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터-990화 (990/1,064)

990화

보울룬이 눈이 돌아간 괴물 앞에서 위태로운 곡예를 펼칠 수 있었던 것은, 물론 그가 자신이 탄 말을 완벽하게 제어하고 있었으며 동시에 반응속도를 비롯한 그의 신체 능력이 평범한 사람을 웃돌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게 다는 아니었다.

‘둔해. 아니, 둔한 것이 아니라.’

보울룬의 상반신을 통째로 덮고도 남을 법한 큼직한 앞발이 돌풍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 앞발이 할퀴고 간 곳은 보울룬과는 제법 거리가 있는 곳이었다. 보울룬이 빠르게 반응하여 피하기도 했지만, 애당초 앞발이 조금은 엄한 곳을 가로지르기도 했다.

‘제 몸뚱이 하나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있다.’

균형을 잃고 마구잡이로 팔을 휘두르는 것처럼, 괴물의 앞발은 파괴적이지만 둔한 공격만을 거듭했다. 처음 한두 번은 목줄에 상처를 입은 고통 때문에 그런 것이겠거니 했지만, 곧 그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기(銳氣)를 잃은 것은 눈앞의 한 마리만이 아니었다. 다른 놈들도 사납게 날뛰지만 위협적이지는 않았다.

“제정신이 아니야!”

“불! 어서!”

거리를 벌린 채 활 시위만 당기고 있던 병사들도 괴물들의 이상을 눈치챘다. 그들 중 용기 있는 몇 명이 길쭉한 창 끝에 성수를 뿌렸다. 그리고 거기에 정령(이름만 그럴 뿐이지만)의 불을 붙이고는 뒤를 보이고 있던 괴물에게 달려들었다.

그 어떤 명령도 없이 이루어진 적절한 보조였다. 덕분에 한결 여유를 되찾은 보울룬이 그의 정령과 함께 다시금 괴물들을 공략해갔다.

‘효과는 확실해.’

막막함은 사라지고 자신감이 차오른다. 목줄을 물어뜯었을 뿐, 본체에게 상처를 입히지는 못했지만 괴물들이 저렇게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을 보니 분명 효과는 있었으리라. 그렇다면 해야 할 일은 명확하지 않은가.

부웅!

말 등에 달라붙듯 잔뜩 몸을 숙이자 그 위로 거대한 앞발이 지나갔다. 바람이 등을 쓸자마자 튕기듯 몸을 일으킨 보울룬이 다시 한번 오히나를 날려보냈다. 불타오르는 창에 막 뒷다리를 찔려 몸을 돌리려는 괴물을 향해.

콰득!

오히나는 이번에도 정확히 괴물의 몸통에 연결된 목줄을 물어뜯었다. 분노하던 괴물이 비명을 토하며 몸을 뒤틀었지만 괴물만큼이나 거대한 뱀 정령은 아랑곳하지 않고 세차게 머리를 흔들어 목줄을 완전히 끊어 놓았다.

쿵!

목줄이 끊긴 괴물이 눈을 까뒤집고 발을 굴렀다. 쩍 벌어진 주둥이에서 분노, 혹은 고통에 찬 포효가 터져 나오려던 순간. 거대한 뱀의 몸뚱이가 괴물의 주둥이와 목, 몸통을 순식간에 휘감았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금방이라도 터질 듯했던 흉흉한 기세는 한순간에 사라지고, 부딪치는 모든 것을 박살낼 수 있을 것처럼 강건해 보였던 괴물의 몸이 축 늘어졌다.

오히나의 특별한 힘이었다. 뱀의 형상을 한 정령에게 독 같은 능력은 없었지만, 마치 정말 독을 쏜 것처럼 상대를 마비시키는 능력. 저 능력은 영적인 존재에게 특히 효과가 좋았다. 그런데 마침 지금 상대하는 괴물도 어느 정도는 영적인 존재였기에 오히나의 능력이 제대로 통한 듯했다.

“좋았어! 한 놈 잡았다!”

“몰아붙여!”

무엇이든 처음이 가장 어렵다. 마침내 한 마리를 쓰러뜨리자 병사들이 한껏 기세를 올렸다. 자신감과 용기로 무장한 그들은 보다 적극적으로 괴물들을 상대해갔다. 오히나가 괴물의 목줄을 물어뜯으면 병사들이 혼란에 빠진 괴물에게 일제히 달려들어 숨통을 끊어 놓았다.

그렇게 하나둘씩 괴물들이 몸을 뉘였지만 그 모든 과정이 순조롭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좋아!”

“어? 이봐! 조심……!”

