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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994화 (994/1,064)

994화

보울룬은 솔롬으로 돌아오자마자 군터 크렘보르에게 직접 치하를 받았다. 사실상 명예직이라고는 해도 판니른 주 방위군의 천부장 직에 임명되었으며 그 외에 재물도 적잖이 하사 받았다. 적어도 오늘의 주인공은 실비아 크렘보르와 그였고, 모든 이들이 보울룬을 부러워했다.

“축하하네.”

평소 경쟁심을 불태우던 동료 로센도 이때만큼은 순수한 마음으로 축하를 건넸다. 그는 아무 생각도 없이 질시부터 하고 보는 이들과는 달리 보울룬이 해낸 일이 얼마나 어려운 것이었는지 짐작했다. 그렇기에 부러워하는 것과는 별개로 순수하게 보울룬을 인정할 수 있었다.

“고맙네.”

“꼴이 말이 아니군.”

성주부에 불려 가기 전에 나름대로 묵은 때를 벗었음에도 여전히 그의 모습은 수 년간 오지를 돌아다닌 여행자처럼 추레했다. 얼굴 가득 퍼진 피로 때문에 더 그렇게 보였다.

“그런가.”

“어지간히 고생한 모양이지?”

“음. 쉽지는 않았네.”

보통 이렇게 물으면 어지간해서는 겸양의 말이 나오기 마련이고, 실제로 이전까지의 보울룬은 그래왔다. 충분히 내세울 만한 일도 별 것 아니라는 듯 감추거나 축소하며 스스로를 낮춰온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그는 그러지 않았다. 전에는 볼 수 없었던 충만한 자신감이 표정에서부터 드러났다. 심경의 변화라도 있었던 것일까. 로센은 그보다 두어 걸음 앞서 걷는 보울룬을 묘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런데…저건 뭔가?”

내성 안쪽. 허가 받은 이들만 출입할 수 있는 군사구역에 기이한, 대놓고 말해 흉물스러운 구조물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아. 저것 말인가.”

로센의 표정이 슬쩍 일그러졌다.

“장군의 명으로 짓고 있는데, 정확히 저게 무엇인지는 나도 몰라. 하지만 다가올 전투를 위한 준비라고 하시더군.”

“준비? 저것이?”

뼈.

병사들이 쌓아 올리고 있는 것은 분명 뼈였다. 뼈의 형태가 다양한 것으로 보아 여러 종류의 뼈가 섞인 듯하지만, 개중에는 분명 사람의 것으로 보이는 뼈도 적잖이 있었다.

“크렘보르 장군이 뛰어난 사령술사라는 것은 이제 비밀도 아니지 않나.”

“그렇긴 하지만.”

“그나마 이렇게 성 안쪽 구석에 설치하는 것은 세간의 인식 때문이겠지. 저 탑의 존재를 아는 이들은 얼마 되지 않네.”

탑이라.

본능적인 꺼림칙함을 떨쳐내고서 로센의 말까지 듣고 보니 확실히 저 흉물스러운 구조물이 탑과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너무 관심두지 말게. 느껴지지 않나? 이 불길한…….”

“느껴지네.”

보울룬이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단순히 보기에 흉물스러워서 그런 것이 아니라, 보다 깊숙한 곳에서부터 느껴지는 서늘한 감각. 저 탑에서 멀어지고 싶은 마음이 무의식에 스며들었다. 왜인지는 모른다. 이유를 모르기 때문에 더 껄끄럽게 느껴지는 부분도 있었다. 어쩌면 이 본능적인 거부감이 로센이 말한 ‘준비’와 관련되어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저런 탑이 여럿인 모양이지?”

“내가 본 것만 세 개였네. 더 지어질지도 모르지. 이미 짓고 있을지도 모르고.”

짓는다. 단순히 뼈를 쌓고, 끈으로 묶어 고정시키는 것이 전부인 것 같은데 저런 것을 짓는다고 할 수 있는 걸까. 보울룬은 엉성하게 형태를 갖추어 가는, 뼈의 탑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교단의 인사들이 저것을 보지 못해서 다행이었다. 만약 그들이 저 흉물스러운 구조물을 보았다면 아무리 크렘보르의 위세가 두려워도 들고 일어났을 테니까.

‘음.’

그러니까, 소심하게라도 말이다.

* * *

“장군. 탑의 축조가 모두 끝났습니다.”

“술법진의 설치를 완료했습니다. 이제…….”

“병력의 배치를 마쳤습니다. 언제든 명령만…….”

적을 맞을 준비가 이제 거의 다 끝나갔다. 군터는 그의 머릿속에 선명히 기억된 도시의 구조도를 떠올렸다. 그리고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를 지도 위에 하나씩 그려 나갔다.

[그자가 말했던 대로, 아간투스베록은 온갖 짐승과 괴물들을 수족처럼 부렸었지. 만약 그자가 마물들까지 굴복시켰다면 지금 하고 있는 방비는 헛수고가 될 가능성이 커.]

[상관없다.]

