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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989화 (989/1,064)

989화

“전하! 모브자카 전선이 무너졌습니다!”

“전하! 유그낙토라가 함락…….”

“전하!”

“전하!”

무샤라트 트라소프는 어느 순간부터 급보랍시고 들려오는 보고들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처음에야 의욕적으로 대응책을 강구하기도 했으나 잠시뿐이었다. 갈수록 악화되는 전황 속에서 그의 목소리는 점점 공허하게 변해갔다.

‘뭘 새삼스럽게.’

두통을 핑계로 수하들을 잠시 물린 그는 적막한 막사에 홀로 남았다.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지 않은가.’

형제들의 피를 칼에 묻힐 때 쳐냈던 것은 그들 개인만이 아니었다. 그들이 거느린 세력들 역시 적잖이 쓸려 나갔다. 당연히 해야 했던 일이다. 힘 있는, 그러나 믿을 수 없는 자들을 가만히 내버려둘 수는 없었으니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그들을 쓸어내면서도 무샤라트 트라소프는 내심 느끼고 있었다. 이 상태로 동쪽의 숙부와 겨룬다면 결국 어느 순간 힘이 달리게 될 것이라고.

그렇지 않은가. 제 몸을 후벼 판 상태로 적을 맞아 싸우다니. 자살 행위라고 밖에 볼 수 없다. 처음 얼마간이야 버틸지라도 결국 한계가 찾아오게 되어 있는 것이다.

‘어쩔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었어.’

파멸의 운명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거기서 거절했더라면 어찌 되었겠는가? 그들의 손을 잡은 다른 형제에 의해 일찌감치 목이 잘렸을 것이다.

악마의 유혹이었다. 그때도 알고 있었지만, 그 손을 잡지 않을 수가 없었다.

[후회되는가?]

거뭇한 형체가 어둠 속에서 걸어 나온다. 언제부터 그곳에 있었던 것일까. 저것이 그자의 본체이기는 할까? 무샤라트 트라소프는 생각하기를 관두었다.

“후회된다고 하면? 뭐가 달라지나?”

[아니.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는다.”

후회하지 않는다. 단지 비참할 뿐이다. 위대한 황가의 적통인 자신이 이런 꼴이 되었다는 것이.

‘아버지. 당신었다면…….’

기억 속, 세상에 거칠 것이 없는 듯했던 부친의 모습이 떠올랐다. 형제들의 피를 봐 가며 그의 가업을 이었건만, 지금 자신의 꼴은 어떠한가.

“그래. 바라는 대로 되었나?”

[어느 정도는.]

“여기서 내가 숙부에게 항복한다면?”

[그러지 않을 것을 안다. 설령 정말 그런다 해도 상관없고.]

그런가. 이미 대세는 정해졌는가. 아무래도 저들이 그리고 있는 그림은 이미 완성 단계에 이른 모양이었다. 말 한 두개가 엇나간다고 해서 망가지지는 않을 정도로.

“당신의 말이 맞아. 나는 그러지 않을 것이다. 마지막까지 승리하기 위해 발악할 것이야.”

조롱하기 위해 왔는가. 아니면 그저 실의에 빠졌을 자신을 확인하러 왔을 뿐인가.

뭐가 되었든, 그의 방문은 무샤라트 트라소프의 다 꺼져가던 의욕을 자극했다. 지금 그의 눈에서 타오르는 감정은 오기였다.

“당신들이 원하는 건 이 제국의 몰락이겠지. 그렇지 않나?”

[비슷하지.]

“그렇다면 더 적극적으로 나를 돕는 것이 좋을 거다. 알다시피 상황이 썩 좋지 않거든. 이대로라면 머지않아 내 목이 숙부의 발 앞에 구르게 되겠지.”

[목숨 구걸을 제법 참신하게 하는군.]

“구걸?”

조소하는 상대에 맞서, 그 역시 조소했다.

