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1화
거대한 늪 속에서 허우적대는 것 같았다. 발버둥칠수록 팔다리가 무거워지고 더 깊게 빠져드는 듯했다.
푸욱!
보울룬은 어느새 무의식적으로 창을 찌르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언제부터 이랬지?’ 그는 약간 놀랐으나, 그의 창은 그 어느 때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뻗어 나가고 있었다. 뾰족한 창 끝이 송아지 만한, 거미를 닮은 괴물의 가장 큰 눈 두 개의 한 가운데를 찔렀다. 창이 괴물에게 닿기 바로 직전, 괴물의 몸이 덜컥 멈추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고맙다. 오히나.’
유령처럼 움직여 괴물의 몸을 마비시킨 뱀 정령이 굳어버린 괴물에게서 벗어나 다시 보울룬의 곁으로 돌아왔다. 그 사이 보울룬의 창은 다시 한 번 움직였다.
‘왜 어둡지?’ 보울룬은 문득 생각했다. 그리고 머리 위로 뻗은 창에서부터 역한 피가 후두둑 덜어지고 나서야 머리 위로 뛰어오른 또 하나의 괴물이 있었음을 알아차렸다.
‘아아. 네놈이 달을 가렸구나.’
창 날을 지나 창대까지 꿰여 내려온 작은 괴물을 털어내고 숨을 골랐다.
‘생각보다 잘 싸우는데.’
이것이 사선에 서서 내리는 스스로에 대한 평가라는 것이 우습다. 하지만 실제로 그의 몸은 그 어느 때보다 원숙한 전사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교관에게서 소질이 있다는 말을 듣기는 했으나 그는 무기를 만져본 지 얼마 안 된 애송이에 지나지 않았다. 그 스스로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신의 굽어살피심을 믿고 객기를 부리기보다는 뒤에 물러나서 정령의 힘을 빌리거나 지휘관 행세만 해왔던 것이 사실이다.
후두둑!
얼굴에 핏물이 튄다. 기이할 만큼 긴장이 되지 않는다. 어둑한 밤. 그보다 더 어두운 곳에서 끝도 없이 쏘아지는 끔찍한 괴물들. 죄 지은 자들, 불신자들이 마지막에 닿게 된다는 형벌의 세계가 이렇지 않을까 싶었다. 그런데 그 흉험함을 생생하게 느끼고 있음에도 그의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주께서 굽어살피시는가.’
점점 지쳐가는 몸. 등 뒤에 있는 지켜야 할 대상. 육신은 점점 굳어갔으나 그의 의식은 이제 막 날개를 펴고 날아오른 새처럼 한없이 자유로워졌다.
“훌륭하십니다! 그런 솜씨를 숨기고 계셨습니까!”
뒤따르던 론돌이 크게 웃으며 외쳤다. 그의 목소리는 정작 보울룬에게는 닿지 않았으나 몇 안 되는 병사들의 귀에는 선명하게 파고들었다.
* * *
카인, 아니 레오니스 코누디스는 멀어져가는 보울룬 일행을 가만히 서서 바라보았다. 밝은 달빛이 구름 사이로 비칠 때마다 그의 형체가 흔들렸다.
‘걸물이군.’
실비아 크렘보르를 구해간 자. 그는 가장 앞에서 길을 열며 눈부신 활약을 보여주었다. 하기야 신령(神靈)과 함께 하는 자가 평범한 인물일 리 없을 테지만.
눈이 부시다. 주변이 어둑하기에 더 그렇게 보이는 것이겠지. 알지만, 그래도 마음이 동요한다. 이것이, 이 감정의 이름이 질투라는 것을 안다. 갖고 싶지만 가질 수 없는 것을 바라보며 생기는 감정.
그들은 결국 어둠을 뚫고 나갔다. 마지막까지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레오니스 코누디스는 미련없이 몸을 돌렸다.
[빈 손이로군.]
동이 터오는 시간. 높은 언덕 위에 다다른 그는 가장 높은 곳에 우뚝 서 있는 거인왕을 보았다. 거인왕의 몸과 시선은 분명 반대 쪽을 향하고 있었으나 그가 보내는 선명한 조소가 느껴졌다.
“당신의 종들이 덩치 값을 못 하더군요.”
[아니. 그게 아니지. 넌 그것들을 잡고자 하면 잡을 수 있었다.]
“…….”
[그러니 넌 그것들을 놔준 것이나 다름없다. 왜 그런 거지? 성주라는 놈의 독녀라고 하지 않았나?]
“그랬지요.”
실비아 크렘보르는 솔롬 성주 군터 크렘보르의 독녀이자 단 둘뿐인 크렘보르의 핏줄이다. 그러니 후계자이자 독자인 보리스 크렘보르에게 문제가 생길 경우, 그녀는 자연스럽게 크렘보르의 후계자가 된다.