[아간투스베록의 짐승들은 세뇌라도 당한 것 같이 두려움을 몰라. 고통도 모르지. 놈들과의 싸움은 간단해. 다 죽거나, 다 죽이거나. 그 전까지는 결코 끝나지 않아.]

[바라는 바다.]

[장군. 이 싸움을 이기려면 오직 단 한 가지 방법 뿐이야. 머리를 치는 거지. 사실 거의 모든 싸움이 다 그렇지 않나?]

전투가 다가올수록, 도시를 뒤덮은 전운이 짙어질수록 이가로프도 점점 흥분했다. 지금의 그가 보이는 것은 전의를 넘어선 일종의 광기였다. 그 스스로도 그것을 인식하고 있는 듯했으나 자제하는 기색은 조금도 없었다.

군터는 그의 마음을 이해했다. 이가로프는 지금 나름의 방식으로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다가올 전투에서 아낌없이 자신을 불사르기 위해.

[때가 되면 당연히 그럴 거다.]

[하지만 때라는 것은 한번 놓치면 다시는 오지 않아. 장군도 알고 있을 테니 더 말하지는 않겠네.]

이가로프가 조용해지자, 군터는 다시 내면으로 눈길을 돌렸다.

영혼 감옥 속. 잠이라도 빠진 것처럼 조용한 다른 영혼들과 달리 홀로 부산스러운 영혼이 눈에 띄었다.

[할렌.]

다른 영혼들보다 월등히 거대하고 활동적인 영혼이 움직임을 멈췄다. 군터의 부름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었다. 본래의 형태를 거의 잃은 영혼이었으나 그런 와중에도 여전히 자신의 이름만은 기억하고 있었다.

[네가 누구인지 기억해라. 네가 왜 고통을 느끼는지를 떠올려.]

할렌의 상처는 낫지 않았다. 그것은 여전히 할렌에게 고통을 안겨주고 있었다. 영혼 전체를 좀먹던 것이 일부를 좀먹는 수준으로 바뀌었으나, 좀먹고 있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고통은 두려움과 분노를 낳는다. 어느 쪽에 더 무게가 실리느냐는 주체와 대상에 달린 것. 하지만 할렌은 분노하면서도 누구에게 분노해야 하는지는 알지 못했다. 아니, 알면서도 모르는 체했다. 단 한번 대적했을 뿐인 거인왕은 그만큼 할렌의 영혼에 커다란 흔적을 남겼다.

그렇게 두려움이 분노를 누르려 할 때. 군터가 할렌을 일깨웠다.

[네가 누구인지 잊지 마라.]

전사로서 살았고, 전사로서 죽었다. 그의 삶을 장식한 숱한 싸움에서 수 없는 고통과 두려움 속에서 쓰러졌으나 단 한번도 다시 일어나지 못한 적이 없었다.

[장군.]

거대했으나 흐릿했던 영혼이 서서히 빛을 되찾았다.

[다시 한번…제게 기회를.]

두려움은 온데간데없이 분노, 투쟁심만이 가득하다. 많은 것이 달라졌지만 본질만은 변하지 않은 것이다. 입꼬리는 움직이지 않았으나, 군터는 흡족하게 웃었다.

[그럴 것이다.]

끓는 물처럼 끓기 시작한 할렌을 진정시키고, 군터는 즉시 모페이브를 불러 할렌을 위한 새로운 몸을 만들 것을 지시했다.

“보조가 필요한가?”

“괜찮습니다. 먼젓번의 경험이 있으니 이번에는 저 혼자로도 충분합니다.”

“먼젓번보다 더 나아야 한다.”

이전의 몸도 아주 부족한 것은 아니었으나,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할렌의 영혼은 더 이상 평범한, 일개 영혼이라 할 수 없게 변했다. 그렇다면 그 영혼을 감당할 몸 역시 평범해서는 안 된다.

“맡겨주십시오.”

모페이브가 드물게 자신감과 열의를 보였다. 나이를 먹었어도 여전히 술사로서의 마음과 욕심을 유지하고 있는 그였다. 이런 도전적인 과제는 그의 식어가던 술사로서의 열정에 다시 불을 지폈다.

* * *

명목상으로는 고초를 겪은 동생을 위로하기 위한 자리였다. 그러나 막상 동생과 마주앉은 보리스는 입에 발린 말이라도 위로의 한 마디조차 건넬 수 없었다.

상처투성이의, 그래서 더 독이 바짝 오른 한 마리 독사를 보는 듯했다. 보리스는 늘 그림자처럼 동생을 뒤따르던 시녀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어렵사리 동생에게서 눈을 뗀 후에야 알아차렸다.

‘그런가.’

이름도 기억한다. 산드라. 자신에게 그라모트와 로우렌이 있다면 동생에게는 그녀가 있었다. 아랫사람이라기보다는 친구에 더 가까운.

“고생이 많았겠구나.”

그런 수하를 잃었으니, 마치 몸의 일부를 잃은 기분일 것이다. 지금의 저 모습이 이해가 간다. 자신이라도 그랬을 테니.

