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5화
시어문드는 매일 성벽을 비롯한 군사시설을 순시했다. 오늘도 마찬가지. 차분하지만 날카로운 시선이 이곳저곳을 훑었다.
“하잘의 군대 말이야. 이틀 안에는 도착해야 하는 것 아닌가?”
“별 문제없이 움직였다면…그렇지요.”
군터 크렘보르의 이름으로 이뤄진 지원 요청에 하잘은 마지못해 응답했다. 마물의 군세가 솔롬으로 향하고 있다는 말을 그들이 믿었는지 아닌지는 중요치 않다. 그들은 이미 하잘에서 이쪽의 손을 빌린 적이 있었고, 이 까닭 모를(그들의 입장에서는) 재앙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강한 무력이 필요함을 절감했을 터였다. 그러니 이쪽이 무슨 꿍꿍이를 품고 있는 것인지 의심스러웠더라도 일단은 요구하는 대로 맞춰주는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번이 처음인 것도 아니고, 이미 한번 의지한 전적이 있었으니까 말이다.
“준비는 완벽합니다. 제아무리 마물들이라 해도 이곳을 넘보지는 못할 겁니다.”
마물이라. 마물만이면 다행이겠지만. 시어문드가 내심 고소(苦笑)를 머금었다. 진실을 아는 이는 몇 되지 않는다. 굳이 사기를 떨어뜨릴 수도 있는 사실을 먼저 알릴 필요는 없다. 진정한 적이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기 전까지는.
“완벽이라는 말을 함부로 쓰지 마라. 아니. 아예 입에 담지를 말도록.”
싱숭생숭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수하에게 한 마디 쏘아붙인 시어문드가 성벽 한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갑옷을 입지 않은 자들 너덧 명이 모여서 깡마르고 길쭉한 나무 한 그루를 살피고 있었다.
“종일 돌아가면서 저 술진을 살피고 있습니다. 우리가 경계를 서는데도 굳이 직접 지키려고 하더군요.”
“저들이 뭘 하든 신경 쓰지 마라. 저건 저들의 일이야. 우리는 우리의 일에만 신경 쓰면 된다.”
“예.”
다시 걸음을 옮기던 시어문드가 성벽을 내려가는 계단 앞에서 멈춰 섰다. 때마침 계단을 오르던 일단의 무리를 발견함과 동시였다.
그 무리의 선두에는 당당한 체격인 일행 가운데서도 유난히 커 보이는 한 사내가 있었다. 꽤 오랫동안 손질을 하지 않은 듯 덥수룩한 머리와 깊은 두 눈. 단단해 보이는 각진 턱을 한 사내. 투구를 왼쪽 겨드랑이에 끼고 계단을 오르는 그를 병사 몇 명이 뒤따르고 있었다. 분명 병사임에도 갑옷부터 시작해 전체적인 무장 상태가 어지간한 장교 이상으로 보이는 자들. 친위대 소속 병사들이었다. 그렇다는 것은 그들을 이끄는 선두의 사내 역시 친위대 소속이라는 것.
“울티노 공이시군.”
시어문드가 먼저 아는 체를 했다. 솔롬의 군부에서 못해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그가 먼저 아는 체를, 그것도 나름 예를 갖추어 인사를 건넨 것이다.
“시어문드 공.”
선두의 덩치 큰 사내가 깍듯이 고개를 숙였다. 예는 취했으나 목석같이 딱딱한 태도 때문에 그리 공손하게 보이지는 않았다.
시어문드를 따르던 수하들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으나, 정작 시어문드 본인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옅게 웃었다.
“순시를 하시는가 보군.”
“예.”
“열심이군. 보기 좋아. 그럼 수고하시오.”
시어문드가 그의 어깨까지 가볍게 두드려주고서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을 다 내려가고, 울티노 일행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간 후에 뒤따르던 수하 한 명이 불퉁하게 말했다.
“건방진 자로군요. 아무리 친위대라고 해도.”
“뭐가 그리 불만이냐.”
“예?”
“내가 무슨 아무에게나 대접받지 못해서 안달 난 사람이라도 되느냐? 오히려 그런 가벼운 언사가 더 나를 욕 먹이는 일임을 명심해라.”
“예, 옛. 송구합니다.”
