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4화
줄카와 협력해야겠지만, 군터는 그를 먼저 찾을 생각은 없었다. 찾으려 해도 쉬이 찾을 수 있을 것 같지도 않고, 어차피 이쪽에서 먼저 찾아 나서지 않더라도 그쪽에서 먼저 찾아오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선순위는 줄카가 아니라 실비아였다.
할렌의 불완전한 기억을 통해서 본 바에 따르면 실비아는 그 자리에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찾으셨습니까 장군.”
이제는 제법 숙련된 군인처럼 보이는 보울룬이 깍듯이 군례를 취했다. 그의 고개가 내려갔다 올라오는 그 짧은 순간. 군터는 이게 정말 최선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보았다.
하지만 살라스와 아드리안은 멀리 있고 할렌은 없으며, 시어문드도 아직 도착하지 않은 지금. 그가 쓸 수 있는 녀석들 중 그나마 가장 쓸 만한 녀석은 다시 생각해봐도 이 녀석이었다. 능력도 어느 정도는 있으며, 나름대로 심지도 굳건하다.
“해줬으면 하는 일이 있다.”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명령만 내려주십시오.”
“국외의 일을 마치고 이곳으로 돌아오던 내 딸이 습격을 받았다. 지금은 행방이 묘연해졌지.”
“그런……. 마물의 공격이라도 받은 겁니까?”
마물이라. 그랬다면 보울룬의 말처럼 그냥 명령을 내렸으면 그만이다. 아니면 직접 나서던가.
“아니. 습격한 것은 아간투스베록이다.”
“아간…….”
보울룬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인 것 같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두어 번 정도 귀에 익은 이름을 되뇌던 그의 표정이 한순간 돌처럼 굳었다.
“그 이름은…제가 알기로는 분명.”
“그래. 거인왕 아간투스베록. 그자다.”
“마, 말도 안 됩니다. 그분이 어찌.”
어디서 인지부조화가 일어난 것일까. 거인왕이 이곳에 와 있다는 것? 아니면 그가 크렘보르의 여식을 습격했다는 것? 어느 쪽이든 간에 보울룬이 보이는 반응은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그의 신앙심과는 별개로, 그는 어쨌거나 신전에서 교육받고 선택 받은 자로서 인정까지 받아 이 자리에 오른 인사였으니까 말이다.
“사실이다. 밖에 알려져서 좋을 것이 없어 그간 비밀로 해왔지만, 지금 이 땅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이 그자와 연관이 있지.”
군터는 아직도 어안이 벙벙해 있는 보울룬에게 거의 모든 것을 말해주었다. 이 땅에 아간투스베록이 찾고 있는 무언가가 있으며, 그가 그 무언가를 손에 넣기 위해 이 땅에 혼란을 일으켰다는 것. 그리고 그 이유가 일찌감치 헤이모라에 와 있던 줄카를 견제하기위함이었다는 것까지.
이야기가 이어지는 동안 보울룬의 낯빛이 수시로 바뀌었다. 눈을 크게 뜨기도 했고, 찌푸리기도 했으며, 아예 질끈 감기도 했다.
군터의 이야기가 끝난 이후에도 보울룬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군터도 보울룬의 심정을 대충 짐작했기에 재촉하지 않고 가만히 기다렸다.
잠시 후. 보울룬이 긴 한숨을 내쉬며 눈을 떴다.
“다른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했더라면 믿지 않았을 것입니다.”
군터가 보울룬을 택한 또 하나이의 이유. 그건 보울룬이 품고 있는, 기이할 정도로 굳건한 충성심을 알아보았기 때문이다.
“장군의 말씀을 믿겠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해야 할 일은 아간투스베록…전하로부터 아가씨를 구해오는 일이로군요.”
“무리하지 마라. 구할 수 있다면 물론 구해야겠지. 하지만 어렵다 싶으면 행방만 파악해도 좋다.”
보울룬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서 하는 말이 아니었다. 어차피 이미 아간투스베록이 실비아를 붙잡았다면, 거기서 보울룬이 뭔가 해주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이 싸움은 두 분 전하의 싸움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렇다면 줄카 전하께서는…….”
“거기까지는 신경 쓸 필요 없다. 그자는 자신의 뜻대로 알아서 움직일 테니.”
“알겠습니다. 그러면…바로 출발하겠습니다.”
“그래.”
할렌의 기억 속에서 봤던 지형. 군터는 그 약간의 정보를 토대로 실비아 일행이 습격당했으리라 추측되는 곳을 몇 곳 추릴 수 있었다.
“서두르지 마라. 최대한 신중히, 조심스럽게 움직이도록.”
“명심하겠습니다. 그럼.”
군터로부터 그가 추린 곳들을 전해들은 보울룬은 그의 수하들과 함께 그날 바로 솔롬을 떠났다.
* * *
사실 보리스는 로우렌으로부터 짤막하게 이야기를 들은 후, 그 일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그러니 당연히, 나짐이라는 술사에 대해서도 까맣게 잊고 있었고.
