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터-998화 (998/1,064)

998화

쿵!

또 하나의 거대 괴물이 쓰러졌다. 술진에 의해 강화된 노포의 위력은 실로 가공할 정도여서, 화살 한 발 한 발이 날아들 때마다 괴물의 거체가 크게 부서지고 흔들렸다.

“크으…….”

쓰러지는 거대 괴물의 몸뚱이가 성벽에 부딪친 탓에, 성벽 위에 있던 로우렌은 꼴사나운 꼴을 피하기 위해 황급히 몸을 낮춰야 했다. 거의 쭈그려 앉다시피 한 그가 비릿한 먼지 연기를 털어내며 몸을 일으켰을 때는 또 하나의 거대 괴물이 머리가 반쯤 날아간 채 휘청거리고 있었다.

‘별 것 없군.’

크기만 컸지, 실질적으로는 큼직한 화살 받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물론 저 무식한 노포와 노포에 힘을 불어넣는 술진 덕분이지만, 어쨌거나 거대 괴물이 처음 보여준 존재감에 비해 싱겁게 무너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런데…….’

몸을 다 일으킨 로우렌이 대뜸 눈살을 찌푸렸다.

성벽에 반쯤 부서진 머리를 박고 미끄러져 쓰러진 거대 괴물. 그 정도는 아니라도 어느 정도 성벽에 가까워진 채 쓰러진 괴물들. 그렇게 쓰러진 괴물들이 여섯. 그들의 경악할 정도로 거대한 몸뚱이가 널브러지니 그 자체로 작은 언덕 같았다. 그리고 그 언덕은 솔롬의 높다란 성벽을 향해 뻗어 있으니.

‘잠깐.’

성벽 위에서 보이는 광경이 조금 전보다 작아 보이는 것 같았다. 착각일까?

“길을 놓는군.”

옆에서 들려온 담담한 목소리. 그 목소리에서 로우렌은 답을 찾았다. 길. 그렇다. 길이다.

“짐작하셨습니까?”

“아니. 의심했을 뿐이다.”

그의 주인. 크렘보르의 공자님께서는 여유로워 보였다. 기분은 썩 좋아 보이지 않았지만.

“그겁니까? 전장에서는 일단 모두 의심하고 봐라?”

“그래.”

모든 격언이 그러하듯, 많이들 아는 격언이지만 그대로 행하는 이는 정말 드물다.

“단순하지만 효과적이지.”

“그럼…이제 시작이겠군요.”

보리스가 고개를 끄덕이려던 순간. 도시 안쪽에서 들려온 괴성이 그들의 주의를 빼앗았다. 무표정하던 보리스의 안색이 굳어지고, 로우렌도 덩달아 이변을 직감했다.

그제야 그들은 보았다. 어두운 허공의 균열. 거기서 기어 나오는 괴물들.

두두두!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밀려오는 성벽 밖의 적들.

“공자님.”

“우리의 임무는 이 남벽(南壁)의 사수다.”

일단의 무리가 가장 먼저 떨어진 괴물에게 달려들고, 곧 쓰러뜨리는 것을 보고 내린 결정이었다.

성주 대리로서 한동안 솔롬을 통치했던 보리스는 솔롬의 전력에 대해 누구보다 면밀히 파악하고 있었다. 그가 아는 한, 저런 무력 부대는 솔롬에 존재치 않았다. 거리가 너무 멀어 자세히 살피기는 어렵지만, 저들이 솔롬 소속이 아니라는 것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

‘용아인가.’

줄카의 수하들이라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름이다. 저들이 정말 그 용아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으나 도시 안에 괴물들이 나타날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 움직이고 있는 것만은 확실해 보였다. 그렇다면 도시 안쪽의 이변은 일단 저들에게 맡겨도 될 것이다. 따로 지원 요청을 받았다면 모를까, 그런 것도 아니었으니.

두두두-!

어둠이 꿈틀거린다. 눈에 힘을 주고서야 그것이 어둠이 아니라 무수한 점들의 집함임을 알았다. 그리고 거기서 한 호흡 뒤에는 그것들이 점이 아니라 하나하나의 괴물들임을 알았다.

“기름을 부어라! 불을 놔!”

“바람이 없습니다!”