“틀렸다. 구걸이 아니라 협박이다. 협력을 할 거면 제대로 하라는 말이다. 지금처럼 어정쩡하게 굴지 말고.”

악에 찬 말이 상대의 심기를 거슬렀던 것일까. 있는 듯 없는 듯했던 존재감이 폭발하며 검은 선 하나가 쭉 뻗어 나왔다.

카앙!

눈으로 쫓기 힘들 정도로 빠른 움직임. 그러나 무샤라트 트라소프는 어렵지 않게 반응했다. 검은 선, 아니 얇은 검을 받아낸 그 순간 그는 깨달았다.

“이제 직접 올 필요도 없다 이건가?”

차갑게 웃은 무샤라트 트라소프가 꼬챙이 같은 모양의 얇은 검을 튕겨내며 상대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상대는 기민하게 반응했으나 무샤라트 트라소프의 움직임이 더 빨랐다. 짐승의 발톱처럼 날카롭고 길게 변한 왼 손톱이 상대의 가슴을 깊게 갈랐다.

“내 말을 새겨들어라. 그리고 다음번에 올 때는 직접 오라고.”

피도, 살점도 날리지 않았다. 방금까지 흉험한 기세를 풍기던 인형(人形)은 연기가 되어 흩어지더니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졌다.

“후우!”

무샤라트 트라소프가 길게 숨을 토했다. 이제껏 억눌렀던, 그래서 기어이 독이 되었던 울분이 그 한번의 숨결에 모두 실려 빠져나갔다.

* * *

몇 군데 표시가 된 지도 한 장에 의지해 밤낮없이 이동했다. 처음에는 중요한 임무라는 짤막한 설명에 바짝 긴장하여 군말없이 따라오던 병사들도 닷새가 넘도록 정처없이 방황하기만 하자 슬슬 피로를 토로하기 시작했다. 물론 직접적으로 볼멘소리를 하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사기가 꺾인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모두 힘내라!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가라앉은 분위기를 감지한 보울룬이 그들을 격려했으나 별 소용은 없었다. 애초에 그는 병사들에게 이번 임무를 중요한 임무라고만 했지 정확히 무슨 임무인지는 알려주지 않았다. 아무래도 성주 일가의 일인 만큼 보안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의도는 나쁘지 않았을지라도, 결과적으로 그의 그런 결정은 지금에 와서 독이 되었다.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조차 알지 못한 채 며칠 동안 밤잠을 줄여가며 강행군을 거듭했는데 의욕이 생길 리가 없었다.

“이번 임무에 대해 제대로 설명하지 않는 한 저들의 불만은 점점 커질 겁니다. 아니, 어쩌면 그마저도 소용없을지도 모르겠군요.”

검에서 괴물의 피를 털어낸 사내가 보울룬에게 다가와 말했다.

“그럼 어찌해야 하겠는가.”

보울룬이 그 사내를 보며 물었다. 그 사내의 이름은 론돌. 크렘보르 장군이 붙여준 부관이었다. 성주 직속 친위대의 장교. 명목상으로는 길잡이였으나 실상 그의 역할은 조언자였다. 지금 같은 때를 대비한.

“병사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언제나 실력입니다. 보울룬님께서 실력으로 저들의 마음을 얻는다면 사소한 의구심 따위는 얼마든지 뭉개 버릴 수 있습니다.”

“크렘보르 장군의 방식이로군.”

“언제나 효과적이었습니다.”

“장군이기에 가능한 방식 아니겠나. 아무튼, 기회가 된다면 나도 한번 시도해보지.”

말이 씨가 된 것일까. 기회는 생각보다 빠르게 찾아왔다.

“적이다!”

짐승에 가까운 형상을 한 것들은 비교적 대비하기가 쉽다. 멀리서 다가오는 것을 미리 눈으로 볼 수도 있고, 숨어있다가 기습을 한다 해도 그 모든 움직임은 상식선에서 이루어진다. 나무 위에 숨어있다가 덤벼든다든가, 울퉁불퉁한 땅속에서 튀어나온다든가 하는 식으로 말이다.

