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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1000화 (1,000/1,064)

1000화

흡사 먹이를 향해 달려드는 개미떼처럼, 무수한 괴물들이 솔롬의 성벽을 기어올랐다. 가장 밑에 깔린 거대 괴물의 사체는 이제 그 위로 뒤덮인 또 다른 사체들로 인해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드디어.’

그렇게 완강히 버티던 적도 결국 밀려나고 있다. 물러나는 것이든 밀려나는 것이든, 어쨌거나 더는 버티지 못한다고 판단했다는 거다.

‘더 쉽게 갈 수도 있었을 터인데.’

성벽이 반쯤 넘어가고 있는 와중에도 굳게 닫힌 성문은 여전히 끄떡없었다. 저 성문을 열기 위해 조잡한 나무 기둥으로 들이받던 괴물들이 수백 마리 이상 쓰러졌고, 지금도 쓰러지고 있다. 만약 저 성문을 공략할 수 있었다면 이렇게 큰 피해를 입어가면서 성벽을 공략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정작 저 군대의 주인은 그런 기색이 전혀 없었다. 여전히 팔짱을 낀 채 묵묵히 전장을 바라보고 있을 뿐인 그에게서는 자신감 외에 다른 감정은 일절 엿볼 수 없었다.

어쩌면 그는 전부 죽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저 도시 안에 있는 사람들도, 도시를 공격하는 괴물들도.

‘정말 그런 것일지도.

거인왕의 눈에 보이는 세상은 자신이 보는 것과 다를 것이다. 아마도 저 눈에 비치는 세상은 자신이 보는 것보다 훨씬 더 간단명료하리라.

* * *

전투가 시작되기 전부터, 그러니까 어둠 속에서 적이 모습을 드러내기 전부터 솔롬 외성의 외곽지는 군의 통제 하에 철저히 소개되었다. 적어도 관에 신고되어 있는 정식 시민 중에 아직까지 외곽지에 머물고 있는 이들은 없었다.

쾅!

카니악의 철퇴가 부정한 핏물로 번들거렸다. 그는 또 한 마리의 마물을 머리 없는 시체로 만들어주고서 숨을 골랐다. 초월적인 힘을 얻었다고 해도 그는 여전히 하나의 생명에 불과했다. 그리고 모든 생명은 호흡을 한다. 그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지금 조금 피로를 느끼고 있었으며, 이 피로가 설산에서 굴러 내려오는 눈덩이처럼 점점 커질 것임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능숙한 전사였다. 용혈을 받아들이기 전에도 그랬고, 받아들인 후에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는 어떻게 해야 최대한 피로를 덜 쌓으면서 오랫동안 싸울 수 있는지, 그 누구보다 잘 안다고 자신했다.

싸움은 이제 막 시작되었다. 시작부터 성가신 것들과 얽히기는 했지만, 이런 날도 있는 법이다.

‘저쪽도 슬슬 시작인 것 같은데.’

성벽 쪽이 아까부터 영 어수선했다. 보이지는 않지만 분위기가 썩 좋지 않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아마도 밀리고 있는 것이겠지. 얼마나 몰려온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덩치 놈의 싸움 방식을 떠올려보면 아마 끌어 모을 수 있는 최대한으로 모아왔을 것이다. 사람이든 괴물이든 머릿수에는 장사가 없는 법이니 첫 교전에서는 적절한 시기에 한 수 접어줘야 한다.

“후우. 이쪽도 얼추 정리가 끝난 것 같습니다. 이동할까요?”

호흡이 거칠어진 수하가 물었다.

“아니. 여기까지다. 모두 불러 모아.”

“벌써 말입니까?”

“벌써가 아니야. 덩치 놈을 상대로 이 정도면 그래도 꽤 선전한 셈이다. 이제 곧 여기는 불바다가 될 거야.”

“그렇겠지요. 그럼…우리는 빨리 물러나야겠습니다.”

“그래. 그러니 서둘러.”

성벽 위. 역겨운 것들이 범람하기 시작한 지금까지도 아직 군기가 흐트러지지 않은 것을 보아하니 밀리기 전에 물러나기를 결정한 듯했다. 그렇다면 2차 방어선까지는 순식간일 터. 휩쓸리지 않으려면 지금부터 부지런히 움직여야 하리라.

* * *

콰직!

보울룬의 검이 쓰러진 괴물의 뒤통수를 찍었다. 혼자서 균형을 잃고 쓰러진 놈이었다. 뒤쪽의 동료들에게 밀려 넘어진 것이다. 이놈들에게 과연 동료의식이라는 것이 존재하기는 하는지 의문이었지만.

“대장님! 어서!”

“기다리지 마! 먼저 뛰라고 하지 않았나!”