그렇기에 그는 드물게 난처한 얼굴을 한 로우렌이 도움을 청했을 때도, 나짐이라는 이름을 다시 들었을 때도 잠시 기억을 더듬어야 했다.
“보아하니 네 말재주가 통하지 않았던 모양이구나.”
“쉬울 거라 생각했는데 생각 외로 완고한 부분이 있더군요. 제 불찰입니다.”
로우렌이 아무런 변명 없이 제 잘못을 인정하는 일은 드물었다. 그가 쓸데없이 자존심이 강해서가 아니라, 애초에 경솔하게 실수를 저지르는 일이 적기 때문이다.
그것을 잘 알고 있던 보리스는, 로우렌을 난처하게 만든 나짐이라는 술사에 대해 호기심이 생겼다. 완고한 부분이 있다고?
“그래. 내가 뭘 해줘야 하지?”
“그자를 한번 만나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아무래도 저 같은 무명이 하는 말에는 무게가 실리지 않는 모양이라서 말이지요.”
솔롬의 관계(官界)에서 로우렌의 이름은 제법 유명한 편이었다. 할렌의 둘째 아들로서든, 보리스 크렘보르의 심복으로서든. 유명인이라고 할 수는 없어도, 무명이라 할 정도는 결코 아니었다. 높은 곳에 눈과 귀를 열어두는 이들 사이에서라면 더더욱.
보리스는 로우렌의 말장난을 한 귀로 흘리고 나짐이라는 술사에 대해 물었다. 이전까지는 기억할 생각도 없었던 이름이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외지에서 흘러 들어온 술사입니다. 젊다는 점을 제외하면 딱히 눈에 띄는 점은 없던 자입니다. 장군께서 직접 데려다 쓰시기 전까지는 특별히 어울리는 이들도 없었던 듯하고 말이지요.”
젊은 술사라는 점에서 유망한 인재라고 볼 수 있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나짐이라는 술사는 특별함과는 제법 거리가 있는 자였다. 그랬던 그가 특별한 존재가 된 것은 군터 크렘보르의 부름을 받은 이후였다. 정확히는 그가 군터 크렘보르의 부름을 받아 그 모페이브 공과 함께 무언가를 했었다는 사실이 알음알음 알려진 이후.
“무명이었던 자가 부름을 받았다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던 거겠지.”
“예. 하지만, 아직도 그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내가 필요하다는 것이 그 부분에 대해서인가?”
“겸사겸사지요. 공자님의 권위로 그자를 설득해주십시오.”
“네가 보기에 그자가 도움이 될 만한 자 같더냐?”
“기대중입니다.”
“기대?”
“어차피 손해볼 것은 없지 않습니까.”
보리스는 얄밉게 싱글거리는 로우렌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피식 웃고 말았다. 저 얼굴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었다. 후에 자신이 솔롬의 성주가 되고, 그보다 높은 곳에 이르게 된다고 해도 이 녀석만은 그때도 지금과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그래. 그렇지. 그자에 대해서 조사한 것이 더 있나?”
“물론이지요.”
로우렌의 일처리가 꼼꼼하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번에 나짐에 대해 조사한 내용은 그런 보리스조차 놀랄 정도로 세밀했다. 그가 솔롬에 온 이후의 행적은 물론, 그 전의 행적까지 조사되어 있었다.
“어려운 자 같지는 않은데.”
로우렌의 꼼꼼함 덕분에 보리스는 나짐이 어떤 자인지 알 수 있었다. 조사에 틀린 내용이 없다는 전제 하에, 이 나짐이라는 자는 상당히 알기 쉬운 자였다. 출세욕과 재물욕. 그리고 그 외에 탐할 수 있는 것은 다 탐하는, 전형적인 욕심 많은 인간상이었다. 거기에 어느 정도의 능력이 뒷받침된다는 점이 조금 특별하다면 특별한 점이었고, 그 외에는 눈여겨볼 만한 부분이 없었다.
그렇기에, 보리스는 로우렌이 나짐을 구슬리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 내용은 로우렌이 직접 조사한 것일 테니 나짐이라는 인간에 대해서도 지금의 자신 이상으로 잘 파악했을 터. 그런데 어째서…….
“그의 비밀이 그만큼 대단한 것이라는 뜻 아니겠습니까. 제 이름값 정도로는 넘길 수 없을 만큼.”
“흐음.”
“날은 언제로 잡으면 되겠습니까?”
“길게 끌 필요 있겠느냐.”
그리하여 다음날 저녁. 보리스는 일반적인 술사들보다 훨씬 푸짐한 체구를 지닌 젊은 술사와 마주 앉았다.
* * *
술사 나짐은 아직도 지금의 상황이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째서?’
어떻게 이 자리까지 오게 된 것인지는 대충 이해했다. 보리스 크렘보르의 심복인 로우렌이라는 자와 이야기를 나눈 것이 바로 얼마전이었으니, 보리스 크렘보르가 자신을 부른 것 역시 같은 이유에서가 아니겠나. 그렇게 보면 로우렌이라는 자를 보내서 자신을 떠본 것 역시 보리스 크렘보르의 생각이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래. 거기까지는 알겠다. 하지만 그래도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왜 보리스 크렘보르가 그 일에 이렇게 관심을 두느냐였다.
