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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987화 (987/1,064)

987화

역동하는 영혼에게서 곧 사라질 것 같은 희미함과 불안함은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끔찍한 상처는 여전히 영혼의 일부를 좀먹고 있었지만 한껏 부풀어오른 영혼에게 이제 그 정도 상처는 자그마한 생채기에 불과했다.

[확실히 효과는 있는 것 같지만 이건 너무…….]

뼈가 보일 정도로 삐쩍 말랐던 사람이 한순간에 굴러다녀도 될 정도의 뚱보가 되었다. 뼈를 드러낼 정도로 깊게 났던 상처는 부푼 살점에 밀리거나 가려져 보이지 않게 되었고. 과연 이것을 나았다고 할 수 있을까? 애매하지만, 상태가 좋아진 것은 분명했다.

물론 영혼의 상처와 육신의 상처는 같지 않다. 하지만 조금 전까지만 해도 꺼지기 직전의 불처럼 희미했던 영혼이 지금은 왕성하게 빛나고 있었다.

[과한 것 같은데.]

이가로프의 조심스러운 우려 따위는 무시했다. 지금 군터는 자신의 감각, 느낌만을 신뢰했다. 그는 역동하는 할렌의 영혼을 생생히 느낄 수 있었고, 잠들어 있던 할렌의 의식이 곧 깨어날 것을 직감했다.

그는 곧 깨어날 할렌을 기다리며 모든 업무를 중단했다. 그리고 별도의 지시를 내리기 전까지 그 어떤 접견도 하지 않겠노라 선언했다. 시어문드를 포함한 수하들이 당황했지만 군터는 그들에게 일일이 설명하거나 납득시키려 하지 않았다.

* * *

“들으셨습니까?”

“쉿. 그 입 조심하시오.”

토어릭은 표정에서부터 호들갑을 떨어대는 한 인사를 침묵시킨 뒤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걸음을 옮겼다.

‘저리 조심성이 없어서야.’

성주관저 주변만이 아니라 도시 전역에 성주의 눈과 귀가 깔려 있다. 성주가 따로 지시를 내리지 않더라도 그 눈과 귀들은 스스로 움직이며 정보를 수집한다. 물론 그 정보에는 불온한 목소리에 대한 포착 역시 포함되어 있다.

도처에 깔린 눈과 귀. 그 중에서도 특히 감찰대. 그들의 치밀함과 집요함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솔롬의 그늘 속에서 암약하며, 좀처럼 존재감을 드러내는 일이 없지만 일단 한번 전면에 나서는 순간 단번에 화제의 중심에 설 정도로 거침없이 실력을 행사한다.

‘직접 데이고 나서야 뜨거운 줄 아는 건가.’

토어릭이 보기에, 몇몇 이들의 불온한 목소리는 감찰대의 기준에 아슬아슬하게 닿을 듯 말 듯한 정도까지 이른 상태였다. 여기서 조금만 더 나아간다면 그들은 지금까지 경솔하게 입을 놀린 대가를 배, 아니 그 이상으로 치르게 되리라.

하지만 토어릭은 만약 그런 일이 정말 벌어진다고 해도 그 경솔한 자들을 탓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만큼 간밤에 벌어진 일을 충격적이었다. 그것은, 감히 그런 말을 머릿속에 떠올린 것만 해도 어마어마한 불경일 테지만…그야말로 미치광이의 소행 그 자체였다.

처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토어릭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성주가 직접지하 감옥에 갇혀 있던 죄수들을 도륙했다니? 아무리 그들이 곧 죽거나, 기약 없는 노역형에 처해질 이들이라고 해도 아무런 예고도 없이 모조리 죽여 버리다니. 그것도 사형집행인이 나선 것도 아니고 성주가 직접?

그 이야기가 사실이 아닐 거라 고개를 저은 이들 외에, 혹자는 성주가 사령술을 수련하며 얻은 영감을 시험하기 위해 그랬을 거라 했다. 또 어떤 이들은 그저 그간 전장에서 쌀인 광기가 폭발한 것이라고도 했다. 그리고 또 어떤 이들은 이미 벌어진 일의 이유를 궁금해하는 대신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우려했다.