그렇기에 그녀는 명분이었다. 크렘보르 가문. 나아가 솔롬과 판니른을 손에 쥘 수 있는 강력한 명분. 그 명분을, 레오니스 코누디스는 마음만 먹으면 손에 넣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 절호의 기회를 스스로 내려놓았다. 왜?
이 몸뚱이가 품은 알량한 감정 때문에? 그럴 리가.
“확인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확인?]
“내 것이었다고 배웠습니다. 그러니 되찾아야 한다고 수도 없이 말씀하셨었지요. 그때는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들였습니다만, 여기까지 오는 동안 가끔씩 궁금해지더군요. 내가 품은 이 분노가 정당한 것인지.”
[그래서?]
“모르겠습니다.”
선친의 총애를 받았으나 마지막 순간에 그 은혜를 모두 저버린 배신자. 세상에 하나 남은 코누디스로서 선친과 가문의 복수를 하고 배신자가 가진 모든 것을 거둔다. 그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이라고 배웠기에 스스로도 그렇게 여겨왔다.
하지만, 글쎄. 마음이 약해진 것일까. 철부지 주제에 뭐라도 해보겠다며 아등바등하는 여인을 곁에서 바라보며 다른 생각이 든 것일지도 모른다. 저마다의 위치에서 분투하는 인간군상들을 보며, 그들이 이룬 모든 것을 구원(舊怨)이라는 단 하나의 명분 하에 빼앗아도 되는 것인지 문득 궁금해졌던 것일지도.
그래서 확인하고자 했으나, 결과적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다만.
“아무 생각도 안 들더군요.”
회의, 죄책감, 다른 그 어떤 감정도 느끼지 못했다. 여기까지 와서 마음을 돌릴 만한 그 어떤 이유도 찾지 못한 것이다.
[당연히 그렇겠지. 명분이란 약한 것들이 짖어대는 헛소리에 불과하니까.]
여전히, 상대에 대한 배려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강렬한 의성(意聲)에서 짙은 경멸이 느껴졌다.
[세상은 약육강식이다. 강한 놈이 약한 놈을 먹는 것은 태초부터 이어져온 단 하나의 섭리지.]
선과 악. 정의와 불의. 너그러움과 잔혹함. 그 외 그 어떤 분리도 모두 헛소리일 뿐. 강자가 약자를 어찌 다루든 그것은 강자의 마음에 달린 것이다. 그 방식이 어떠하든 약자는 받아들여야 한다. 받아들이지 못하겠거든 맞서 싸워 승리하여 강자가 되어야 한다. 세상의 역사는 매순간 이 단 하나의 원칙에 의해 쓰여 왔다.
[분노할 이유를 찾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지. 원하는 것이 있다면 쟁취하면 그만이다. 목숨을 걸고 싸워서 얻어내. 아니면 쓰러져 죽든지.]
레오니스 코누디스는 거인왕의 눈에 비친 세상이 어떤 모습일지 알 것 같았다. 그의 눈에 비친 세상은 그 어떤 가식이나 거짓도 없이 순수할 것이다. 누군가는 그 순수함을 잔혹하다고 할지도 모르지만, 거인왕은 개의치 않으리라.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의 목이 꺾이기 전까지 그 헛소리가 그의 귀에 닿는 일은 없을 테니.
“당신께서는 늘 승자의 입장이셨으니 그런 말씀을 쉽게 하실 수 있는 것이겠지요.”
[당연한 소리를. 패자는 죽어 사라질 뿐. 내가 지금까지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내가 늘 승리했기 때문이다.]
무형의 물결이 거인왕을 중심으로 퍼져 나갔다. 절로 고개를 숙이게 되는 웅혼함 앞에 레오니스 코누디스는 입을 다물었다.
쿵! 콰르르-
땅이 울리고, 뒤집혔다. 괴물이라는 표현이 너무나 부족한, 실례라는 생각까지 드는 거대한 존재들이 저마다 떨쳐 일어나며 거인왕을 바라보았다.
[오직 승리할 것만 생각하면 된다. 패한 뒤는 존재하지 않을 테니.]
레오니스 코누디스는 이제야 거인왕의 앞에서 매순간 느꼈던 이질적인 느낌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오만함이 아니다. 자신감도 아니다. 말도 안 될 정도의 절대적인 투쟁심. 자신이 부서지든지, 세상을 부수든지. 둘 중 하나를 이루기 전에는 만족하지 않는 들끓는 투쟁심이야말로 이자의 본질이었다.
* * *
[느껴지나?]
줄카의 시선은 줄곧 하늘을 향해 있었다. 반면에 군터는 근처의 작은 바위에 걸터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그래.]
[공기가 변했다.]
한참 전. 어쩌면 그보다도 더 전부터 무언가 변했다. 줄카는 그것을 공기라고 했으나, 그마저도 완전히 들어맞는 표현은 아니다.
[놈은 거인의 후손이다. 비록 육신은 오래전에 잃었다 하나 그 영혼만은 분명한 거인의 것. 그 강대한 힘과 흉포한 본성을 고스란히 품고 있지.]
