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터-988화 (988/1,064)

988화

“따로 준비해야 하는 것이 있을지요.”

“없다.”

“예.”

물러나기 전. 모페이브는 군터의 손 위에 흐릿하게 보이는 빛의 덩어리 같은 것을 보았다. 그는 그것이 할렌의 영혼이며, 그 때문에 요즘 시끌시끌한 ‘지하 감옥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빛에 시선을 고정한 채 미동도 않는 군터를 보며, 모페이브는 묘한 기시감에 사로잡혔다.

술사로서 미지의 신비를 엿보다 보면 때때로 한순간에 스치는 감정 이상의 무언가를 느낄 때가 있다. 고양감이라고 해야 할까.

보잘것없는 하나의 생명으로서,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로 거대한 세계의 이면을 탐구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전율이 이는 위대한 도전이었다. 하물며 전체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지라도,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성과를 거머쥐게 되는 순간. 그 순간에 느끼는 희열은 성직자들이 노래하는 신의 기적에 감히 비견할 만하다.

모페이브 또한 술사로서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있었다. 그것도 몇 번이나. 그런 면에서 그는, 적어도 술사로서는 행운아라고 할 만했다.

“그럼, 물러가 있겠습니다.”

그런데 지금. 영혼을 손 안에 쥐고 몰두하는 군터에게서 그 비할 수 없는 희열의 순간을 겹쳐 보았다.

위대한 신비를 목도했을 때 느꼈던 그 벅찬 감정. 그 전율을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 느낀다는 것. 모페이브는 그것이 뭘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단순히 영혼을 손 위에 올려놓고 있을 뿐인 저 행위에서 그런 감정을 느낀다는 것. 술사로서 이제껏 쌓아 올린 지식과 본능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멀어지시는군.’

지금껏 군터 크렘보르라는 사람이 걸어온 길을 돌이켜보면, 영웅이라는 말이 자연스레 나올 수밖에 없다. 그만큼 그가 이룩한 것들은 입지전적이라는 표현이 어울렸으며,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것까지 포함한다면 그 이상이었다.

모페이브는 지금껏 군터 크렘보르의 곁에서 그를 지켜봐 왔다. 그가 육체적으로 죽음을 맞이했던 순간에도, 그 죽음을 딛고 다시 일어서던 그 순간에도.

죽음의 강을 도로 건너 돌아왔던 그때부터, 미지의 신비 속을 거닐고 있음을 알았다. 그에게 더 충성하고 헌신했던 것도 그 영향이 없지 않았다. 평범한 사람이 아닌, 위대한 존재를 섬기고 있다는, 그러니 응당 우러르고 경외해야 한다는 무의식적인 인식.

보이지 않는 선. 두려울 정도로 신비롭고 지고한 경계.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그가 이미 한참 전부터 그 경계에 서 있었음을. 원한다면 언제든 넘어갈 수 있었으나 지금껏 망설이고,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왜인지는 모른다. 이유를 듣는다 해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남들이 뭐라고 추켜세워주더라도,모페이브는 자신이 한낱 범인에 지나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진정 초월적인 신비의 영역에서 알량한 지식과 경험 따위는 길바닥의 돌멩이와 같으니 그 고차원적인 세계에서 그와 같은 이는 무지렁이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원하는 바를 이루시길.’

부러움이나 선망 같은 감정은 없다. 술사로서 탐구심은 여전히 간직하고 있으나 지고한 신비의 영역을 어떻게 해서든지 엿보겠다는 의욕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열정이 식은 것인가? 그럴지도 모르지만, 그보다는 지친 것에 가깝다.

손에 닿을 듯하면서 닿지 않는 애절함이 처음에야 유혹적이지만, 손을 뻗는 데도 한계가 있는 법이다. 손을 뻗고 또 뻗다 지쳐 쓰러질 즈음에는 저 아련한 목표에 닿는 것이 노력이나 시간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러면 자연스레 알게 되는 거다. 저 너머는 내게 허락된 영역이 아니라는 것을.

‘한동안 시끄럽겠군.’

그의 주인은 밖에서 떠들어대는 온갖 말들에 전혀 관심이 없는 듯했다. 이전에도 그랬지만, 지금은 특히 더 그런 것 같았다.

저 어리석고 시끄러운 자들은 알까? 같은 곳을 보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자신들의 목소리가 닿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저들이 떠들어대는 말들. 조심스러운 움직임. 모두 아무 의미 없는 헛수고에 지나지 않는다.

감히 직접 저분의 앞에서 목소리를 낼 용기가 없는 자들은 분명 자신에게 다가와 시답잖은 소리를 늘어놓으리라. 뻔히 예상되는 번거로움이나, 모페이브는 언제나 그랬듯 이번에도 인내심을 갖기로 했다. 주인을 대신해 자잘한 일들을 처리하는 것. 이 또한 집사의 일이 아니겠는가.

