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3화
쾅! 콰쾅!
벼락이 치는가. 힐끗 창 쪽으로 시선을 던져보지만 보이는 것은 어둠뿐. 나직한 한숨과 함께 다시 고개를 돌리니 부들부들 떨고 있는 어린 수행 사제들이 보였다. 그런 그들을 고리눈을 뜨고 노려보는 지도 사제들.
신을 섬기는 이들에게 있어 무언가를 두려워한다는 것은, 대개의 경우 그 자체로 죄다. 주께서 굽어살펴 주심을 진실로 믿는다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저 어린 것들에게 무슨 잘못이 있다고.’
지도 사제들이 하는 일이라는 것이 원래 그런 것이기는 하지만, 이 난리판에 저러지 않는 것이 오히려 더 이상하지 않은가. 지금 고리눈을 뜨고 있는 자들만 해도 그렇다. 정녕 저들이 투철한 신심 덕에 두려움을 느끼지 못하고 있을까? 나이 지긋한 사제는 그렇지 않다고 확신했다. 왜냐하면 성직자로서 한평생을, 50년이 넘는 세월을 살아온 그조차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애당초 신심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믿음은 고결하나 완전하지 않다. 아니, 믿음은 완전할지 모르나 정작 사람은 완전하지 못하다. 그러니 사람의 믿음 역시 완전하지 못하다. 온갖 것에 흔들리고, 온갖 것에 뒤집힌다. 두려움은 사람을 좀먹는 가장 큰 어둠 중 하나이며, 그렇기에 두려움 앞에서 믿음의 불꽃은 종종 빛을 잃곤 한다.
‘성전 이전의 세상에 놓인 것 같군.’
주의 말씀에 따라 황제가 야만과 무질서가 만연한 세상에 전쟁을 선포했다. 그것이 성전이다. 거룩한 전쟁. 인간에게 빛을 가져온 전쟁.
성전이 있기 전의 세상은 끔찍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온갖 사악한 존재들이 난립하여 세상을 어지럽혔고, 땅 위에는 비통한 울음과 사악한 자들의 웃음만이 가득했다고.
사람의 손에 쓰이는 이야기들이 대개 그렇듯 과장과 비유적인 표현이 다소 포함된 것이겠지만 당시의 세상이 그리 살기 좋은 세상은 아니었던 것만은 분명했다. 인간에게, 약한 자들에게 있어서는 말이다.
교단의 역사는 곧 제국의 역사. 따라서 수행 사제들이 제국사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성전기(聖戰記)를 통째로 달달 외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늘의 빛마저 가리워진 밤에 짐승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지니 그것을 들은 자들이 저마다 다른 이름을 부르짖었다.’
수행 사제 때야 반쯤 졸면서도 읊을 수 있을 정도로 철저하게 외웠었지만, 그로부터 수십년이 지났다. 그렇게 열심히 외웠던 성전의 내용이 가물가물하다. 그래도 얼추 이런 내용이었을 것이다. 성스러운 군대의 도래 직전. 가장 어두운 곳에 대한 표현.
‘차이가 있다면 그때와 달리 빛이 아니라 어둠이 밀려온다는 거지.’
밤이 아직 충분히 깊지 않았는가. 저 멀리, 어쩌면 그리 멀지 않을지도 모르는 곳에서 들려오는 흉포한 괴성은 경험 많은 사제의 마음마저 뒤흔들었다.
성주는 아무런 설명도 해주지 않았다. 전투가 벌어질 것이며, 그 싸움은 쉽지 않은 싸움이 될 테니 미리 준비하라는 말만 했을 뿐.
그 어떤 대귀족보다 고압적인 행태.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성주 대리를 한번 겪었기 때문인지 다시 돌아온 성주의 방식이 퍽 낯설고 어렵게 느껴졌다.
‘준비라고 해봐야…….’
몸은 신전에 머물고 있어도 귀는 열어 두었다. 그렇기에 바깥이 어찌 돌아가는지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괴물들이 출몰하고 길이 막혔다. 도시가 고립됐다. 도시 밖 마을들에서는 피난민들이, 생존자들이 몰려들었다. 그러한 광경을 목도하면서 그가 떠올린 단어는 전쟁이었다.