군터는 거인이 어떠한 존재인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줄카의 짤막한 설명, 그리고 무엇보다 할렌의 영혼을 통해 접했던 아간투스베록의 모습을 토대로 옛 거인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었다.
[가장 강하고 가장 사납지. 놈은 마음만 먹는다면 야성을 품은 모든 적을 굴종케 할 수 있다.]
[편리한 능력이군.]
[그렇지.]
줄카의 즐거움이 느껴졌다.
[놈은 이곳에 온 뒤로 부지런히 군대를 만들었을 거다. 그리고 그 작업이 이제 막바지에 다다른 듯하군.]
군터는 솔롬으로 오는 동안 마주쳤던 무수한 괴물들을 떠올렸다. 아간투스베록이 그런 것들을 끌어 모으고 있는 것이라면 그리 대수로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게 전부일 리는 없을 터. 어쩌면 아간투스베록의 지배력은 마물들에게까지 미치는 수준일지도 모른다. 아니, 줄카의 말로 미루어 보면 아마도 그럴 듯했다.
[전력이 부족할지도 모르겠군.]
솔롬과 판니른의 주전력은 서부 전선에 머물고 있다. 솔롬과 하잘, 그 외에 남은 병력을 다 동원한다고 해도 아간투스베록의 군대에 맞서기에는 부족할 터. 줄카의 전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지만, 그 또한 그리 대단한 수준은 아닐 터였다.
[그래. 부족하겠지.]
줄카도 선선히 인정했다. 하지만 그에게서는 여유가 느껴졌다. 어딘가 믿는 구석이 있는 것 같은 모습.
[지원군이 있을 것 같다.]
[있으면 있는 것이지, 있을 것 같다는 건 또 뭔가.]
[확실하지는 않거든. 올 것은 확실하지만 제때 도착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어. 하지만…나는 왠지 제때 도착할 것 같군. 사람의 욕망은 종종 재미있는 일들을 일으키곤 하거든.]
거기까지 들은 군터는 관심을 끊었다. 올지 안 올지 확실치도 않은 원군은 배제한다. 게다가, 원군을 감안하든 안 하든 어차피 해야 할 일은 같다.
[병력을 집결시키겠다.]
[나도 준비하도록 하지.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이야.]
줄카의 시선이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왔다. 늘 여유로 자신을 감싸던 그였지만, 지금은 언제 그랬냐는 듯 숨 막힐 듯한 전의가 흘러나왔다.
* * *
“콜록!”
주름진 손이 다급히 입을 가렸으나, 가느다란 손가락 사이로 붉은 핏물이 새어 나오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노인의 시선이 손가락 사이로 흐르는 선혈을 향했다. 새어 나가는 것이 자신의 생명이라도 되는 양, 힘없는 눈길에 허탈함과 절박함이 가득 담겼다.
“각하!”
그의 주치의가 다급히 말에서 내려 달려왔다. 노인, 자이드라 멕시스는 피 묻은 손을 뻗어 그를 제지했다.
“별 것 아니다.”
“너무나 고된 일정입니다. 이미 기력이 쇠한 몸으로 이리 무리를 하시면…….”
“나도 알고 있다. 내 몸이니 내가 제일 잘 알지. 하지만 어쩔 수 없느니라.”
어찌 설명할까. 자신이 피를 토할 때마다 제 심장이 쪼개진 것처럼 안색이 창백하게 변하는 주치의를 보면 우습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했다. 만에 하나 자신이 말 위에서 숨이 끊긴다면 저 녀석도 좋은 꼴을 보지 못할 것을 알기에.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자이드라 멕시스는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그 시간을 조금이라도 늘려보고자 동원할 수 있는 수단은 다 동원해보았으나 모두 허사였다. 그에게 남은 마지막 희망이 바로 이 여정의 끝에 달렸으니, 그것이 성치 않은 몸으로 이리 길을 재촉하는 이유였다.
‘조금 더 일찍 알았었다면 좋았을 것을.’
덧없는 후회라는 것을 안다. 사람이 자신의 남은 시간을 헤아릴 수 있었다면 옛 시대부터 지금 이 시대에 르기까지, 허망하게 끝을 맞이한 지배자들이 왜 그리 많았겠는가.
코앞에 놓인 돌부리도 보지 못하고 달리는 것이 사람의 삶이다. 그나마 늦게라도 희망을 쫓을 수 있다는 것이 어디인가. 자이드라 멕시스는 입가의 피를 닦고 가늘게 숨을 몰아쉬었다.
“얼마나 남았나.”
“늦어도 이틀이면 판니른에 닿을 것입니다.”
“늦다.”
“하오나 각하.”
“늦다고 했다.”
동부에 발생한 이변. 자이드라 멕시스는 자신이 부름을 받은 이유가 그것과 연관되어 있음을 확신했다.
“나는 괜찮으니 최대한 빠른 길을 잡아라. 시간이 많지 않다.”
아직도 한참이나 남은 길. 그 길을 바라보는 노인의 눈에 조급함이 감돌았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