토어릭은 마지막 경우에 해당했다. 그는 이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퍼져 나갔을 때 관료들이 어떻게 반응할지, 나아가 신전과 시민들이 어떻게 반응할지를 걱정했다.

그는 이 끔찍한 이야기가 자신의 귀에까지 들어온 시점에서 이 일을 없던 일로 만들기는, 다시 말해 입막음을 하기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니 궁리해야 하는 것은 이후의 대처였다.

“푹 쉬어야 할 때에 미안하게 됐소”

토어릭은 시어문드를 찾아갔다. 얼굴에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그는 오랜만에 찾아온 동료를 외면하지 않았다.

“그런 말을 하려거든 이렇게 찾아오지 말았어야 하는 것 아닌지.”

“뻔히 알면서 그러시는군. 예의상 한 말 아닌가.”

하루이틀 본 사이도 아닌데 서로를 모를까. 뻔뻔하게 웃는 토어릭을 시어문드가 반갑게 맞이했다.

시어문드의 집은 그의 지위에 걸맞게 꽤 큼직했다. 다만 하인의 수는 그리 많지 않았고, 내부의 장식 같은 것도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특별히 검소하다는 인상은 없지만 군인답다는 느낌이라고 할까.

“그래. 무슨 일이시오?”

“다짜고짜 용건부터 물으시는가? 삭막하군.”

“이런 말을 듣기 싫었으면 평소에 자주 찾아 왔어야지.”

“그러다 정말 자주 찾아오면 어떻게 하시려고?”

“어떻게 하기는 뭘 어떻게 하겠소. 간간이 바람이나 맞히는 거지.”

“야박하군. 야박해. 전장의 엄혹함이 인심마저 앗아간 모양이야.”

한때는 그들 모두 성주, 아니 장군의 심복으로서 각자의 위치에서 젊음을 불태웠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토어릭은 다른 길을 택했고, 반면에 시어문드는 지금까지도 그때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사실 함께 일했던 때에도 그들은 그리 친분이 깊지 않았다. 서로 기질이 다른 터라 사적인 교류도 드물었으니, 입장이 달라진 후에는 말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서로에게 동질감을 느꼈다. 신인들이 끊임없이 들어서는 관계(官界)에서, 벌써부터 원로 취급을 받는 입장이기 때문일까. 이 번성하는 도시를, 크렘보르의 이름으로 쌓아 올린 업적에 일조했다는 자부심 때문일까.

가까운 사이냐고 묻는다면 망설일 테지만, 먼 사이냐고 묻는다면 곧장 고개를 저으리라. 토어릭과 시어문드의 관계는 이렇듯 묘한 부분이 있었다.

그렇기에 시어문드는 토어릭을 웃으며 맞이했고, 토어릭도 낯설게 느껴지는 집에 익숙한 듯 발을 들인 것이다.

하지만 두 사람의 관계와는 별개로 이런 만남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서로가 다른 위치에 서게 된 이상 이는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떠들어대기 좋아하는 이들에게는 맛있는 먹이감으로 보일 테고, 윗분들도 좋아하지는 않으실 테니.

“말은 바로 하셔야지. 윗분의 눈치를 보는 건 내가 아니오.”

“그래. 그대는 걱정거리가 나보다 하나 적어서 좋으시겠군 그래.”

두 사람이 동시에 쓴웃음을 머금었다.

“그래서 용건이 뭐요.”

“짐작하고 있지 않나.”

“나는 모르는 일이오. 아마 그대와 비슷하게 소식을 들었을 테지.”

“그건 더 문제로군.”

“…….”

“적잖은 이들이 동요하고 있어. 평소와는 달라. 이번만은 그들의 가벼운 입을 탓할 수 없네. 이미 신전 쪽에서도 냄새를 맡은 모양이고. 어쩌면 곧 움직일지도 몰라. 장군께서는 아무 말씀도 없으셨나?”

“전혀. 뵙지도 못했소.”

