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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1004화 (1,004/1,064)

1004화

갑자기 땅이 흔들리고, 저 앞에서 흙더미가 비산했다.

‘빌어먹을.’

땅속에서 튀어나온 그것은 상당한 크기의 괴물이었다.

쿼어어억-!

놈과 눈이 마주쳤다. 착각이 아니다. 놈은 자신을 노려보고 있다.

놈이 뛰기 시작했다. 쿵! 쿵! 하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놈과의 거리가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놈이 자신을 노리고 있음은 명확하다.

“공자님!”

그라모트가 소리쳤다. 아마 달리기 시작했겠지. 하지만 늦다. 괴물은 너무 빨랐다. 사람의 뜀박질로 따라잡을 수 없는 속도를 내며 가까워지고 있다.

쿵! 쿵!

네 발. 앞발 두 개는 팔에 가까워 보이나, 뛰는 모양새가 통상적인 네발 생물들보다 더 자연스럽다. 정면에서 치이면 바위라도 박살이 날 듯했다. 과연 피할 수 있을까? 다행히 몸이 굳지는 않았다. 다만 누적된 피로 때문에 무거울 뿐.

‘나름 머리가 있는 건가.’

대장을 알아본 것인가. 아니면 본능인가. 뭐가 됐든 입 달린 것들은 위험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한 셈이다. 어쩌면 조금 늦었을지도 모르지만.

그극-

늘어뜨린 검 끝이 땅에 끌렸다.

몸을 날린다고 해도 곧장 따라붙을 테니 소용없다. 그렇다면 충돌하는 순간 흘려야 한다.

‘할 수 있을까.’

괴물 놈의 눈이 이상할 정도로 또렷하게 보였다. 어쩐지 잔뜩 화가 나 있는 것 같았다. 어째서? 아, 혹시 여기 널브러진 것들이 저놈 부하라도 되나? 괴물들에게도 그런 것이 있는 걸까?

쾅!

그런 것은 아닌 듯했다. 거대한 괴물은 달려오던 중 앞에 얼쩡거리던 입 없는 괴물을 성가시다는 듯 후려쳐 날려버렸다. 길바닥의 돌멩이를 걷어차듯이 자연스럽게.

‘하나. 둘.’

보리스는 속으로 남은 거리를 가늠했다. 앞발, 혹은 한 팔로 괴물 한 마리를 곤죽으로 만들어버렸다. 저 정도의 괴력이라면 빗겨 맞아도 치명상이다. 실수는 용납되지 않는다. 흘린다면 빈틈없이, 완벽해야 한다.

‘셋. 넷.’

지금.

마음 속으로 셈을 마친 보리스가 몸을 움직였다. 그의 거리 계산은 틀림이 없었다. 다만 한 가지, 그가 간과했던 것은.

콰앙-!

괴물이 전력으로 달려온다고 생각했으나,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 아직 둘이 남았다고 여겼으나, 괴물은 한 번의 도약으로 두 번의 셈을 없애버렸다.

보리스가 그에 반응하려 했을 때, 이미 괴물은 그의 바로 앞까지 날아와 있었다. 양쪽 앞 발을 활짝 펼친 채.

‘빌어…….’

모든 것이 느려졌다. 뒤편에서 들려오는 그라모트의 고함소리. 떨어져 내리는, 커다란 갈고리 같은 발톱.

느리지만 착실하게 다가오는 그것들에 비해, 날이 다 빠진 검은 어정쩡한 상태로 멈춰 있었다. 아니, 그렇게 보였다.

‘먹을…!’

그늘이 머리 위를 덮었다.

* * *

“소집령이 떨어졌습니다만…….”

“무시한다.”

“괜찮겠습니까?”

살라스는 우려를 표하는 수하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사람이 아니라 돌로 된 벽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완고한 태도.

“황자가 아닌 이상 누구도 우리에게 명할 수 없다.”

그들은 판니른의 군세이며 크렘보르의 군세. 그들은 처음 군터와 함께 이곳 전선으로 왔을 때부터 독립 작전권을 약속 받았다. 비록 군터가 솔롬으로 돌아가 있다고는 하나, 그 약속은 여전히 유효했다.

“저쪽도 황명 운운하고 있기는 합니다만.”

“말장난일 뿐. 황자에게서 직접 명령이 내려오지 않는 이상 우리는 움직이지 않는다.”

더는 이 전쟁에서 피 흘리지 않는다. 대세가 굳어져가는 모양새였음에도 살라스의 결정은 변하지 않았다. 남들은 어떻게든 한 발이라도 더 깊이 담구려 눈이 뒤집혀 있었음에도,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먼저 솔롬으로 돌아간 그의 주인에게서 그리 명령을 받았기 때문이다.