시어문드는 이것이 저열한 화풀이일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저 울티노에 대해서 이런저런 말들이 돌고 있다는 것도.
이것은 숨길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시간을 들여 천천히 진행한 것도 아니고, 모두의 신경이 곤두서 있는 이 시기에 갑작스레 등장한 새 얼굴이라니. 다시 생각해봐도 너무 무리한 처사였지만, 그 역시 갑작스레 통보를 받은 처지였다. 단지 그 통보가 남들보다는 조금 더 빨리 왔을 뿐.
‘너무 변했단 말이지.’
껍데기가 변했기 때문인가. 그럴 것이라 생각은 하지만, 그렇게 넘어가려고 해도 설명하기 힘든 무언가가 계속해서 신경을 건드렸다.
‘하. 죽어도 죽지 않는다니.’
그 자체도 현실감이 없지만, 그것을 그럭저럭 받아들이고 있는 자신도 놀라웠다. 언젠가부터 이전까지 무의식 중에 자연스레 그어 놨던 현실의 경계가 흐려진 것 같았다.
‘아무리 스스로 원했다지만.’
이미 두 번이나 죽은 자가 다시 몸을 얻어 전투에 임한다.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전사로서 찬사를 보낼 만하지만, 글쎄. 시어문드가 울티노, 아니 할렌에게 갖는 감정은 감탄이 아닌 연민이었다.
무엇이 그를 죽음 후에도 전장에 묶어두는가. 집념? 복수심? 무엇이 되었든 시어문드는 공감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죽음 뒤에는 안식이 존재하기를 바랐다.
고단한 삶이 아닌가. 사는 날까지는 충실히 살겠지만, 그 뒤는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하물며 생소한 몸뚱이를 입고 다시 한 번 전장에 나선다? 어지간하면 사양하고 싶었다.
‘미련 없는 삶이라면 아쉬움이 남을 리 없을 테니.’
그런 면에서 다가올 전투는 제법 기대가 됐다. 분명 이 싸움은 역사의 한 구절로서 기록될 만한 대전일 테니.
* * *
어둑한 밤.
쿵!
육중한 울림이 도시 전체를 흔들었을 때. 눈은 감았으나 긴장의 끈을 놓치지 않고 있던 이들이 튕기듯 몸을 일으켰다. 보리스도 그 중 하나였다.
“공자님!”
“말을 준비해!”
보리스는 시종이 들어오기도 전에 스스로 갑옷을 착용했다. 그가 침대 옆에 검과 함께 둔 투구를 한 손에 들고 침실을 나서자 기다렸다는 듯 그라모트가 달려왔다. 살짝 충혈된 눈을 날카롭게 뜬 그는 자연스레 보리스의 뒤에 섰다.
“역시 기대한 대로는 되지 않는군.”
“늘 그렇지요.”
내일 즈음 하잘의 원군이 당도할 것으로 예상했다. 그런데 ‘적’은 그때까지 기다려주지 않는 듯했다.
쿵!
다시 한번 건물 전체가 흔들린다. 병사들은 물론, 이 저택에서 일하는 하인들 모두 훈련된 이들이었기에 꼴사나운 비명이 터져 나오는 일은 없었다.
“빌어먹을.”
벽에 걸려있던 등불 하나가 빛을 잃었다. 보리스가 나직이 욕지거리를 내뱉고는 허겁지겁 계단을 오르고 있는 수하를 향해 외쳤다.
“말은 준비됐나!”
“옛!”
“좋아. 아버님께서는?”
“성주부 쪽에서 온 소식은 없었습니다!”
“알겠다. 가자!”
서둘러 저택을 나선 보리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저택이 자리한 곳은 내성의 최심부. 당연히 인근에는 솔롬의 최고 권력자들만이 소수 거주하고 있었다. 거주하는 이들보다 지키는 이들이 더 많다는 말은 우스갯소리가 아닌 것이다.
그런 만큼 언제나 이곳은 조용했다. 가장 크게 들리는 소리가 말발굽 소리일 정도로.
그러나 지금. 이전까지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소란함이 일대를 장악하고 있었다. 여인네의 비명, 사내들의 거친 고함소리. 그리고 저 멀리서 들려오는 것이 확실한 괴성까지.