물론 그들은 실제로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제국의 주인을 가리기 위한 전쟁 말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 전쟁이라는 것이, 그리 피부에 와 닿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후방이었기에 그런 것도 있지만, 그보다는 교단에 속한 몸이었기 때문이다. 황위를 위해 전력을 쏟아내는 황자들조차 감히 교단을 압박하지는 못했다. 기껏해야 지지를 표해주기를 요청했을 뿐이고, 교단은 오직 황제의 명만을 따른다는 명분 하에 그마저도 정중히 거절했다. 당연하지만 황자들은 아무런 불만도 표할 수 없었다. 설령 나중에 그들 중 하나가 황제가 된 후라도 보복 따위는 생각지도 못할 것이다. 그만큼 제국에서 교단의 권위는 절대적이다. 제국 신민들의 지지를 받고 있으며, 그들의 삶과 정신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쿵! 쿵!
유배지와 같은 벽지의 교구에서 하루하루 주의 부름을 기다리는 처지지만, 그럼에도 그 어떤 유력자도 성직자들에게 함부로 굴지 못했다. 비록 교단 내에서는 천덕꾸러기 신세라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교단 안에서의 일이다. 교단의 든든한 울타리는 천덕꾸러기들까지 분명히 포함하고 있었고, 외인들이 그들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을 허락지 않았다.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여전히, 교단의 위신은 그렇게 만들어지고 유지되어 왔다.
촌구석의 권력자라도 권력자는 권력자. 그들은 세상이 어찌 돌아가는지 정도는 알고 있었고, 그렇기에 성직자들에 대한 존중을 잊지 않았다.
콰앙!
수행 사제들의 어깨가 크게 들썩였다. 사나운 눈을 하고 있던 지도 사제들도 한순간 몸을 떨었다. 때마침 수행 사제들의 눈이 질끈 감긴 덕에 그 꼴사나운 모습을 들키지 않아 다행이었다. 그것을 그들 스스로도 느꼈는지, 지도 사제들의 눈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허허.’
두렵다. 하지만 내가 두려워하는 기색을 보인다면 저들은 더 두려워할 것이다. 지도 사제들도 그것을 알기에 수행 사제들의 앞에서 더 강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리라.
소싯적에는 전투 사제를 꿈꾸기도 했다. 후에 자신에게 몸 쓰는 재주가 없다시피 하다는 것을 깨달은 후로는 깔끔하게 단념했지만, 지금에 와서 다시 생각해보니 설령 전투 사제가 됐다 해도 제 구실을 힘들었겠다 싶었다. 울음소리만 듣고도 이렇게 가슴이 쪼그라드는데, 정면에서 대적한다면…….
‘주여.’
암흑의 시대가 재림한 것만 같은 밤. 흔들리는 불빛 앞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눈을 감고 평온함을 가장하는 것뿐이었다.
* * *
퍽!
검은 더 이상 괴물들을 깔끔하게 베지 못했다. 칼날의 이가 나가서 그런 것도 있었고, 검을 휘두르는 보리스의 힘이 부족한 탓도 있었다.
그래서 괴물의 머리를 내리치는 검은, 검보다는 차라리 도끼나 몽둥이에 가까워 보였다. 검에 찍힌 괴물의 우둘투둘한 머리가 단박에 으스러졌다.
“공자님!”
그라모트의 목소리. 녀석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안다. 잠시 뒤로 물러나 숨을 고르거나 하다못해 날이 다 나간 검이라도 바꾸라는 것일 터.
‘소용없어.’
점점 힘이 빠지고 있다. 이 상태로는 베는 것보다 후려치는 것이 더 편하다. 섬세한 힘 조절이나, 기교 같은 것을 부릴 만한 여유는 없다. 남은 힘을 쥐어짜는 것만 해도 충분히 벅차니.
“흡!”
흉측한 대가리를 들이미는 괴물. 보리스는 재빨리 몸을 뒤로 빼며 놈의 몸통을 걷어찼다. 그런데 힘이 부족하다 보니 걷어차는 것이 아니라 밀어내는 모양새가 되었다.
“으아압!”
보리스가 발로 놈을 밀어내는 사이, 그라모트가 재빨리 놈의 뒷목을 내려찍었다. 처음에 쥐고 있던 검은 어디로 내팽개쳤는지 그의 손에는 큼직한 도끼 한 자루가 들려 있었다.
