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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1001화 (1,001/1,064)

1001화

솔롬 외성 외곽 구역.

쾅!

그럴듯하게 생긴 집 한 채가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집을 통째로 깔고 앉은 괴물은 하늘을 향해 포효하고는 고개를 돌려 주변을 훑었다. 그러나 이미 근방에 있던 병사들은 멀찍이 물러선 뒤였기에 괴물은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쿠르륵-

불만스럽게 고개를 턴 괴물이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자 아직 형체를 유지하고 있던 잔해가 괴물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갈라지거나 부서져 내렸다.

성벽을 넘은 괴물들이 도시의 중심으로 몰려들어갔다. 대다수가 상대할 만한, 입 없는 괴물들이었으나 간혹 보이는 집채만한 크기의 괴물들은 일반 병사들이 대적하기에는 너무 버거운 상대였다.

“물러나!”

몸을 숨긴 채 준비를 마치고 있던 석궁수들이 일제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십여 대의 강맹한 화살이 괴물을 벌집으로 만들었다. 살벌한 비명과 함께 괴물이 비틀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잡을 수 있을 것 같은데?”

“한참 부족해! 뒈지기 싫으면 어서 도망쳐!”

병사들을은 등을 보이며 도망쳤고, 고통에 잠시 허둥대던 괴물은 곧 광분하여 그 뒤를 쫓았다.

쿵! 쿵!

땅이 울린다. 뒤에서 집채만한 괴물이 자신의 머리통을 박살내고 몸뚱이를 찢어발기기 위해 눈을 부릅뜨고 쫓아오고 있는 것이다. 그 압박감에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안 그래도 체력이 간당간당한데 땅까지 흔들려대니 언제 발이 꼬인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뛰어!”

그렇게 달리고 또 달리다, 신호에 맞춰 힘껏 땅을 박찼다. 일부는 그렇게 있는 힘껏 뛰었다가 착지할 때 균형을 잃고 땅을 구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러는 와중에도 그들의 시선은 뒤쪽, 골목길 전체를 틀어막다시피 하며 달려오는 괴물에게 향했다.

쿵! 쿵!

커다란 몸집에 어울리는 커다란 머리. 마찬가지로 커다란 얼굴. 그리고 있어야 할 곳이 아닌 전혀 엉뚱한 곳들에 중구난방으로 자리잡고 있는 눈들. 최소 여섯 개는 넘어 보이는 크고 작은 눈들이 저마다 뒤룩뒤룩 구르며 자신을 분노케 한 적들을 찾고 있었다.

괴물은 명백히, 고통과 분노에 눈이 멀어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병사들이 몸을 날렸던 지점까지 가까워졌음에도 괴물은 성큼성큼 앞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우득!

갑자기 꺼진 땅에 중심을 잃고서 그대로 빨려 들어갔다. 괴물의 커다란 몸뚱이가 순식간에 반 이상 땅속으로 사라졌다.

쿠워어어-!

화살을 맞았을 때보다도 더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다만 이번에는 분노가 섞이지 않은, 오직 고통만이 가득한 비명이었다.

괴물이 떨어진 구덩이의 바닥. 그곳에는 수십 개의 작살이 있었고, 그중 일부는 괴물의 튼튼한 몸뚱이에 깊숙이 파고들었다.

“꼴 좋다. 개자식.”

“끝난 거 아니야! 막아! 빠져나오려고 하잖아!”

“어딜!”

괴물이 함정에서 기어 나오려 하자 칼과 도끼를 든 병사들이 달려들어 장작을 패듯 내리찍었다. 흥분한 괴물이 앞발을 휘저을 때면 잠시 물러났다가, 땅을 짚고 올라오려고 하면 다시 득달같이 달려들어 괴물의 앞발을 너덜너덜하게 만들어 놓았다. 그러자 집채만한 크기의 괴물도 위기의식을 느꼈는지 처음처럼 마구잡이로 빠져나오려 하지 않았다. 얼굴 전체에 마구잡이로 난 눈들을 교활하게 굴러다녔다. 기회를 엿보기 시작한 것이다.

“침착해. 절대 서두르지 마.”

동료들을 향한 것임과 동시에 스스로에게 하는 경고였다. 병사는 잠잠해진 괴물을 보며 연신 마른침을 삼켰다.

저 큰 덩치가 몇 번 용을 썼다고 해서 힘이 다 빠졌을 리 없다. 그런데도 저렇게 잠잠하다는 것은 기회를 엿보고 있다는 뜻. 성급하게 마무리하겠다고 접근했다가는 저 너덜너덜한 앞발에 머리가 박살이 날 수도 있다.

“너무 끌면 다른 놈들이 몰려올 거야.”

“기다려.”

불안감을 드러내는 동료에게 단호히 대꾸했다. 그라고 당장 이 자리를 뜨고 싶은 마음이 없겠는가. 단지 마음이 급할수록 머리를 쓰라는 격언에 충실하고 있을 뿐이다.

