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터-992화 (992/1,064)

992화

보리스는 부친의 부름을 받고 집무실로 향하면서 자신이 부름을 받은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역시 술사 나짐과 관련한 문제였다. 바로 얼마 전, 억압하다시피 하여 그의 입을 열었으니 만약 나짐이 아직도 부친의 관심 안에 있었다면 자신이 강제로 그의 입을 열었던 것이 필시 부친의 심기를 거슬렀으리라.

하지만 보리스는 가장 먼저 떠올린 추측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나짐의 일 때문일 가능성은 크지 않다. 나짐이 여전히 부친의 관심을 받고 있었다면 그가 지금까지 그런 한심하게 지내고 있었을 리 없다. 게다가 솔롬의 전력 상당 부분이 서부 전선에 가 있는 상황에서 난데없는 재앙이 판니른에 드리운 이 때. 감찰대의 역량이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은 바로 얼마 전까지 성주 대리로서 솔롬을 다스렸던 보리스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그들이 과연 일개 술사 나부랭이에게까지 신경을 쓰고 있을까?

‘그럴 리 없지.’

세번째 계단을 올랐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거칠 것 없이 걸음을 옮겼었지만 지금은 몸가짐에 신경을 쓰게 된다.

“잠시 기다려주십시오. 안에 아뢰겠습니다.”

문을 지키고 있던 병사가 그를 멈춰 세웠다. 그가 문을 두드리기 무섭게 들어오라는 말 한 마디 없이 문이 열렸다. 고개 숙인 병사가 제 위치로 돌아가고, 보리스는 문턱을 넘어 집무실로 들어섰다.

솔롬의 성주가 업무를 보는 집무실은 본래 솔롬이 군사 요새였던 시절 지어진 것이라 어엿한 도시로 다시 태어난 현재 솔롬의 위상에 비하면 초라하다 할 만한 크기였다. 사람이 열 명만 넘어가도 앉을 자리가 부족해질 정도였고, 그 이상의 인원이 한번에 모여 일을 보려면 나머지는 대열을 맞춘 병사들처럼 나란히 서 있어야 했다.

그 크지 않은 집무실에 두 명이 있었다. 한 사람은 그의 부친. 그리고 또 한 사람은.

[눈이 맑군.]

머릿속에 들려온 한 마디. 그 속에서 느껴지는 옅은 흥미. 보리스는 순간 표정이 무너질 뻔했다. 마치 개미가 되어, 까마득한 위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포식자를 마주한 것 같은 감각.

“줄카다.”

부친의 입에서 나온 줄카라는 이름. 그 이름을 어디에서 들어봤는지 떠올리는 데만 숨을 두 번 쉴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다. 사고의 속도가 평소보다 훨씬 느려졌던 탓이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보리스 크렘보르라 합니다.”

마음을 감추고 표정을 숨긴다. 최대한 담담하게 짜낸 목소리로 말하며 부족하지도, 과하지도 않게 예를 표한다.

푹신한 가죽의자에 앉은 사내가 성의 없이 고개만 까딱였다. 그 가벼운 몸짓 어디에서도 군주다운 위엄은 느낄 수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를 의식하게 된다.

“곧 전투가 벌어진다.”

“예?”

“아간투스베록이 군대를 모으고 있다. 지금쯤이면 모든 준비를 마쳤을지도 모르지. 그게 아니라고 해도 조만간이다.”

보리스는 이 대화의 흐름을 놓치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어째서 줄카가 여기에 있는가. 아간투스베록이 군대를 모으고 있다? 곧 전투가 벌어진다고? 어디서?

“…그가 이곳에 오는 겁니까?”

“그래.”

이 땅에 벌어지고 있는 재앙이 두 군주의 싸움으로 인한 것임을 안다. 줄카가 이곳에서 부친과 함께 있다는 것은 부친이 줄카와 손을 잡았다는 뜻일 터. 그렇다면 자연히 적은 아간투스베록이 된다.

‘어째서…….’

