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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983화 (983/1,064)

983화

할렌의 영혼은 특별했다. 특별함으로 따지면 영혼 감옥에 거둔 영혼 중에서도 독보적이었다. 심지어 이가로프조차 비교할 수 없었다.

할렌은 군터가 아끼던 수하였다. 그의 영혼은 군터가 직접 거둔 것이었으며, 그의 영혼에는 군터의 힘이 일부나마 깃들어 있었다. 게다가 영혼 상태로 그냥 놔둔 것이 아니라 직접 깃들 만한 육체를 마련해주기까지 했다. 할렌의 영혼 자체는 본래 특별한 구석이 없는 평범한 것이었으나 군터에 의해 특별해졌다.

할렌의 영혼에서 손쉽게 기억을 읽을 수 있었던 것도 그래서였다. 할렌의 영혼은 군터에게 속해 있는 것이기에. 영혼 감옥 속의 다른 영혼이 그의 손에 들린 도구와 같다면 할렌은 그의 살점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군터가 원한다면 그는 할렌의 모든 기억을 읽을 수 있어야 했다. 그런데 그가 읽을 수 있었던 기억은 아간투스베록과 마주했던 마지막 순간뿐이었다.

‘영혼이 상처 입었기 때문이겠지.’

할렌의 영혼이 온전치 않기 때문에. 그것 말고는 달리 생각할 수 있는 이유가 없었다. 할렌의 영혼이 회복되면 그로부터 더 온전한 기억을 얻을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그렇게 되기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모른다.

할렌이 기억하는 마지막 순간. 아간투스베록은 할렌의 영혼을 억지로 취하려 들었다. 그 때문에 그렇지 않아도 상태가 좋지 않았던 할렌의 영혼이 감당하기 힘든 상처를 입고 말았다.

회복할 수 있을까? 할렌의 영혼은 여전히 금방이라도 흩어져 사라질 것 같이 희미했다. 영혼 감옥 깊숙한 곳에 방치해두는 것 외에 군터가 손쓸 수 있는 부분은 없었다. 그는 영혼을 도구처럼 사용하는 데는 제법 익숙했지만, 상처 입은 영혼을 보듬거나 치유할 줄은 몰랐다.

[장군. 용과 손을 잡을 생각인가.]

군터의 분노가 적어도 겉으로는 가라앉자, 그때까지 침묵하고 있던 이가로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래야겠지.]

결국 줄카가 말했던 대로 되었다. 아간투스베록은 누가 적이 되어도 상관없다는 듯이 오만하게 굴었다. 지금까지는 그래도 아무 문제없었는지 모르지만, 이번만큼은 아니다. 그는 자신이 한 일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되리라.

* * *

“송구합니다. 마땅히 제가 먼저 찾아 뵈었어야 했는데.”

차가운 무언가가 손등에 떨어지고 나서야 카인은 자신이 식은땀을 흘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분명 추태지만 조금도 부끄럽지 않았다. 누구라도 이 자리에 있었다면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을 것이기에.

[갑자기 소식이 끊겼지. 네 짓이었나?]

이런 상황이 닥치더라도 당황하지 않겠다고 몇 번이나 다짐했었다. 그런데도 지금, 선뜻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마치 누가 목줄을 틀어쥐고 있는 것처럼.

상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알고 있다. 이건 그저…두려움이다. 본능적인 두려움. 자신이 겁쟁이라서가 아니다. 말 그대로,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몸이 떨린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유일하게 자유로운 입이 카인 자신도 놀랄 정도로 천연덕스럽게 움직였다.

믿는가? 믿지 않는가? 겉으로 보이는 것만으로는 전혀 짐작할 수가 없다. 흥미롭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며 입꼬리를 말아 올리지만,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안다. 진정한 초월자들은 미물에게 감정을 품지 않는다. 미물이 무엇을 하든, 그들의 눈에는 무가치하게 보일 뿐.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떻게 행동할지. 그런 것은 절대 함부로 예측해서는 안 된다. 그런 시도조차 위험하다.

[그래.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지. 어찌됐든 결국 손에 넣었으니.]

그가 손을 뻗었다. 거대한 손은 허공에서 멈췄으나, 그 손끝이 이쪽을 향한 것만으로도 다리에 힘이 풀리고 균형을 잡을 수가 없었다.

[우선은 그 혀부터 뽑겠다. 물론 사지도 잘라야겠지. 그런 후에 불로 지지면 돌아갈 때까지는 버틸 수 있을 터. 아주 좋군.]

살의. 그 어떤 악의도 없는 살의가 폭풍처럼 몰아친다.

* * *

멈췄던 손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함과 동시에, 카인이 필사적으로 입을 뗐다.

“물론 그러실 수 있을 겁니다. 당신에게는 아주 간단한 일이겠지요.”

다가오는 손은 멈추지 않았다. 그래도 다행히 한 번 열린 입은 다시 활발히 움직여주었다.

“당신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느낄 수는 있습니다. 이 몸에 깃들어 있는 무언가.”

[그래.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음. 원주인이 아니라서 가능한 모양이군.]

“역시 알고 계셨습니까?”