충성스러운 부하들은 가족처럼 애틋하지만, 그 가상한 마음도 때와 장소를 가려가며 드러내야 하는 법. 지금 자신이 이렇게 뒤에 남아 시간을 끌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던가. 다 저 녀석들이 안전하게 몸을 뺄 수 있는 시간을 벌기 위함이었다.

“이제 충분합니다! 그러니…….”

“제기랄! 알겠다!”

보울룬은 뒤통수가 깨진 괴물의 머리통을 짓밟아 두개골을 파고든 검을 빼냈다. 팔에 살짝 저린 느낌이 있었다. 기분 탓은 아닐 것이다. 벌써 그가 검으로 직접 찌르고 베어 죽인 괴물만 일곱이었다. 급소만 노려서 한번에 처리할 수 있을 만큼 녹록한 상대도, 상황이 아니었기에 매번 전력을 다해야 했다.

휴식이 필요하다. 이 상태로는 얼마 버티지 못할 터.

하지만 괜찮다. 오히려 상황은 지금이 더 나았다.

‘오히나. 네 차례다.’

적과 아군이 혼란스럽게 뒤엉킨 성벽 위에서는 그의 가장 큰 전력을 사용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한방 크게 먹여줘.’

인내에 인내를 거듭하며 침묵해왔던 뱀 정령이 마침내 몸을 세우고 입을 벌렸다. 쩍 벌어진 입에서 보이지 않는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것은 독이었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하지만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독보다도 이질적인 독. 그 독은 경계 너머에 존재하거나 반쯤 걸쳐 있는 존재들에게 특히 유효했으며, 거인왕의 영향을 받은 괴물들은 그 범주에 충분히 드는 존재들이었다.

우직! 쿵!

기세 좋게 몰려오던 괴물들이 하나 둘 쓰러졌다. 뱀 정령의 독에 가장 가까이서, 가장 강하게 접촉한 괴물이 먼저 균형을 잃고 쓰러지자 그에 뒤엉킨 괴물들도 덩달아 균형을 잃었다. 족히 수십 마리의 괴물이 한순간에 그렇게 나동그라졌고, 보울룬은 그 틈을 타 재빨리 몸을 뺐다.

“달려! 멈추지 마라!”

오히나가 힘을 씀과 동시에 보울룬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앞만 보고 달리는 그의 눈에 어두운 거리가 눈에 들어왔다. 짓다 만 건물들, 초라한 움막들. 모두 눈에 익다. 이 순간을 위해 몇 번이나 이 거리를 걸으며 길을 익혀 놓은 덕이다.

“아직 따라붙는 놈들은 없습니다!”

어느새 그의 옆으로 따라붙은 수하가 뒤쪽을 곁눈질하며 외쳤다. 보울룬은 답하지 않고 뜀박질을 이어갔다. 지금 그는 달리면서 말까지 할 여력이 없었다. 괴물들의 발을 묶은 것은 그의 정령이 한 일이지만, 정령이 힘을 발휘하는 데는 그의 힘이 필요했다. 정령의 힘이라는 것이 대가 없이 무제한으로 쓸 수 있는 권능은 아닌 것이다.

“허억. 허억.”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다 못해, 더는 숨을 쉴 수 없을 정도에 이르렀을 때. 보울룬은 무릎을 부여잡고 멈춰 섰다. 그는 그와 별반 다르지 않은 수하들을 일견하고서 뒤를 돌아보았다. 어두워 잘 보이지 않지만, 성벽 위로 검은 선이 길쭉하게 이어져 있는 것만은 확인할 수 있었다.

지금 정도면 모든 아군이 철수를 마쳤을 것이다. 즉, 성벽은 이미 괴물들에게 점거 당했다는 뜻이다. 지금쯤 저것들은 자기들이 승리했다고 착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다.’

끝나다니. 그럴 리가. 끝나기는커녕, 지금부터 시작이다.

* * *

쿵!

마침내 성문이 열렸다. 입이 사라지지 않은 괴물 세 마리가 안쪽에서 문을 연 것이다. 예상했던 대로 저 성문은 술법으로 강화된 것이었고, 그 견고함은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려 할 때는 강하게 힘을 발휘하지만 그 반대일 경우에는 그렇지 않은 듯했다. 하기야, 외적을 상대하는데 그거면 되지 않겠나.

어쨌거나 덕분에 불필요하게 시간을 더 끌 필요는 없었다.

‘이런 부분에 있어서는 꽤나 인간적이군.’

레오니스 코누디스는 앞서가는 거인왕을 보며 머릿속에서 상념을 지웠다. 이 정도는 괜찮을 것 같지만, 그래도 혹시 모를 일이다. 저 무시무시한 자에게 머릿속을 읽는 능력이 있을지 누가 알겠는가.