아간투스베록이 이곳에 오는가? 그것을 어찌 아느냐는 어리석은 질문 따위는 하지 않았다. 보리스가 이해하지 못한 것은, 어째서 둘 중 하나의 손을 잡아 솔롬을 전장으로 만들었냐는 것이었다.

두 군주가 서로 다툰다? 제국의 비극이긴 하나 냉정히 따져보면 솔롬과는 상관없는 일 아닌가. 폭풍이 몰아칠 때는 문을 닫아걸어야 하는 법이다. 굳이 밖으로 나가 바람을 맞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입 밖으로 낼 수는 없었다. 보리스는 이 자리가 통보의 자리지, 의견을 듣기 위한 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렇다면…병력을 집결시켜야겠군요.”

솔롬의 병력이야 인근 초소 등에 배치되어 있는 인원까지 합해도 얼마 되지 않지만, 하잘의 군대는 수가 제법 된다. 물론 하잘은 최후의 보루라 할 수 있는 군대를 내주지 않으려 할 테지만 솔롬 성주의 이름으로 밀어붙인다면 결국 따를 수밖에 없을 터.

‘머릿수만 채우는 것뿐이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써먹을 수 있겠지.’

보리스가 머릿속으로 끌어 모을 수 있는 병력을 계산하고 있는데, 그의 머릿속이 또 한 번 울렸다.

[써먹을 수 있는 전력이어야 한다. 함성 대신 비명을 지르는 약졸들은 있어봐야 혼란만 가중시킬 뿐이니.]

“당연히 모든 병력이 정예라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머릿수는 그 자체로 쓸모가 있습니다. 일단 성벽이 있으니…….”

[이번 전투에 성곽은 쓸모가 없을 거다.]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신지.”

솔롬의 성곽은 대충 모양새만 내기 위해 올린 허접한 물건이 아니었다. 크렘보르의 깃발이 걸리기 전의 솔롬도 군사 요새였으며, 크렘보르가 다스리기 시작한 후에 도시로서 다시 태어난 솔롬의 성벽도 철저하게 군사용도로 설계되었다. 새로운 성곽을 만든 설계자들은 만명의 병력만 있으면 서너 배 이상의 적도 막아낼 수 있을 것이라 자신 있게 말하기도 했다.

그렇기에 솔롬의 성벽은 솔롬 시민들의 자부심이자 크렘보르의 자부심이었다. 당연히 보리스의 자부심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 자부심이 아무것도 아닌 듯 무시당했으니 상대가 군주라고 해도 목소리에 날이 서는 것이 당연했다.

[영적인 존재들은 경계를 넘나들 수 있지. 놈이 그런 것들을 서넛만 거느리고 있어도 성벽은 의미가 없다.]

줄카는 보리스의 불손한 태도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보리스는 심지어 자신이 무시당했다고 느꼈다. 의도적인 괄시가 아니라 정말 가치가 없기에 눈길을 받지 못한 것 같은 느낌을.

비참한 경험이었지만, 낯선 경험은 아니었다. 때때로 부친과 마주하고 있으면 부친의 시선이 자신이 아닌 어딘가를 향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다. 지금의 느낌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그때와 비슷했다.

[너라면 이해하겠지.]

그의 시선은 부친에게만 향했다. 아마 처음부터 그랬었던 것 같다. 눈이 맑다는 말을 했던 그 순간조차.

“아주 의미가 없지는 않다.”

뜻 밖이었던지 줄카의 고개가 슬쩍 옆으로 움직였다. 그러다 무언가를 깨달은 듯 눈의 크기가 조금 커졌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슬며시 웃기까지 했다.

[훌륭하군.]

보리스는 철저한 방관자가 되어 둘의 대화를 들었다. 그는 그들이 나누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고, 따라갈 수는 더더욱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 보리스의 얼굴에는 표정이 사라졌으나, 앉아 있는 둘 모두 그런 보리스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 * *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로우렌은 어쩐지 얼굴에 핏기가 없어 보이는 보리스를 보며 물었으나, 보리스는 아무 일도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곧 전투가 벌어질 거라더군.”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줄카가 이곳에 와 있다.”

