

로우렌이 몸을 돌렸다. 그보다 몇 걸음 뒤. 우두커니 서서 기다리고 있던 두 사내. 그들이 공자를 구했다. 만약 그들이 아니었다면 공자는 지금 저기 누워있지도 못했을 터.

“아닙니다. 저는…한 일이 없습니다.”

로센이라고 했다. 교단에서 양성한 술사 비슷한 무리 중 하나. 나름 특별한 재주를 지닌 자들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생각보다 쓸 만한 자인 듯했다. 그의 말처럼 공자를 구하는 데 별로 도움은 되지 않았으나, 혼자서 괴물 여러 마리를 그 특유의 기이한 능력으로 어렵지 않게 처리했다고 했으니.

“…….”

그래. 로센이라는 자는 공자를 구하는 데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공자에게 달려든 그, 무지막지한 괴물 놈을 쓰러뜨린 것은 이 로센이라는 자도, 그의 형 그라모트도 아닌 저기 입 꾹 다물고 있는 자였다. 어딘지 모르게 멍해 보이는 인상의 사내.

“그대. 이름은?”

“…렌돌.”

말이 짧군. 주변을 지키던 수하들 몇몇이 표정관리를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로우렌은 개의치 않았다. 성주 직속 친위대. 거기에 그만한 실력까지 지녔다면 모가지가 뻣뻣할 만도 하다. 그렇다고 해서 불쾌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내색할 정도는 아니다.

“그래. 렌돌. 마땅히 그대의 공을 치하해야겠지만, 보다시피 공자님의 상황이 썩 좋지 못하시니 치하는 추후로 미루도록 하지. 공자님이 깨어나신 후에 직접 살피실 것이다.”

“…….”

“그럼, 두 사람 다 이만 물러가 쉬도록.”

“예.”

깍듯이 고개 숙이는 한 명과 그냥 돌아서는 한 명. 로우렌은 그들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제 형에게 말을 붙였다.

“자책하지 마시오.”

“공자님의 곁에 있었던 건 나다. 그런데 내 앞에서 공자님이 저리 되셨지.”

핏발 선 두 눈에 방향을 잃은 비통함과 분노가 가득하다. 그라모트는 로우렌을 노려보며 힘겹게 말을 이었다.

“자책하지 말라고? 너라면 그럴 수 있겠느냐?”

“…….”

그라모트가 휘청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보리스가 실려간 방향이었다. 어차피 치료 중에는 한 방에 들어가지도 못할 터. 그럼에도 그라모트는 보리스의 뒤를 따랐다. 한 방에 들어갈 수 없다면 그 문 앞이라도 지킬 기세였다.

‘정말…엉망진창이군.’

그나마 다행인 점을 하나 억지로 꼽자면, 보리스의 분투와 부상 소식이 알음알음 퍼졌다는 것이었다. 소식을 접한 이들은 크렘보르의 하나뿐인 후계자가 중상을 입었다는 사실에 걱정하면서도, 가문의 후계자가 마지막까지 후방을 지키기 위해 몸소 칼을 들었음에 위안과 용기를 얻었다. 제법 경력이 오래된 자들은 역시 피는 어디 가지 않는다고 속닥거리기도 했다.

‘당신은 당신 아버지와는 다르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누누이 당부하고 경고했음에도 고집을 꺾지 않더니, 결국은 이런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안타깝다 못해 원망스러울 지경이다.

‘그래도…털고 일어나면 이 또한 공자의 자산이 될 겁니다.’

그러니, 어떻게든 다시 일어나시길.

그를 위해서라면, 평생 거의 해본 적 없는 기도도 해줄 용의가 있었다.

* * *

“너뿐이다.”

새로운 몸을 얻은 할렌에게 곧장 임무를 맡겼다.

“녀석을 지켜다오.”

살라스가 없는 지금, 그가 가장 믿을 수 있는 수하는 역시 할렌이었다. 아직 새로운 몸에 제대로 적응했는지 어떤지도 모르는 할렌이었으나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역시 이런 일을 맡길 수 있는 이는 할렌뿐이었다.

그래. 그게 최선이었다. 그가 직접 옆에 붙어있을 수는 없었기에 가장 믿을 수 있는 할렌에게 호위를 맡겼다.

하지만 결국 이렇게 되었다. 죽지는 았았으나 의식불명. 회복조차 장담할 수 없는 상태.

[유감이군.]

유감?

나름대로는 위로를 하려고 한 말이겠지만, 글쎄.

전장에서는 온갖 예상치 못한 일들이 종종 벌어지곤 한다. 그런 면에서 보리스에게 닥친 일도 반 정도는 사고라고 할 만하다. 불운한 사고.