* * *

할렌의 영혼은 군터의 손 위에서 연신 꿈틀거렸다.

[욕심이 많은 친구로군.]

이가로프의 이 말은 그냥 나온 것이 아니었다. 사형수들 열 다섯의 영혼을 남김없이 먹어치우고도 아직 부족하다며 난리를 치는데, 자연히 그런 말이 나올 수밖에.

[영혼이 영혼을 먹는다. 이런 일이 가능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는데.]

사람이나 짐승이 살코기를 탐하는 것과는 다르다. 영혼은 그 존재의 본질이다. 그런 영혼이, 한쪽이 일방적으로 먹어치우는 것이라 해도 어찌 되었든 섞인다는 것은, 두 존재의 본질이 뒤섞인다는 것.

[장군. 지금 그 녀석이…여전히 장군이 알던 할렌이라는 녀석이라고 생각하나?]

[물론.]

[어떻게 그리 확신할 수 있는 것인지 모르겠군.]

이가로프의 의심, 혹은 우려는 군터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군터는 그의 손 위에서 꿈틀거리는 이것이 할렌이라고 확신했다. 다만 조금 변했을 뿐이다. 사람도 이런저런 일을 겪으며 외면과 내면에 변화가 생기듯 영혼 역시 마찬가지인 것이다.

[충분해.]

부족하다며 계속해서 탐닉하려는 할렌을 진정시킨 군터가 영혼 깊숙한 곳으로 눈길을 돌렸다. 전에 보지 못했던 기억. 지금이라면 그것을 볼 수 있으리라.

[보여라.]

절대적인 명령이 떨어지자, 할렌의 영혼은 불만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순순히 자신의 기억을 열어젖혔다.

* * *

할렌은 흔들리는 말 위에서 고개를 들었다. 우중충한 하늘. 그러나 오늘도 간간이 시끄러운 울음만 토할 뿐, 정작 한바탕 쏟아낼 생각은 없는 듯했다. 어느 전사의 말처럼 하늘이 변비라도 걸린 것 같았다.

“롬바드 공. 아가씨의 호위가 더 필요합니다.”

실비아 크렘보르의 호위 시녀 산드라가 굳은 얼굴로 다가와 말했다. 할렌은 실비아 크렘보르의 주변을 지키는 전사들을 눈으로 훑었다. 당장 눈에 보이는 이들만 해도 열이 넘었다.

“아무리 솜씨가 좋다고 해도 저들은 외부인이 아닙니까. 아가씨의 곁을 지키는 것은 절대적으로 믿을 만한 이들이어야 합니다.”

반박하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겠지만 할렌은 그러지 않았다. 산드라 역시 나름대로 그녀가 할 일을 하는 것일 뿐이니.

“알겠소.”

“정찰이라면 저들에게 시켜도 되지 않겠습니까?”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군인에게 너무 날카롭게 쏘아붙인 것 같아 마음에 걸렸는지, 산드라가 변명하듯 말을 덧붙였다. 문제는, 그게 말 같지도 않은 말이라는 점이었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하지.”

근방의 지리도 모르는 자들에게 어찌 정찰을 맡기겠나. 뿐만 아니라, 정찰 임무야말로 가장 믿을 수 있는 병사들에게 맡겨야 하는 일이다. 그런 중임을 통역이 없으면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는 자들에게 맡기라고? 윗사람을 섬길 줄은 알아도 병사를 부릴 줄은 모르는 자가 할 만한 말이었다.

제 할 일은 다 했다고 생각했는지 한결 후련해진 얼굴로 산드라가 돌아가자, 할렌은 실비아 크렘보르의 주변을 지키던 전사들을 자신의 곁으로 불러들였다.

“지금부터 너희는 나를 따른다.”

말이 통하지 않아도 괜찮다. 무기를 든 사내들을 다스리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그들이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는 힘을 보여주는 것이다. 할렌은 이 거친 사내들에게 여러 차례 그의 힘을 보였고, 이제 그들은 말도 잘 통하지 않는 새로운 지휘관의 명령에 철저히 복종했다.

“오늘은 이곳에서 멈춘다.”

해가 지기도 전. 할렌은 사방이 탁 트인 개활지에서 하루의 종료를 선언했다. 그러자 모두가 조용히 짐을 풀고 야영지를 꾸리는 가운데, 한 사내가 다가와 이해할 수 없다는 투로 물었다.

“롬바드 공. 어제도 그렇고, 너무 느린 것이 아닙니까? 아직 해가 지지도 않았는데 말입니다. 이래서야 언제 솔롬에 도착할 수 있겠습니까?”