로우렌의 반응도 조금 전의 보리스와 다르지 않았다. 줄카라는 이름을 듣고도 눈을 두어 번 정도 끔뻑거린 후에야 천천히 입을 벌렸다.

“아버님께서 줄카의 손을 잡았다. 곧 아간투스베록이 군대를 이끌고 이곳으로 올 거라 했다.”

“…그렇다면, 병력을 모아야겠군요.”

“그래. 하잘로 전령을 보내라. 병력을 보낼 수 있는 만큼 다 보내라고 해.”

“시간이 얼마나 있는 겁니까?”

“모른다. 하지만 그리 많지는 않은 것 같더군.”

로우렌의 보리스의 목소리가 가라앉아 있는 것에서 그의 기분이 좋지 못하며, 그것이 조금 전 성주의 집무실에 들렀던 것과 관련이 있으리라 짐작했다.

“예. 전령은 곧 보내겠습니다. 그런 그렇고, 그 일 말입니다만. 진전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 일?”

“예. 술사 나짐…….”

“아. 그래. 진전이 있었다고? 무슨 진전 말이냐?”

화제 바꾸기는 성공적이었다. 나짐에게 맡겼던 그 일을 거론하자 보리스가 관심을 보였다. 이전보다 더 적극적인 모습이었다. 그게 진전이 있었다고 해서인지, 아니면 그새 마음이 바뀐 것인지는 모를 일이었다.

“얼핏 듣기는 했습니다만 저는 잘 이해가 안 되더군요. 그게 아니더라도, 직접 들으시는 편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렇겠지.”

“어떻게, 그자를 부를까요?”

“아니. 내가 가서 듣겠다.”

비밀스럽게 진행되는 일이다. 나짐의 존재 자체도 그렇고, 요정왕의 유해를 수습한 것도 아무도 몰래 했던 일인 만큼 이 일이 밖으로 알려지면 아무래도 곤란했다. 하여 보리스는 직접 나짐이 연구에 매진하고 있는 비밀 연구실로 향했다.

“오셨습니까.”

눈 밑이 검게 변한 나짐이 보리스를 맞이했다. 기분 탓인지 모르지만 푸짐하던 체구도 조금 가늘어진 것 같았다.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는 보고를 듣기는 했지만, 지금 나짐의 모습은 일전에 보았던 때와 사뭇 달랐다.

“그래. 성과가 있었다고 들었는데.”

“약간의 진전이라면 모를까, 성과라고 하기에는 부족함이 많습니다. 음. 일단 보시지요.”

앞서 걷는 나짐의 걸음걸이에서 힘이 느껴졌다. 자신감, 혹은 자부심의 발로일 터였다.

“신비롭고 강대한 존재는 그 숨결조차 힘을 머금는 법이지요. 요정왕 정도의 존재라면 그 유해에 막대한 힘을 품고 있는 것이 당연합니다.”

처음 로우렌에게 작은 주머니를 건네받았을 때, 그리고 그것이 요정왕의 유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얼마나 놀랐던가. 놀란 수준이 아니라 경악 그 자체였다. 주머니를 받아 든 손을 너무 떨어서 로우렌이 괜찮냐고 물었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 정도로 막대한 힘은 특별히 작용하지 않더라도,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주변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끼치기 마련입니다. 예를 들면…….”

“말을 끊어서 미안하지만, 내가 자네를 찾은 것은 수업을 듣기 위해서가 아니야.”

“앗! 송구합니다. 제가 그만.”

바로 화들짝 놀라며 사과하는 나짐. 그를 보며 보리스가 내심 혀를 찼다.

술사라는 이들이 대체로 이런 경향이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속물적인 족속으로 보였던 나짐까지 이럴 줄은 몰랐다. 뭐, 능력만 있다면 아무래도 좋은 일이지만.

“에…그러니까, 그 유해에 깃든 힘이 어떤 부류인지 알아냈습니다. 생기더군요. 살아있는 것들의 기운을 북돋고, 성장케 하는 힘이었습니다. 다 죽어가던 벌레와 쥐, 그 외 다른 생명들이 유해의 기운에 잠깐 닿은 것만으로도 건강을 되찾았습니다.”

