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터-1002화 (1,002/1,064)

1002화

전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누군가는 머릿수라고 할 것이고, 누군가는 군대의 질이라 할 것이며, 또 누군가는 지휘관의 능력이라고 할 것이다.

하나도 틀리지 않다. 저마다 다른 답을 할 수도 있겠지만, 그들의 답 중 틀린 것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이런 질문을 받게 된다면, 보리스는 망설이지 않고 답하리라. 전투에서 가장 중요한것은 기세라고.

강군이라고 해서 무조건 이기지 않는다. 머릿수가 많다고 해서, 지휘관의 역량이 뛰어나다고 해서 반드시 승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물론 그 또한 중요한 요소지만, 전장에는 그 모든 것을 뒤엎을 수도 있는 불확실성이 존재한다. 그게 열심히 지휘하던 지휘관의 머리를 꿰뚫는 눈 먼 화살 한 대이건, 화공을 준비하던 군대에게 쏟아지는 폭우이건, 뭐건 간에.

“크압!”

이 기세라는 것도 그렇다. 산처럼 높이 솟구치다가도 어느 순간 날개 잃은 새처럼 추락하기도 한다. 그 반대의 경우도 흔하고.

그리 길지 않은 세월 동안, 많지 않은 경험을 통해 배우고 익힌 바에 따르면 기세는 흐름이다. 흐름을 타는 것은 손가락을 까딱이는 것만큼 쉽지만 흐름을 거스르는 것은 어렵다. 어지간한 능력으로는 시도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단순히 거스르는 것조차 그만큼 힘들다. 하물며 흐름 자체를 주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영역이라 보아도 좋다. 보리스는 이제껏 그게 가능한 사람은 한 명 밖에 보지 못했다.

그의 부친. 머리가 굵어진 이후로 한시도 눈을 뗀 적 없는 목표.

늘 닮기를 바랐고, 따라잡기를 바랐다. 하지만 단 한번도 만족스러웠던 적이 없다. 늘 부족함을 느꼈고, 그렇기에 괴로웠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가까워지지 않는 목표는 그 자체로 끔찍한 고통이다.

‘하다못해.’

지금 이 순간조차 그렇다.

“공자! 당장 물러나야 합니다! 당장!”

형식적으로 갖추던 예의마저 벗어 던지고 맞먹으려는 듯이 소리친다. 상황이 상황이라 저도 모르게 본심이 튀어나온 거다. 건방진 놈 같으니.

“길이 막혔다.”

“그러니 어서 서둘러야……!”

당초 계획은 시가전을 통해 적의 기세를 최대한 꺾어두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 외곽 시가지에 거주하던 주민들을 소개하고 함정을 준비했다. 그리 어려운 계획은 아니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싸우는가. 그 모든 것을 미리 준비해둔 채 적을 끌어들인 것이다. 어려울 이유가 없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말이다.

그러나, 이번 적은 상식이 통하지 않았다.

뻥 뚫려 있던 대로 한복판에 갑자기 괴물들이 나타났다. 일반적인 괴물들과는 확연히 다른 것들이었다. 조금 더 일찍 알았다면 용감하게 덤벼들었던 병사 수십이 갈가리 찢겨 나가는 일은 없었을 터인데.

“더는 버티지 못할 겁니다. 곧 몰려들겠지요. 그렇게 되면…혼란스러워질 겁니다.”

노골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 안에 담긴 뜻은 짐작하고도 남았다.

병사들이 퇴각하기 위해 지나야 할 길이 막혔다. 정확히는 대로가 막힌 것이지만, 지금으로서는 거의 같은 의미라고 봐도 좋다. 길을 막은 괴물들을 처리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지금은 그럴 전력도, 시간도 부족하다.

도망치는 병사들은 늘어날 것인데, 그들이 이용해야 할 길은 막혔다. 남은 것은 소수의 개구멍 뿐.

한 명이나 간신히 지나갈 수 있을 만한 개구멍에 절박한 수십, 수백 명이 한번에 몰리면? 어떤 상황이 펼쳐질지는 불 보듯 뻔하다.

“저들 모두, 죽음을 각오하고 뒤에 남은 이들이다.”

“잘 됐군요. 죽음을 각오한 자들이니 차례가 조금 밀린다고 해도 억울하지는 않을 것 아닙니까.”

“크렘보르를 위해, 솔롬을 위해 싸운 용사들에게 꼴사나운 모습을 보일 수는 없어.”

“용기와 만용을 구분하는 법은 진즉 배우지 않으셨습니까.”

“뭐라 해도 좋아. 하지만 물러난다 해도 지금은 아니야. 그럴 수는 없다.”

