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5화
“그럼…저는 이만.”
“그래. 나중에 또 보지.”
“예.”
깍듯이 고개를 숙인 나짐이 돌아가고, 집무실의 한쪽 벽이 열리며 로우렌이 모습을 드러냈다.
“거짓말을 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래. 그럴 만한 배짱은 없는 자다.”
보리스가 심드렁하게 대꾸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가 쪽으로 간 그는 정문 앞에서 마차에 타고 있는 나짐을 내려다보았다.
로우렌의 조사는 잘못되지 않았다. 나짐은 술사로서는 몰라도 사람으로서 그리 대단한 자는 아니었다. 조심성이 제법 있다는 것을 제외하면 평범한 그 나이대의 사내였다. 적당히 탐욕스럽고, 적당히 용감하고, 그러면서도 또 적당히 겁먹을 줄도 아는.
“인체 실험이라.”
“정확히는 그릇을 만드는 일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내 귀에는 그렇게 들렸다.”
“뭐, 저희 같은 문외한이 보기에는 그게 그것이지요.”
나짐의 말에 따르면, 그가 모페이브와 함께 연구했던 것은 영혼을 담을 그릇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 얘기를 들었을 때 보리스는 그게 무엇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로우렌의 말처럼 그런 쪽에는 문외한이었기 때문이다. 사령술에 특별히 거부감을 지닌 것은 아니나, 그가 사령술에 대해 아는 거라고는 시체와 영혼을 다룬다는 것 정도였다.
‘따지고 보면 그 그릇이라는 것도 그런 범주에 들어가는군.’
부친이 전장에서 시체를 일으켜 병사로 써먹었다는 이야기는 몇 번이고 들었다. 그런데 누구의 조력 없이도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부친이 굳이 영혼을 담을 그릇이라는 것을 필요로 할 이유가 있을까? 문외한인 자신이 알지 못하는 다른 이유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보리스는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았다.
“겁먹은 것이 눈에 보이는데도 끝까지 입을 열지 않는군. 네 말을 이해했다.”
나짐은 모든 것을 털어놓지 않았다. 나짐은 그 그릇이라는 것이 특별한 영혼을 담기 위한 육신이라고 했다. 그러나 보리스가 그 특별한 영혼이 무엇인지 물었을 때, 그는 답하지 않았다. 제법 자연스럽게, 죄송해서 몸 둘 바를 모르겠다는 얼굴로 그 부분에 대해서는 모른다고 답했다. 자신은 모페이브를 보조했을 뿐, 영혼과 관련된 비밀스러운 과정에 대해서는 참여한 적도 들은 적도 없다며.
어쩌면 정말 사실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미 한번 거짓말을 한 자가 두 번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지 않은가. 적어도 나짐은 그 그릇에 깃든 영혼이 특별한 영혼이라는 점 하나만은 알고 있었다.
“특별한 영혼이라.”
로우렌의 나직한 중얼거림. 그러나 보리스의 관심은 어느새 다른 부분으로 옮겨 가 있었다.
“시체에 영혼을 깃들게 한다면, 그건 죽은 자를 되살렸다는 뜻인가?”
“글쎄요. 사령술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합니다만, 움직이는 시체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영혼이 깃들었다 하지 않았나.”
“저는 그 영혼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영혼이 무엇입니까? 인격? 기억? 아무리 영혼이 깃들었다 해도 그 몸뚱이는 전혀 다른 사람의 것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그 몸뚱이가 다시 살아 숨쉬게 되었다 해도…….”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아. 그래도 일반적인, 움직이는 시체 같은 것과는 아무래도 다르지 않겠나? 그러니까 직접 연구를 시키셨겠지.”
“그건 그렇겠지요. 직접 한번 여쭙는 건 어떻겠습니까?”
옅은 웃음기가 감도는 말에 보리스가 콧방귀를 뀌었다.
“시도 때도 없이 흰소리를 해대는군. 그 나쁜 버릇은 대체 언제 고칠 셈이냐.”
“글쎄요. 굳이 고칠 생각은 없습니다. 아직은 말이지요.”
가벼운 농담으로 분위기가 환기되고, 로우렌이 다시 얼굴에서 웃음기를 거뒀다.
“오늘 일이 새나가면 장군께서 별로 좋아하지 않으실 겁니다. 어떻게…조용히 처리할까요?”
로우렌이 은근한 목소리로 정리할 것을 권하자 보리스가 잠시 고민하는 듯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럴 필요까지는 없다. 교활한 구석이 있기는 하지만, 위험을 무릅쓸 배짱은 없는 놈이다. 그런 놈에게 굳이 손을 쓸 필요는 없지. 손을 쓰는 것이 오히려 더 부담이다. 당분간만 조용히 지켜보는 편이 나을 것이야.”
“알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요즘 조금 묘한 말들이 돌고 있습니다만.”
“묘한 말?”
“아가씨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아가씨께서 국외에서 급히 돌아오시던 중에 소식이 끊기셨다는…….”