예의를 차리면서도 할 말은 다 쏟아낸다.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인데도 어쩐지 거슬리게 들리는 까닭은 이 사내에 대한 편견이 마음 한구석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일 터. 할렌은 그것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잠시 머릿속에서 말을 골랐다.

“해가 지기 전에 적절한 곳에 닿을 수 있다면 갈 거요. 그렇지 않다면 멈출 수 있는 곳에서 멈추는 것이고.”

“하지만.”

“아가씨가 허락하신 일이니 내게 따져봐야 소용없소.”

“…알겠습니다.”

저자가 무례하게 군 적이 있던가? 없다. 단 한번도 없다. 무례하기는커녕, 어떤 순간에도 예의를 잊지 않았다. 행동도 모난 곳이 없어 그를 싫어하는 이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런데 왜일까. 할렌은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처음부터 그랬던 것 같았다. 시간이 지나고 그를 더 많이, 자주 보게 되면서 그런 감정이 더 뚜렷해졌을 뿐.

왜일까.

할렌은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도, 가치도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쿠웅!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찾았군. 마침내.]

하늘에서 떨어져 내린 거인의 시선이 처음 향한 곳이 그 녀석이었음을 깨달았을 때. 할렌은 저 거인을 이곳으로 끌어들인 것이 바로 그 녀석임을 알 수 있었다. 놈이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간에.

“오셨군요.”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숙인다. 그 몸짓에,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미미한 떨림이 섞여 있다는 것을 할렌은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알아차렸다고 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을 테지만.

“이게 어찌된 일이지?”

실비아 크렘보르의 날 선 목소리가 그 녀석에게 향했다. 산드라가 할렌보다 먼저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할렌은 산드라에게 조용히 손짓했다. 그 신호를 알아들은 산드라가 실비아를 뒤로 이끌려 했으나, 실비아는 꿈쩍도 하지 않고 버텼다. 반드시 답을 듣고야 말겠다는 듯이.

“큰 바람이 불면 작은 수풀들은 몸을 누일 뿐이지요. 믿으실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의도한 바는 아니었습니다.”

납득하지 못한 듯 재차 입을 열려던 실비아를 결국 산드라가 힘을 써가며 끌어냈다. 그 사이 할렌은 미친듯이 울부짖으며 뒷걸음질 치는 말을 억지로 앞으로 몰았다.

[의도한 바가 아니라고?]

거인의 조소가 모든 이들에게 닿았다.

“오실 줄은 알고 있었지요. 그러나 당신의 행사를 제가 어찌 가늠하겠습니까?”

그 뒤는 들리지 않았다. 들을 수가 없었다.

크아아아-!

어디에선가 갑자기 나타난 괴물들이 사방에서 몰려들어왔기에.

* * *

“…….”

잠잠해진 할렌의 영혼을 영혼 감옥 안으로 돌려보낸 군터는 방금 할렌의 기억을 통해 보았던 것을 떠올렸다.

아간툿스베록을 불러들인 녀석이 있었다. 거인왕이 한 말과 녀석이 보인 반응을 보면 그가 찾던 것은 그 녀석이 분명했다. 카인이라는 놈.

그 놈은 누구인가. 그 놈이 누구이기에 아간투스베록이 직접 놈을 찾기 위해 움직여야 했는가. 설마하니 놈이 줄카가 말했던 그 언약비인가? 언약비라는 것이 물건이 아니라 사람이었나? 그럴 수도 있는 것인가?

[무엇을 보았나?]

[아직은 모르겠군.]

마지막 순간 할렌은 실비아를 그녀의 호위 시녀, 그리고 소수의 호위 병력과 함께 탈출시키려 했다. 그 시도가 성공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할렌이 쓰러지기 전까지 실비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럼 아무 성과도 없었던 거로군.]

[글쎄.]

해야 할 일은 변하지 않았다. 기다리는 것. 그것이 줄카든 보울룬이든,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기다리는 것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성과가 없었는가 하면 그건 또 아니다. 만약 그 카인이라는 놈이 언약비이거나, 그에 관련된 무언가라면.

[그렇지는 않은 것 같은데.]

할렌의 기억을 다시 한 번 들여다보고 정확히 하루가 지난 밤. 익숙한 분위기의 사내 한 명이 수많은 경비병의 감시를 뚫고 군터의 집무실을 찾아왔다.

“그분께서 다시 한번 답을 듣고자 하시오.”

군터는 창문을 넘어 들어와 이제 막 몸을 세우던 사내에게 즉답했다.

“네 주인에게 돌아가 전해라. 원하던 답을 주겠노라고.”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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