앞다리를 굽히고 반쯤 쓰러진 괴물. 그 정면에서 한 병사가 용맹하게 달려들었다. 그런데 그때 괴물의 고개가 들렸고, 무언가 이상함을 감지한 뒤편의 동료 병사가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그의 경고가 앞서가던 병사의 귀에 닿았을 때는, 이미 쭉 뻗어 나온 괴물의 주둥이가 그의 코앞에서 벌어진 뒤였다.

그 어떤 반응도 할 수가 없었다. 병사의 머리가 괴물의 입 속으로 사라졌고, 목 위가 흉측하게 뜯겨진 몸뚱이만이 기겁한 말의 위에서 맥없이 흔들거렸다.

“거리를 벌려!”

병사들은 물론, 보울룬도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광경이었다. 갑자기 목이 늘어나다니. 족히 보이는 것의 두세 배는 늘어난 것 같았다. 보울룬은 머리 없이 얼마간 달리다 결국 말 위에서 추락한 시신을 일견하며 자책했다.

저 괴물들은 일정 부분은 영적인 존재다. 오히나의 능력이 통하는 것을 보며 다시 한번 확인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왜 보이는 게 전부라고 생각했던가.

안일했다. 오히나가 돕지 않았다면 그 역시 저 머리 잃은 병사와 같은 꼴이 될 수도 있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다시금 온몸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뒤를 잡아! 시선을 끌어!”

그 뒤로 보울룬과 병사들은 한층 더 신중하게 괴물들을 상대했다. 그러나 그렇게 신중을 기울였음에도 피해는 생겨났다.

쾅!

암석으로 이루어진 것 같은 괴물의 몸통. 그 몸통이 갑작스레 폭발하며 괴물의 돌 조각 같은 피부가 비산했다. 암살자가 있는 힘껏 던진 암기 같은 것이 수백, 수천 개가 뿜어져 나오니 그 가까이에 있던 병사들은 도저히 피할 방법이 없었다.

“아아악!”

그나마 거리가 있어 몸을 숙이거나, 아예 몸을 날린 이들은 그나마 무사했지만 아슬아슬하게 괴물의 뒤로 돌아가던 병사들은 여지없이 폭발에 휘말리고 말았다.

“이런 개 같은!”

방심하지 않았다. 그저 몰랐을 뿐. 보울룬과 병사들은 미지의 적을 상대할 때는 마지막 순간까지 마음을 놓아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다시 한번 마음 깊숙이 새겼다.

콰득!

그래도 다행히 그 뒤로는 별다른 피해가 생기지 않았다. 보울룬과 오히나가 더욱 열심히 힘을 쓴 덕이었다. 보울룬이 보다 위험한 줄타기를 감행하며 괴물들의 사이를 누볐고, 오히나도 부지런히 몸을 날리며 목줄을 끊었다. 병사들도 그들의 활약(그들의 눈에 보이는 것은 죽고 싶어 안달이 난 것 같은 보울룬뿐이었지만)을 보며 몸을 사리지 않고 전투에 매진했다.

그 결과.

쿵!

마지막 한 마리의 괴물이 혀를 길게 빼물고 쓰러졌다. 그럼에도 보울룬과 병사들은 기뻐하는 기색 하나 없이 신중하게 확인사살 작업을 진행했다. 마지막으로 쓰러진 괴물은 물론, 그 전에 쓰러진 괴물들까지 전부.

그 지루한, 하지만 긴장감 가득한 과정이 다 끝나고 나서야 그들은 비로소 표정을 풀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감탄했습니다.”

부관 론돌이 땀과 피로 젖은 투구를 겨드랑이 사이에 끼고 다가왔다. 보울룬은 그가 건네는 손수건을 받아 들었다.

“그런가?”

“솔직히 말씀드리면…조금은 걱정했습니다만, 괜한 걱정이었군요.”

당사자를 앞에 두고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실례되는 일이나, 말을 하는 론돌이나 듣는 보울룬이나 그런 것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 론돌이 한 말이 나는 널 믿지 못했다는 수줍은 고백에서 끝나지 않음을 알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정이다. 지금까지는 반신반의했지만, 지금부터는 제대로 믿고 따르겠다는 조용한 선언이었고. 그러니 보울룬도 불쾌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는 지나간 일에 마음을 두는 좀스러운 사내가 아니었다.

“아랫사람으로서 상관을 함부로 재단하려 한 점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말게. 이해하니까.”

“이해하신다고요?”

“못해도 10년 이상을 군문에 몸 담았겠지. 그런 자네의 입장에서, 신기한 재주가 있다고는 해도 하루아침에 벼락 출세를 한 상관이 불안하게 느껴지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니겠나.”