그라모트의 말에 보리스가 재차 외쳤다.

“상관없다! 보지도 못하고 목을 물어뜯기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느냐!”

눈에 잔뜩 힘을 주고 있어도 몰려오는 적들을 살피기가 힘들다. 더 가까워지면 보이기야 하겠지만, 보통의 병사들은 그렇지 못할 터였다. 하늘은 어둡고, 대다수 괴물들은 위장이라도 한 것처럼 어둠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성벽 위에 놓인 횃불의 빛만으로는 저것들을 다 밝히지 못한다.

“기름을 부어!”

두번의 반문은 없었다. 병사들이 보리스의 지시대로 기름을 뿌렸다. 성벽 아래로 떨어진 기름의 일부는 땅 위로, 일부는 성벽에 머리를 박고 쓰러진 거대 괴물의 몸뚱이 위로 뿌려졌다.

화르륵!

그리고 그 바로 위에 불씨가 닿으니, 크게 피어난 불꽃이 어둠을 밝혔다.

“쏴라!”

어둠이 걷히고 적의 모습이 보였다. 지휘관들의 지시 아래, 일찌감치 대기하고 있던 궁병들이 일제히 활 시위를 놓았다.

* * *

네 다리로 뛰는 것들이 가장 앞에서 몰려왔고, 두 다리로 뛰는 것들이 그 뒤를 이었다. 당장 눈에 보이는 머릿수 또한 네 다리들이 가장 많았다. 하나같이 정상적으로 생겨 먹은 놈이 없었다. 머리가 두 개 달린 놈, 사마귀와 거미를 섞어 놓은 것처럼 생긴 주제에 크기가 어지간한 집 한 채 만한 놈, 날개 같기도 하고 꼬리 같기도 한 것을 땅에 찍어가며 펄쩍 뛰어대는 놈 등.

성벽 위의 병사들은 아직 보지 못하는 것들이 군터의 눈에는 바로 앞에서 보고 있는 것처럼 뚜렷하게 보였다.

[기억나는군. 예전에도 지금과 같았지. 전장을 피로 적신 후에 본격적으로 나서는 것. 지금 보니 이게 놈의 방식인가 싶어.]

거대한 괴물의 몸을 타고 오른다고 해도 성벽 위에 오르기에는 부족하다. 전투태세를 굳힌 성벽 위의 적을 밀어내는 것은 어지간한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아무리 두려움 없이, 앞만 보고 달리는 괴물 군대라고 해도 말이다.

슈슈슝!

화살 비가 쏟아질 때마다 괴물의 무리가 출렁였다. 그러나 수가 줄어드는 것 같은 느낌은 조금도 없었다. 괴물들은 그만큼 많았고, 끝없이 밀려오고 있었다. 그에 한참이나 위에서 그것들을 내려다보며 냉정함과 담담함을 유지하던 이들조차 점점 약간의 불안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열심히 활 시위를 당기다가 잠시 숨을 고르고 있던 병사, 잭도 그 중 하나였다. 마치 개미를 밟아 죽이듯이 속 시원히 활을 쏘던 그는 점점 가까워지는 괴물들을 보며 살짝 위축된 상태였다.

“쉬지 마라.”

그런 소리가 들린 듯했다. 당황하여 소리가 들렸다고 생각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남들보다 머리 두 개는 더 큰 사내가 커다란 활 시위를 당기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들의 장군이자 솔롬의 성주. 단 한번도 사사로이 대화를 나눈 적이 없으나 친숙하고, 그 이상으로 두렵게 느껴지는 존재.

그가 자신처럼, 동료들처럼 활을 쏘고 있다. 특유의 그 감정 없는 얼굴로 묵묵히. 그 모습 어디에서도 평소와 다른 점은 찾아볼 수 없었다.

방금 그 말. 쉬지 말라는 말은 장군께서 한 말이었을까? 아니면 환청이었을까? 머리는 후자라고 하는데, 가슴은 전자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굳었던 몸이 어느새 기분 좋게 풀려 있다. 저릿하던 손에는 힘이 가득하다. 화살을 수십 발이라도 더 쏠 수 있을 것 같았다.

뿌드득!

활 시위를 힘껏 당긴다. 더는 당길 수 없을 정도로 당긴 다음, 시위를 놓았다. 비효율적인 힘의 낭비였으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 * *

[대단해.]