반면에 척 보기에도 기괴한 형상을 한, 누가 보더라도 괴물이라 할 만한 것들은 대개 어떤 기미도 없이 불쑥 나타나곤 했다. 바로 지금처럼.

카아악-!

아무것도 없던 허공이 슬쩍 일그러지는가 싶더니 족히 열댓 마리는 되어 보이는 괴물들이 뛰쳐나왔다. 개, 혹은 늑대를 닮은 대가리에 암석 덩어리 같은 육중한 몸통. 그 몸통에는 길쭉한 무언가가 달려 있었는데, 그것이 서로 다른 괴물들의 몸통을 연결하는 듯 이어져 있었다. 그렇기에 보울룬은 처음 그것들이 대가리부터 모습을 보일 때는 여럿이라고 생각했다가 그것들의 몸통이 이어진 것을 보고는 판단을 보류했다.

“거리를 벌려! 머리를 노려라!”

척 보기에도 단단해 보이는 몸통. 반면에 머리는 살과 가죽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보였다. 보울룬은 빠르게 지시를 내린 후 그 자신도 활을 들었다.

그의 활솜씨는 아무리 좋게 말해도 뛰어나다고 하기는 힘들었다. 대신 그는 그의 정령 오히나의힘 덕에 말을 잘 통제할 수 있었다. 말을 통제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은 기마술이 뛰어난 것과는 다른 이야기였으나 결과물은 비슷했다. 말 위에서 균형을 유지하면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는 점에서 말이다.

푸르륵!

재빨리 괴물들과의 거리를 벌리는 말 위에서, 보울룬은 상체만 비스듬히 튼 채 빠르게 활 시위를 당겼다. 노린 곳에 제대로 날아가는 화살은 드물었지만 그래도 빠르게 쏜 열 발 중에 일곱 발 정도는 괴물의 머리 부근으로 날아갔다.

카악-!

그 중에서 제대로 박힌 것은 고작해야 두 발뿐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괴물들의 움직임을 늦추는 데는 충분했다.

“젠장! 꿈쩍도 안 하잖아!”

병사들은 보울룬의 명령대로 괴물들의 머리를 노렸다. 하지만 그들의 공격 역시 괴물들의 움직임을 잠시 멈추는 데 그쳤을 뿐, 유효한 피해를 주지는 못했다. 머리 쪽, 심지어 눈 바로 밑에 박힌 화살마저 괴물이 한번 고개를 휘젓자마자 먼지가 떨어지듯 떨어져 나갔다.

‘피 한 방울 안 흘리는군.’

저 괴물도 피를 흘리기는 할까? 아니기를 바랐다. 그래야 쏟아 부은 화살이 조금이라도 덜 아깝게 느껴질 테니.

‘머리를 노리는 것도 별 소용이 없다.’

가까이 다가가 직접 도끼 같은 것으로 찍는다면, 그러면 혹시 효과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러기에는 위험부담이 너무 크다.

푸학-!

보울룬이 계속 활을 쏘며 생각에 잠긴 사이, 괴물들도 반격을 시작했다. 쩍 벌린 입에서 거무튀튀한 연기 같은 것이 뿜어져 나왔다. 보울룬은 재차 거리를 벌리라고 외치며 정신을 집중했다. 독인가? 괴물들의 입에서 뿜어져 나온 저 연기에서 상당한 불길함이 느껴졌다. 저게 독이든 아니든, 저것과 멀어져야 한다는 확신에 가까운 예감이 들었다.

‘오히나.’

그의 동료인 뱀(의 형상을 한) 정령은 연기를 내뿜는 괴물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의 동료 역시저 연기가 위협적이라고 판단한 듯했다.

‘어디를 노려야 하지?’