“비켜라!”
그라모트가 병사들을 이끌고 길을 열었다. 보리스는 주변에 눈을 돌리지 않고 말을 달렸다. 끝까지 길 한복판에서 허둥대다가 말에 치일 뻔한 이들도 몇 있었으나, 그들이 기겁하며 몸을 날리는 순간까지도 보리스는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 * *
쿵!
묵직한 울림이 발 밑에서 전해졌을 때. 군터는 그의 집무실 창가에 서서 하늘을 보고 있었다.
[왔군.]
이가로프가 격렬하게 반응할 때도 그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가로프가 반응하기 전부터, 발 밑으로 울림이 전해지기 전부터.
[준비는 됐나?]
들떠 있던 이가로프가 침묵했다. 붉게 변한 벽난로의 불이 움직임을 멈췄다. 그대로 얼어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어리석은 질문을.]
[마음의 준비를 말한 것이야.]
[그런 준비는 필요 없다.]
할렌의 기억 속에서 보았던 난폭한 파괴자의 모습이 생생하다. 처음 보았던 그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적은 적이다. 강하든 약하든, 위험하든 위험하지 않든 모두 같은 적일 뿐.
땅울림의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또 한번의 거대한 충격이 도시 전체를 휩쓸었다.
[■■■■■-!]
모두가 그 소리를 들었다. 몸을 잔뜩 움츠린 아낙, 두려운 와중에도 가족들을 이끌고 움직이던 사내. 짙은 어둠 너머를 노려보던 병사. 신전을 향해 힘겨운 걸음을 재촉하던 노인.
그들 모두가 동시에 그 소리를 들었다. 원초적인 두려움을 자극하는 거센 포효. 결코 끝나지 않을 것처럼 길게 이어지는 포효는 이전까지의 모든 것을 묻어버렸다. 땅의 울림, 성벽 밖에서 들려오던 괴성. 심지어 그로 인해 솟구치던 불안과 두려움의 감정까지도.
[안 좋은 기억이 떠오르는군.]]
이가로프가 분노했다. 그에게 육신이 있었다면 필시 이를 갈고 있었을 것이다.
[요란하기만 할 뿐, 자기 과시 외에 아무런 의미도 없지.]
[두려움을 굳이 숨길 필요는 없다. 그 자체로 힘을 낭비하는 셈이니.]
[두려움이라고? 내가?]
부정하려 하지만 부정하지 못한다. 사실 그 스스로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분노와 전의로 감춰두었을 뿐, 그는 여전히 저 강대한 원수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지워지지 않는 흉터와 같아, 없애고 싶다고 없앨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내게도 껍데기를 주게. 그러면 곧바로 내 용기를 증명할 테니.]
이가로프가 다시 한번 큰소리를 쳤으나 이번에는 그리 진지하지 않았다. 껍데기를 달라는 말만은 진심이 어느 정도 섞여 있었으나 나머지는 반쯤 우스갯소리나 다름없었다.
철컥-
갑옷의 관절부가 맞물리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군터가 옆을 스쳐갈 때마다 벽에 걸려있던 등불들이 저절로 빛을 잃었다.
“장군.”
“곧 나가겠다.”
“옛.”
집무실 밖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평소와 다름없었다. 그들의 심장이 여느 때보다 조금 더 빠르게 뛰고 있다는 것 외에는. 그나마 그 사소한 차이조차 무뚝뚝한 군터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사라졌다. 마지막으로 들린 그들의 목소리에는 신뢰의 감정이 가득했다.
[충성스럽고 헌신적인 부하들이군. 이런 부하들을 얻기는 어렵지.]
[너와 함께하는 녀석들처럼 말인가.]
[그래.]
부럽다는 듯 말하는 이가로프에게도 원령이 되고 난 후에도 여전히 그를 따르는 수하들이 있었다. 그 점을 짚어주자 이가로프가 기뻐하며 동의했다.
[나는 이제 그들을 내 수하라 여기지 않는다.]
[그럼?]
[동료지. 고락을 함께한 동료. 비록 즐거움은 거의 없었지만 말이야.]
[그렇다면 고락이라는 말은 적절하지 않은 것 아닌가.]