“그건…대단하군.”

보리스가 나직이 감탄하자 나짐은 자신이 칭찬을 들은 것처럼 눈을 반짝였다.

“대단하지요. 대단하고 말고요. 사제들의 축복을 생각해보십시오. 악한 기운을 물리치고 신의 은총을 불어넣어준다지만 실질적으로 눈에 보이는 기적은 치유입니다. 병을 낫게 하고 상처를 아물게 하는 힘이지요. 그런데 이 유해가 지닌 힘은 신전에서 베푸는 기적보다 월등히 뛰어납니다.”

나짐이 잔뜩 흥분해서 떠들어댔다. 보리스는 그의 말을 끊지는 않았으나, 나짐의 말에 다 동의하지는 않았다.

나짐이 말한 것이 모두 사실이라는 전제 하에 분명 유해의 힘은 대단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신전의, 사제들의 힘보다 낫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나짐이 말하는, 그의 기준으로 변변찮은 수준의 기적은 대개 일반적인 성직자들을 통해 이뤄지는 것일 뿐이다. 일반적으로 보기 힘든 고위 성직자들이 사용하는 힘은 정말 기적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대단했다. 아마 나짐은 그 힘을 겪지도, 보지도 못했기에 저리 쉽게 말하는 것이리라.

“정말 다행입니다. 사실 저는 내심 유해의 힘이 다루기 까다로운 부류면 어떻게 하나 걱정을…….”

“생기라는 것이 다루기 쉬운 부류인 모양이지?”

“물론이지요. 생기야말로 살아있는 모든 생명에게 가장 가깝고 적합한 힘입니다. 그만큼 활용하기도 쉽지요.”

“호오.”

보리스와 나짐은 어느새 비밀 연구실의 가장 깊숙한 곳에 이르렀다.

두꺼운 철문이 그들의 앞에 나타나자, 나짐이 큼지막한 열쇠를 꺼냈다.

“본래 모든 힘은 그릇을 필요로 합니다. 그릇을 잃은 힘은 늦든 빠르든 흩어지게 되지요. 땅에 닿은 물이 결국 스며들어 사라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끼릭-끼릭-철컹!

문이 열렸다. 나짐이 얼굴을 붉히며 철문을 밀었다. 느릿하게 밀리는 철문을 바라보던 보리스가 한 손을 뻗었다. 나짐이 밀 때는 애벌레가 기어가는 것처럼 느릿하게 움직이던 문이 보리스가 손을 대기 무섭게 시원하게 뒤로 밀려났다.

“허억. 허억. 송구합니다.”

“말이나 마저 하게.”

“아, 예. 에…그러니까, 요정왕의 유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 제게 그것을 주셨을 때는 재의 형태였지요. 만약 그것을 그대로 두었다면 오래지 않아 모든 힘이 소실되었을 겁니다. 때문에 저는 가장 먼저 유해의 힘을 안정적으로 보관하기 위해 그릇을 마련했습니다.”

보리스는 나짐의 말이 변명하는 투라고 느꼈고, 곧 정말로 그것이 변명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 그릇이라는 것이, 꼭 저런 형태여야 했나?”

“어, 어쩔 수 없었습니다. 에…모든 생명은 잘 만들어진 건축물과 같습니다. 그 외형도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기에 그리 생긴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영혼의 발현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정신이며, 그 정신이 머물기에 가장 적합한 부위가 바로 머리입니다.”

횃불로 밝힌 어두운 실내. 그 한가운데에 복잡한 문양이 새겨진 작은 석조 구조물이 있었고, 그 위에… 은은한 빛을 뿜어내는 두개골이 떠 있었다.

“혹시 해서 묻는 것인데.”

“사람의 것이 맞습니다. 백치의 것이지요. 일가족 하나 없이 아사한 자의 것입니다.”

나짐은 묻지도 않은 내용까지 줄줄 읊어댔다. 보리스는 허공에 둥둥 떠서 빛을 뿜어내고 있는 해골을 보며 실소를 머금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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