“그리 말씀해 주시니, 아니 이해해 주시니 감사할 뿐입니다.”

그간 내색하지는 않았으나 내심 이 젊지만 경험 많은 부관과의 거리감을 느끼고 있던 보울룬으로서는 어지간한 부분들은 다 덮고 넘어갈 용의가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의 마음을 론돌도 알아차렸는지 한결 편해진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갈 길이 바쁜 것은 알지만, 적당히 수습이라도 해주고 싶은데 괜찮겠습니까?”

“물론 그래야지.”

가뜩이나 얼마 없던 인원이 더 줄어들었다. 보울룬은 쓰린 속과 불안감을 달래며 사망자들에 대한 수습을 명했다.

“빌어먹을.”

“먼저 가서 기다려라. 적당한 때에 따라갈 테니까.”

장례는 약소하게 치러졌다. 시신을 최대한 수습한 뒤 기름을 붓고 불을 놓는 것이 전부였다. 매장을 하기에는 터도 좋지 않거니와, 언제 흙 냄새 좋아하는 짐승이나 괴물들이 와서 무덤을 헤집고 다 썩지도 않은 시신을 들출지도 모르니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화장이 최선이었다.

“용감한 대장 밑에서 싸우다 갔으니 녀석들도 너무 억울해 하지는 않을 겁니다.”

칭찬인가? 아니면 위로? 뭐가 됐든, 보울룬에게는 그 웃기지도 않는 말이 조금은 위안이 됐다.

“그러면 좋겠군.”

하늘로 올라가는 검은 연기를 눈으로 따라가던 보울룬이 어느 순간 몸을 돌렸다. 죽은 듯 널브러져 있던 말의 숨소리가 고르게 돌아온 직후였다.

* * *

“말이 많은 분은 아니시죠. 음. 이것도 굉장히 순화한 표현입니다. 알고 계실지도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물론 알고 있지. 그 부분에 있어서는 전적으로 공감하네.”

론돌과는 말이 통했다. 그가 본래 성주 친위대 소속이었다는 점에서 이미 짐작하고 있던 바였지만, 그렇게 짐작하고 기대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말이 잘 통했다.

론돌은 군터 크렘보르라는 사람의 광적인 추종자였다. 지금 당장 그에게 깃펜을 쥐어 주고 상관에 대한 이야기를 글로 써보라고 한다면 그럴듯한 서사시 한 편을 그 자리에서 작성할 수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보울룬이 가장 마음에 들어하는 것도 바로 그 점이었다. 그는 군터 크렘보르의 열성적인 추종자였으니, 그와 같은 열성적인 추종자(다시 말해 동족)와는 말이 잘 통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렇게 ‘크렘보르 장군’에 대한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만으로도 긴장되고, 또 한편으로는 지루한 여정이 그럭저럭 즐거워지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입을 놀리는 와중에도 주변을 경계하고 가장 좋은 길을 찾는 것은 잊지 않았다.

“이곳입니다.”

‘크렘보르 장군’께서 직접 지도에 표시해주신 지점. 벌써 세 번째였고, 이번에도 허탕이라면 네 군데가 남았다. 시간이 얼마나 걸리더라도, 어떤 위험과 마주하더라도 주어진 임무는 철저히 완수할 작정인 보울룬이었지만 그래도 되도록 빨리 단서를 찾을 수 있기를 바랐다.

그리고 지금.

[쉬이익-]

잠잠하던 오히나가 날카로운 눈을 빛내며 혀를 날름거렸다. 그리고 잠시 후. 병사들과 함께 말에서 뛰어내렸던 론돌이 몸을 일으켰다. 일전에 끔찍한 괴물들을 상대할 때 지었던 것과 유사한 표정을 지은 채.

“대장님. 여기 좀 보셔야겠습니다.”

그 말에 보울룬이 기다렸다는 듯 다가갔다. 그는 론돌의 말이 더 없어도 자신이 뭘 봐야 하는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전투의 흔적이로군.”

단순히 깊게 파인 것과는 다른, 격렬한 전투의 흔적이 여기저기 남아 있었다. 그 중 상당수가 바람에 쓸렸는지, 짐승의 발에 뭉개졌는지 흐릿해지기는 했으나 그래도 알아보는 데는 큰 지장이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뱀 정령 오히나가 아까부터 날카로운 눈으로 사방을 훑어보고 있었다. 그 예민한 반응은 이곳에서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었음을 의미하는 것일 터.

“확실한 것 같군.”

“같은 생각입니다.”

“그렇다면…여기서부터 짚어가면 되겠어.”

“역시, 같은 생각입니다.”

