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9화
입 없는 네 발 괴물. 흡사 허리가 굽은 사람이 손으로 땅을 짚고 네 발로 달리는 것 같은 외형. 그러나 번들거리는 두 눈은 그 어떤 흉포한 괴물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만큼 흉험했다.
“컥!”
폴짝 뛰어오른 괴물이 그대로 병사를 덮쳤다. 반사적으로 찌른 창은 괴물의 몸통을 살짝 빗겨갔고, 괴물의 양 앞발은 병사의 목을 찢어발겼다. 갈고리처럼 생긴 발톱이 인간의 연약한 피부를 종잇장처럼 갈랐다.
목을 뜯긴 병사의 몸이 경련하는 와중에, 갈고리 같은 발톱은 이제 가슴팍을 헤집었다. 순식간에 뼈가 드러나고 밤공기에 노출된 심장이 펄떡펄떡 뛰었다.
“으아아아!”
괴물의 머리가 움푹 들어갔다. 괴물만큼이나 흉흉하게 빛나는 눈을 한 병사의 양손 망치가 괴물의 머리를 후려친 것이다.
“퉷!”
입가에 튄 괴물의 피를 신경질적으로 뱉은 병사가 망치를 고쳐 쥐고 다시 한번 내리쳤다. 머리가 반쯤 몸통에 파고든 채 부들부들 떨던 괴물을 향해서.
콰직!
이제 괴물은 아예 머리가 사라졌다. 병사는 그제야 숨을 몰아쉬었다. 고통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주책 맞게 떨리는 손에 더욱 힘을 주며 고개를 돌렸다. 속을 훤히 드러낸 채 식어가는 이름 모를 동료에게는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아마 저 녀석도 그걸 바랄 터였다. 누가 부끄럽게 제 속을 훤히 드러내고 싶겠나.
“숙여!”
누가, 어디서 소리친 것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 소리가 들렸을 때, 병사는 조금의 의심도 없이 엎어지다시피 몸을 숙였다.
우웅!
동시에, 귀가 멍하고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세찬 바람이 머리 위를 쓸고 간 것 같기도 했다. 그게 착각이 아니라는 것은 퍼뜩 고개를 들자마자 알 수 있었다.
저 앞쪽. 조금 전까지만 해도 징그러운 것들로 가득했던 곳에 깔끔하게 길이 나 있었다. 그것을 본 병사는 방금 자신의 머리 위로 지나간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빌어먹을! 진작 좀 팍팍 쏴줬으면 좋잖아!’
화살, 아니 저걸 화살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항간 산만한 괴물마저 결국 쓰러뜨린 무시무시한 물건이다. 놀리지 말고 진작 부지런히 썼으면 이렇게까지 몰리지는 않지 않았을까? 물론 아군이 휩쓸리지 않게 조심은 해야겠지만.
“후욱. 후욱.”
괴물들이 한가득 모여 있던 곳에 한 가닥이라고는 하지만 길이 뻥 뚫려버리니 잠깐이나마 숨 돌릴 틈이 생겼다. 병사는 축축하게 젖은 것이 분명한 손으로 다시 한 번 망치를 고쳐 쥐었다. 오랫동안 다뤄온 놈이지만 이 순간만큼 간절하게 붙든 적은 없었다. 지금 이곳, 이 순간, 그의 신은 저 하늘 위에서 재미보고 있을 누군가가 아니라 손에 들린 이 묵직한 녀석이었다.
‘잘 해보자 자식아. 이번만 멀쩡하게 나고 나면 번쩍번쩍하게 금칠이라도 해줄 테니까.’
쾅!
다시 한 번 벼락이 쳤다.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괴물들이 득시글거리던 곳에 휑하게 길이 뚫렸다. 그가 서 있는 곳과는 거리가 제법 떨어져 있었는데도 보는 것만으로 속이 다 시원해지는 것 같았다.
* * *
우드득!