이가로프는 아첨을 모르는 사내였다. 왕자로 태어나 살았으며, 죽은 후에는 신전의 기둥 속에 갇혀 원한의 칼을 갈아온 그였으니 다른 누군가에게 잘 보이기 위해 입을 놀리는 법 따위 알 턱이 없었다. 그러니 이것은 순수한 감탄이었다.

가벼운 말 한 마디로 흔들리던 전의를 붙들었다, 아니 오히려 더 크게 불을 질렀다. 지금, 열정적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열심히 활을 쏘아대는 병사들을 보라.

[어떻게 한 거지? 저들의 정신을 건든 건가?]

역시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무시당한 셈이지만 불쾌하지는 않았다.

한때는 왕위를 이을 왕자였던 이가로프였다. 생전의 그였다면 이런 대접은 상상도 못했을 것이며, 그런 대접을 받으면 참지 않고 칼을 뽑아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왕자가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분노로 달아오를 머리도, 세차게 뛸 심장도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상대가 상대인 만큼 이런 상황 자체에 익숙해진 것이 컸다.

[저쪽도 만만치 않군.]

끝도 없이 화살의 비가 쏟아져 내리는데도 괴물들의 기세는 조금도 줄지 않았다. 문제는 머릿수도 줄지 않는 것 같았다는 점이다. 분명 수도 없이 죽거나 쓰러지고 있을 터인데도 머릿수가 줄어드는 것 같지 않다는 건 그만큼 괴물들의 수가 많다는 뜻.

[놈이 작정하고 긁어 모았나보군.]

“그래.”

쉬지 않고 활 시위를 당기던 군터도 그 말에는 대꾸했다.

그가 보기에도 괴물들의 수는 상당했다. 괴물이 아니라 적이라고 표현한다면, 그는 단 한번도 이만한 수의 적을 상대해본 적이 없었다. 물론 이 정도 수의 적이 다른 세 곳에도 비슷하게 있다는 전제 하에 말이다.

크고 작은 괴물들. 일대에 존재하는 모든 괴물을 끌어 모은 것 같은 압도적인 머릿수. 아무리 담대한 전사라도 이 정도의 적과 맞서고 있으면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사람의 마음은 강철이 아니다. 마음은 육신과 마찬가지로 지치고, 상처 입으며, 꺾인다. 군터의 한 마디는 병사들의 마음에 용기와 전의를 심었지만, 그것도 오래 가지는 못할 터였다. 아무리 건강한 씨앗이라도 메마른 모래에서는 싹을 틔우지 못하는 법이니.

“온다!”

결국 괴물들은 성벽에까지 이르렀다. 놈들은 먼저 쓰러진 거대한 괴물과 앞서 달려가다 죽어 나자빠진 다른 괴물들의 몸뚱이를 발판 삼아 뛰어올랐다. 대부분은 성벽까지 닿지 못하고 떨어지거나, 설령 간신히 닿았더라도 기다리고 있던 병사들의 창에 찔려 허무하게 추락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 가지 않았다.

그렇게 떨어진 몸뚱이들이 쌓이고 쌓이면서 더 높이 뛰어올라 기어이 성벽 위에 발을 딛는 괴물들이 늘어났다. 처음에는 방패로 밀어내는 식으로 쉽게 몰아낼 수 있을 정도였으나, 곧 그것도 한계에 다다랐다. 성벽 곳곳에서 거친 기합과 고함 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 * *

“아악!”

“방패! 방패로 밀어붙여!”

“으으! 찔러! 찌르라고!”

전투 경험이 풍족하다면, 그래서 전투 중에도 생각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여유를 가진 위화감을 느낄 것이다. 그리고 곧 그 위화감의 정체를 깨달으리라.

‘입이 없군.’

괴물들이 본격적으로 성벽 위에 닿기 시작할 때부터 활을 내던지고 칼을 뽑아 든 군터는 병사 대여섯이 막아야 할 면적을 홀로 막아섰다. 그의 칼이 한 번 움직일 때마다 반드시 한 마리 이상의 괴물이 피를 뿌리며 성벽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그의 칼날에 피를 흩뿌린 괴물이 벌써 열 마리가 훌쩍 넘었다.