[아니. 아니지. 이제부터 즐거울 예정이니까. 장군. 내게 껍데기를 달라고 한 말은 진심이었다.]
[알고 있다.]
아무리 일정부분 물리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한들, 영체로서 발휘할 수 있는 힘에는 한계가 있다. 이가로프는 직접 몸을 움직여서 적을 살육하고 싶은 것이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직접 거인왕의 앞에 서서 복수를 선언하고 싶은 것이고.
그의 열망을 알지만, 군터는 섣불리 그에게 육신을 줄 수가 없었다. 이가로프를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전략적인 판단 때문이었다. 중요 전력의 힘을 쓸데없이 뺄 필요는 없으니까 말이다.
[참아라.]
[그게 명령이라면 따라야지. 그리 오랫동안 참았는데 여기서 조금 더 참는다고 뭐가 달라지겠나.]
이가로프가 조용해지자 이번에는 뒤쪽에서 말이 들려왔다.
[놈은 자신감에 차 있다. 하지만 오만은 아니야. 놈은 늘 그렇거든. 이미 한 번 꺾인 적이 있으면서도 변하지 않아. 웃긴 녀석이지.]
움직임을 멈췄던 벽난로 속 불꽃이 다시 춤을 췄다. 붉게 변했던 색도 다시 제 모습을 찾았다.
[꺾인 적이 있다고?]
하늘 아래, 아니 하늘 위라고 해도 자신보다 높은 존재를 허용하지 않을 것 같은 패도적인 자신감. 군터가 느낀 아간투스베록은 그 결정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자였다. 그런데 그런 자가 꺾였다니. 좀처럼 상상이 가지 않았다.
[그래. 꺾였지. 우리 모두가 최소한 한 번씩은 꺾였다. 그러니 원치도 않는 종 노릇을 한 것이지.]
[그렇다면 이것은 패배자들의 싸움이로군.]
[하지만 넌 아니지.]
[그래. 나는 아니다.]
패한 적 없다. 패하지 않는다. 이번에도 마찬가지.
군터가 몸을 돌렸다. 뒤편, 잠잠해진 불꽃 너머에서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두번째 도발이 시작될 때 움직이겠다. 그때 즈음이면 미끼가 충분히 넘어갔겠지.]
[알아서 판단해라.]
군터가 집무실을 나섰을 때. 문 앞에는 완전무장한 무관들 십 수 명이 석상처럼 미동 없이 늘어서 있었다. 군터는 그들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 걸음을 옮겼고, 그들은 그제야 자세를 풀고서 그 뒤를 따랐다.
“적이 도시를 포위했습니다. 초병들이 사전에 보고하지 못한 것을 보면.”
“전장에만 집중해라.”
어떻게 적이 소리소문 없이 갑작스레 나타났는가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들은 이미 나타났으며, 포위까지 마쳤다. 그렇다면 지금 논해야 할 것은 당연히 바로 지금부터 어떻게 적과 맞서 싸울 것이냐가 되어야 한다.
“보리스 공자가 남쪽으로 향했습니다. 명하신다면…….”
“하고싶은 대로 하도록 둬라.”
크렘보르의 후계자라는 신분을 떼어 놓고 본다면 보리스는 나름 무장으로서 쓸 만한 축에 들었다. 어린 나이부터 전장에서 경험을 쌓았으며, 곁에 도움을 줄 인재들도 적잖이 있다. 물론 인재가 아무리 많아도 쓸 줄 모른다면 허사이기는 하나, 보리스는 자신의 부족함을 남의 도움으로 채울 줄 알았다. 그건 일신의 무용이나 군재보다 더 중요한 재능이다. 물론 일신의 재능이 한 시대를 풍미할 정도로 대단하다면 이야기는 달라지지만, 그런 재능은 드물다. 대부분의 재능은 어설픈 수준에 머물고, 그렇기에 그 어설픔에 취한 주인을 죽인다.
보리스는 그런 얼간이들과 다르다. 그렇게 생각하지만, 혹시 또 모른다. 하지 않을 행동을 해서 일을 그르치기에 실수라고 부르는 것 아니던가. 누구나 실수를 한다. 완벽한 사람은 없다. 사람은 완벽할 수 없기에 사람이다. 그리고 보리스는 조금 뛰어난 면이 있다 해도 결국 사람에 불과하다.