거목을 도끼로 수십 번 정도 후려쳐서 크게 균열이 생기면 이런 소리가 날까 싶었다. 그러나 소리가 난 곳에는 거목도, 도끼도 없었다. 창 한 자루 크기의 화살을 쏘아 보내는 커다란 노포와 그를 운용하는 병사들과 술사 몇만 있을 뿐.
“또 금이 갔습니다!”
노포의 지지대 쪽에 길쭉한 금이 간 것을 본 병사가 다급히 외쳤다. 그렇게 소리치지 않아도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고, 무엇보다 그쪽만 눈이 있는 것이 아니니 굳이 그렇게 홍보하듯 외치지 않아도 될 터인데.
“제길.”
중년의 술사가 저도 모르게 욕지거리를 뱉었다. 사회적 지위가 있는 만큼 천박한 언행은 의식적으로 자제해왔던 그가 도무지 감정을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상황은 좋지 못했다.
그냥 노포가 아니다. 최대한 튼튼하게 특수 제작된 노포다. 그런 물건조차 더는 견디지 못할 만큼 부하가 걸렸다는 거다. 금이 갔더라도 당장은 더 쓸 수 있겠지만 앞으로가 문제다. 이것은 붕괴의 전조다. 몇 발이나 더 쏠 수 있을까? 두 발? 세 발? 어쩌면 그보다 더 버틸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처럼 연사를 해대서야 본래 버틸 수 있는 것의 반, 혹은 반의 반도 버티지 못할 것이다. 그만큼 술진이 부여하는 힘은 부담이 크다. 강한 힘을 부여하지만, 그만큼 부하도 강하게 걸리는 거다. 특수 제작된 물건도 버티지 못할 정도로.
그는 술진을 구성하는 술식의 고안에 참여하지는 않았으나 실전에서 술진을 운용해야 하는 만큼 술식의 원리에 대해서는 들어 알고 있었다. 때문에 이런 식의 무식한 운용은 금물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본래대로라면 아무리 군관들이 윽박을 질러대더라도 원칙을 고수해야 옳았다. 하지만.
“아악!”
“밀리지 마! 몸으로라도 막으란 말이야!”
상황이 여의치 않다. 성벽 위에는 이미 아군 반, 적 반이었다. 반쯤, 아니 그 이상 밀려났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 그런 와중에도 적은 끊임없이 밀려 들어오는 데 반해 아군의 증원은 더디기만 했다. 다른 쪽의 상황도 비슷할 테니 어쩔 수 없는 것이겠지만………
“짐작하고 있겠지만, 오래 버티지 못할 거요.”
그 말에, 이미 굳어있던 군관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얼마나 버티겠습니까.”
“글쎄. 운이 좋으면 세 번 정도?”
“운이 나쁘면?”
“그건 생각하지 않는 게 이롭지 않겠소?”
눈으로 보이는 손상은 아직 그리 크지 않다. 하지만 일단 손상이 생겼다는 것이 중요하다. 막혀 있던 물길이 한번 트이면 순식간에 쥐구멍이 개구멍이 되고, 곧 뻥 뚫린 대로가 되는 것이다.
“알겠습니다.”
씹어 뱉듯 답한 군관의 눈빛이 복잡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할 만했다. 끝까지 버텨야 할지, 아니면 병력을 물려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 것이겠지. 위쪽의 명령 없이 병력을 물리는 것이야 군법으로 처벌받을 수도 있는 중죄지만, 저 끝도 없이 밀려오는 괴물들을 상대로 노포의 보조 없이 버티는 것은 자살 행위나 다름없어 보였다. 죽기 살기로 버틴다고 해도 과연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쾅!
한 번. 거대한 화살이 괴물들 십여 마리를 관통하고, 그 몇배를 날려버리며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 병사들에게 숨 돌릴 틈을 주었다.
쾅!
또 한 번. 노포의 포신에 굵은 금 수십 가닥이 생겨났다. 마법사들의 표정이 구겨지고, 군관들의 낯빛이 시체처럼 창백해졌다.
콰앙! 우지직!