“후우.”
잠깐 숨을 돌린 보리스가 눈앞에서 흐느적거리는 괴물의 몸뚱이를 신경질적으로 밀쳐냈다.
‘여기까지군.’
어느 순간부터 시간의 흐름을 잊은 탓에 얼마나 오래 이러고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처음에 비해 머릿수가 얼추 반 이상 줄은 데다, 살아남은 자들도 썩 상태가 좋지 않았다. 물론 여기에는 보리스 자신도 포함이었다.
더 이상은 못 버틴다. 지금부터는 정말 목숨을 내놔야 한다.
“마지막이다.”
“예?”
“한번 밀어낸 후에, 우리도 퇴각한다.”
이 칙칙한 골목에서 최후를 맞이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이곳에서 이를 악 물고 버틴 것도, 로우렌 녀석은 어찌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엄연히 앞을 내다본 결정이었다.
그 증거가 바로 여기 있지 않은가. 살아남은 병사들의 눈. 그 안에 담긴 굳건한 빛. 저 빛이야말로 충성과 신뢰의 증거다. 자신을 향한 그 눈빛들을 훑어보고 있으니 어쩐지 손아귀에 조금이나마 힘이 돌아오는 듯했다.
“나보다 앞서지 마라.”
멋스러운 한 마디 대신 명령 같지 않은 명령 한 마디만 툭 던지고, 보리스가 힘껏 앞으로 달려나갔다. 피로가 덕지덕지 묻은 와중에도 한껏 상기된 얼굴의 병사들이 곧장 그 뒤를 따랐다.
와아아-!
기세. 그것은 중요한 만큼이나 우스운 것. 어쩌다 사그라질지 모르고, 어쩌다 활활 타오를지 모른다. 그러나 지금. 귀족 같지 않은 귀족 공자와 그를 따르는 병사들은 한 몸이라도 된 것처럼 똘똘 뭉쳐 맹렬히, 두려움 없이 달려나갔다. 몸은 지쳤지만 그 어느 때보다 또렷하게 고양된 정신이 그들을 그 어느 때보다 힘 있게 달려나가게 했다.
콰직!
하나는 부수고, 하나는 흘려 보냈다. 처음과 달리 이런 방식이 자연스럽다. 자신이 처리하지 못하더라도 뒤따르는 누군가가 해주리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덕분에 보리스의 움직임은 오히려 힘이 남아있던 처음보다 더 여유로웠다.
“으아아아!”
입으로 뺄 힘도 아껴서 검을 휘둘러야 하건만,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냉철하게 이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생각은 이 순간 잠시 접어두었다. 지금은 이 기세를 조금이라도 더 강하게, 더 길게 이어가야 한다는 변명 아닌 변명에 수긍하며.
* * *
로센은 그가 맡은 구역을 적당히 지키다가 퇴각 신호가 떨어지기 무섭게 성벽을 내려왔다. 그는 해야 할 일을 소홀히 할 생각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너무 과하게 나설 생각도 없었다.
‘이 싸움은 짧게 끝나지 않는다.’
직감이었다. 여기서 힘을 빼 봐야 득 될 것은 전혀 없다는 확신.
겁쟁이처럼 굴 생각은 없다. 목숨을 걸어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기꺼이 걸리라. 단, 그럴 만한 가치가 있어야 한다.
‘그래. 지금 같이 말이지.’
로센이 크렘보르의 공자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것은 정말 우연이었다. 몸을 피해도 진작 피했어야 할 사람이 결사대를 이끌고 길을 사수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로센은 보고를 한 병사가 어디서 헛것을 듣고 온 것이 아닌가 의심했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일전에 눈여겨보았던 그 과감함과 용맹함이라면,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대장이 병사들이 퇴각할 시간을 번다? 보통은 그 반대가 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처음 봤을 때도 심상치 않았지만, 하여간 특이한 자다. 대귀족이라고 해도 무방한 신분인데, 하는 행동을 보면 전혀 그래 보이지 않는다.
“대장님. 저희는…….”
조심스러운 목소리. 그 안에 담긴 뜻은 명확하다. 왜 이쪽으로 가냐는 거겠지.
“평생에 다시는 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큰 판이다.”
