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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986화 (986/1,064)

986화

사람이라고 다 같은 사람이 아니듯, 영혼도 다 같은 영혼이 아니다. 격이라고 해야 할까. 빈민과 왕이 같지 않듯, 영혼 사이에도 분명한 차이가 존재했다.

대표적으로 이가로프가 그랬다. 그는 다른 영혼들과 달리 살아있는 사람과 맞먹는 지성과 감정, 활동력이 있었다. 그것이 그의 생전 신분 때문이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군터는 아마 아닐 것이라 생각했다. 왜냐하면 이전에 그가 헤이모라의 지하 미궁에서 거둬들였던 고대인들 중에도 생전에 존귀한 신분이었던 영혼들이 있었음에도 그들에게서는 그리 특별하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군터는 영혼들을, 그것들이 사람의 영혼이라고 해도 인격으로서 대우하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 영혼이란 그가 손쉽게 다룰 수 있는 편리한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영혼들과 소통할 생각도, 의지도 없었다. 할렌은 특별한 경우였기에 제외한다면, 이가로프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그때는 그 이유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와서 다시 생각해보니 그건 영혼들에게서 그럴 만한 가치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사람이 개미와 같은 미물을 보며 자신과 동등한, 혹은 존중해야 할 만한 상대라고 느끼지 못하듯이 그 또한 영혼들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예외적인 경우였던 할렌을 제외하고, 이가로프만이 달랐던 이유는 그가 존중할 만한 상대라고 자연스레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의 격이, 어느 정도 대우할 만한 존재에 달한다고 느꼈기 때문에.

격.

그게 무엇인지는 몰랐다. 하지만 자연스레 느껴졌다. 의식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얼추 가늠이 된다고 할까. 모든 영혼이 예외 없이 그랬고, 이번에도 그랬다.

할렌의 영혼은 나날이, 아니 매순간 작아졌다. 처음의 낙관적인 예상과는 달리 영혼에 난 상처는 아물기는커녕 오히려 더 악화되어갔다.

영혼이 작고 약해진다는 것. 한번도 이런 경우를 본 적이 없었지만, 그럼에도 그게 뭘 의미하는지 알 것 같았다.

처음 돌아왔을 때만 해도 걱정했던 할렌의 영혼이, 이제는 하찮고 가치 없게 느껴졌다. 그것은 어떤 대상에 대한 애착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것보다 더 급격한 변화였다. 군터는 아주 자연스럽게 그 급격한 변화를 받아들이는 자신이 낯설었다.

‘이대로는 안 돼.’

할렌의 영혼은 점점 작아지고, 약해질 것이다. 그러다 종국에는 완전히 사라져버리겠지. 그렇게 되도록 놔둘 수는 없다.

[방도가 없겠나.]

이가로프가 한참을 망설이다가 답했다. 그의 대답에서 자신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영혼에 대해서는 나보다 장군이 더 잘 알고 있을 것이야. 내가 해줄 수 있는 조언은 그리 많지 않을 것 같군. 고작해야 영혼으로서의 느낌 정도일까.]

[큰 기대는 하지 않아. 뭐라도 좋다.]

[으음. 육신을 가졌을 때와 영혼만 남았을 때는 전혀 달라.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영혼만 남은 지금, 살아있을 때보다 더 자유롭다고 느낀다. 하지만 동시에 끝없는 위협도 느끼지. 발가벗은 채 전장 한복판에 서 있는 느낌이라고 할까.]

[계속해라.]

[산 자의 육신을 빼앗으려 하는 원령들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지. 그 이야기를 들었을 당시, 그러니까 내 몸을 가지고 살아있던 당시에는 별 생각 없이 그저 원령들이 사악한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라고 여겼지. 하지만 내가 영체가 되고 보니 알겠더군. 사람이 찬 바람 앞에 옷을 껴입으려 하듯이 그들 역시 위험을 피하고자 했을 뿐이라는 것을. 아마도 본능이었겠지. 더 안전해져야 한다는 본능.]

육신은 영혼의 감옥이다. 자유를 억압하고 구속하는 족쇄. 하지만 동시에 외부의 위험으로부터 보호해주는 갑옷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육신을 잃은 영혼은 자유로워지지만 위험 앞에 무방비로 노출되는 것이다.

[그 할렌이라는 자의 영혼은 상처를 입었지. 비유하자면 갑옷을 벗은 채로 뼈와 살이 베인 거다. 그렇다면 그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약과 음식이 필요하지 않겠나? 약으로 상처를 치료하면서 푸짐한 음식으로 몸의 기운을 북돋는 거지.]

