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3화
“자질구레한 사연까지 읊을 필요는 없네.”
지금이야 고귀한 자리에 앉아있지만, 한때 보리스는 피냄새가 가장 짙게 풍기는 곳에서 숱한 시체를 봤었다. 하지만 일반적인 시체와 살점이 다 떨어져 나간, 헐벗은 머리통은 다르다. 불쾌하거나 꺼림칙하다기보다는…조금 낯설다고 해야 할까.
뭐, 그의 감상이야 그렇지만 나짐의 말대로라면 필요하기에 쓴 것뿐이다. 그렇다면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야 할 일일 터. 보리스는 빛나는 두개골을 보며 다시 물었다.
“그래서 이…물건을 어디에 쓸 수 있다는 말인가. 의료용으로?”
“제가 조금 흥분해서 말씀드리기는 했지만 그런 물건이라면 제법 흔한 편입니다. 물론 효과야 그런 흔한 물건들보다 월등하겠지만, 그런 단순한 용도로 쓰기에는 요정왕의 유해가 너무 아깝지요.”
“그렇다면?”
“외람되지만 공자님께서는 혹 각인 시술을 받으셨는지요.”
“아니. 받지 않았다.”
받을 기회는 있었다. 지금도 원한다면 당장 받을 수 있다. 하지만 보리스는 각인을 받지 않았다. 욕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한 사람이 지닐 수 있는 각인의 힘은 한가지. 그러나 솔롬은 물론, 하잘이나 판니른까지 범위를 넓힌다고 해도 그의 마음에 드는 각인은 찾을 수 없었다. 시술을 하는 술사의 역량도 역량이지만, 그의 마음에 찰 만큼 뛰어난 각인술을 찾을 수가 없었다.
모든 각인술은 비전이다. 제국의 군문에서 공용으로 쓰이는 것도 있으나 그런 것은 보리스의 마음에 차지 않았다. 정말 보물이라고 할 만한 비전 각인들은 대개 특정 가문들에서 비밀스럽게 전승되거나 황가의 비보로서 존재했다.
일반적으로는 그 존재조차 알지 못하며, 안다고 해도 손댈 수 없는 지식이며 힘이지만 보리스는 자신이 있었다. 제국의 주인을 정하는 전쟁이 진행중이다. 그 전쟁에서 크렘보르 가문은 중추 역할을 맡고 있지 않은가. 공에 대한 보상으로서 요구해도 되고, 그게 아니라면 비전 각인을 지니고 있는 가문을 무너뜨리고 얻어내면 될 일이다.
지금은 아니지만, 시간 문제라고 생각했기에 서두르지 않았을 뿐이다. 그런데 지금. 나짐이 각인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며 보리스의 흥미를 끌었다.
“지금 시대에 우리가 사용하는 각인은 이종(異種)의 능력을 모방한 것이 대부분이지요. 고대의 위대한 탐구자가 발견한 각인술이라는 것은 쉽게 말해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사람에게 도구를 쥐여주고 그 사용 방법을 알려주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힘이나 능력만을 더해주는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보다 근본적인 면에서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지요. 존재 자체를 바꿔 놓는다고 봐도 좋을 겁니다.”
나짐은 또 다시 샛길로 빠지려는 것 같다가 곧 균형을 찾았다. 그는 보리스의 눈빛이 부드럽지 않은 것을 간파하고는 목소리를 낮추며 말을 이었다.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각인은 단순한 힘이나 능력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각인 시술을 받고 각인이 피시술자에게 온전히 안착하게 되면 그 순간부터 피시술자는 변화하게 됩니다. 각인에 영향을 받는 것이지요. 영육 전체에 걸쳐서 말입니다.”
“자네가 헛소리를 하는 것이 아니라 믿지만, 나는 그런 이야기를 처음 듣는데.”
“그런 사례가 극히 드물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허나 그것은 각인술의 설계 과정에서 여러 안전장치를 끼워 넣기 때문입니다. 그런 장치는 거의 모든 각인술에 포함되어 있으며, 심지어 그것이 없으면 술법 자체가 작동하지 않게끔 되어 있습니다. 필수적인 요소인 것처럼 말이지요. 때문에 그러한 배제과정이 각인술의 필수 요소인 것으로 알고 있는 술사들이 많습니다. 아니, 거의 대부분이 그럴 겁니다.”
“자네는 그것을 어찌 아나? 어찌 그리 확신하지?”
“제가 말씀드린 대부분에 속하지 않는 극소수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 배제과정 없이도 멀쩡히 작동하는 각인술을 본 적이 있습니다. 몇 가지 알고 있기도 하지요.”
“그건 사령술과 관련된 것이겠지?”
나짐은 제국에서 배척 받는 사령술사다. 비단 제국만이 아니라 국외에서도 인식이 썩 좋은 부류는 아니고 말이다. 물론 제국처럼 아예 금기로 지정되는 수준까지는 아니지만.
“맞습니다. 그렇기에 내세울 만한 것은 못 되지요.”
