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6화
쿵!
작은 산이 통째로 움직이는 듯했다. 실제 크기를 비교하면 당연히 저것은 산은커녕 언덕 하나만도 못할 것이나, 어둠 속에서 움직이는 그 흐릿한 형체는 그를 지켜보는 병사들의 마음 속에서 몇 배나 더 거대해졌다.
소리 없는 두려움이 겉잡을 수 없는 속도로 퍼져 나갔다. 병사들과 함께 있던 지휘관들은 그것을 누구보다 민감하게 느꼈으나, 굳이 억지로 두려움을 통제하려 들지는 않았다. 소용도 없을뿐더러, 억지로 두려움을 가라앉히려고 했다가는 오히려 반작용이 일어날 수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병사들에게서 두려움을 걷어내는 대신 병사들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는 데 집중했다. 자고로 몸이 바쁘면 머리는 자연히 가벼워지기 마련.
“술사님들을 호위해라! 방벽을 쌓아!”
“궁수 준비! 위치를 지켜라!”
먼저 술사들의 존재를 상기시켜 자신감을 심어주고, 한편으로는 움직일 이유를 만들어준다. 활을 든 녀석들이 이미 한참 전부터 제대로 자리잡고 있었다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저 움직이는 산들에게서 주의를 돌릴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다. 비록 그것이 아주 잠깐 뿐일지라도.
쿵!
한 장교는 자신의 앞에 있던 병사들의 얼굴이 핼쑥해지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바로 지금. 바로 이 순간을 위해서 그간 준비를 해왔던 거다! 너희가 할 일은 손이 부르트도록 시위를 당겨서 저것들의 접근을 조금이라도 늦추는 것뿐이야! 어차피 저것들을 쓸어버리는 건 술사님들이 하실 일이란 말이다! 정신 똑바로 차려라! 우리 모두가 해야 할 일만 제대로 해낸다면 아무 문제없을 거다!”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부터가 거짓일까. 실컷 입을 놀린 장교 본인도 알지 못했다. 어쩌면 지금 내뱉은 말 중 제대로 된 내용은 아무것도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저 뒤편에서 지금도 분주하게 무언가를 하고 있는 술사들이 정확히 무엇을 하고 있는지, 그들이 하는 일이 도시의 방위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 것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단지 그들이 일을 마칠 때까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그들을 지켜야 한다는 것. 그 하나만은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뭐하나?”
복잡해진 머리 때문이었을까. 갑작스레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그는 제때 반응하지 못했다. 그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몸을 돌리려 했을 때는, 이미 웬 손바닥 하나가 그의 한쪽 어깨를 붙든 후였다.
“어둡기는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이미 저것들이 아군의 사거리 내에 들어온 것 같은데.”
“예, 옛?”
“명령을 내려야 하지 않겠나?”
자신의 어깨를 붙든 사내가 까마득한 상관임을 깨달은 직후까지도 그는 제대로 반응하지 못했다. 그가 허겁지겁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웃는 듯 마는 듯했던 상관의 눈매가 슬슬 날카로워지기 시작할 즈음이었다.
“궁수 준비! 첫발은 불화살이다!”
“궁수 준비!”
* * *
‘잔뜩 굳어 있군.’
굳어 있는, 아니 얼어 있는 놈들은 방금 전 그 얼빠진 놈 하나만이 아니었다. 얼어 있는 놈들을 찾는 것보다 얼지 않은 놈들을 찾는 것이 훨씬 빠를 정도였다.
쿵쿵대며 다가오는 저 거대한 괴물들 때문에? 확실히 저 덩치는 놀랍지만 그 때문은 아니다. 덩치가 큰 놈들은 힘은 좋을지 몰라도 노릴 곳이 많다. 저 괴물들이 무슨 놀라운 능력을 지니고 있을지는 모를 일이지만, 저놈들에게서 보이는 이상의 위압감 같은 것은 느껴지지 않았다. 실전 경험이 충분히 있다면 병사들이라고 해도 저 덩치만을 보고 위축되지는 않을 터였다. 그리고 지금 솔롬의 성벽을 지키고 있는 병력은, 모두는 아니더라도 대부분 정예라는 이름이 아깝지 않은 놈들이다.
그런 놈들이 지금 저렇게 다 같이 얼간이가 된 이유. 그것은 조금 전까지 길게 이어졌던 기이한 괴성 때문이었다. 사람의 마음, 그보다 훨씬 더 본능적인 부분을 사정없이 옥죄었던 그 장엄한 울림.
아직도 가슴이 두근거린다. 그렇기에 확신한다. 저들 모두가 아직도 그 그림자를 떨쳐내지 못하고 있음을.
‘마치 술법 같지 않은가.’
이 많은 사람의 마음을 건드는 술법이라니. 그 정도면 술법이라는 표현만으로는 부족하다. 마땅히 기적이라 불러야 하지 않을까? 당하는 쪽에서는 재앙이라고 할 만한 끔찍한 기적 말이다.
“그래. 하시는 일들은 잘 되어 가오?”