그 말을 하며 로우렌은 조심스럽게 보리스의 기색을 살폈다.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었다. 무표정한 얼굴에 꾹 다문 입.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 같기도 했고,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듣고만 있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건 한 가지만은 분명했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동생을 걱정하는 오라비의 모습은 아니었다.
“함부로 입에 담아도 될 것이 있고, 안 되는 것이 있지. 상황이 상황이라서 그런 것인지, 경솔한 것들이 튀어나오는 모양이군.”
“어떻게, 조치를 취할까요?”
“아니. 그냥 두어라. 그런 것들에 일일이 반응한다면 오히려 더 소란스러워지지 않겠느냐. 그냥 두되, 입을 함부로 놀리는 것들이 누구인지 이름 정도는 알아보도록 해.”
“그리 하겠습니다.”
로우렌은 충직한 수하의 모습으로 깍듯이 고개를 숙였다. 조금 전까지 짓궂은 농을 해대던 사람과 동일인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이제 제법 그럴듯해 보이시는군.’
로우렌이 내심 미소 지었다.
간혹 그 나이 대의 사내다운 치기라든가, 경솔함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보리스는 이제 어느 정도 전체적으로 윗사람이 갖춰야 할 여러 가지를 갖춰가고 있었다. 지금의 그만 놓고 봐도 한 가문의 후계자로서 부족함이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도 나날이, 모든 면에서 더 좋아지고 있으니 여기서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난다면 보리스는 분명 이 땅의 지배자로서 손색없는 인물이 될 수 있을 터였다.
언젠가 보리스가 만인의 축복을 받으며 솔롬의, 나아가 판니른의 최고 권력자로서 우뚝 서는 날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그리고 그런 그의 바로 뒤에서 함께 걷는 자신과 형의 모습도.
아직은 조금 멀 수도 있는 즐거운 상상을 머릿속에서 천천히 지워내며, 로우렌은 보리스가 명했던 ‘명단 작성’을 위해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 * *
히히힝!
입에 거품을 물면서도 주인의 재촉에 못 이겨 계속 앞으로 내달리던 말이 기어이 다리가 꼬여 쓰러졌다. 실비아는 쓰러지는 말 위에서 재빨리 고삐를 놓고 몸을 날렸다. 구슬피 울부짖는 말의 한참 앞에서 땅을 구른 그녀는 격통에 이를 악물면서도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허억…허억…….”
“아가씨!”
뒤따라오던 산드라가 손을 뻗었다. 실비아는 산드라의 손을 붙잡고 훌쩍 뛰어올라 산드라의 뒤에 붙어 앉았다. 그러자 가뜩이나 힘들던 와중에 갑자기 한 사람을 더 태우게 된 산드라의 말이 비명을 질렀다.
“잠시만이라도 쉬었다 가는 것이 어떨까요?! 말들이 더는 버티지 못할 겁니다!”
“안 돼. 멈춰서는 안 돼. 느껴지지 않느냐? 뭔가가…우리를 지켜보고 있어.”
“저는…저는 모르겠습니다 아가씨.”
산드라는 실비아가 초조함과 두려움에 삼켜져 이성이 흐려졌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실비아가 정체 모를 시선이 느껴진다고 했던 것은 해가 지기도 전부터였다. 그런데 지금은 하늘이 밝아오는 지금까지도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으니, 산드라가 그런 불경스러운 생각을 떠올리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아가씨의 말에 토를 단다는 것. 단 한 번도 생각한 적 없는 불경이었다. 하지만.
“아가씨. 말들이 쓰러지면 그때는 서두르고 싶어도 서두를 수 없습니다. 잠시라도 좋으니 휴식을 취하시지요.”
“…….”
“아가씨.”
“…그래. 알겠다. 적당한 곳에서 쉬어 가도록 하자.”
쉴 만한 곳을 찾기는 어렵지 않았다. 지형이 평탄해서가 아니라, 일행의 수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비아와 산드라를 포함해도 고작 열 하나. 야영지를 탈출할 때의 인원이 서른이 훌쩍 넘었었으니, 못해도 삼분의 이가 죽거나 낙오한 것이다.
“아가씨. 여기.”
산드라가 홀쭉한 물주머니를 건넸다. 실비아는 힘없이 그것을 받아 들었다. 생각 없이 한 모금 들이켜니 더는 나오는 것이 없었다.
“송구합니다. 급히 도망쳐 나오느라 미처 식수를…….”
“아냐. 괜찮아. 신경 쓰지 마라.”
산드라의 입술은 가뭄을 겪은 땅처럼 마르고 갈라져 있었고, 그녀의 목소리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먹을 물 한 방울까지도 남기지 않았다는 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런데도 죄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는 산드라를 보며, 실비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때였다.
스스슥-
착각일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산드라는 지금까지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고 했으니.
하지만 가만히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 그 소리가 다시 한 번 들렸을 때, 실비아는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섰다.
“아가씨?”
“뭔가 있어. 그것도 아주 가까이!”