딱 봐도 기회를 엿보고 있는 괴물 놈을 성급히 치면 크게 다칠 것 같다. 그렇다고 등을 돌려 달아난다면 기껏 함정에 빠뜨린 놈이 어떻게든 빠져나와서 뒤를 따라오지 않겠나. 흥분한 수준을 넘어서 아예 눈이 돌아간 괴물 놈에게 쫓긴다? 상상하기도 싫다.

“기다려. 기다리는 거야. 저 새끼도 지치고 있어.”

구덩이 속에는 통나무를 잘라 만든 작살 수십 개가 박혀 있다. 저 육중한 몸뚱이가 그 위로 떨어졌으니, 아무리 튼튼한 놈이라고 해도 멀쩡할 리가 없다. 상처가 났을 것이고, 피가 계속 흐르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조금만 더 버티면.

쿠워어어어-!

머리를 멍하게 만드는 우렁찬 포효. 잘못 들었나 싶어 눈에 잔뜩 힘을 주었으나 함정에 빠진 괴물은 여전히 눈만 굴려대고 있었다. 그렇다면?

“비, 빌어먹을!”

“다른 놈이야! 가까워!”

가까운지 아닌지는 모른다. 워낙 큰 소리였으니까. 하지만 그들은 그 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려온 것처럼 반응했다. 이미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던 두려움과 초조함이 방금 그 포효로 몇 배나 증폭되어 정신을 갉아먹었다.

“이야아아!”

“안 돼! 멈춰!”

인내심이 바닥난 동료 병사 두 명이 땅을 박찼다. 그런데 둘이 향하는 방향이 반대였다. 한 명은 등을 돌리고 도망쳤고, 다른 한 명은 도끼를 양손으로 쥐고 함정에 빠진 괴물을 향해 달려들었다.

우직!

도끼를 들고 달려들던 병사가 한 순간 사라졌다. 정확히는, 허리 위쪽 상반신이 사라졌다. 계속 눈으로 보고 있었음에도 믿기지 않는 광경이었다.

‘뭐지 저게?’

튀어나가는 동료에게 멈추라고 소리쳤던 병사. 그는 땅에서 불쑥 솟은 길쭉한 무언가를 보며 눈을 깜빡였다. 그것이 채찍처럼 움직여 동료의 몸 절반을 갈라버렸다.

‘꼬리?’

사람 키만큼 솟아올랐던 그것이 땅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동시에, 구멍 뚫린 땅이 불쑥 가라앉았다. 적어도 그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물러나!”

힘 있는 목소리. 듣는 순간 그대로 따라야 할 것 같은. 하지만 어디서 들려온 소리지? 이해하지 못하고 궁금해하면서도, 그의 몸은 충실히 그 목소리의 지시대로 따랐다.

* * *

땅이 꺼진다. 물결에 휩쓸리는 모래처럼.

원래 저렇게 물렀던 걸까?

‘그럴 리가.’

좁은 골목길이라 마차는 오가지 않았겠지만, 사람은 하루에도 수없이 오갔을 것이다. 절대 저렇게 흐물흐물할 수는 없다.

‘꼬리.’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았던 한 병사는 상황파악도 못하고 정신을 놓았으나, 보울룬은 방금 튀어나왔던 것이 무엇인지 한 눈에 알아보았다. 그것은 분명 꼬리였다.

‘독인가? 아니면 다른 특별한 능력?’

뭐가 되었든, 집채만한 괴물은 물을 잔뜩 먹은 진흙처럼 흐물흐물해진 땅을 헤엄치다시피 하며 함정을 빠져나오려 하고 있었다. 아마 조용히 눈만 굴려대던 것도 바로 지금을 위해서였을 것이다. 훼방꾼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은밀히 준비를 한 거다. 보이는 것과 다르게 무척이나 교활한 괴물이었다.

하지만 놈은 아직 빠져나오지 못했다. 놈의 몸의 대부분은 땅 밑에 가라앉아 있었고, 여전히 운신이 자유롭지 않았다.

그렇기에 보울룬은 자신보다 몇 배는 거대한 괴물을 향해 망설임없이 달려들 수 있었다.

부웅-

그의 몸뚱이보다도 더 거대한 앞발이 날아들었다. 하지만 평범한 병사들이라면 모를까, 보울룬이 그런 둔하고 큼지막한 휘두르기에 당할 리 없었다. 살짝 몸을 굽히는 것만으로 피해내고, 괴물의 툭 튀어나온 주둥이에 칼을 꽂았다.

집채만한 괴물에 비하면 칼 한 자루는 장난감도 되지 못한다. 하지만 보울룬의 칼은 단순한 칼 한 자루가 아니었다. 거대한 뱀의 이빨. 맹독이 뚝뚝 떨어지는 독니였다.

그아아아아-!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꼈을까. 보울룬은 재차 날아드는 거대한 앞발을 피해 뒤로 몸을 날렸다. 제법 깊숙이 파고든 칼은 내버려둔 채로.

구워어억-! 구워어-!

눈이 뒤집힌 괴물이 사지를 버둥거리며 발광했다. 보이는 것은 앞발 두 짝뿐이었지만 아마 보이지 않는 뒷발도 비슷하게 움직이고 있으리라.

