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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997화 (997/1,064)

997화

쩌적-!

모두가 들었으나 대부분이 들은 줄도 모른 채 넘어갔다. 그들이 무신경해서가 아니라, 도시 밖에서 다가오는 위협이 그들의 사고를 독점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다가오는 적에 주의하면서도 분명하게 들린 소리에 집중한 일부가 있었다. 그들은 잠시나마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보았다.

쩌적-! 쩌저적-!

갈라지는 허공. 그 안에서 튀어나온 무언가.

그것은 길쭉한 나뭇가지 같기도 하고, 사지 중 하나나 꼬리 같기도 했다. 하지만 뭐가 되었든, 평범한 생물의 몸뚱이가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했다.

“저, 저기……!”

그것들이 균열을 비집고 나오기 전. 먼저 알아차린 이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들은 이미 성벽 위에서, 성벽 밖의 적을 맞이하느라 여력이 없었던 것이다.

* * *

“도대체가,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도 도무지 변하지를 않는군. 진부하기 짝이 없어.”

“늘 먹혔었으니까요. 그렇게 따지면 이 칼도 그렇지 않습니까? 수백 년 전이나 지금이나, 전사들은 여전히 이 자그마한 쇠붙이를 들고 있지요.”

“음. 뭐, 그도 그렇군.”

떠들썩한 성벽 위의 상황과 달리, 외성 시가지는 고요했다. 본래 외성 곳곳에 흩어져 살던 시민들은 대피소, 그러니까 내성에 인접한 곳으로 몰려든 탓에 외성의 외곽지역은 유령들의 거리라고 해도 고개를 끄덕일 만큼 적막에 휩싸여 있었다.

그런 거리를, 일단의 무리들이 거닐었다. 작은 무리는 2, 30명 정도. 큰 무리는 5, 60명 정도 되어 보였다. 그들은 전신을 가리는 철갑을 입고 있었고, 통일되지 않은 개성 넘치는 무기들을 들고 있었다. 한 손으로 드는 것이 가능할까 싶은 거검부터 양날 도끼에 철퇴, 도리깨, 심지어 굵직한 쇠사슬을 땅에 질질 끄는 이도 있었다.

손에 든 무기가 제각각인 것과는 달리 전신을 가리는 중갑을 걸친 그들. 얼굴을 가리는 투구의 눈구멍 사이로 불그스름한 안광이 흘러나왔다.

“제아무리 거인의 힘이라도 한꺼번에 이렇게 많은 놈들을 통제하지는 못해. 간신히 목줄만 걸어 놓은 수준일 거다. 들여보내는 것까지는 할 수 있지만, 그 이후는 손을 떠났을 거란 말이지.”

“이해했습니다.”

“어렵게 생각할 것 없어. 이건 사냥이다. 예전에야 대단했다고 해도, 지금은 영락한 짐승이나 마찬가지지.”

“언제부터 그렇게 박식해지셨습니까?”

“전하가 하신 말씀을 그대로 읊는 것뿐이야.”

“아하. 어쩐지.”

“말투가 심히 불손한데?”

“나중에 합시다. 지금은 저것들과 뒹굴어야 하니까.”

누가 대장이고 누가 부장인지. 장대한 체구들 사이에서도 특히 장대한 체구를 지닌 사내, 카니악이 허공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이질적인 존재를 눈에 담았다.

‘지저분한 놈들 같으니.’

균열 너머에서 허우적거리는 것들. 아직 제 모습을 다 보이지 않았음에도 참기 힘든 악취가 먼저 밀려온다. 저것도 나름 존재감이라면 존재감이다.

아직 다 드러나지 않은 외관을 보고 있자면 기괴하다는 생각 밖에 들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이 불쾌감의 이유는 아니었다.

친숙하다는 것. 그게 그것이 문제다. 동질감에서 비롯된 친숙함. 몸 안에 깃든, 지금은 영혼에까지 녹아 든 것 같은 피가 반응한다. 이런 것을 피가 당긴다고 하던가? 실로 역겹기 그지없다.

그르르-

조심스러운 울음. 이쪽을 향한 경계심이 느껴진다. 깨끗한 머리로 사고를 할 수 있을 리 없으니 저것은 본능적인 반응이라 봐야 할 터.

‘그래. 이쪽을 봐라.’

되도록 술래잡기는 피하고 싶었다. 민간의 피해를 우려해서가 아니라, 저것들이 분별없이 날뛰는 것이 아간투스베록이 의도한 바일 것이기 때문이다. 적의 계획은 되도록 망쳐 놓는 편이 좋지 않겠는가.

‘그러고 보면 그 놈도 꽤 웃기는 놈이란 말이지.’

분명 적의 의도를 짐작했을 터인데, 그럼에도 놈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굴었다. 저 마물들이 날뛰어대면 가장 크게 피를 보는 것이 누구인지는 굳이 따져보지 않아도 명확한데 말이다.

그런 영문 모를 여유가 아니꼬워서, 나서지 말고 뒷짐만 지고 있을까 잠시 고민했을 정도였다. 뭐, 결국 이렇게 저 지저분한 것들과 마주보는 꼴이 되기는 했지만.