“힘들었지.”

“이야기는 들었다.”

처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웃음 밖에 나오지 않았다. 화를 내려고 해도 적당한 수준이어야 화가 나지, 이해 가능한 범주를 넘어서면 황당하기만 할 뿐이다.

코누디스라고? 그 이름을 떠올리기 위해 이미 오래 전에 묻힌 기억을 더듬어야 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이름을 떠올린 후에는, 그 코누디스의 후계자라는 놈이 지껄였다는 말을 이해하기 위해 다시 한 번 머리를 써야 했다. 하지만, 허사였다.

“상상도 못했군. 그 놈이 설마 그런…….”

미치광이였을 줄이야.

뒷말을 삼킨 보리스가 동생과 시선을 마주쳤다. 차분해 보였다. 서늘한 독기가 분명히 느껴지는데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차분해 보인다. 감정을 철저히 통제하고 있음이다.

철없는 녀석이라 여겼었는데 언제 이렇게 성숙해진 것인지. 홀로 앉아있는데도 예전 잡스러운 녀석들을 몰고 다닐 때보다 더 강해 보였다. 그 모습이 대견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애석하기도 했다.

“…….”

가리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가리지 않은 것인지, 팔뚝에 난 얕은 상처가 눈에 띄었다. 사제에게 치료를 받았을 터인데도 지워지지 않은 그것이 실비아를 귀족 영애가 아니라 한 명의 여전사처럼 보이게 했다.

활짝 만개한 꽃. 그러나 한참이나 일찍 스스로 핀 꽃이다. 그 상처투성이 꽃을 보며 보리스는 차마 아름답다고는 할 수 없었다.

문득 회의가 들었다. 대체 무엇을 위해 이 아이와 다투었는가. 조금이라도 더 강해 보이기 위해서? 어째서 그리도 보여지는 것에 집착했던가?

‘내가 강하지 않았기 때문이지.’

진실로 강한 자는 스스로를 내보일 필요가 없다. 강함을 과시하거나 연기하지 않는다. 오직 강하지 않은 자들만이 강하지 못한 것을 우려하여 유난을 떠는 것이다.

보리스는 마침내 깨달았다. 자신이 해야 했던 일은, 이 가여운 녀석을 물어뜯으며 이를 드러내는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갈고 닦으며 힘을 길러 진정으로 강해지는 것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이른 순간. 놀랍게도 불편했던 마음이 한순간에 평온하게 가라앉았다. 자리에 앉기 전까지 품었던 일말의 못마땅함도 씻은 듯 사라졌다. 그것은 이제껏 보리스가 겪었던 것 중 가장 신비로운 경험이었다. 같은 밥그릇을 놓고 싸우는 못마땅한 피붙이가 이제는 가족으로 보였다. 예전, 그렇게 아꼈던 하나뿐인 동생으로.

“고생이 많았겠어.”

같은 말을 반복했다. 고저 없는 목소리인 것도 똑같았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감정의 차이를 느꼈는지 실비아의 표정이 변했다.

“힘들었지.”

같은 말이 다시 한 번 오갔을 뿐인데, 서늘함만이 감돌던 자리에 자그마한 온기가 피어났다. 아직은 너무 작지만, 사그라지지만 않는다면 머지않아 훈풍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 온기였다.

* * *

성주부의 동태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것은 모든 관료와, 그 외에 힘 있고 눈치 있는 자들의 공통사항이지만 로우렌은 특히 그쪽에 신경을 더 많이 썼다.

이전에도 그랬고, 실비아가 보리스와 대립각을 세우기 시작한 후부터는 더욱 그랬다.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후계구도에 이상이 생기지는 않으리라 확신하기는 했지만, 그런 개인적인 생각과는 별개로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야 하지 않겠는가.

친위대의 동향에 신경을 쓰는 것도 그 일환이었다.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없는 성주와 달리, 그의 수족이라 할 수 있는 친위대는 비교적 그 행보를 파악하고 짐작하기가 쉬운 편이었다.

그렇기에, 바깥에서 굴러들어온 용병 나부랭이가 단번에 친위대의 백부장 자리에 앉았다는 소식을 들은 로우렌의 머릿속에서 불똥이 튄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자의 이름이 뭐라고?”

“울티노라고 합니다.”

울티노. 울티노. 몇 번이고 머릿속으로 되뇌어보지만 역시나 들어본 적이 없는 이름이다.

“알아보도록. 어디서 왔는지, 뭘 하다 왔는지. 알아낼 수 있는 것은 전부 알아봐.”

명령을 내리며, 로우렌은 기시감을 느꼈다.

분명 이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다. 어디서 굴러들어온 것인지 모를 자에게 대뜸 친위대의 장교 자리를 내리지 않았던가. 이름도 기억한다. 롬바드. 아가씨를 지키다가 전사했다고 들었다.

‘공교롭군.’

롬바드가 죽자 다른 자가 그의 자리를 대신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이건…너무나 공교롭지 않은가.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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