“이런. 최악이로군.”

토어릭이 길게 탄식했다.

시어문드조차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함은 이번 사태가 온전히 성주의 독단이라는 뜻이다. 그의 속을 짐작하는 것이야 이미 한참 전에 포기했지만, 이번만큼은 어찌 대처해야 할지 정말 막막하기만 했다.

“알고 있나? 그날 밤. 공자께서 장군을 뵀다는군. 그, 일이 벌어졌던 지하에서 말이야.”

“그렇소?”

“그 자리에서 모든 것을 보셨다는군. 충격을 받은 와중에 장군께 이게 무슨 일이냐 여쭈었다가 대차게 깨지신 모양이야.”

“깨지다니. 거 표현이 꽤나…….”

“웃으며 넘길 일이 아니라는 것. 자네도 알지 않나.”

시어문드가 입을 다물었다. 억지로 지었던 웃음도 사라졌다.

“장군께서 세상의 눈치를 보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건 우리 모두 알지. 하지만 그렇다고 그분께서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모르거나 무시하는 분이라는 것은 아니야. 그간 그분께서 행하신 모든 것들, 제정신이 아니라고 손가락질 받았던 일들조차 다소 파격적이었을지언정 정도에서 벗어난 경우는 없었네. 하지만 이번만은 달라. 신전에서 본격적으로 이 일을 문제삼기 시작한다면 뭐라 변명해야 하겠나?”

“신전이 문제 삼는다고? 그들에게는 그럴 만한 배짱이 없소.”

“물론 그렇지. 장군의 한숨소리에도 놀라 움츠러들 자들이 감히 그럴 리는 없겠지. 이번에는 말이야.”

토어릭은 지금 당장이 아니라 앞으로를 내다보았다. 그가 걱정하는 것은 지금 당장 떠도는 말들이 아니라 그로 인해 시작될 수 있는 변화였다.

“먼저, 내가 여전히 장군을 존경하고 있음을 분명히 하지.”

“뒷감당이 걱정될 정도의 말이라면 입 밖에 내지 않는 편이 나을 터인데.”

“하하하. 날 팔려고? 자네가 날 팔아서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려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음대로 하게. 얼마든지 팔려주지.”

“거 참.”

시어문드가 들을 준비가 됐다고 생각이 들자, 토어릭은 돌연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장군의 사고는 평범한 사람과는 다르네. 방식의 차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야. 그야말로 궤를 달리해. 같은 것을 보면서도 그분은 일반적인 사람은 절대 떠올릴 수 없는 생각을 종종 하시고, 그것을 행동으로 보이시기까지 하지. 자네도 분명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있을 걸세. 늘 곁에서 따르지만, 어느 순간 처음 보는 것처럼 낯설게 느껴지는. 그렇지 않나?”

“듣고 있소.”

“우리는 의심 없이 따랐지. 때때로 낯설고 두렵게 느껴지더라도 그 끝에 승리가, 영광과 성과가 따라온다는 것을 수없이 경험했으니까. 그런 경험이 믿음을 주었던 것이야.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젊은 녀석들, 혹은 장군을 모르는 자들이 늘어났지. 그들은 우리 같지 않아. 게다가 지금은 뻗어 나가기 힘든 시기 아닌가. 우리 때와는 달라. 장군의 방식은 그들에게는 그저 알 수 없는, 그래서 더 낯설고 두렵게만 느껴질 뿐이네.”

“그럼에도 따르는 것이 아랫사람의 본분 아니겠소. 그게 충성이라는 것이고.”

“모두가 자네 같지는 않아. 그게 자네가 지금 그 자리에 홀로 앉아있을 수 있는 이유 아니던가.”

“하아. 좋소. 그래서 뭐가 어떻다는 말이오?”

“이번 일은 어찌어찌 지나간다고 해도, 이대로는 계속 곤란한 상황이 생길 것이야. 그렇다고 우리가 장군을 설득할 수 있을까?”

“불가능하지.”

시어문드가 즉답했다.