“서두를 것 없다. 저것들에게 동료애 같은 것은 없으니까. 한 마리씩 차분하게 처리하면 그만이야.”

“그러면 피해가 제법 생기지 않겠습니까.”

“거기까지 신경 쓸 필요는 없다.”

같잖은 여유를 부리는 성주 놈에 대한 반발심 때문은 아니다. 아무리 반 백치나 마찬가지인 상태라지만, 그럼에도 마물이라는 것들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위험한 사냥감을 상대로 조바심을 내다가는 도리어 사냥하는 쪽이 크게 물리는 수가 있다. 사냥을 하러 와서 사냥감에게 물어 뜯기다니. 그만한 불상사가 있겠는가.

“저놈부터 시작하지.”

카니악이 가장 강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마물을 가리켰다. 놈은 가장 거대한 균열에서 이제 막 전신을 드러내고 있었다.

“내가 먼저 간다. 신호는 따로 하지 않을 거다.”

함께 해 온 세월이 못해도 수십 년이다. 그리 짧지 않은 그 시간. 농담 따먹기나 하면서 보내지는 않았다. 게다가 같은 피를 받아들인 덕에 그들 사이에는 경험만으로는 쌓을 수 없는 본질적인 유대감이 존재했다. 그리고 그 유대감은 이런 싸움터에서 특히 빛을 발했다.

“후읍!”

깊게 숨을 들이마신 카니악이 힘껏 땅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육중한 전신갑옷을 입은 데다, 통짜 쇠로 된 철퇴까지 들고서 새처럼 비상하는 그의 모습은 균열을 통해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마물들만큼이나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콰앙!

격렬한 충돌. 카니악의 몸이 반대 방향으로 튕겨 나갔다.

“쳇!”

뛰어오른 것보다 빠르게 추락한 카니악이 땅을 뒹굴었다. 흙먼지가 투구의 숨구멍을 통해 입 안까지 흘러 들어와 기분이 아주 더러웠다.

이런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아무리 무거운 갑옷을 입고 거대한 무기를 든다고 한들, 사람의 규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몸뚱이로는 거대한 괴물들과 제대로 맞붙기가 힘들다. 하물며 몸을 공중에 띄운 상태에서는 더더욱.

하지만 뭐, 그래도 괜찮다. 처음부터 저걸 단박에 때려잡겠다는, 현실감 떨어지는 생각은 한 적 없었으니.

촤르륵-

실제로 귀로 들은 소리는 아니다. 다만, 만약 실제로 소리가 난다면 이렇지 않을까 싶었다.

추락하는 마물. 그 위로 날아드는 형형색색의 거대한 그물들.

거창한 외형에 비해 물리력은 대단하지 않다. 장정 두어 명이 한번에 힘을 쓴다면 어느 정도는 뜯어낼 수 있을 정도니까. 법구에 각인의 힘까지 더해진 결과물이라고 하기에는 아무래도 너무 초라하다.

그러나.

카아아아-!

어지간한 건물 두어 채를 합쳐 놓은 수준의 덩치. 게다가 일반적인 괴물도 아닌 마물. 그런 존재가 저 초라한 그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괴성만 토한다.

저것이 그물의 진정한 효용이다. 범상한 존재들을 상대로는 별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지만, 어느 정도 이상의 존재에게는 강대한 구속력을 발휘하는. 그런 면에서 보면 사실 그물보다는 거름망에 더 가까울지도 모른다.

뭐, 그거야 어쨌든.

“하압!”

카니악의 철퇴가 장작을 쪼개는 도끼처럼 뚝 덜어졌다. 장작 대신 철퇴를 맞은 것은 비스듬히 널브러진 마물의 앞발이었다.

콰직!

손맛은 확실했다. 하지만 놈은 마물아니랄까봐 발끝까지 기괴하게 생겨 먹었다. 발가락이 없는 대신 나무뿌리 같은 것이 여러 가닥 땅을 파고 들었다. 이제 막 허공에서 뚝 떨어졌는데, 마치 몇 년 동안은 그 자리에 자리잡은 채 뿌리내린 것 같은 모양새였다.

카니악의 철퇴는 그 뿌리의 일부를 깨부쉈다. 손맛은 확실했으나 놈에게 얼마나 타격을 줬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한 번으로 안 되면 수십, 수백 번 두들겨주면 그만이지.’

그물 덕에 마물의 움직임은 극도로 제약됐다. 거칠게 몸부림치지만 그물은 찢어지지도, 늘어나지도 않았다. 만약 마물이 작정하고 그물에서 벗어나려고 했다면 어느 정도는 성과를 거둘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처럼 막무가내로 몸부림치는 정도로는 어림도 없었다.

쾅!

카니악의 철퇴가 마물의 몸통을 후려쳤다. 격렬하게 몸부림치는 와중에도 마물이 확실한 반응을 보일 때가 있었다. 바로 지금처럼, 카니악이 힘껏 철퇴를 휘두를 때였다. 그리고 그건 바꿔 말하면, 카니악의 공격을 제외하고는 마물에게 제대로 된 피해를 입히는 것이 없었다는 뜻이다. 카니악을 제외한 용아들이 변변찮아서? 그럴 리가.