그렇게 열 마리가 넘는 괴물을 베어 넘기는 동안, 군터는 그가 벤 괴물들의 대다수가 입이 없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입이 없다. 때문에 그런 괴물들에게서는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놈들이 덤벼들 때도, 칼에 베여 쓰러질 때도.

[이 또한 놈의 악취미지. 예전에도 똑같았어. 뒤틀린 것들은 이런 식으로 입이 없었지.]

뒤틀린 것. 아간투스베록의 영향을 크게 받아 외형을 비롯한 여러 부분이 변이한 괴물들을 일컬었다. 아간투스베록과 본격적으로 맞서게 되면서 이가로프로부터 일찍이 들은 이야기이기도 했다. 그는 뒤틀린 것들을 약한 것들이라 부르기도 했다. 작고 약한 존재이기에 아간투스베록의 영향력을 더 강하게 받는다는 것이다.

그 논리가 맞는지 아닌지는 둘째 치고, 그가 한 말 중 한 가지는 맞아떨어졌다. 아간투스베록의 괴물 군대 중 작은 것들, 그러니까 뒤틀린 것들의 수가 가장 많았다. 그게 지금 성벽 위의 싸움이 한쪽만 일방적으로 목소리를 내는, 조용한 싸움이 된 이유였다.

푸욱-!

그러나 조용한 싸움이라고 해서 그 치열함이 덜하지는 않았다. 군터는 방패로 괴물을 밀어내다가 도리어 밀려 균형을 잃고 쓰러진 병사를 보았다. 괴물의 육중한 앞발이 병사를 향해 내리 꽂히던 순간, 깔끔하게 목 아래가 날아간 머리통이 괴물의 머리를 후려쳤다.

[신기로군.]

이가로프가 감탄했다. 그는 군터의 영혼 감옥 속에서 군터가 보는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니 방금 군터가 어떻게 병사를 구했는지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한번 휘둘러 괴물의 목을 베고, 직후에 칼을 비틀어 넓은 면으로 허공에 떠오른 머리통을 후려쳐 날려보냈다. 눈앞의 괴물을 상대하면서 다른 쪽의 상황을 파악하는 시야도 시야지만, 소름이 돋을 정도로 섬세한 힘 조절이 특히 감탄스러웠다.

콱!

입이 없는 대부분의 사족 보행 괴물들과 달리 원형의 구멍 같은 입을 가진 네 다리의 괴물이 화살처럼 빠르게 날아들었다. 군터는 그것을 보지도 않은 채 한 손으로 낚아챘다. 구멍 같은 입의 살짝 뒤, 목으로 추측되는 부위였다.

쾅!

목덜미를 붙들린 괴물이 반응하기도 전에, 군터는 괴물을 무기처럼 휘둘러 입 없는 괴물을 후려쳤다. 군터의 괴력 때문인지, 아니면 구멍 입의 괴물이 생긴 것보다 더 튼튼했기 때문인지, 군터가 휘두른 괴물은 그럭저럭 형체를 유지한 반면 그에 부딪친 입 없는 괴물은 몸의 일부가 찌그러져 크게 튕겨 나갔다.

쾅! 쾅!

그렇게 한 마리. 또 한 마리. 군터는 아예 칼 대신 입 달린 괴물을 무기처럼 휘둘렀다. 그러다.

우드득!

제법 버티던 입 달린 괴물의 몸뚱이가 결국 본래의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망가졌다.

[얼마간은 버틸 수 있을지 모르지. 하지만 결코 오래 가지는 못해.]

군터가 흐물흐물해진 괴물의 사체를 내던졌다. 그리고 왼쪽에서 덤벼들던 괴물을 주먹으로 후려쳤다. 머리가 으깨진 괴물이 힘없이 주저앉았다.

‘그래.’

성벽 위의 상황은 이미 조금 전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조금 전까지는 성벽에 올라온 괴물들을 밀어내는 모습이었다면, 지금은 양측이 성벽 위에서 뒤엉켜 싸우고 있었다.

‘그렇겠지.’

그리고, 성벽 아래에서 우글거리는 괴물의 수는 조금도 줄지 않은 것 같았다. 적어도 육안으로 보기에는 그랬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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