빛살처럼 날아간 화살이 괴물들을 꿰뚫고 뭉개는 것과, 노포가 박살 난 것은 동시였다.
“더는 무리요!”
“저도 눈이 있습니다!”
첫만남에서 상관을 대하듯 깍듯했던 태도는 이제 온데간데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 자리의 누구도 그런 것을 신경 쓰지는 않았다.
“퇴각해야 하오.”
“아직 명령이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그럴 겨를도 없는 것이겠지! 병사들을 보시오! 저들이 얼마나 더 버틸 수 있겠는가!”
“죽는 순간까지!”
챙! 하는 소리. 어느새 칼집을 벗어난 군관의 검이 술사의 목 앞에 멈춰 있었다. 퇴각을 종용하던술사는 목 바로 앞에서 느껴지는 서늘한 예기에 입을 다물었다.
“이곳을 지키라 명 받았으니 따르는 겁니다. 우리는 군인이니까.”
“…….”
“우리와 함께 전장에 나선 이상 여러분도 군인입니다. 그리고 군인은 상관의 명에 따른다. 그 한 가지만 알면 됩니다.”
입을 꾹 다문 술사가 힘겹게 고개를 까딱였다. 그제야 목 앞에 멈춰 있던 검이 내려갔다.
“이제 노포는 쓸 수 없는 겁니까?”
“그렇소. 저걸 만든 장인들도 손을 쓸 수 없을 거요. 안에서부터 망가졌을 테니까.”
“그렇군요. 그렇다면…술진을 해체해주십시오.”
“술진을?”
“혹시 모르는 일 아닙니까. 우리가 물러난 후든, 죽은 후든, 성벽이 놈들의 손에 넘어간다면…….”
“…무슨 말인지 이해했소. 그리 하지.”
술진의 술식구조 자체는 그리 대단하지 않다. 하지만 여러 사람의 노력이 깃든 물건이었다. 특별한 지식이 필요하지는 않지만 술사의 노동력이 적잖이 들어가는 물건. 그런 것을 고스란히 적의 손에 넘겨줄 수는 없지 않은가.
만드는 데는 여러 손이 필요하지만, 망가뜨리는 것은 쉽다. 군관의 서슬 퍼런 위협에 주눅들어 있던 술사들이 일제히 술진에 몰려들었다.
* * *
역사의 다른 이름은 전쟁의 역사일 것이다. 이성과 감정을 지닌 것들은 늘 각자의 욕망을 위해 서로 다퉈왔고, 피 흘려왔다. 그 과정에서 전쟁의 기술은 계속해서 발달해왔다.
무기라는 것 역시 전쟁의 기술 중 한 부류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보다 효율적으로 적을 죽이기 위해 기술자, 혹은 전쟁 전문가들이 최고의 무기를 만들기 위해 열심히 머리를 굴려 갖가지 무기들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결국 최고의 무기는 탄생하지 않았다.
애당초 최고의 무기란 무엇인가. 가장 효율적으로 적을 죽일 수 있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무기가 아닐까? 하지만 무기의 효율은 일정하지 않다. 살상의 효율은 소유자의 실력에 따라 달라지며, 무엇보다 때와 장소에 따라 달라진다.
예를 들어, 광활한 전장에서는 활이나 창이 효율적일 것이다. 멀리서 적을 쏴 맞히거나, 최대한 길게 뻗어 적을 먼저 찌를 수 있는 창이 빛을 볼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반면, 협소한 전장에서 적을 맞아 싸워야 할 때는 활과 창이 활약하기가 힘들다. 적은 날아오는 화살을 피해 몸을 숨길 것이고, 창은 장점이 되어야 할 길이 때문에 이곳저곳에 걸려 제 힘을 내지 못할 터. 그러니 그런 곳에서는 차라리 짧은 검 같은 것이 유용할 것이다.
콰직!