남은 네 곳을 돌지 않아도 되었으나, 그래도 시간은 부족했다. 어쩌면 처음 솔롬을 나설 때부터 이미 늦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늦지 않았다는 희망을 가지고 움직여야 한다.

“말발굽들이 있습니다. 한 쪽 방향으로 이어져 있군요.”

보울룬을 따라온 병사들 모두 눈 하나만큼은 자신 있는 이들이었다. 그들이 흩어져 수색하니 곧 쓸 만한 정보가 들어왔다.

“이건…뭔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것은 처음 봅니다.”

말발굽들과 같은 방향으로 나 있는 발자국을 몇 번이고 들여다보던 병사가 결국 난색을 표했다. 보울룬도 그것을 흘깃 보았다. 길쭉하게 뻗은 네 개의 흔적. 발가락 같아 보였는데, 그가 아는 한 이런 발자국을 내는 짐승은 없었다.

“모르겠지만, 알 것 같군.”

“또 하나의 증거로군요. 아가씨는 여기서 일전을 치르신 것이 분명합니다.”

네 개의 발가락을 지닌 발자국 외에도 온갖 괴이한 발자국들이 더 나왔다. 보울룬은 더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 말 위에 올랐다.

“방향은 정해진 듯하니 더 들여다볼 필요는 없을 것 같군.”

“예. 서쪽입니다.”

어둠 속을 한참 동안 헤매다 겨우 길을 찾은 사람처럼, 보울룬 일행은 서쪽으로 말머리를 고정하고서 앞만 보고 달렸다. 그들의 질주가 멈춘 것은 해가 지고도 한참 후. 오히나의 이상 반응을 감지한 보울룬이 한쪽 손을 들어 올리면서였다.

“뭔가 발견하셨습니까?”

론돌은 그의 새로운(임시) 대장이 신비로운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그 능력이 이번 임무에 상당히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가 이 어둠 속에서 한눈에 뭔가를 발견했다고 해도 전혀 놀랍거나 의심스럽지 않았다.

“여기서 또 한 번 일이 일어났었다.”

“전투입니까?”

그렇게 되물은 론돌이 고개를 돌려가며 사방을 훑었다. 특별히 눈에 들어오는 것은 없었다. 나무가 많긴 한데, 부러지거나 상처입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만약 이곳에서 전투가 일어났었다고 한다면 규모가 작거나 무척 은밀한 전투였으리라.

“아마도.”

보울룬이 애매하게 말을 흐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이곳에서 있었던 일을 론돌과 병사들에게 설명할 수가 없었다. 그의 목소리에 힘이 실리는 까닭은 오직 오히나에 대한 신뢰에 기반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 뱀 정령이 갑자기 사람의 말을 배워서 직접 설명을 하지 않는 한, 그가 론돌과 병사들에게 이러니 저러니 말을 늘어놓을 수도 없는 것이다.

‘저쪽인 거냐, 오히나?’

날카로운 눈을 빛내며 이곳저곳을 기웃대던 뱀 정령이 고개를 들더니 북쪽, 아니 북서쪽 어딘가를 응시했다.

“계속 가지.”

보울룬이 목소리에 최대한 힘을 주면서 다시 고삐를 짧게 쥐었다.

* * *

“허억…허억…….”

실비아 크렘보르는 앞만 보고 달렸다. 그녀를 태우고 달리던 말이 더는 버티지 못하고 주저앉았을 때부터 계속.

두려움에 잡아 먹힌 것이 아니다. 그녀의 절박한 걸음은 분노에 기반했다. 조금이라도 더 멀리 도망쳐서 조금이라도 더 늦게 잡혀야 가증스러운 배신자를 조금이라도 더 곤란하게 만들 수 있으니까. 그녀가 제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다리를 필사적으로 앞으로 뻗는 이유는 오직 그것 하나였다.

“언제까지 도망치실 수 있겠습니까.”

조금 전보다 더 커진 목소리가 뒤쪽에서 들려왔다. 실비아는 피가 나올 정도로 이를 악물고 한 걸음을 내디뎠다.

“대단하십니다. 대단하신 분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제가 생각했던 이상이시군요.”

악마의 속삭임이 이러할까. 점점 더 가까워지는 목소리는 그녀의 마지막 저항이 끄트머리에 다다랐음을 알리는 듯했다.

“하지만 이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이제 그만하시지요. 저는 아가씨를 해할 마음이 조금도 없습니다. 처음부터 그러했지요. 결과적으로는 아가씨께 불충한 셈이 되었지만, 저도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실비아의 거친 호흡이 이제는 중간중간 뚝뚝 끊어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그녀는 계속 걸었다. 마지막으로 들려온 목소리 이후로 정확히 다섯 걸음을 더 내디뎠을 때. 긴 한숨 소리가 실바람처럼 귓가를 스쳤다.