“저쪽도 이제 더는 여력이 없는 모양입니다.”

“그런 것 같군.”

제 아비의 뒤를 이은 황손, 무샤라트 트라소프는 제 아비에 비하면 여러모로 부족한 자인 듯했다. 아비의 죽음을 접하자마자 제 혈육들부터 쓸어버리는 과감함은 인상적이었으나 그 후 전쟁을 지휘하는 것을 보면, 제 아비와 여러 면에서 비교가 됐다. 승계 과정에서의 대대적인 숙청 때문에 인재들을 상당수 잃었기 때문일까? 고착화되는 것 같았던 전선은 이쪽이 밀어붙이기 시작하자 조금씩이나마 꾸준히 밀려갔다. 그나마 무샤라트 트라소프 본인이 나선 쪽은 나름대로 선전하고 있는 모양이지만, 다른 쪽이 힘을 못 쓰고 있으니 그쪽도 어쩔 수 없이 밀려날 수밖에 없을 터였다.

“이 전쟁도…이제는 끝이 보이는 것 같군요.”

끝이라.

‘글쎄.’

이 전쟁을 한 번의 큰 사냥이라고 한다면, 사냥이 끝난다고 해서 모든 다툼이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함께 사냥에 나선 이들만 수십, 수백이다.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모르지.

사냥이 끝나면 그 많은 이들이 저마다 제 몫을 요구할 것이다. 애초부터 그것만을 바라고 몰려든 이들이니 어떻게든 자기 몫을 더 많이 챙기려 안달을 할 터. 하지만 살코기의 양은 정해져 있으니, 누군가의 몫이 는다면 다른 누군가의 몫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제 욕심만 내세우며 목소리를 높이면 남는 것이야 파국 밖에 더 있겠나. 결국 또 다른 싸움의 시작일 뿐이다.

전쟁의 끝이 조금씩 보이는 것 같기도 한 지금. 생각 있는 이들은 앞으로 다가올 자명한 미래를 내다보고 있을 터. 그들 대부분은 간신히 하나가 된 제국이 또 한 번 내분으로 몸살을 앓지는 않을까, 벌써부터 걱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대부분에 속하지 않는, 살라스 같은 이도 있었다. 그는 다가올 미래 따위에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가 바라는 것은 이 전쟁의 조속한 마무리와 귀환 명령이었다. 아무 의미 없이 이곳에서 시간만 죽이고 있는 것은, 그의 입장에서는 상당한 고역이었다.

‘답답하군.’

서쪽의 전쟁 때문에 동쪽에서부터 먼 길을 왔건만, 이쪽의 상황이 괜찮아지니 이번에는 동쪽의 정세가 심상치 않다. 그런데 돌아갈 수가 없다. 옥에 갇힌 죄수가 된 것만 같다.

“어디 가십니까?”

“바람이나 쐬려 한다.”

바깥에 나와 찬공기를 마셔도 답답한 속은 진정되지 않았다. 긴 한숨을 내쉬는 살라스의 눈은 동쪽을 향했다.

* * *

어떤 것에 집중한다는 것은 몰두한다는 것. 달리 말하면 집중하는 그 한 가지를 제외한 모든 것에 눈을 감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눈앞의 적에 집중한다는 것은 용사의 자질이라고 할 수 있으나, 지휘관의 자질이라고는 할 수 없다. 지휘관은 눈 앞의 적이 아니라 전장의 상황에 집중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소수의, 자질과 경험을 두루 갖춘 이들은 양립할 수 없을 것 같은 그 두 가지를 모두 해낼 수 있다. 하지만 그럴 수 있다고 한들, 두 가지를 한번에 해내는 것보다는 한 가지에만 집중할 때 더 큰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 당연했다.

군터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적의 목을 베고, 심장을 찌르면서도 전장의 상황을 상공에서 내려다보는 것처럼 넓게 살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그 역시도 한 가지에 집중할 때 더 편안함을 느꼈다.

[북쪽의 상황을 모르겠군. 아무리 용이라고 해도 병력이 받쳐주지 않으면 한계가 있을 것인데.]

이가로프는 군터의 눈으로 세상을 보았으나, 그의 모든 감각을 공유하지는 못했다. 군터라는 그릇에 이가로프라는 물이 담겼다고 해서 물이 그릇이 될 수는 없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게다가 심지어, 이가로프라는 물은 군터라는 그릇을 가득 채우지조차 못했다.

때문에 이가로프는 군터의 감각을 온전히 느끼지 못했다. 이가로프는 북쪽의 상황을 알 수 없다 했지만, 군터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난데없이 일어난 폭풍 속, 맹렬히 내려오고 있는 줄카의 존재를 느낄 수 있었다.