그러니 증명해야 한다. 이미 몇 번이나 증명을 해온 녀석의 입장에서는 조금 억울할 수도 있겠지만, 어쩔 수 없다. 그래도 녀석은 만족할 것이다.
‘이번이 마지막이니까.’
희생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돌이켜보면 지금까지 해온 일들은 모두 미련을 줄여 나가는 작업이었다. 그러니 순수하게 녀석들을 위해 헌신했다고는 할 수 없다. 아닌가? 어쩌면 이마저도 편해지기 위한 변명일지 모른다. 사실, 이제 아무래도 상관없다.
철컥! 철컥!
집무실을 나설 때는 십 수 명이었고, 말에 올라 성벽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을 때는 백 명이 훌쩍 넘었다. 군터는 그의 집무실에서 가장 가까운 북쪽 성벽으로 향했다.
“장군. 북쪽 성벽의 병력 배치는 끝났습니다.”
군대는 이미 전투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요 며칠간 병사들을 닦달한 것이 빛을 발한 순간이었다.
“저쪽도…이미 준비를 마친 걸까요.”
메아리처럼 울리던 포효가 그쳤을 때. 어둠 너머에 길게 늘어선 무언가가 보였다.
통일성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저것을 군대라고 해야 할지도 의문인 군대가 이곳을 노려보며 살기를 흘려대고 있었다.
“아마도.”
근처 병사 몇 명이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군터는 그들을 나무라지도, 돌아보지도 않았다.
* * *
구워어어어-!
길게 늘어선 것들 가운데 유독 눈에 띄는 것들이 있었다. 주변의 다른 것들이 야트막한 언덕이라면, 그것은 하늘을 찌를 듯 솟은 산의 꼭대기 같았다.
처음에는 짙은 어둠 때문에 그것의 존재를 알아채지 못했던 성벽 위 병사들도, 그것이 힘차게 포효하며 앞으로 나서자 비로소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다.
“저, 저게 뭐야?”
이제 막 어수룩한 태를 벗은 신병이건, 전역을 고민하는 고참병이건 그것을 본 순간의 반응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바보처럼 입을 벌리고 눈을 끔뻑이며 저게 정말 생물인지를 의심했다.
“저 정도면…이곳까지 닿는 거 아냐?”
어떤 병사의 입에서 흘러나온 독백은 그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었다.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다. 두려움이 아니라 이성에서 나온 합리적인 의심이었다. 그만큼 저 멀리 보이는 괴물은 압도적이었다.
“거인?”
누군가가 이야기 책 속에서나 나오는 존재를 들먹였을 때 아무도 웃거나 정색하지 않은 이유였다.
쿵! 쿵! 쿵!
땅이 울린다. 그들은 이제야 조금 전 도시를 흔들었던 땅울림이 저 괴물들에게서 비롯된 것임을 알았다. 여러 개의 높고 뾰족한 산이 도시를 향해 달려드는 것 같았다. 그것도 사방에서.
“전투 준비!”
어둑했던 도시에서 무수한 작은 불빛이 일어났다.
* * *
“장관이군.”
레오니스 코누디스는 도시를 향해 달려나가는 거대한 괴물들을 보며 나직이 감탄했다.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단순히 앞으로 달려나가기만 할 뿐인데, 그 뒷모습은 장엄하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박력이 넘쳤다.
“신화 속의 거인들이 저랬을까 싶군요.”
[덩치만 클 뿐인 저열한 것들과 지고한 존재를 비교하다니. 제대로 볼 줄 모르는 눈은 지금이라도 파내는 편이 낫다.]
“용서하십시오. 무지에서 나온 실언이었습니다.”
당장 굽히지 않으면 정말로 두 눈을 팔 기세였기에, 레오니스 코누디스는 바로 고개 숙여 사죄했다. 온 몸을 짓누르던 무형의 무게감이 그제야 사라졌다.
“덩치가 큰 만큼 더 큰 표적이 될 겁니다.”
[상관없다. 저것들은 다리일 뿐이니.]
거인왕이 조소했다. 산과 같은 크기의 괴물들을 앞세우면서 동시에 본대도 한발 늦게 전진시킨 그는 지금까지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