지금 성벽 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투가 바로 그랬다. 그리 넓지 않은 공간에 수많은 사람과 괴물이 뒤엉켜 발 디딜 곳을 찾기 힘들 정도로 붐볐다. 그런 곳에서 창은 제 힘을 발휘하기 힘든 무기였다. 실제로 병사들 역시 짧은 도끼나 검에 한 손 방패 같은 것을 들고 괴물들과 드잡이질을 벌이고 있었다.
촤악!
그러나, 오직 군터만이 예외였다. 그는 야전에서와 다를 바 없이 그의 창을 휘둘렀다. 창이 그리는 궤적에 걸린 것은 모두 갈라지고 부러졌다. 사람과 괴물이 뒤엉켜 혼잡스러운 성벽 위 전장에서 오직 그의 주변만이 비교적 한산했다. 그의 주변, 창이 닿는 거리 안에는 오직 뭉개지고 갈라진 살점만이 가득했다.
“후우.”
창을 네 번 휘둘렀고, 지금 한번 숨을 몰아쉬었다. 초월자의 마음과 기세는 전장을 뒤엎고도 남음이 있었으나 그를 발현하는 육신은 인간의 것이었기에.
그래도 피로는 그리 크지 않다. 역겨운 피로 목욕을 하다시피 한 외관과는 다르게, 그는 아직 여유로웠다. 하지만 그의 군대는 그렇지 못한 듯했다.
“…….”
이성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 괴물들이라고 일말의 본능은 남았는지, 처음 앞뒤 안 가리고 달려들던 것들이 이제는 조금씩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단번에 대여섯의 동료가 죽어 나자빠진 것을 보고 놈들도 달려들기를 주저했다. 덕분에 군터는 잠깐의 고요 속에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릴 수 있었다.
[밀리고 있다. 술진의 힘도 효력이 다한 거겠지. 물러나려면 지금이다.]
이가로프의 참견에 귀를 기울인 것은 아니나, 군터도 비슷한 생각이었다. 여기서 더 버티는 건 무모한 짓이다.
* * *
둥둥둥-!
전고가 울렸다. 정신없이 싸우고 있던 병사들은 전고가 울리는지, 천둥이 치는지 신경 쓸 겨를도 없었으나 지휘관들을 달랐다. 전투를 지휘하면서도, 역겨운 괴물의 모가지에 칼을 쑤셔 박으면서도 귀를 열고 있던 그들은 기다리던 신호가 떨어지자 지체없이 소리쳤다.
“퇴각하라-!”
“대열을 유지해! 후열부터 물러난다!”
전장에서 가장 위험한 때는 적에게 뒤를 보이는 순간이다. 뒤를 잡히는 순간 처참하게 물어뜯기는 것은 기정사실. 그렇기에 지휘관이 병력을 운용하며 가장 신경 써야 할 순간은 바로 적에게 등을 보이며 퇴각할 때다.
“아니. 내가 마지막이다.”
“하지만…….”
“나는 이미 명령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무운을.”
먼저 물러나라 권하는 부관에게 단호하게 고개를 저은 보리스가 점점 더 많아지는 적을 보며 이를 갈았다.
“정말이지 끝도 없이 몰려오는군.”
“먼저 가시지요. 뒤는 제가 맡겠습니다.”
“건방진 소리를.”
한숨을 내쉰 그라모트가 체념하고 보리스의 뒤편에 섰다.
“시가전에서만은 빠지셔야 합니다. 그쪽은 그쪽대로 준비를 마쳤을 테니까요.”
“그건 그때 가서 보면 될 일이다.”
보리스가 검을 쥐고 전면의 괴물에게 달려들었다. 널리고 널린 것들과 다른, 이질적인 외관의 괴물이었다. 덩치도 더 크고, 뚫린 주둥이도 있었으며, 심지어 날개 같은 것도 있었다. 크기가 작은 것으로 보아 날지는 못하는 듯했지만.
쾅!
힘 하나만은 엄청났다. 보리스가 전력으로 휘두른 검이 놈의 팔뚝에 막혔고, 밀어내지도 못한 것이다.