“누구…아. 시어문드님이시군요.”
자신들만의 세상에서 자신들끼리만 바쁘게 소통하던 술사들이 짜증 섞인 반응을 보이다가 상대를 확인하고는 태도를 누그러뜨렸다.
“재촉할 생각은 없지만, 조언이 필요할 때인 것 같아서 말이오.”
“무슨 조언을.”
“그대들이 준비하고 있는 일. 서둘러야 할 거요. 아니면 지금까지의 수고가 다 헛것이 되어버릴 테니.”
시어문드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는 거대한 괴물들과 그 너머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알고 있습니다.”
돌아오는 답이 딱딱하다. 입 위로 지은 표정은 더 그렇고. 시어문드는 그들이 느끼는 긴장감을 엿볼 수 있었다. 그 긴장이 긴장에서 멈췄을 뿐, 두려움으로까지 번지지는 않은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겉보기에는 그저 정신없이 허둥대는 것 같아도, 적어도 제 할 일은 제대로 하고 있다는 뜻이니.
“쏴라!”
첫발. 기름을 듬뿍 먹인 불화살이 허공을 갈랐다. 그 선명한 궤적이 어둠 위에 그려지고, 거대한 괴물들을 향해 나아갔다.
그 궤적의 끝. 허공에 그어진 붉은 선 중에는 괴물에게 닿는 것도 있었고 닿지 않는 것도 있었다. 성벽 위의 지휘관들은 그것을 보며 거리를 가늠했다.
“2열 준비! 노포는 대기하라!”
여전히 거대한 괴물들은 덩치만큼이나 큰 발소리를 내며 다가오고 있었다. 방금의 그 공격, 그러니까 화살 몇 발 정도는 그들에게 위협 비슷한 것도 되지 못했다는 뜻.
“쏴라!”
두번째 화살이 날아갔다. 불이 붙은 것은 없으나 첫번째보다 더 빠르고 강하다. 그러나 여전히, 거대한 괴물들의 걸음은 멈추지도 늦춰지지도 않았다.
“3열 준비!”
소용없다.
“쏴라!”
아마 저들도 슬슬 느끼고 있을 터였다. 단지 인정하고 싶지 않기에 더 악착같이 외치고 있을 뿐. 저것 역시 용맹이라고 불러야 할까. 시어문드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 * *
“됐다!”
술진을 중심으로 모여 있던 술사들이 탄성을 토했다. 방금까지 어둠 속에 묻혀 있던 술진은 지금은은한 빛을 뿜으며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된 겁니까?”
“그렇소. 노포를 준비하시오!”
성벽 곳곳에 만들어진 술진. 그것이 도시를 수호하기 위한 대비라는 것 정도는 짐작했지만, 정확히 무슨 기능을 하는 것인지 알고 있는 이는 드물었다. 특별히 입단속을 한 것은 아니다. 지식 없는 자들이 알아봐야 득 될 것이 없었기에 굳이 알려주지 않은 것뿐. 기본적으로 술사들은 타인에게, 그러니까 무지한 자들에게 친절하지 않다. 말이 통하지 않는 외국인에게 굳이 자신의 말을 가르치거나 이해시키려 들지 않듯, 그들 역시 무지한 자들과 애써 무언가를 논하려 들지 않았다.
“준비가 끝났습니다.”
병사 네 명이 두 명씩 양 옆에서 노포를 끌고 왔다. 네 명이 한꺼번에 힘을 썼음에도 얼굴이 붉고 숨소리가 거칠었다. 일반적인 노포가 아니라 특수 제작한 물건이라 그렇다. 일반적인 노포보다 훨씬 더 크고 무겁기에.
“술진이 작동하면 노포에 힘이 깃들 것이오. 하지만 힘이 제대로 깃들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지. 그러니 내가 신호를 보내면 그때 발포하는 거요. 이해하셨는가?”
“신호…예. 알겠습니다.”
이 술진의 기능은 간단하다. 목표에 힘을 불어넣는 것. 힘이 깃든 대상은 더 강해진다.
“시작하세.”
술진에서 흘러나온 빛이 노포에 깃들었다.
우득!
튼튼해진다.
우드득!
무거워진다.
콰득!
강해진다.
화살이라기보다는 작은 기둥에 가까운 물건이 묵직한 소리를 내며 뒤틀리는가 싶더니 끝내 표면에 미세한 실금까지 생겨났다.
“지금!”
“쏴, 쏴라!”
당황한 기색의 장교가 그런 와중에도 제때 명령을 내렸다. 숨을 고르고 있던 병사들이 화살을 지탱하고 있던 굵은 줄을 힘겹게 풀어냈다.
피잉- 쾅!
단단히 고정되어 있던 노포가 뒤로 밀려났다. 뒤쪽에서 노포를 받치고 있던 병사들이 숨 넘어가는 소리를 내며 반쯤 자빠졌다.
그렇게 훈련에 훈련을 거듭한 정병들이 이런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였지만, 누구도 그들을 꼴사납다 여기지 않았다. 그럴 겨를도 없었다. 굉음과 함께 날아간 노포의 화살. 모두의 눈길과 신경은 그 끝이 향한 곳에 집중되어 있었기에.