누구도 등 떠밀지 않았다. 보리스가 후방에 남아 퇴로를 지켰던 것은 녀석 스스로의 결정이었다. 그렇다면 녀석도, 이렇게 될 가능성에 대해 조금이라도 생각은 했을 것이다.

그러니 유감이라고 할 것도 없다. 그저, 조금 운이 좋지 않았을 뿐.

[보러 가지는 않나?]

‘그래.’

이미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있다. 솔롬 내의 솜씨 좋은 사제와 의사들이 모두 모여서 녀석을 돌보고 있으니 괜히 얼굴이나 보겠다며 기웃거릴 이유는 없다.

[냉정하군.]

냉정이라. 흔들리지 않는 이성은 종종 그렇게 혼동되곤 하는 듯하다. 군터는 굳이 이가로프의 착각을 정정해주지 않았다.

‘시원하게 날뛰는군.’

북쪽. 줄카의 이야기다. 그는 아직도 용아들과 함께 괴물들의 틈바구니를 거침없이 휘젓고 있었다. 덕분에 북쪽의 적의 공세는 확실하게 무뎌졌다.

[하지만 한계는 명확해. 놈 역시 그걸 알고 있기에 별 반응을 하지 않는 거겠지.]

아간투스베록 역시 진즉 줄카의 출현을 눈치챘을 터. 그런데도 특별한 반응이 없다는 건, 이가로프의 말처럼 줄카의 활약이 언제까지 이어지지는 못하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줄카가 아무리 날뛴다고 해도 만이 넘는 괴물들을 홀로 감당하지는 못한다. 거기에 북쪽은 주춤했다고 해도 다른 세 방향의 적들은 별 문제없이 물밀 듯 몰려오고 있다.

[곧 북쪽을 제외한 외성 대부분이 넘어갈 것이야. 그래도 더 기다릴 참인가?]

‘그래.’

아직이다. 조금 더. 조금 더 기다린다. 놈들이 충분히 들어올 때까지.

시위는 이미 당겼다. 조급하게 놓았다가는 지금까지 들인 모든 것들이 수포로 돌아가리라. 그러지 않기 위해, 최적의 한 순간을 붙잡기 위해 군터는 계속해서 감각을 곤두세웠다.

* * *

구워어어어어-!

유난히 커다란 울음소리가 울려 퍼진다. 필시 거인왕이 옛 적수라고 표현했던 강대한 괴물일 터. 멀리서 봐도 범상치 않다는 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는데 그것으로도 부족했는지 이런 식으로 제 존재감을 과시한다.

레오니스 코누디스는 누더기가 된 성벽과 도시 일부를 보며 아쉬운 마음을 작은 한숨으로 털어냈다.

그런 그의 마음을 꿰뚫어보았는지, 머릿속에서 거친 조소가 울렸다.

[네 것이 되었어야 할 도시가 무너지고 있으니 아쉬운가보군.]

“예. 그렇습니다.”

어차피 초월자의 앞에서 얄팍한 연기 따위는 통하지 않는다. 레오니스 코누디스는 거인왕의 비웃음에 시원하게 인정했다.

그는 거인왕에게 자신의 것을 되찾아 달라고 했다. 거인왕은 그의 요청을 수락했고. 그런 면에서 보면 이 도시를 통째로 파괴해버릴 기세로 몰아치는 지금의 상황은 어찌 보면 약속 위반인 셈이다.

하지만 따질 생각은 없다. 뒷감당을 할 자신도 없을뿐더러, 진작에 한눈에 알아보았기 때문이다.

[완강하게 버티는 솜씨도 그렇지만, 아랫것들을 제대로 휘어잡고 있다. 이곳을 다스리는 놈은 분명 상당한 녀석이다. 그런 놈의 둥지라면 머리를 벤다고 해도 쉽게 떨어지지 않아.]

“무슨 말씀인지 압니다.”

거인왕의 뒤에서 모든 것을 지켜보았다. 처음 전투가 시작되던 순간부터 기어이 성문을 뚫고 들어가 지금에 이르기까지.

압도적인 전력차를 분명 실감했을 터인데, 그럼에도 적은 결코 겁먹거나 포기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몸과 마음이 모두 잘 단련된 군대라는 것을 멀찍이 지켜보면서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군대와 시민, 도시 전체를 동일하게 볼 수는 없다 해도…거인왕의 말대로다. 이 정도라면 머리만 바꾸는 정도로는 부족하다.

‘사실 이미 알고 있었다.’

짧은 시간이나마 이 도시에서 머물지 않았던가. 크렘보르 가문이 이곳에 뿌리내린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으나, 그들은 이곳에 튼튼한 기반을 마련했다. 그 기반이라는 것은 단순히 권력구조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그들은, 군터 크렘보르는 이 도시의 진정한 충성을 이끌어냈다.