오히나의 독은 대상에 따라 효력을 달리 한다. 평범한 생물에게는 큰 영향이 없지만 평범하지 않은, 영적인 면이 조금이라도 있는 존재들에게는 지금처럼 특별한 효과를 발휘한다.

어떤 느낌일지는 모른다. 하지만 오히나의 독이 통하는 상대들은 지금 저 괴물처럼 격렬하게 반응했었다. 갑자기 각성이라도 했는지 저렇게 날뛰어대다가 오래 지나지 않아 눈이 풀리고, 몸을 흐느적대다가.

그…

어느 순간.

쿵!

쓰러진다.

“커윽!”

동시에 가슴, 아니 그보다 더 깊숙한 곳 어딘가에서 무언가가 올라왔다. 참을 수가 없어 토하듯 뱉었지만 정작 입에서 나오는 것은 없었다.

“후욱. 후욱.”

세상이 흔들렸다. 정확히는, 그렇게 보였다. 사실 흔들리고 있는 것은 그의 몸뚱이였다. 몸을 지탱하는 다리부터 흔들리니 눈이 달린 머리도 흔들리고, 종국에는 세상이 흔들려 보이는 것이다.

“저…….”

“움직여라.”

“예?”

“놈들이 몰려온다. 움직여.”

“아, 옛. 그, 그런데…괜찮으십니까?”

괜찮냐고? 보울룬은 허리 위가 사라진 채로 무릎 꿇은 시신을 보았다. 몸에 힘이라고는 한 줌도 없고, 세상은 빙빙 돌지만…저기에 비하면 멀쩡한 수준이라 할 것이다.

“그래.”

괜찮다. 괜찮고 말고.

“그…피가.”

“피?”

반사적으로 입가를 훑었다. 입가를 훔친 손등에 붉은 무언가가 묻어 있었다.

“움직여.”

피를 확인해서일까. 마음이 가라앉았다. 무의식 중에 건조한 말이 튀어나갔다. 이름 모를 병사는 그것을 압박으로 느꼈는지 짤막한 답 후에 열심히 다리를 움직였다.

“후우…….”

몸은 금방이라도 늘어질 것처럼 노곤했다. 하지만 귀는 멀쩡했기에 온갖 소리들을 들을 수 있었다. 가까이서, 또 멀리서 들려오는 온갖 소리들을.

‘막을 수 있을까.’

아니.

‘버틸 수 있을까?’

이곳까지 오며 본 것들. 그리고 지금 들리고, 느껴지는 것들.

적은 강하고, 무엇보다 끝이 있는 것일까 싶을 정도로 많다. 반면 아군은 강하지만 수가 적다. 저 징그러운 것들에 비하면 말이다.

“쿨럭!”

나오는 것도 없는데 속이 들끓는다. 정령의 힘을 남발한 대가다. 여기서 또 한 번 힘을 썼다가는 정말 피를 토할 것이다. 어쩌면 그보다 더 심각한 일이 생길지도 모르고.

“괜찮으십니까?”

“…그래.”

괴물이 죽은 것을 확인한 수하들이 주변을 에워싸듯 섰다. 보울룬이 몸을 추스를 때까지 기다린 그들은 보울룬이 걸음을 옮기자 그제야 그 뒤를 따랐다.

* * *

[개떼처럼 몰려드는군.]

개떼라는 표현도 부족하다. 이 정도면 개미떼라고 해야 하리라.

전선이 밀리고 있다. 사실 전선이라고 해봐야 익숙한 길목이나 건물 안에 숨어있다가 기습하고, 쫓아오는 것들을 함정으로 유인하는 정도다. 직접적인 교전은 거의 일어나지 않고 있다. 그러다 보니 적의 수는 효율적으로 줄일 수 있을지언정 전선을 유지하지는 못했다. 말 그대로 쭉쭉 밀리고 있는 거다.

[계속 밀리다가 결국 따라 잡히겠지.]

병사들은 최선을 다해 교전을 피하고 있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다. 아무리 훈련받은 병사라고 해도, 주변 지리에 밝다 해도 결국 사람의 체력에는 한계가 있으니까. 물론 괴물들에게도 체력의 한계는 있겠지만, 사람에 비할 바는 아닐 테고.

“아아악!”

“도망쳐! 뛰어! 뛰라고!”

온갖 소리가 들려온다. 딱히 들으려고 하지 않아도 들리는 소리들.

최대한 철저하게 준비했음에도 부족했다. 적은 강했고, 아군은 약했다. 강한 것과 약한 것이 부딪쳤으니 약한 쪽이 밀리는 것은 당연한 일. 거기에 유감을 느낄 이유는 없다.

[냉혹하군.]

냉혹? 원한만 남은 원령이 꺼내기에는 너무 말랑한 단어다.

[흔들리지 않는 차가운 이성과 냉혹을 어찌 분간하겠나. 가능하다 해도 쉽지 않겠지.]

이제야 알아들을 만하다. 여전히 원령치고는 감성적이라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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