만용. 오기. 다 맞는 말이다. 로우렌이 열 뻗치는 얼굴로 입술을 달싹이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 사실 그 역시 이성적으로는 당장 몸을 빼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자마자 뭔가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욱하고 올라왔다.

보리스 크렘보르.

지금이야 판니른에서 손꼽는 권세가의 독자이자 후계자로서 대우를 받지만, 처음부터 이랬던 것은 아니다. 보리스는 자신이 보리스 크렘보르가 아니었던 시절을, 대접받지 못하던 시절을 똑똑히 기억했다.

이전의 그를 알던 이들은 가끔 농담조로 귀족답다고, 귀족 같다고 말하곤 했다. 목에 힘이 들어갔다는 말을 최대한 돌려서, 고상하게 하는 거다.

부정하지 않았다. 그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했으니까. 다만, 그것이 같잖은 오만 따위로 빚어진 결과는 아니었다. 오만은커녕, 나름의 노력으로 인한 산물이었다.

어떤 자리에 앉은 사람은 자리에 맞게 굴어야 한다. 지위, 신분, 그 밖의 뭐가 되었든 간에.

귀족, 그것도 대귀족이라는 이름을 쓰려면 그에 부족하지 않은 행실을 보여야 한다. 날 때부터 귀족이 아니었기에, 보리스는 더 강박적으로 부족함이 없도록 노력했다. 그런 노력 중 일부가 비웃음을 샀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근본 없는 신출내기가 맞지도 않는 옷을 껴입는다고 수군거리는 자들이 있다는 것도.

그래도 개의치 않았다. 뒤에서 떠들어대는 자들이야 세상 어디에나 있는 법이고, 결국 좋든 싫든 받아들이게 될 테니.

고귀한 피란 무엇인가. 지배자란 무엇인가.

한때는 보기 좋은 허울이라고 비웃었었다. 내세울 것이라고는 이미 오래 전에 죽어 뼛가루도 안 남은 선조들과 긴 이름 밖에 없는 족속들이 고귀한 핏줄이네 어쩌네 공허하게 떠들어대는 것뿐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입장이 바뀌어서일까.

“그럴 수는 없어.”

“공자님. 지금 괜한 오기를 부리실 때가…….”

“오기가 아니다.”

이걸 뭐라고 해야 할까. 생소한 감정이라서 단번에 적절한 표현을 떠올릴 수가 없었다.

“집 주인이 집을 지키지 않으면 누가 주인이라고 인정해주겠느냐.”

그래서 그냥 생각나는 대로 뱉었다. 충분한 설명은 아니었을 테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마음은 굳었고 결심은 흔들리지 않으니.

“설마하니 부하들이 무사히 다 도망칠 때까지 내가 남아서 시간을 벌겠다…뭐,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시려는 것은 아니지요? 정말 그건 아니리라 믿습니다.”

“실망시켜 미안하군.”

“그…….”

인상을 있는 대로 찌푸린 로우렌이 손을 들어 신경질적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짜증은 나고, 욕이라도 하고 싶은데 필사적으로 억누르는 모양새였다.

“그런 줄 알면, 지금이라도 그만두시면 안 됩니까?”

“생각을 다시 해봐라. 위험하긴 하지만, 이건 기회이기도 하다.”

“기회요? 하!”

기회. 그래. 기회일 수도 있다.

이곳은 솔롬이다. 크렘보르의 둥지이자, 앞으로 그 성세를 이룩해갈 터전이기도 하다. 이곳의 모든 것은 크렘보르의 것이다. 땅, 성벽, 병사들, 시민들까지 전부.

집에 도둑이 들었다. 아니, 강도인가? 어쨌거나 주인 된 입장으로서 엄한 놈들이 살림살이를 죄 박살내도록 놔둘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놈들에게 당당히 맞섬으로써 증명하는 거다. 내가 이 집의 주인이라고. 내 허락 없이는 이곳의 그 무엇도 건들 수 없다고.

“따르겠습니다.”

여전히 분통이 터져있는 동생과 달리, 그라모트는 언제나 그랬듯 보리스의 뜻대로 따르겠다며 뒤에 섰다. 보리스는 말없이 슬쩍 웃어 보이는 것으로 그가 느끼는 든든함을 표현했다.

“좋아. 병사들을 모아라. 부상자는 제외하고, 크게 지쳤거나 기가 꺾인 녀석들도 제외해. 싸울 수 있는 인원만 추려. 시간이 부족하니 서둘러라.”

“옛.”

로우렌은 멀어지는 제 형의 등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신경질적으로 자기 머리를 긁어댔다.