[별나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

괜찮다. 속을 읽힌 것이 아니다. 저것은 그저 통찰일 뿐이다. 세찬 바람이 불어오는데 얇은 옷차림으로 바람을 맞고 있다면 누구라도 그자가 난로나 모닥불을 갈망하고 있으리라 짐작할 수 있지 않겠나.

레오니스 코누디스는 마음을 다스리며 태연하게 긍정했다.

“예. 그리 생각하고 있습니다. 굳이 성문이 열릴 때까지 기다리실 필요가 있었는지요?”

[정복자는 가장 큰 문을 지나는 법이다.]

“고상한 철학이로군요.”

[왕이 거렁뱅이의 옷을 입을 수는 없는 법이지. 같은 이치다.]

그것과 이것이 같은가? 만약 그가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면 지금쯤 이 가장 바깥의 성벽을 넘어서서 저 안쪽의 진짜 도시를 두드리고 있었을 터. 이것은 그저 효율과 비효율의 문제였다.

하지만 레오니스 코누디스는 초월자의 논리를 이해하려 노력하지 않았다. 그저 받아들이면 그만이다. 그의 사고나 행동방식을 따라할 필요도 없다. 어차피 이 판을 주도하는 것은 저 고집스러운 거인이었으니.

[보잘 것 없는 도시로군.]

피와 시체로 뒤덮인 길. 네발로 기는 거대한 괴물이 그 위를 이동했다.

외관만 본다면 거대한 유인원이었다. 명확하게 구분되는 두 팔과 두 다리. 그 외의 신체구조 역시 사람과 거의 같았다. 다만 몸뚱이 전체에 짐승처럼 길고 거친 털이 전신에 나 있었으며, 머리가 달려있어야 할 부분에는 머리 대신 식물의 뿌리 같은 것이 달려있었다. 그 뿌리의 무수한 줄기들은 오랫동안 자란 덩굴처럼 길쭉했으며 저마다 뱀처럼 꿈틀거렸다.

이렇듯 외형만으로도 충분히 이질적이었으나 레오니스 코누디스가 느끼는 꺼림칙함은 눈에 보이는 부분에 기인하지 않았다.

‘거인…이라 할 수 있는가.’

다시 한번, 그는 거인왕이 마음을 읽지 못한다는 것에 안도했다. 만약 그가 지금 자신의 생각을 읽었더라면 불경에 대한 대가를 받아내려 했겠지.

어쨌거나 머리 부분과 온몸에 수북이 난 털들도 제외한다면 괴물의 외형은 충분히 거인이라 할 만했다. 오히려 크기만 따지자면 거인왕보다 더 거인다웠다. 괴물이 우람한 군마라고 한다면 그 위에 타 있는 거인왕은 위태롭게 말에 오른 아이처럼 보일 정도였으니.

두 팔로 땅을 짚고 기어가는 모양새였으나, 그럼에도 그 거대한 덩치 때문에 성문을 통과하지 못하는 것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다행히 거인왕을 태운 괴물은 아슬아슬하게 성문을 통과했다. 그리고 펼쳐지는 참상.

괴물이 멈췄다. 왜? 사람과 괴물이었던, 이제는 생전에 어떤 모습이었는지 짐작도 되지 않는 시뻘건 고깃덩어리들에 홀려서? 그럴 리가.

[훌륭해.]

이제 레오니스 코누디스도 이 초월자의 방식에 어느 정도는 익숙해졌다. 이해하거나 공감은 못하더라도, 적당히 어울릴 정도는 된 것이다.

무엇이 훌륭하다는 말인가. 괴물들이 만들어낸 이 참상이? 아니면, 저 어둠 속에서 벌어지고 있을 전투가?

[전투는 이래야 한다. 모든 것을 걸고 부딪치는 만큼 치열해야 해.]

즐거움. 그리고 기대.

다시 한번 거인의 부름을 들은 괴물의 군대가 광란의 돌격을 개시했다. 아직까지도 도시 밖에서 대기하며 차례를 기다리던 괴물들이 성벽을 넘고, 성문을 지나 도시로 달려들었다.

* * *

“지금!”

좁은 골목에서 길쭉한 창이 튀어나와 괴물의 옆머리를 관통했다. 바닥이 축축하게 젖어 있던 거리에 괴물들이 몰려들자 어디선가 날아온 불씨가 한 순간에 거리 전체를 불지옥으로 만들었다.

“아악!”

그러나 그 불지옥조차 모든 괴물을 태우지는 못했다. 괴물들을 집어삼킨 불꽃을 보며 한순간 마음을 놓았던 한 병사는 불길 속에서 튀어나온 거대한 아가리에 몸통을 물어 뜯겼다.

푸욱-!

그때. 어디선가 날아온 창 한 자루가 병사와 괴물을 통째로 관통했다.

흐려져가는 의식 속에서, 병사는 안도했다. 의식이 흐려지는 만큼 고통 역시 희미해졌기에.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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