보리스의 눈매가 불쾌함을 담아 꿈틀거렸다. 이를 악문 보리스가 있는 힘껏 괴물을 밀어내고, 동시에 그라모트가 측면을 잡았다. 그의 손에 들린 것은 날 달린 무기가 아닌 육중한 철퇴였다.
“하압!”
괴물의 눈은 보리스에게 향해 있었으나, 그런 와중에도 측면에서 날아온 철퇴에 신속하게 반응했다. 대충 휘두른 것 같은 한 팔과 그라모트의 전력이 담긴 철퇴가 부딪쳤으나 억눌린 비명을 흘리며 밀려난 것은 그라모트였다.
‘건방진.’
보리스는 괴물의 시선이 한 순간, 밀려나는 그라모트에게 향한 것을 놓치지 않았다. 애초에 그럴 목적이긴 했지만, 괴물의 신경이 분산된 것을 확인하니 기쁨보다는 분노가 치밀었다. 이 역겨운 괴물에게 자신이 그만큼 얕보였다는 뜻이 아니겠나.
보리스가 온 몸의 힘을 짜냈다. 육체의 힘을 다 쏟는 것과는 다르다. 모든 신경, 모든 의지를 더한 것. 그야말로 전력.
그것을 이끌어낼 수 있었던 것은 그라모트가 만들어낸 자그마한 틈 덕이었다.
한 호흡. 아니, 그보다도 더 짧다.
‘갑각이 둘러진 곳은 피한다.’
검을 막은 팔뚝에 있는 갑옷 같은 피부. 그와 같은 것이 목덜미와 양쪽 가슴, 허벅지에도 있음을 이미 눈으로 확인했다.
“흐읍!”
밀어내며, 동시에 밀려났다. 그라모트에게 신경이 분산됐기 때문인지 전력으로 밀쳐내니 조금은 밀렸다. 물론 그래도 오히려 밀친 보리스 쪽이 더 밀려났지만, 상관없다. 거리만 벌리면 그걸로 됐다.
서걱-
재차 휘두른 검. 빠르고 날카롭다. 이번만은 괴물도 제때 반응하지 못했다. 다리 안쪽을 베인 괴물이 거칠게 포효하며 몸을 뒤틀었다. 하지만 이미 보리스의 검은 괴물의 옆구리를 갈라가고 있었다.
“흐읍!”
보리스가 거칠게 숨을 들이켰다.
호흡이 모자라다. 이보다 훨씬 더 강하고 거칠게 움직이면서도 숨소리 한번 내지 않던 부친과 달리, 보리스의 심장은 단 두 번 검을 그었을 뿐인데 벌써부터 터질 듯 요동치고 있었다.
“으아아!”
튕겨났던 그라모트가 다시 달려들었다. 맥없이 밀려났던 방금 전과 달리, 이번에는 그의 철퇴가 괴물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괴물이 재차 고통스레 울부짖었다.
‘노려보면 어쩔 테냐.’
뒤통수를 맞았는데도 괴물의 눈은 움직이지 않았다. 놈의 본능이 어느 쪽이 더 위험한지를 알려주고 있는 것일 터. 칭찬할 만한 반응이지만, 거기까지다. 한 번의 호흡으로 보리스는 여력을 찾았다.
푸욱-!
힘껏 찌른 검이 괴물의 속살을 파고들어갔다. 사람으로 치면 명치쯤? 역시 갑각이 존재치 않는 부위였다. 제법 깊게 파고들었다는 확신이 듦과 동시에 보리스는 몸을 날렸다. 괴물에 올라타다시피 한 그가 체중까지 더해 검을 힘껏 눌렀다. 균형을 잃은 괴물이 휘청거렸고, 그라모트의 철퇴가 괴물의 한쪽 무릎을 후려쳤다.
쿵!
쓰러진 괴물 위. 보리스가 허리춤의 단검을 뽑아 냅다 괴물의 눈에 내리 찍었다. 쓰러지고 나서도 자신을 노려보던 바로 그 눈이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