[바보 같군. 당연히 한눈에 알아보았지.]

“그렇다면 제가 제 스스로 이것을 없애버릴 수 있다는 것도 아시겠군요.”

우뚝!

보란 듯이 느릿하게 다가오던 손이 멈췄다. 카인은 그제야 숨을 쉴 수 있었다. 그래봐야 한계까지 억눌렀던 것을 한 차례 토했을 뿐이지만.

[없앤다고?]

“이 몸을 살려 두셔야 할 이유가 있겠지요. 이 안에 깃든 것을 이 자리에서 바로 꺼내실 수는 없는 거겠지요.”

[재미있군.]

먹혔는가? 카인은 여전히 확신할 수 없었다. 상대의 태도가 조금 변한 것 같기는 하지만, 여전히 아무것도 읽을 수 없었다. 그래도 그가 당장 혓바닥을 뽑으려 들지 않는 것만은 다행이었다. 혀를 뽑힌다면 더는 이렇게 필사적으로 주절대지도 못할 테니까.

[가능하리라 보느냐? 내가 허락하지 않는 한, 너는 네 뜻대로 살 수도 죽을 수도 없다.]

“저는 가능하리라 봅니다. 하지만 당신께서 그리 생각하지 않으신다면, 그럴 수도 있겠군요. 한번 확인해 보시겠습니까?”

카인은 답이 없는 상대를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바라보려 노력했다. 하지만 치미는 초조함과 두려움은 숨기려 한다고 해서 숨겨지지 않았다.

아간투스베록은 그가 이 몸의 원주인이 아니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보았다고 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는 모른다. 전생술(傳生術)에 뭔가 문제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 신비로운 술법에 대해서는 사실 그도 모르는 부분이 적지 않았다.

‘유일한 희망은 저자가 전생술에 대해 알지 못할 경우.’

까마득한 옛날부터 비밀스럽게 내려온 힘이라고 했다. 신비롭기 그지없는 힘인 데다, 익히기도 힘들어 계승자가 나타나지 않아 지식으로만 이어진 경우도 많다고 들었다.

그렇다면 저 초월적인 존재도 이 신비로운 술법에 대해 모를 가능성이 있다. 안다고 해도 제대로 알지 못한다면, 그래서 약간의 꺼림칙함만이라도 느끼게 된다면…….

‘이 몸에 깃들어 있는 것. 그건 저자에게 있어 상당히 중요한 것임이 분명해. 내 운명을 바꿀 수 있는 기회라는 것은 틀림없이 지금 이 순간을 말한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의 인생은 이 순간만을 위해 달려온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카인, 아니 카인의 몸을 차지한 레온은 각오를 다졌다. 그가 의지를 세우자 영혼마저 위축시켰던 두려움이 조금은 가시는 듯했다.

[재미있군.]

운명의 기로. 거대한 손은 더 다가오지도, 물러서지도 않았다.

[그래.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냐? 살려달라?]

통했다.

주저앉으려는 다리에 억지로 힘을 주고 허리를 폈다. 당당하지는 않더라도 비굴하게 보이지는 않도록.

“이 몸에 당신께서 원하시는 것이 있으니 몸은 당신께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그 전에 제 부탁을 들어주십시오.”

[부탁이라.]

“부와 권세. 명예. 이 땅의 어떤 인간보다 높은 곳에 오를 수 있기를 원합니다.”

[하찮은 것이 하찮은 것에 목을 매는군. 너희 족속들이 원하는 것이 대개 그런 것뿐이기는 하지만.]

멈춰 있던 손이 제 자리로 돌아갔다. 동시에 세상을 가득 채운 듯했던 살의가 거짓말처럼 한순간에 사라졌다.

[좋다. 그 소원을 들어주지.]

“감…….”

긴장과 두려움, 그 외 온갖 것들로 굳어 있던 얼굴에 마침내 핏기가 돌아오던 순간.

푸욱!

번개처럼 뻗어 나간 무언가가 카인의 왼쪽 가슴을 찔렀다. 부드러운 모래속을 파고들듯이, 빠르고 자연스럽게.

“커흑!”

[걱정 마라. 이미 내가 네 그 하찮은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하지 않았느냐.]

“이, 이건…….”

[지금 가져가지는 않는다.]

손가락 하나. 가슴을 찌른 것은 고작 손가락 하나였다. 하지만 그 손가락 하나는 가슴을 파고들어 심장을 꿰뚫었다.

[그래도 할 건 해야지.]

파고 들어올 때처럼 나갈 때도 거침이 없었다. 레온은 자신도 모르게 왼쪽 가슴을 더듬었다. 분명 저 무지막지한 손가락이 가슴을 뚫고 심장을 찔렀건만 상처 하나 만져지지 않았다. 피도 흐르지 않았고.

[너는 뱀이로구나. 바닥에서 꿈틀댈 운명이지만, 때때로 거목의 꼭대기까지 기어오르기도 하지. 네놈은 어디까지 오를 수 있는지 보겠다.]

조소다.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분명하게 느껴졌다.

‘그래도 좋다.’