존재 자체가 금기에 대한 부정이기에, 사령술사들은 법칙처럼 여겨지는 주류의 방식으로부터 자유로웠다. 그들은 무수한 시도를 했고, 그 시도들 대부분이 금기이거나 그에 준할 만큼 파격적이고 비밀스러운 방식이었다.
많은 도전이 있었고 많은 실패가 있었으나, 개중 약간의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제국의 각인술은 비효율적이라는 겁니다.”
“비효율적이다?”
“각인이 이종의 힘과 능력을 흉내낸 것이라 말씀드렸지요.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만약 가시가 잔뜩 난 나뭇가지를 손에 쥐려고 한다면 손을 보호하기 위해 장갑을 착용해야 할 겁니다. 당연히 필요한 안전 장치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런데 맨들맨들한 작은 돌을 쥔다면, 그때도 장갑 같은 것이 필요하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럴 때 장갑은 거추장스러울 뿐이지요. 가벼운 예시로 말씀드렸지만, 불필요하고 거추장스러운 정도의 차이만 다를 뿐 대부분의 경우가 이렇습니다. 요컨대 부여하려는 힘과 능력의 성질에 따라 안전장치, 배제과정이 필요치 않을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 배제과정이라는 것이 들어가면 비효율성이 그렇게나 커진다는 말인가?”
“커집니다. 각인술이라 함은 맨몸의 사람에게 도구를 쥐여주고 그 사용방법을 알려주는 것이라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배제과정이라는 것은 사용 방법이 매우 복잡한 도구를 쥐여주고서 정작 중요한 사용방법은 알려주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 어찌 되겠습니까? 물론 스스로 궁리하여 사용방법을 깨우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런 경우는 극히 드물 것입니다. 천에 하나, 만에 하나 정도나 될까요?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모르겠군요.”
보리스는 조금 전 나짐이 했던, 각인이 피시술자에게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킨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비로소 이해했다.
순박한 무지렁이에게 칼 한 자루를 쥐여준다고 가정하자. 그러면 그 무지렁이는 어떻게 될까? 그것은 그에게 칼을 쥐여준 이가 그를 어떻게 이끄느냐에 달린 일일 것이다. 이 칼로 힘없는 자들을 해칠 수 있다고 속삭인다면 그는 도적이 될 것이며, 힘 있는 자가 지켜야 할 규율과 책무 등에 대해 알려준다면 군인이 될 것이다. 어쩌면 위대한 영웅이 될 수도 있을 테고.
무지렁이가 도적이 되고, 군인이나 다른 무언가가 되는 것. 그것은 무지렁이라는 사람의 본질이 변화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제국의 각인술은 그러한 본질의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부분을 잘라낸 채 가장 단순한 부분만을 남겨놓았다.
“의도적이라고 보나?”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또한 이해합니다. 본질의 변화라는 것은 상상 이상으로 위험한 영역이니까요. 하지만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위험하다고 해서 무조건 배제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미지는 종종 두려움을 낳지만, 그렇다고 미지가 곧 두려움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미지는 탐구와 개척의 대상이지요. 나짐은 그리 덧붙였다.
‘흐음.’
그의 열정적인 설명이 아니더라도 보리스는 그가 말한 내용에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위험할 수도 있지만, 비효율을 없앤다는 그의 설명은 분명 매력적이었다. 이 장황한 이야기를 꺼낸 이유가 필시 저 빛나는 두개골 때문이라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 흥미는 더욱 커졌다.
“계속 해보게.”
보리스가 자신의 말에 설득됐다고 느꼈는지 나짐의 표정이 밝아지고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이것은 요정왕이라는 신비롭고 강대한 존재의 유해입니다. 온전하지는 않을지라도 그의 힘이 녹아 있지요. 게다가 그 힘은 생기입니다. 이것은 행운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자네의 표현에 따르면, 돌이라고 할 수 있겠군. 장갑을 낄 필요 없는 맨질맨질한 돌.”
“그렇습니다. 만약 이 유해의 힘을 수습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일반적인 각인 따위와는 비할 수 없을 만큼…….”
“한 가지만 짚고 넘어가지.”
“예?”
“자네의 말은 얼추 다 이해했네. 자네가 주장하는 방식대로 각인을 진행한다면 확실히 이점이 있을 거라는 것도. 하지만 자네가 저것을 잘 다룰 수 있겠나? 그러니까 내 말은, 자네에게 저 유해를 이용한 각인 과정을 맡겨도 되겠느냐는 말이네.”
나짐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언제든 자신의 목을 날려버릴 수 있는 권력자 앞에서 어떻게든 잘 보이려 조심하던 속물적인 술사의 모습은 이제 그에게서 찾아볼 수 없었다.
“맡겨주신다면 최선을…….”
“아니. 아니지. 그런 답을 바란 것이 아니네. 저것은 자네가 말한 것처럼 귀한 물건이지. 보물이라 할 만해. 그런 물건을 사용하는 일이야. 게다가 시술이 안정적일 거라는 보장도 없지. 자네가 아무리 확신한들, 오랜 시간 동안 안정성이 검증된 일반적인 각인술에 비해서 위험성이 큰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 아닌가.”