지극히 옛사람다운 사고방식. 그러나 분명 참고할 만한 부분이 있었다. 특히 영혼과 육신에 대한 비유가 그러했다. 자연스럽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던 것을 머리로 이해하게 되니 이제야 사고가 트이는 느낌이었다.

[그렇다면 그 약과 음식은 무엇이겠나. 어떻게 영혼에 약을 바르고 고기를 먹인다는 건가.]

[그건 나도 잘 모르겠군. 하지만 장군은 알 수 있을 거야.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았고, 누구에게도 배운 적 없지만 장군은 스스로 그 누구보다도 영혼을 능숙하게 다루지 않나.]

결국 마지막에 가서 나온 결론이 ‘스스로 궁리하라’였지만 군터는 실망하지 않았다. 이가로프의 말처럼 스스로 궁리하면 떠올릴 수 있을 것 같은 막연한 자신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영혼이라.’

이가로프의 말처럼 그는 영혼을 다루는 데 능숙했다. 그가 영혼을 다루는 것은 몸을 다루는 것처럼 쉽고 자연스러웠다. 그리고 어쩌면, 꽤나 깊게 이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머리로 알아야 이해할 수 있는가. 이해한다 함은 지식으로서 아는 것과 다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군터는 다시 한 번 할렌의 영혼을 살폈다.

희미해진 영혼에는 상흔이 남아 있었다. 우악스럽게 잡아 뜯긴 것 같은 상처. 시간이 흘러도 아물기는커녕 점점 더 악화되어가고 있다. 저 상처를 어떻게 해야 치료할 수 있는가. 그건 모른다. 시간을 두고 깊게 궁리한다면 떠올릴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으로서는 무리다. 여유롭게 방도를 궁리하기에는 남은 시간이 부족하다.

그렇다면 어찌 해야 하는가. 상처를 건들 수 없다면 영혼 자체를 건들면 된다. 상처를 치료하지는 못하더라도 할렌의 기운을 북돋아줄 수는 있다.

그 방도는 아주 간단하게 떠올랐다.

“장군.”

집무실의 문을 열고 나섰다. 그가 걸어가는 길. 중간중간 마주치는 병사들이 군례를 취했다. 군터는 그들 가운데 누구 하나와도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걸음을 옮겼다.

“엇. 장군. 어찌 나오셨습니까? 마침 보고드릴 일이…….”

엊그제 밤에 도착한 시어문드와도 마주쳤다. 며칠 밤잠을 설친 사람처럼 얼굴이 초췌해진 그가 용무를 꺼내려 했지만 그가 한 마디를 꺼내기도 전에 군터가 그의 입을 막았다.

“나중에 하지.”

“아, 예.”

시어문드가 당황하며 옆으로 물러났고, 군터는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그의 발걸음이 멈춘 곳은 지하 감옥 앞에서였다. 감옥문을 지키던 옥졸이 허둥대자 군터는 그에게서 열쇠를 받아 들고 직접 감옥 문을 열었다.

“장군. 어찌…….”

“이곳에 볼 일이 있다. 소란 떨지 말도록.”

군터가 어두컴컴한 지하 복도 너머로 사라지고 난 후. 그때까지도 상황파악을 못하고 눈만 끔뻑거리던 옥졸이 참았던 숨을 길게 토해냈다.

* * *

“시어문드 공.”

“보리스님.”

보리스가 시어문드와 마주친 것은 우연이었다. 집무실에서 조금만 더 여유를 부렸더라면 어딘가 묘한 표정을 하고 있는 시어문드를 보지 못했을 것이다.

“아버지를 뵈셨나 봅니다.”

“예, 뭐. 뵙기는 했지요.”

길게 말하고 싶지 않다는 듯 얼버무리는 시어문드. 그런 모습조차 평소의 그답지 않았기에, 보리스는 작은 호기심을 느꼈다.

그러나 그런 호기심을 내색하지는 않았다. 시어문드는 그에게 있어 제법 어려운 사람이었고, 그렇기에 대함에 있어 조심하곤 했다. 지금도 예외는 아니었다.

시어문드를 먼저 보낸 후. 보리스는 왔던 길을 돌아갔다. 그리고 안면이 있는 친위대 병사 한 명을 붙들고 물었다.

“성주님은 집무실에 계시나?”

“아닙니다. 조금 전까지는 집무실에 계셨습니다만, 급히 어디론가 가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어째서였을까. 평소였다면 궁금한 부분이 있더라도 대충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작은 호기심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것은 일종의 직감이었다. 공무에 대한 책임감을 보이지는 않으면서도 일과는 칼 같이 지키던 부친의 일탈. 시어문드가 보였던 그답지 않은 모습과 반응.

“성주님은 어디 계시나.”