‘너무 입을 놀리고 다녔나?’
그 일을 마치고 난 후. 한동안 그는 입조심을 하고 다녔다. 괜히 가볍게 행동하고 다니다가 그 무시무시한 장군의 눈 밖에 나고 싶지는 않았기에.
하지만 무명의, 그것도 지닌 재주를 함부로 보이고 다닐 수도 없는 술사 나부랭이에게는 한계가 있었다. 결국 나짐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이 장군의 명으로 모페이브 공과 함께 연구를 했었다는 이야기를 넌지시 흘리고 다녔다. 문제가 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구체적인 연구 내용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효과는 있었다. 곧 그는 무명의 애송이 술사가 아니라 재능 있고 젊은, 전도유망한 술사로 대접받을 수 있었다. 간혹 무슨 연구를 했는지 조심스럽게 캐묻는 이들도 있었지만 그때마다 장군을 언급하며 단호한 태도로 거절했다. 적당한 사과의 말도 덧붙이면서.
그걸로 충분했다. 가끔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이들도 있었지만 질투에 눈이 먼 얼간이들이라 여기며 무시했다. 어차피 의심하는 시선보다는 호의와 선망을 담은 시선이 더 많았다.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그래서 나짐은 자신이 이 정도로 입을 놀리고 다니는 정도는 장군도 용인해준 것이라고, 지금까지는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부름을 받다니? 그것도 장군이 아닌 그의 아들, 아니 후계자에게?
“그래. 나짐. 유망한 술사라고 들었다.”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허명일 뿐입니다.”
“그래? 다른 이들은 그리 생각하지 않는 것 같던데.”
“…….”
크렘보르의 후계자에 대해서는 꽤나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부친을 꼭 닮아 얼굴의 솜털이 가시기 전부터 적의 피를 보고 다녔다던가, 평소에는 너그럽지만 한번 심사가 뒤틀리면 상대가 누구든 고개를 조아리게 만든다던가.
돌아다니는 말들이야 흘려들어야 할 것이 반에 듣지 말아야 할 것이 반이라지만, 그 숱한 이야기들이 공통적으로 짚는 내용은 크렘보르의 후계자가 보통 성미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참고 정도는 할 만하다고 봐도 되지 않겠는가.
그리고 지금. 직접 독대를 하고 있으니 알 것 같았다.
‘아비의 피를 아주 제대로 이었군.’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마주한 사람의 피를 자연스럽게 말린다는 점에서 이들 부자는 확실히 닮은 구석이 있었다.
“혹, 우리가 전에 만난 적이 있던가? 왠지 모르게 자네의 얼굴이 눈에 익은 것 같아서 말이야.”
“예. 한 번 뵌 적이 있습니다만, 스치듯이 잠깐 뵌 것이라 기억하지 못하시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래? 그래도 미안하군. 이해 하게나. 내가 기억력이 그리 좋지 못해서.”
“어인 말씀을.”
의미 없이 흐르는 가벼운 대화. 나짐은 긴장의 고삐를 더 강하게 당겼다. 그간의 경험상, 이런 말이 오간 후에는 보통.
“그래. 성주님의 명을 받아 모페이브 공과 함께 연구를 했었다고?”
“그…예. 그렇습니다. 함께 했다고 하기는 뭐하고, 모페이브님의 옆에서 그분의 수발을 든 정도였지요.”
“무슨 연구였나?”
나짐이 마른침을 삼켰다. 그의 본능이 위험하다고, 신중해야 한다고 비명을 질렀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말씀드리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니라, 장군께서 엄명을 내리셨습니다. 그때의 일에 대해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비밀을 지키라고 말입니다.”
“그래? 이상하군. 그렇다면 내가 이 이야기를 어찌 알고 있겠나?”
보리스의 눈이 날카롭게 변했다. 그 살벌한 눈초리에, 나짐의 살찐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무례는 용서하지. 하지만 무례는 용서해도, 나를 기만하는 것은 그냥 넘길 수 없어. 자네는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나?”
“고, 공자님.”
“공자님이라.”
무릎이라도 꿇을 것처럼 허둥대는 나짐을 보며, 보리스가 헛웃음을 머금었다.
공자님이라. 얼마 전까지 그는 성주라 불렸지만, 그 전에도 그를 공자님이라고 부르는 이들은 드물었다. 오직 그와 마음을 터놓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이들만이 그를 공자님이라 부를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 처음 본, 아니 본인의 말에 따르면 이전에 스치듯이 한 번 본 것이 전부인 놈이 자신을 공자님이라 부른다. 저것이 공경의 의미일까?
‘그럴 리 없지.’
크렘보르의 후계자. 크렘보르의 도련님.
아직도 많은 이들이 자신을 이름 없는 ‘공자님’으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아주 자연스럽게 말이다.
“그게 아니라면 말해라.”
보리스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지로 감추며 차분함을 연기했다. 그래도 여전히 이 돼지 같은 놈의 얼굴은 피가 다 빠진 고깃덩어리마냥 창백했다.
“당장.”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