“그건…그렇습니다.”
“그러니 나로서는 신중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야. 저 보물도 보물이지만, 시술이 잘못될 경우에는…….”
나짐이 마른침을 삼켰다.
이 부분은 그 역시 생각해본 문제였다. 왜 그렇지 않겠나. 상대는 크렘보르의 후계자다. 그런 존귀한 존재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일신의 안위. 그런데 어찌, 효과가 뛰어나고 해도 안정성 측면에서 불확실한 시술을 받을 수 있겠는가.
“증명하겠습니다.”
“어떻게 말인가.”
유해가 품은 힘이 흩어지지 않도록 백치의 두개골에 최대한 응집시켜 놓았다고는 하나, 요정왕의 두개골도 아닌 급하게 구한 대용품일 뿐이라 여러모로 한계가 명확했다. 담긴 힘을 보충할 수도 없으며, 힘이 서서히 사라지는 것을 완전히 막을 수도 없었다.
“실험을 하겠습니다. 이미 짐승들을 이용해 간접적으로나마 실험을 한 바가 있으니, 사람을 통해 보다 본격적으로 실험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곧 안정성을 검증할 수 있을 겁니다.”
“유해는 더 구하지 못한다.”
“어차피 한 사람이 유해에 담긴 힘을 모두 소화할 수는 없습니다. 유해의 힘이 아무리 안정적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지요. 말씀드렸듯 각인은 피시술자의 영육에 영향을 미칩니다. 특히나 배제과정을 배제한 시술의 경우, 영육이 보다 강하게 영향을 받게 되지요. 그런데 너무 많은 힘을 받아들이려 할 경우, 최악의 경우에는 영혼이 변질될 수가 있습니다.”
“…그건 좋지 않겠군.”
“그러니 유해의 힘이 소진될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목적이 안정성의 검증인 만큼 확실하게 진행하겠습니다. 에, 다만 실험체로 쓸 대상은.”
“그 부분은 걱정하지 말게.”
세상이 혼란스러워지면 숨어있던 쥐새끼들이 가장 먼저 고개를 드는 법. 광산으로 끌려가는 죄수들 가운데 몇 명 정도 사라진다고 해서 신경 쓸 이는 아무도 없다.
보리스는 나짐에게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하고, 마지막으로 빛나는 두개골을 일견한 뒤 퀴퀴한 지하 연구실을 나섰다.
“공자님.”
보리스가 막 지상으로 올라왔을 때. 로우렌이 묘한 얼굴을 한 채 그에게 다가왔다.
“아가씨가 돌아오셨습니다.”
“그래?”
보리스의 표정이 로우렌과 비슷하게 변했다.
* * *
“허억…허억…….”
떠나갈 때는 열 명이 넘는 인원이 움직였으나 돌아온 이는 넷뿐. 그마저도 한 명은 떠날 때 없었던 얼굴. 그러나 솔롬의 성벽을 앞둔 일행의 표정은 저 하늘에 걸린 태양처럼 환했다.
가슴 속에 묻어둔 슬픔과 분노는 잠시 잊는다. 지금만큼은, 잠시만큼은 기뻐해도 되지 않겠는가. 기적적인 생환과 임무의 완수에 대해서.
두두두-!
그들이 성문 앞에 다가가기 전. 성문이 먼저 열리고 일단의 기마가 먼지구름을 만들며 빠르게 다가왔다.
“아가씨.”
실비아가 앞으로 나섰다. 기력을 회복하자마자 주인 잃은 말 위에 홀로 올랐던 그녀였다. 지금도 겉모습은 추레할지언정 당당함과 기품만은 잃지 않았다.
그녀는 가만히 서서 점점 가까워지는 먼지구름을 응시했다.
흐릿하던 말 위의 모습들이 어느 정도 분간되기 시작할 즈음. 그녀의 눈에 한순간 실망의 빛이 스쳤다.
“아가씨!”
그녀의 앞에 다다르자마자 모두가 뛰어내리다시피 말에서 내리며 예를 취했다. 실비아는 그녀의 무사 귀환에 안도하는 이들을 담담히 지나쳤다. 저 멀리 보이는 성문과 성문으로 통하는 길은 모두 활짝 열려 있었다.
* * *
“마중은 나가지 않으십니까?”
“그래.”
모페이브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군터는 즉답했다. 정말로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미 보고를 들어 실비아가 무사하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러니 굳이 도시 밖까지 나가서 녀석을 맞이할 필요는 없다. 그러지 않아도 어차피 녀석이 이곳으로 올 테니.
물론 그는 모페이브가 왜 그런 쓸데없는 질문을 한 것인지 알고 있었다. 험난한 여정을 겪은 여식에게 부성애를 보임으로써 심심한 위로라도 건네라는 것이겠지. 그러나 그런 얄팍한 위로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녀석이 홀로 서려 한다면 이런 과정도 스스로 이겨내야 한다. 아니면 일찌감치 주저앉아 도와달라 손을 뻗든가. 만약 녀석이 그리한다면 군터는 기꺼이 손을 잡고 일으켜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녀석이 스스로 바라기 전에는.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