실비아의 다급한 외침에 산드라가 엉거주춤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녀의 눈에는 경각심 대신 걱정이 떠올라 있었다.
“아가씨. 저는 아무것도 듣지 못했습니다.”
산드라의 걱정스러운 목소리는 실비아의 귀에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는 방금 들려온 그 작지만 섬뜩한 소리에 집중했다. 지금까지는 한번 들리고 나면 한동안은 다시 들리지 않았다. 그렇기에 실비아는 몇 번씩이나 그 소리를 들었으면서도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은 아닌지 계속해서 의심해야 했다.
스슥-
하지만 이번은 아니었다. 착각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듯, 그 섬뜩한 소리는 다시 한번 실비아의 귓가를 스쳐갔다.
“산드라. 정말 이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거야?”
“아가씨. 저는 정말.”
이어지던 말이 뚝 끊겼다. 돌처럼 굳은 산드라의 표정을 본 실비아는 본능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바로 그곳에 있었다. 녹음(綠陰)의 중간. 전혀 이상하거나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풍경의 한복판에서 깜빡이는 눈동자.
“적이다!”
산드라가 실비아를 잡아당기며 그녀의 앞에 섰다. 그녀의 외침을 들은 병사들이 저마다 무기를 붙들고 그녀의 곁에 몰려들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깜빡이는 눈동자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저게 대체.”
“눈…인가?”
숨막히는 긴장감 속에, 산드라가 손에 쥔 검을 고쳐 쥐었다. 어느새 흘러나온 땀이 검 손잡이를 축축하게 적셨다.
‘이런. 꼴사납게!’
산드라는 자책하고, 또 자책했다.
아가씨의 말이 맞았다. 초조함이나 두려움 때문에 착각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정말로 저 괴물이 따라붙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명색이 호위라는 자신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고, 심지어 아가씨의 정신이 온전치 않은 것인가 하는 불경한 의심이나 품었다. 게다가 지금은 적을 앞에 두고 이런 추태까지 보이다니.
“놈이 덤벼든다면 내가 상대하겠다. 너희는 아가씨를 지켜라.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반드시.”
그것은 그녀 자신에게 하는 각오의 한 마디이기도 했다. 어떻게 되더라도 아가씨만은 반드시 지키겠다는. 그러기 위해서라면 자신의 목숨까지도 아끼지 않겠다는.
“저, 저…….”
그러나 녹음 속에서 깜빡이는 눈의 개수가 하나 둘 씩 늘어나다가, 기어이 열 개 이상이 되었을 때. 산드라는 방금 세운 각오가 형편없이 무뎌지는 것을 느꼈다.
“도망쳐야 해.”
뒤쪽에서 실비아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동시에 눈만 괴물들이 하나 둘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쿵! 쿵!
나무에서 뛰어내린 괴물들. 어찌된 것들인지 땅에 내려서자마자 몸의 색이 다채롭게 변했다. 어떤 것은 진한 갈색, 어떤 것은 나뭇잎과 같은 연한 녹색. 산드라는 왜 지금까지 저것들을 발견하지 못했던 것인지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외눈. 머리에서부터 몸통까지는 도마뱀을 닮았다. 그러나 꼬리는 없으며 네 개의 다리는 거미의 그것처럼 가늘었다. 전체적으로 날렵한 외형이었으나 그 크기가 어지간한 송아지에 버금갔다.
듣도 보도 못한 괴물. 외형만 해도 저리 기괴한데, 위장 능력 외에 또 어떤 능력을 지니고 있을지 모른다.
“모두. 내가 신호하면 곧장 말에 올라라. 아가씨를 모셔. 알겠나?”
“아, 알겠습니다.”
결연한 목소리에서 무언가를 짐작했는지, 잠자코 있던 실비아가 언성을 높였다.
“산드라.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너…….”
“지금!”
산드라가 괴물들을 위협하듯 앞으로 뛰쳐나갔다. 그러자 괴물들이 일제히 펄쩍 뛰며 뒤로 물러났다. 본능적인 경계의 움직임.
“아가씨를 모셔라!”
괴물들은 곧 언제 물러났냐는 듯 하나뿐인 눈을 번뜩이며 앞으로 달려 나왔다. 가느다란 다리로 그렇게 빨리 뛸 수 있다는 것이 보면서도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네 마리의 괴물이 한번에 산드라에게 덤벼들었다. 산드라는 괴물들을 향해 검을 휘두르면서 재차 외쳤다.
“서둘러!”
안 된다며 소리치는 실비아가 병사들의 손에 붙들려 억지로 말에 올랐다. 이미 잔뜩 겁에 질려 있던 말들은 주인의 허락이 떨어지자 기다렸다는 듯 땅을 박찼다.
“산드라!”
등 뒤로 들려오는, 점점 멀어지는 목소리에 산드라는 옅은 웃음을 머금었다. 동시에 괴물의 가시 같은 앞발이 그녀의 왼쪽 어깨를 파고들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