“변명을 해보자면, 저 역시 이럴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여섯 번째 걸음을 힘겹게 내딛기 전. 또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뒤가 아니라 앞에서.

“일전에, 가문을 재건하고 이름을 되찾고자 한다 말씀드렸었지요.”

실비아의 부릅뜬 눈이 어둠에 잠긴 수풀 속 어딘가를 향했다. 그곳에서 흐릿한 형체가 움직였다.

“그때 말씀드렸던 제 꿈을 위해 할 수 있는 바를 다했을 뿐입니다.”

“개소리를 잘도 늘어놓는군.”

“하하.”

이제 흐릿했던 형체가 그럭저럭 보였다. 목소리의 주인, 카인은 혼자였다. 그는 호위 하나 없이 홀로 여기까지 따라온 것이다. 그가 어떻게 이렇게 조용히 자신을 앞지른 것인지까지는 생각이 닿지 않았다. 실비아는 카인이 지금 혼자라는 것, 그 하나에만 집중했다.

여기까지 필사의 도주를 이어오면서도 결코 손에서 놓지 않았던 검이 힘겹게 위로 올라가 카인을 겨눴다.

“역시 아가씨는 사내로 태어나셨어야 합니다. 그랬다면 보리스를 제치고 크렘보르의 후계자가 되실 수 있었겠지요.”

“개소리는 더 듣지 않겠어. 내 목을 원한다면 가져가봐라.”

“거듭 말씀드리지만, 저는 아가씨를 해할 마음이 없습니다.”

“그럼 대체 왜!”

“저는 단지, 제 것을 되찾으려 하는 것뿐입니다.”

“아까부터 무슨 소리를…….”

“제 이름은 카인이 아닙니다.”

어둠에 가렸기 때문일까. 아니면 누적된 피로에 시야가 흐려진 것일까. 카인의 모습이 바람을 맞은 촛불처럼 흔들리는 듯했다.

“레오니스 코누디스. 이제는 아는 이 하나 없는 제 본명이지요.”

“…….”

처음 듣는 이름. 마땅히 생소해야 할 터인데, 실비아는 이상하게도 그 이름이 귀에 익었다. 정확히는 코누디스라는 이름이.

“한때 군터 크렘보르, 그때는 그저 군터였을 뿐인 그자는 제 선친의 총신이었지요. 그러나 선친의 땅, 코누다이안이 불길에 휩싸였던 날. 그자는 선친의 은혜를 저버리고 제국으로 떠났습니다.”

다시 한번 카인, 아니 레오니스 코누디스의 몸이 흔들렸다. 그리고 그 다음 순간, 그는 실비아의 앞에 서 있었다.

“많은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배신자에게 약간의 대가를 주장하려 할 뿐.”

실비아가 반사적으로 칼을 찔렀다. 그러나 그 움직임은 어린 아이도 여유롭게 피할 수 있을 정도로 무디고, 느렸다.

턱!

레오니스 코누디스는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엄지와 검지, 두 손가락만으로 실비아의 검을 막았다.

“그러니 아가씨도 협조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원치 않으신다 해도 협조하실 수밖에 없을 테지만 말입니다.”

실비아가 안간힘을 쓰며 검에 힘을 주던 그 순간. 뒤쪽에서 큼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숙이십시오!”

생소한 목소리에 그녀가 자신도 모르게 재빨리 몸을 숙임과 거의 동시에 서늘한 바람이 머리 위를 스쳤다.

퍼억!

레오니스 코누디스의 몸이 크게 흔들렸다. 실비아는 이번에도 본능적으로 검을 놓고 뒷걸음질쳤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또 다시 들려온 목소리. 그러나 이번에는 말발굽 소리도 함께였다. 실비아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도 전에 그녀의 몸이 훌쩍 떠올랐다.

“크렘보르 장군께서 보내셨습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무례를 범할 수밖에 없었음을 이해…….”

말이 채 끝나기도 전.

“여흥이 너무 길었었나 보군.”

온 몸의 털이 모두 쭈뼛 서는 듯했다. 아니, 필시 그랬을 것이다.

형언할 수 없는 섬뜩함에, 실비아는 자신을 등 뒤에 태운 사내의 몸을 강하게 붙들었다. 이 역시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크르륵-!

밤의 어둠보다 더 어두운 무언가가 사방에서 나타났다. 그리고 그 너머에서 본능적인 두려움을 자극하는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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