[성가신 것들이지. 이런 놈들은 깔끔하게 쓸어버려야 한다. 네 몫은 다른 곳에서 챙겨주마.]

“예.”

내 몫이라.

이 순간이 오면 가슴이 뛸 줄 알았는데, 그렇지는 않았다. 숙원의 성취가 코앞까지 다가왔는데도 말이다.

‘어머니.’

기억이 존재하는 그 순간부터 그는 모친의 가르침 속에서 살아왔다. 모자 간의 애틋함 따위는 찾아볼 수 없는, 집념과 분노만이 가득했던 시간들. 그 속에서 그는 모친의 염원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써 성장했다.

그때는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지만,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우습기도 했다.

‘그자를 직접 봤을 때도 별다른 느낌은 없었다.’

그날. 그 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른다. 모친에게서 들은 이야기는 있지만, 그녀에게서 들은 그 이야기가 진실이라는 보장은 없다. 어렸을 때야 곧이곧대로 믿었어도 머리가 조금 굵어진 후에는 이런저런 의문이 들었다. 저주스러운 배신자라. 정말 그럴까?

‘몸이 늘어지니 별 생각이 다 드는군.’

우스울 뿐이다. 이제 와서 이런 생각 따위,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이제는 돌이킬 수 없다. 돌이킬 생각도 없다. 오직 이 순간만을 위해 이제껏 살아오지 않았던가. 모친으로부터 우악스럽게 심어진 복수심이라고 할지라도, 그것만이 지금까지 그의 삶을 이끌어온 이정표였다. 처음부터 하나뿐이었던 길인데, 이제 와서 멈추거나 돌아갈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의심도 망설임도 없다. 이 길의 끝을 볼 뿐이다.

[흐흐.]

연못의 정중앙에 커다란 돌이 떨어진다. 큼지막한 파장이 연못의 중앙에서부터 퍼져 나가 단번에 끄트머리까지 이른다. 끄트머리에 있던 레오니스 코누디스는 인상을 구기며 흔들리는 정신을 붙잡았다.

“무슨 일입니까?”

돌아오는 답은 없다. 네 발로 걷는 괴물 위. 거인왕의 시선은 저 먼 북쪽을 향했다.

[그래. 거기 있었군.]

북쪽. 고개를 빼고 눈에 힘을 줘서 보니, 저 멀리 불그스름한 무언가가 보였다. 심상치 않다는 것정도는 짐작하겠지만, 저게 정확히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아니.’

순간, 그는 일전에 거인왕이 흘리듯 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초월자에게도 적은 존재한다. 그리고 거인왕에게는 특히 이를 가는 적수가 하나 존재하지 않던가. 그는 그 적수와 마주하게 될 것을 짐작하고 있었고.

그리고 지금 보인 반응까지.

‘저곳에 그가 있는 거군.’

거인왕의 격한 반응이 단번에 이해가 갔다. 동시에 우려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초월자는 전지전능한 신이 아니다. 그랬다면 적 같은 것이 존재할 리 없다. 당장 거인왕만 해도 자신과 거래를 해야 하는 처지가 아닌가. 비록 그 주도권은 저쪽이 쥔 모양새라고 하지만 말이다.

[마음 같아서는 안전한 곳에 보관해두고 싶다만.]

“눈치껏 뒤에 빠져 있겠습니다.”

기세가 변했다. 레오니스 코누디스는 한층 더 몸을 낮췄다. 이제 거인왕에게서 조금 전과 같은 여유는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그 자리를 오싹할 정도의 투기가 채웠다. 어쩌면 그는 이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의 적수가 모습을 드러내는 이 순간을.

[아니. 그 정도로는 부족해.]

“예? 그게 무슨………”

말이 채 나가기도 전. 레오니스 코누디스는 자신의 몸이 붕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발버둥을 치려 했으나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내가 너를 어찌 믿겠느냐. 허무하게 죽어 버리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축축한 무언가가 어깨에서부터 시작해 온 몸을 뒤덮었다. 몸 전체가 얼어붙기라도 한 것처럼 옴짝달싹 할 수가 없었다.

[높이 날아라. 내가 명하기 전까지 내려오지 마라.]

아스라이 들려오는 날갯짓 소리. 점점 더 멀어지는 땅을 보며, 레오니스 코누디스는 자신이 무언가에 붙들려 날아오르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이런…….’

시야가 흐려졌다. 의식이 잠겨가는 것이 느껴졌다.

설마 독인가? 아니면 저주?

혀를 씹으려 했으나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는 흐릿한 점 하나가 된 거인왕을 마지막으로 눈에 담으며 떠올릴 수 있는 모든 저주를 퍼부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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