조언과 설득은 다르다. 그들이 아는 군터 크렘보르는 남의 의견을 참고는 해도 남의 뜻을 그대로 따르는 이는 아니었다. 그것은 고집스러운 것과는 달랐다.

“만드는 것은 어렵지만 부수는 것은 쉽네. 세상 모든 것이 다 그렇지.”

“점점 듣고 있기가 힘들어지고 있소.”

“아네. 듣기 싫은 말을 늘어놓고 있는 내 마음도 편치는 않아. 하지만 자네도 알고 있을 걸세. 애써 외면하고 있을 뿐.”

지금은 군인의 시대다. 비어 있는 옥좌를 차지하기 위해 황자들이 서로 다투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창과 칼의 시대이자 군인들의 시대인 것이다. 지금 같은 시대이기에 군터 크렘보르는 모든 것을 이룰 수 있었다. 아무리 좋게 표현해도 처신을 잘한다고는 할 수 없는 자가 유력한 황자의 총신이 될 수 있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의 재주가 중용 받을 수 있는 시대였기 때문에.

하지만 지금. 그 시대는 서서히 저물어가고 있다.

“여전히 혼란은 계속되고 있소. 황자들의 싸움도 그렇고, 이제는 군주들마저 나서기 시작했지. 이 혼란이 언제 끝날 것이라 그 누가 장담할 수 있겠소.”

“군주들의 싸움은 오래 가지 않을 걸세. 그들은 황가에 충성하니까. 지금이야 황가의 주인이 정해지지 않았으니 날뛸 수 있겠지만, 전쟁이 끝나고 나면 이야기는 달라져.”

시어문드는 어찌 그리 확신할 수 있느냐고 되묻지 않았다. 지금 토어릭이 한 말은 그의 개인적인 견해가 아니라, 시류를 읽을 줄 아는 이들 대부분의 공통적인 견해였다.

“그때가 되면, 정말 많은 것들이 달라질 것이네. 지금 이 시대에 익숙해진 이들은 적응하기 힘들 만큼.”

“이해했으니 이제 그만 진정 하고 싶은 말을 하시오.”

토어릭이 잠시 뜸을 들였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다시 입을 열었다.

“보리스 공자께서 장군의 뒤를 이으셔야 한다고 생각하네. 근시일 내에 말이야.”

“…….”

시어문드가 몸을 뒤로 젖혔다. 그는 눈을 감은 채 몇 번 정도 숨을 고르고 나서야 다시 토어릭과 눈을 마주쳤다.

“조금 더, 설명이 필요할 것 같은데.”

“장군께서 일찍부터 말씀하셨었네. 당신께서는 보리스 공자가 준비가 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으시다고 말이야. 부, 권세, 그 외에 다른 모든 것들은 그저 하찮을 뿐이라 하셨지. 그분께서는 언젠가 그것들을 쓸모없는 짐이라고 표현하시기도 했어.”

“권력자들이 으레 하는 말 아니오. 자잘하고도 진부한 시험 같은.”

“장군께서 그런 흔해 빠진 권력자들과 같은 분이시던가?”

“그건.”

“보리스 공자는 성주 대리를 맡은 동안 통치자로서의 능력을 보이셨네. 지금 당장 가업을 이어받는다 해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라고, 나는 생각하네.”

“열 번 양보해서 그 말이 틀리지 않다 해도, 우리 같은 아랫사람이 논할 주제는 아닌 것 같소.”

“지금 당장 답을 들으려던 것은 아니네. 그저 내 생각을 말하고, 자네의 생각을 듣고 싶었을 뿐이야. 지금 당장은 받아들이기 어려울 테지만, 그래도 한 번 생각해보게. 장군의 마음이 그때와 변하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이런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도 불충은 아닐 테니.”

토어릭은 머리를 복잡하게 만드는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던져 놓았다.

그가 돌아간 후. 시어문드는 한참 동안이나 가만히 앉아 복잡해진 머리를 부여잡고 있었다. 못 들은 것으로 하려 해도, 토어릭이 했던 이야기가 자꾸만 떠올라 심사를 뒤틀어 놓았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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