“정말 이러실 겁니까?”

“위기와 기회는 함께 온다. 너도 종종 하던 말 아니냐.”

“이건 기회가 아니라 그냥 무리인 것 같습니다만.”

“따라오라고 하지 않으마. 격하게 움직여야 할 텐데 짐만 될 거다.”

“저도 제 목숨 아까운 줄은 압니다.”

“그럼 다행이고.”

로우렌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침묵하다가 끝내 헛웃음만 흘렸다.

‘핏줄은 어디 안 가는군.’

고집스럽다. 무모해 보일 만큼 대범하기도 하다.

이런 저런 말로 변명 비슷하게 늘어놓았으나 결국은 적 앞에서 도망치기 싫다는 거다. 자존심을 굽히지 않을 것이며, 조금이라도 약한 모습은 보이지 않을 거라는 거다.

“마음대로 하십쇼.”

저렇게까지 하는데, 이미 말로 해서 들어먹을 단계는 한참 지났다.

“그래도 목숨 아까운 줄은 아셔야 합니다. 위신이고 명예고, 죽고 나면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똥덩어리일 뿐이니까요.”

“그래.”

* * *

저마다 눈에 힘이 있었다. 저마다의 이유로 빛나는 눈들. 보리스는 굳이 그들의 속마음을 짐작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그들이 지금 싸우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앞에 섰다는 것. 그뿐이었다.

“다들 알다시피 상황이 좋지 않다.”

담담하게 사실을 전하며 시작했다. 어차피 저들 가운데는 이미 알고 있는 이들도 있을 것이고, 알지는 못해도 눈치껏 짐작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기에. 그렇다면 차라리 처음부터 밝히고 가는 편이 낫다.

“갑자기 나타난 괴물들이 대로를 막았다. 덕분에 아군의 퇴각이 지난해진 상황이다. 적들은 이미 코앞까지 와 있고, 더는 놈들의 발을 묶어 둘 함정도 병력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미 알거나 짐작하고 있었기에, 병사들의 반응은 그리 크지 않았다. 기껏해야 안색이 좀 더 어두워진 정도.

보리스는 그들의 반응을 무심하게 살피며 말을 이었다.

“퇴각하는 아군에게 여력은 없다. 우리가 그들의 뒤를 지켜주지 않는다면 퇴각하는 아군은 궤멸적인 피해를 입게 될 테지.”

해야 할 일은 명확하다.

“전투는 이제 시작됐다. 외성의 전투는 서전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여기서 전력이 크게 상한다면 앞으로의 전투는…….”

“더는 말씀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라모트가 와락 인상을 일그러뜨렸다. 거기에 모자라 한 발 앞으로 나서려는 것을 보리스가 눈짓으로 제지했다.

“저희도 다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곳에 모인 것입니다.”

당찬 병사다. 다른 병사들과 마찬가지로 두 눈에 힘이 가득하고, 열기가 느껴진다. 굳이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그 열기의 근원이 무엇인지 알 듯했다. 저런 눈을 한 자들이 익숙했기 때문이다.

야심.

‘나쁘지 않아.’

아니. 오히려 좋다. 욕망은 사람을 움직이는 가장 큰 동기 중 하나가 아니던가.

“좋아. 너희 모두 알고 있겠지만, 위험한 일이다. 아무것도 장담하지 못한다. 내가 해줄 수 있는 약속은 내가 항상 너희보다 앞서 달릴 것이라는 것. 그 하나뿐이다.”

병사들의 눈에 더욱 힘이 들어가는 것을 보며, 보리스가 칼을 뽑아 들었다.

“가자.”

* * *

[온다.]

이가로프가 아니었다.

[준비가 됐기를 바라지.]

북쪽에서부터, 난데없이 폭풍이 몰아쳤다. 귀를 아프게 하고, 순간적으로 시야마저 가릴 정도로 거대한 폭풍이었다.

힐끗 그쪽을 향해 시선을 던졌던 군터는 곧 창을 마저 뽑았다.

바깥쪽 성벽 앞에 죽어 있는 덩치 녀석들에 비할 바는 아니나, 그에 준할 정도로 커다란 괴물의 사체. 군터의 창은 그 큼지막한 놈의 두개골을 쪼개 버리며 뽑혀 나왔다.

[이 정도면 마물이라고 할 만해. 반편이지만.]

이번에는 이가로프였다.

[이런 것들이 대로에 나타난 것이 우연은 아닐 테지. 다른 쪽도 괜찮을지 모르겠어.]

그 말에, 군터의 시선이 아주 잠깐 남쪽을 향했다.

(다음 화에서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