긴 설명은 필요 없다. 방금 이야기를 들을 때 그들 역시 옆에서 함께 들었으니까. 불안감만이 떠올라 있던 얼굴에 또 다른 감정이 섞이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나를 따라라. 죽지 않고 잘 따라온다면 합당한 보상이 따를 것이다.”
물론, 내가 죽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
뒷말을 속으로 삼킨 로센이 보리스 크렘보르 공자가 버티고 있다는 쪽으로 빠르게 이동했다. 중간중간 역겨운 것들과 조우하기도 했으나 성벽 위에서 전력을 온존한 로센 부대의 발을 막을 정도는 아니었다.
‘저기군.’
한숨이 나올 정도로 몰려든 괴물들. 그 너머가 시끌벅적하게 들썩이고 있었다.
“흩어지지 마라! 단번에 돌파한다!”
로센은 숨을 고르며 정령, 바르둑을 곁눈질했다.
그의 눈에만 보이는 이 거상 형태의 정령은 적을 앞에 두고도 평소와 같은 모습이었다. 그 덤덤한 모습이 언제나처럼 믿음직스러웠다.
“돌격-!”
로센과 병사들은 괴물들의 후방을 신속하게 치고 들어갔다. 로센의 검이 맨 뒤에 있던 괴물의 뒷덜미를 벨 때까지 괴물들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괴물들은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이 어떻게든 앞으로 나아가려고 하고 있었고, 덕분에 로센 부대의 기습 아닌 기습은 상당한 성과를 거뒀다.
하지만 그것도 첫 충돌까지였다. 그들이 본격적으로 후방을 헤집기 시작하자 괴물들도 몸을 돌려 반응했다. 가장 앞서 나가던 로센에게 세 마리의 괴물이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모두 입이 없는 괴물들이었다. 소리도 없이 거뭇한 형체 셋이 한꺼번에 달려드니 제법 섬뜩했다.
쾅!
로센이 반응하기도 전에 정령 바르둑이 움직였다. 큼직한 팔이 바람처럼 움직여 괴물들을 후려쳤다. 입 없는 괴물들이 단단한 벽에 충돌하기라도 한 것처럼 크게 튕겨져 나갔다.
‘좋아!’
정령의 힘은 상대에 따라 발휘되는 영향력이 달랐다. 그리고 다행히, 이 괴물들은 영향을 크게 받는 편이었다. 보이지 않는 정령이 크게 물리력을 행사할 수 있을 정도로.
한층 더 자신감을 얻은 로센이 용감하게 앞으로 밀고 나갔다. 성벽 위에서 아껴 놓은 힘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거기에 정령 바르둑의 조력까지 더해진 데다가 아직까지도 괴물들의 주의가 앞쪽에 쏠려 있던 덕에 길을 여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 * *
우직!
망치나 도끼를 내려치듯, 바르둑의 큼직한 주먹이 괴물을 내리 찍었다. 납작한 고깃덩어리가 된 괴물이 비명도 없이 무너지니, 로센의 시야가 드디어 탁 트였다.
‘찾았다!’
전방. 수십 마리의 괴물들과 뒤엉켜 있는 일단의 병력이 보였다. 그 중 한 사내. 칙칙한 피로 목욕을 했으나, 그가 보리스 크렘보르임을 알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는 엉겨 붙은 두 마리의 괴물을 떨쳐내고, 그 중 하나의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보일 만큼 난폭하게 짓밟았다.
‘보통 귀족이 아니란 말이지.’
어디를 보더라도 닳고 닳은 군인, 아니 싸움꾼 같지 않은가.
쿵!
옅게 웃은 로센이 한 걸음을 떼었을 때. 둔중한 울림이 발 밑에서부터 올라왔다. 착각인가 싶었으나, 두 걸음 째에는 아예 몸 전체가 흔들렸다.
콰앙-!
땅이 뒤집혔다. 저 앞. 흙더미가 사방으로 튀며 거뭇한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쿵-!
흙의 비 속에서 땅에 내려앉은 거대한 그것은 곧장 앞으로 튀어나갔다.
쿼어어억-!
귀가 얼얼할 정도로 큼직한 괴성. 온 몸의 털이 곤두설 정도의 난폭한 기운. 그 날카로운 끄트머리가 향하는 곳에는 이제 막 숨을 고르고 있던 보리스 크렘보르가 있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