초월자의 입장에서 보면 권세니 재물이니 하는 세속적인 가치 따위는 별 것 아닐 것이다. 하지만 평범한 사람이 초월자를 이해하지 못하듯, 초월자 역시 평범한 사람을 이해하지 못한다.

‘일단은 지켜보겠다고 하지 않았나.’

어디까지 오를 수 있는지 보겠다고 했다. 보겠다는 것은 건들지 않겠다는 뜻 아니겠나. 적어도 지금 당장은 말이다. 일단은 그것으로 족하다.

‘상당히 꼬였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풀어낸 건가.’

이래서 이곳으로 돌아오고 싶지 않았다. 본래의 계획은 이게 아니었다. 용살자와 거인왕. 두 초월자가 상잔하는 동안 이 땅의 혼란이 심해지면 그 틈을 타 차근차근 일을 진행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실비아 크렘보르의 고집이 모든 것을 뒤틀었다.

‘아니. 거기까지는 괜찮았다.’

원인은 맞지만 문제는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했기에 어쨌거나 순순히 이곳에 돌아온 것이다. 진짜 문제는 거인왕의 집요함과 힘이 예상 이상이었다는 점이다.

설마하니 이렇게 갑작스럽게, 그것도 눈앞에 나타날 줄이야. 거인왕이 모습을 드러냈을 때 가장 크게 놀랐던 이는 앞서가던 병사가 아니라 그의 출현을 눈치챈 레온 자신이었다.

‘결국, 내 오만이 이 모든 것을 초래했다.’

모든 것을 통제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초월자를 뜻대로 다룰 수 있을 거라 착각하면서, 실은 매순간 칼날 위를 걷고 있었다는 것조차 알지 못했다.

하지만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은 것. 그래도 틀어진 것을 어느 정도는 돌려 놓았으니 앞으로의 일만 생각하면 될 것이다.

“이곳에는 당신의 적이 있지요. 당신의 힘을 의심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괜찮으시겠습니까?”

레온은 이 말이 자칫 거인왕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뜻밖에도 거인왕은 전혀 개의치 않는 듯했다. 그러기는 커녕, 오히려 즐거워 하는 기색이었다. 물론 조심스러운 추측일 뿐이었다.

[문제없다. 내가 이곳에 직접 온 것도 그 놈과 결착을 짓기 위함이니.]

거인왕이 걸음을 옮기자 그의 앞에 있던 모든 것들이 뒤로 물러났다. 짐승은 꼬리를 말았고, 괴물은 울음을 멈췄다. 살아있는 것들이 발하는 두려움이 눈에 보이듯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러고보니 그 녀석.]

“예?”

[내게서 도망쳤던 그 녀석. 누구의 수하더냐.]

레온은 거인왕이 누구를 말하는 것인지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가 아는 한, 거인왕에게서 도망친 자는 없었던 것이다. 혹시 실비아 크렘보르를 말하는 것은 아닐 테고.

하지만 그자가 누구인지 모른다고 해서 그가 누구의 수하인지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군터 크렘보르입니다. 총독은 아니나, 이 땅의 지배자라고 해도 무방한 실력자지요.”

[들어본 적 있는 이름이군.]

콰득! 콰드득!

걸음을 옮기는 거인왕의 몸이 굉음에 가까운 소리를 내며 연신 뒤틀렸다. 그러는 동안 그의 몸은 계속해서 형태를 바꿨다. 몸이 작아지고 커지는 것은 예사였으며, 심지어 팔이 네 개로 늘어나기도 했다. 보고 있으면서도 어떻게 저럴 수 있는 것인지 경악스러울 정도였다.

‘저건…….’

매순간 형태를 바꾸는 거인왕을 멍하니 바라보던 레온은, 어느 순간 무언가를 목도했다.

처음에는 착각인가 싶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육신이 계속해서 형태를 바꾸는 동안에도, 그것은 그 어떤 움직임도 없이 그 자리에 존재했다.

[보이느냐?]

어딘가에서 메아리치는 물음. 레온은 자신이 훔쳐보던 그것이 어느새 자신을 바라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것은 거대했다. 보고 있으면서도 전체를 볼 수 없었으니 거대하다고 밖에는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그것은 사람의 형상 같기도 했고, 심심한 하나의 덩어리 같기도 했다. 그 모습을 파악하려 노력하던 레온은 한순간 그런 노력이 아무 의미도 없는 것임을 알았다. 그는 저것을 알기에는 너무도 미미한 존재였다.

[영안이 열린 거다. 보려고 노력하지 마라. 불에 가까이 간 벌레가 타 죽기밖에 더하겠느냐.]

메아리가 사라지고, 레온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다시 떴다. 변화를 멈춘 거인왕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 주변으로 신기루 같은 무언가가 희미하게 보이는 듯도 했으나, 일부러 집중력을 흐트러뜨리자 더는 보이지 않았다.

“어디로 가십니까?”

[놈은 혼자가 아니다. 하지만 나는 혼자지. 그러니 이쪽도 군대가 필요하지 않겠느냐.]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는 거인왕의 뒤로, 거대한 괴물 몇 마리가 조용히 따라붙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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