“물러나십시오!”

그 말이 들려오기도 전에, 카니악은 이미 몸을 뒤로 빼고 있었다.

* * *

용혈이 정말 말 그대로 용의 몸뚱이에서 나온 피를 의미하는가? 그건 직접 용혈을 받아들인 용아들의 입장에서도 답하기가 난감한 질문이다.

분명 그들은 용의 피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것이 단순한 피 한 방울이었냐고 묻는다면 그들은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겪은 본질적인 변화는 그렇게 단순하게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

육체적으로는 물론이며, 영적으로도 변화가 일어난다. 그리고 그 변화는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더 깊어진다. 그러다 어느 순간. 옛적 자신의 모습이 완전히 타인처럼 느껴지는 시점에 이르면 이런 이능을 발휘하는 것도 가능해지는 것이다.

파바박!

날카로운 뼛조각 같은 것들이 비가 되어 일제히 쏟아져 내렸다.

그들은 이것을 뼈가 아니라 가시라고 불렀다. 일명 가시 비. 술법이라면 술법이었으나, 일반적인 술법과는 확실히 달랐다. 힘의 근원이 술사들의 술력이 아니라 영육에 깃든 용혈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 힘을 쓰는 방식 또한 그들이 알아서 습득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들의 주인이자 피의 주인인 줄카가 직접 하사한 것이었다.

용살자가 하사한 힘. 그 위력은 확실하다. 특히 이면세계에 한발이라도 걸친 존재들에게는 더욱 효과적이다.

그어어어-!

고통에 찬 비명. 거대한 마물이 벌레처럼 꿈틀거린다. 그러나 여전히, 마물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물에 갇힌 채 수백 개의 가시에 상처입은 마물의 모습은 금방이라도 생명의 불이 꺼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그러나 보이는 것에 속아서는 안 된다. 마물의 생명력은 질기다. 평범한 자들은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이만하면 죽겠지 정도로는 턱도 없이 부족하다. 숨이 완전히 끊어진 것을 확인하는 것으로도 부족하다. 머리를 몸에서 떼어내고 심장까지 부순 후 불까지 질러야 비로소 안심할 수 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거기까지는 무리겠지만.

턱!

카니악이 마물의 머리 쪽으로 훌쩍 뛰어올랐다. 그는 마물의 발을 으깨 놓았던 때처럼 마물의 머리를 곤죽으로 만들었다. 숨이 끊어진 것을 확인하고서도 철퇴에 묻은 거무튀튀한 무언가는 짙어지기만 했다.

피도, 살점도 튀지 않는다. 철퇴에 묻은 거뭇한 것도 금방 연기처럼 흩어져 사라졌다.

“벌써부터 너무 힘 빼시는 것 아닙니까.”

“이 정도로 뭘. 본격적으로 하기 전에 몸을 푸는 정도지.”

“그런 것치고는…벌써 불이 들어왔습니다.”

카니악이 눈 쪽으로 손을 가져갔다. 그런다고 제 눈에 지금 어떤지 알 수 있는 것은 아닌데도 말이다.

“이번은 전과 다르니까.”

“예?”

“오래 끈 싸움 아닌가. 이번에는 어떤 식으로든 결착이 나겠지.”

“아아.”

“그걸 알고 있으니까. 그래서 평소와 달리 흥분한 걸지도 모르겠군.”

후련한 싸움이 될 것이다. 겸사겸사 전(前) 대장의 복수도 해줄 수 있다면 더 그럴 것이고.

‘정정당당하게 자리를 빼앗아주려고 했는데, 허망하기 짝이 없군.’

용아의 대장이라 하면 제국에서도, 제국 밖에서도 전설적인 존재로 여겨진다. 실제로 본명은 아닐지라도, 전 대장 아라얀은 용아의 대장이라는 이름으로 사서에 기록되어 있었다.

그런 자였다. 전 대장은. 굳이 말하자면, 그렇게 허망하게 사라질 자가 아니었다는 뜻이다.

‘뭐, 나만 해도 한탄할 처지는 아니지.’

전 대장이 그리 갔는데, 현 대장이라고 그러지 말라는 법이 있는가. 하물며 이번 싸움에서는 용의 이빨이 아니라 용이 쓰러질지도 모른다. 먼저 간 자를 생각하고 있을 여유 따위는 없다는 거다.

“자, 가자.”

부지런을 떨 생각은 없다. 여러모로 마음에 들지 않는 동맹을 위해 그렇게까지 해줄 의리는 없으니까. 하지만 물론, 그렇다고 해서 게으름을 피울 생각도 없었다.

카아아-!

균열은 한두 개가 아니었으며, 그 균열을 통해 비집고 나오는 마물들 역시 한두 마리가 아니었다. 카니악은 다시 한번, 저것들이 이지가 날아간 상태라는 것에 안도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여유를 부리지는 못했을 테니 말이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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