이가로프의 생각이 틀린 것은 아니다. 확실히, 초월자라고 해도 전장에서는 그를 받쳐줄 병력이 필요하다. 아무리 초월자라고 한들 피와 살로 이루어진 몸뚱이를 지닌 존재인 이상 창칼이 박히면 상처 입는 것은 똑같다. 그런 면에서 줄카가 거느린 전력이라고는 용아가 고작이니 그가 전장에서 발휘할 수 있는 영향력은 한정적이다, 라고 생각할 수 있다. 용아가 제국 전체를 놓고 봐도 손꼽히는 정예라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그들의 머릿수는 그리 많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세상에 절대적인 것은 없다고 했던가. 그 말이 맞는지 틀린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전장에서는 통용되는 말이다. 줄카와 용아들은 북쪽의 적들을 말 그대로 갈라버리며 움직이고 있었다. 난잡하고 사납기만 한 군기가 그보다 사나우며, 그러면서도 예리한 기운에 흔들리고 있음이 느껴졌다.

이가로프는 틀리지 않았다. 단지 간과했을 뿐.

적은 일반적인 군대가 아니다. 아간투스베록이 그의 힘을 발휘해 억지로 뭉쳐 놓은 괴물 무리일 뿐.

그러나 단순히 뭉쳐 놓는 것과 그것을 통제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거인의 핏줄이 지닌 힘은 강력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수천, 수만 마리의 괴물들을 전부 통제할 정도는 되지 못했다. 그렇기에 아간투스베록은 괴물들을 솔롬까지 끌고 온 후에 놈들을 풀어놓았다. 그렇기에 앞뒤 가리지 않고 무식하게 들이받기만 하는 거다. 지휘를 받지 않으니까.

‘흔들리고 있다.’

줄카와 용아는 소수다. 괴물들의 머릿수에 비하면 한줌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 그런데 그 한줌에 수천 이상이 흔들린다. 두 말할 것도 없이 줄카 때문이다.

아간투스베록이 거인이라면 줄카는 용이다. 이가로프의 표현을 빌리자면 말이다.

저 괴물 놈들에게 있어 용보다는 거인이 더 위협적인 존재일지도 모르지만, 그렇다 해서 용이 만만한 상대는 아닐 것이다. 물론 아간투스베록이 북쪽에 있었다면 이야기가 달라졌을지도 모르지만, 그게 아니지 않은가. 줄카가 발하는 기세는 본능에 따라 움직이는 괴물들을 위축시키기에 충분해 보였다.

[저쪽은 여유가 있군.]

줄카와 용아들이 북쪽의 적을 섬멸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들의 활약 덕에 북쪽 적의 공세가 늦춰지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덕분에 북벽의 아군은 다른 곳에 비해 안정적으로 물러나는 중이다.

[남쪽도 나름 상황이 나쁘지 않은 것 같고. 장군의 준비 덕인가.]

이가로프의 아부 섞인 말은 흘려 듣더라도, 남쪽의 상황이 괜찮은 것은 사실이었다. 남쪽은 보리스가 맡았으니, 녀석이 분전하고 있는 것일까.

* * *

외성벽에서의 퇴각과 외곽 시가지에서의 시가전은 그럭저럭 당초 계획대로 흘러가는 듯했다. 성벽을 넘을 때만 해도 단숨에 솔롬을 밀어버릴 것 같았던 괴물들의 기세가 한층 줄어들었고, 반면 아군은 전력을 최대한 온존한 상태에서 다시 한 번 방어전을 준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사고는 예기치 못한 순간에 일어났다.

“이, 이건…….”

사제와 의사 십 수 명이 한 사람을 빙 둘러싸고 서서 식은땀을 흘렸다. 그라모트는 핏발 선 눈으로 그들을 노려보며 씹어 뱉듯이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반드시…치료해야 합니다. 반드시 말입니다. 알아들으시겠지요?”

이곳에 모인 사제와 의사들은 모두 경험 많은 이들. 온갖 환자를 봐온 그들이 그라모트의 사나운 목소리 따위에 위축될 리 없었다. 지금 그들의 안색이 푸르죽죽한 것은 오직 환자, 크렘보르의 공자의 상태가 한눈에 보기에도 심각했기 때문이었다.

“최, 최선을 다해보겠소.”

“최선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들은 더 답하지 않았다. 저들끼리 복잡한 이야기를 주고받더니 곧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라모트는 한 발 자국 물러나 서서 눈을 질끈 감았다.

“…….”

그리고 그 뒤에서, 로우렌이 그의 형제와 같이 핏발 선 눈을 한 채 우두커니 서 있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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