쾅!
수십 발의 화살을 맞고도 끄떡하지 않았던 괴물이 쓰러질 듯 휘청거렸다. 대신전의 기둥과 같은 두 다리가 반쯤 굽혀지고, 하늘을 향해 솟아 있던 머리도 위태롭게 흔들렸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도, 비명은커녕 그 비슷한 것도 들리지 않았다. 바람을 맞은 나무가 흔들리듯, 그저 휘청거렸을 뿐.
“저거…….”
노포의 화살은 남쪽에서도 괴물의 몸통을 파고들었다. 표적이 원체 큰 덕에 힘겹게 쏜 화살이 빗나가는 일은 없었다. 문제는, 그게 전부였다는 거지만.
“죽은 놈이거나. 살았어도 숨만 붙은 놈이거나.”
로우렌의 목소리에서 다소 힘이 빠진 것과 달리, 보리스는 변함이 없었다. 그는 동요하지도, 실망하지도 않았다. 그저 처음과 똑같이 냉철한 시선으로 적을 살필 뿐.
“저 덩치 녀석은 미끼다.”
“미끼요?”
무슨 헛소리를 하냐는 듯, 로우렌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하지만 곧 그의 목소리는 힘을 잃었다. 미끼라는 단어를 한번씩 더 되뇔 때마다 생각이 바뀐 것이다.
“확실히…저 정도 덩치면 미끼로는 최적이긴 합니다만, 뭘 위한 미끼란 말입니까?”
덩치가 크면 표적이 되기 쉽다지만, 저 정도로 큰 덩치라면 약점이 아니라 강점이다. 막말로 저 육중한 몸뚱이로 성문이나 성벽을 들이 받으면? 그게 공성 병기가 아니고 무엇이겠나.
“보면 알겠지. 미끼라는 것을 알아도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니까.”
그 또한 그렇다. 미끼든 뭐든 간에, 저 덩치가 성벽까지 닿게 둘 수는 없다. 미끼라는 것을 알더라도 치워버릴 수밖에 없다는 거다.
쾅!
또 한 번. 무지막지한 화살이 괴물의 몸뚱이에 틀어박혔다. 첫발은 휘청대면서도 끝내 버텨냈던 괴물도 이번에는 견디지 못하고 무릎을 꿇었다.
‘위력은 대단한데, 정확도가 형편없군.’
보리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두번째 화살이 괴물의 가슴 중앙이 아니라 머리를 노렸음을 알아차렸다. 즉, 두번째 화살은 본래의 목표를 꽤나 빗나간 것이다. 첫발로 가늠을 했음에도 저렇게 빗나갔다는 것은 저 화살이 위력은 몰라도 정확도는 썩 좋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공을 들여서 만든 것이 고작 이 정도인가?’
만약 정말 그렇다면 실망스러운 일이다. 뭐, 술사들의 일이라는 것이 들이는 노력에 비해 결과물이 부족한 경우가 왕왕 있다는 것은 알고 있긴 하지만…그래도 실망스러운 것은 어쩔 수 없다. 뭔가 좀 더 대단한 것을 기대했는데 말이다.
“좋아! 준비하시오!”
음? 저게 무슨 소리지?
뒤쪽에서 들려온,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가 보리스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그가 슬쩍 고개를 돌려 보니, 빛나는 술진 앞에 선 술사들이 이곳저곳을 가리키고 있었다.
“전력을 쏟아붓는다 생각하시오! 술진에 비축된 힘이 적지는 않으나, 한바탕 쏟아내고 나면 회복하기까지 시간이 걸리오! 술진의 힘이 다하기 전에 저것들을 모두 박살내야 한다는 거요!”
그 말과 함께 여러 대의 노포가 나란히 배치됐다. 보리스가 눈을 빛내며 그것들을 빠르게 훑어보았다.
“요 며칠 동안 공방의 연기가 밤낮으로 치솟았다는데, 그 이유를 알겠군요.”
로우렌이 나직이 속삭였다.
“그래.”
당장 눈에 보이는 것만 해도 열 대가 넘는다. 저 정도면 이제 정확도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쾅! 쾅! 쾅!
거대한 화살들이 괴물의 몸뚱이 이곳저곳을 때렸다. 가장 앞에서 다가오던 괴물이 너덜너덜해져서 쓰러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 *
[진부하군.]
저 정도의 파괴적인 병기를 보고서도 거인왕의 반응은 심드렁했다. 진부하다는 표현은 그의 진심이었으며, 그는 진정으로 실망하고 있었다. 거대 괴물들이 하나 둘씩 넝마가 되어 쓰러지는 것을 직접 보고 있으면서도.
[좋아. 하나씩 비교해보지.]
거인왕이 그의 두 번째 안배를 풀어놓았다. 그의 허락, 혹은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대기가 흔들렸다.
은은하지만 거대한 파동. 그 중심은 굳건해 보이는 도시의 성벽 너머였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