“저쪽으로 가시는 것 같았습니다만, 자세히는 모르겠습니다.”

눈에 익은 이들을 보이는 대로 붙잡고 물었고, 부친의 행적을 대강이나마 파악할 수 있었다. 그 행적을 따라 걸음을 옮기다 보니 어느새 보리스의 앞에는 지하 감옥의 입구가 나타났다.

“성주님이 안에 계시나?”

“그, 그…….”

보리스는 어딘가 모자라 보이는 옥졸을 물러나게 하고서 지하 감옥으로 들어섰다. 지하로 한 걸음을 딛자마자 지하 특유의 음습한 공기가 코를 스쳤다. 인상을 찌푸린 보리스가 벽에 걸린 횃불 하나를 집어 들고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뭐지?’

퀴퀴한 냄새 사이에 희미하게 느껴지는 비릿함. 익숙한 그 냄새를 떠올리기 위해 보리스는 걸음을 옮기면서 기억을 더듬었다.

한 층을 내려갔을 때, 그 냄새는 더 진해졌다. 그때까지도 보리스는 점점 더 진해지는 냄새의 정체를 알 수 없었다.

‘더 내려가야 하나.’

지하 1층을 지키던 옥졸들에게 부친의 행방을 묻자 그들은 부친이 아래로 내려갔다고 했다. 보리스는 호위하겠다는 그들을 제지하고 더 아래로 내려갔다.

“어찌 이곳에 이렇게 몰려 있나.”

지하 2층으로 내려가자 십 수 명의 옥졸들이 어수선하게 몰려 있는 것이 보였다. 보리스가 의아해하자 그들은 억울한 표정으로 변명하듯 답했다.

“저희는 3층을 지키는 병사들입니다. 장군께서 저희더러 올라가 있으라 하셨습니다, 별도의 명이 있기 전까지는 아래로 내려오지 말라고도…….”

이 순간. 보리스는 어떤 강한 예감을 받았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조금 전부터 코를 간질이던 정체 불명의 냄새의 정체를 떠올렸다.

‘설마.’

보리스의 걸음이 빨라졌다.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만류하는 병사들의 목소리를 뒤로 하고, 그는 지하 3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서둘러 내려갔다.

계단을 반쯤 내려갔을 때. 비릿한 냄새가 물씬 풍겨왔다. 보리스는 자신이 잘못 짚은 것이 아님을 확신했다.

‘피 냄새!’

퀴퀴함을 뒤덮은 비릿함. 이것은 틀림없이 피 냄새다. 그와 가까운 사람들이 우스갯소리로 짐승의 코를 지녔다고 할 정도로 예민한 후각을 지닌 보리스였다. 절대 착각이 아니다. 이 아래에서 전장의 한복판에서나 날 법한 냄새가 났다. 어째서?

“……!”

지하 3층. 지하 감옥의 가장 아래 층에 발을 디딘 보리스는 옥졸들이 쓰는 대기실을 지나 옥방이 늘어서 있는 좁은 복도에 이르렀다. 그리고, 지금껏 찾아다닌 부친과 마주쳤다.

“아버지.”

“무슨 일이냐.”

“제가 여쭙고 싶습니다. 이건 대체.”

모든 옥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피냄새는 그 모든 곳에서 풍겼다. 죽음의 냄새. 보리스는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옥방의 안쪽을 보았다. 나무조각처럼 뻣뻣하게 굳은 몸뚱이 두 개가 뒤엉켜 쓰러져 있었다. 피는 그것들의 눈과 귀, 입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대체 뭡니까.”

다시 시선을 돌렸다. 가장 안쪽. 활짝 열린 옥문 앞에 부친은 서 있었다. 살짝 들어올린 그의 오른쪽 손 위에 푸르스름한 연기 같은 것이 맴돌고 있었다.

보리스는 그게 무엇인지 몰랐으나 그것에서 영문 모를 섬뜩함을 느꼈다.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했는데.”

“왜 이런 짓…아니, 이런 일을 하신 겁니까. 사령술을 위한 제물입니까? 그런 것이라면 보다 은밀히…….”

“내가 하는 일에 네 허락이 필요한가?”

“그런 뜻이 아니지 않습니까.”

자신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던 보리스는 부친과 눈을 마주치기 무섭게 말을 멈췄다. 말을 멈출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벌린 입에서는 더 이상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내가 하는 일에는 누구의 허락도 필요치 않다. 그리고 네가 내게 보여야 할 태도는 순종뿐이다. 그런 면에서 지금 같은 모습은…적잖이 실망스럽군.”

말을 마친 부친이 천천히 걸어 옆을 지나치고, 그 발걸음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게 될 때까지. 보리스는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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