돌로 되어 있는 것 같은 몸통은 자연스럽게 제외. 그래서 머리를 노렸지만 멀리서 쏘는 화살 따위로는 제대로 된 피해를 입히지 못한다는 것이 증명됐다. 그렇다면 어찌 해야 하는가? 술법? 하지만 그가 이끌고 온 인원 중 술사는 없었다. 하지만.

술사는 없어도, 술사보다 더 듬직한 동료가 있었다.

‘가능할까?’

뱀 정령은 답하지 않았다. 단지 몸을 꼿꼿이 세우고 혀를 날름거릴 뿐. 이곳에서는 오직 보울룬 한 사람만이 볼 수 있는 모습. 그 모습에서 느껴지는 것은 자신감이었다.

“흩어져!”

병사들도 이제는 화살 정도로는 어찌할 수 없는 적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양 손으로 고삐를 쥔 채 괴물로부터 거리를 벌리려 들었다. 본래 보울룬이 그들을 지휘해야 했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오히나.’

처음에는 갑작스레 나타난 괴물들에 대응하기 바빠 알아차리지 못했다. 하지만 거리를 두고 차분히 전체를 살피니 괴물들의 몸통을 연결한 긴 줄 같은 것들이 얼핏 목줄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목줄 같아 보이는 것은 그리 튼튼해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까, 돌덩이 같은 몸뚱이나 화살을 정면에서 맞아도 상처 하나 나지 않는 대가리에 비하면 말이다.

‘저 목줄을 노리는 거다.’

정령이라고 하면 얼핏 전능하거나, 그에 준하는 초월적인 존재인 듯하지만 실상은 그와 달랐다. 물론 정말 그런 정령이 존재할지도 모르지만 오히나는 아니었다. 오히나가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은 제한적이었으며, 특정 부분에 있어서는 특히 더 그랬다.

오히나는 영적인 존재였다. 저 거대한 몸체를 볼 수 있는 사람은 한정적이었으며, 저 거체에서 나오는 힘을 온전히 발휘할 수 있는 방식 역시 한정적이었다.

그런 면에서, 명백히 실체를 지닌 저 괴물들은 오히나와 상성이 좋지 않은 상대였다. 오히나가 발휘할 수 있는 물리력은 그리 대단한 수준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놈들을 포위해라! 계속 활을 쏴!”

보울룬은 병사들에게 계속 공격할 것을 명하고 정작 자신은 괴물들을 향해 정면으로 달려들었다. 오히나가 최대한 힘을 발휘하려면 상대와의 거리를 좁혀야 했기 때문이다.

슈슝!

허공을 가르는 화살들. 가끔은 섬뜩한 소리를 내며 그의 주변을 지나치는 것들도 있었지만 보울룬은 결코 움찔하거나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지금!’

괴물 한 마리와 눈이 마주쳤다고 느낀 순간. 보울룬이 마음속으로 신호하기 무섭게 그의 머리 위에 두둥실 떠 있던 거대한 뱀이 하늘을 날았다. 주변에서 계속해서 날아드는 화살처럼, 아니 그보다 더 빠르게 몸을 날린 뱀 정령은 괴물의 등에 나 있던 목줄 하나를 단번에 물어뜯었다.

케에엑-!

미간에 화살이 박힐 때도 분노하기만 했을 뿐, 고통스러운 기색은 보이지 않았던 괴물이 이번에는 거칠게 발광했다.

‘먹혔다!’

보울룬은 자신의 생각이 맞았음에 기뻐할 틈도 없이, 마구잡이로 날아드는 괴물의 앞발을 피하기 위해 연신 몸을 틀고 고삐를 당겼다. 말을 탄 그보다 배는 더 큰 괴물 앞에서 이리저리 방향을 틀고 몸을 날리는 인마(人馬)의 모습은 숙련된 곡예사의 그것과 별 다르지 않아 보였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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