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터-982화 (982/1,064)

982화

언약비. 그것은 계약의 증표였다. 황제의 힘과 계약자들의 언약이 합쳐져 만들어진.

그것의 존재를 아는 이는 극히 드물었다. 당시에는 계약의 당사자인 황제와 군주들이 전부였으며, 후에 우연히 비밀을 알게 된 이들이 몇 생기기도 했으나 그 비밀이 그들의 입에서 새어 나가는 일은 없었다.

황제가 신의 사도가 되어 일어났을 때 그의 추종자들이 스스로 황제의 곁으로 모여들었다. 그 추종자들이 바로 군주들이며, 그들은 헌신의 대가로서 초월적인 힘을 하사 받았다. 그들은 신의 뜻을 받들며, 황제에게 영원한 충성하고 제국을 수호한다.

…세상에 알려진 내용은 이러했다. 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거짓투성이지.]

스스로 모여들었다? 영원한 충성? 모두 거짓이다.

[우리는 모두 목줄이 매인 개일 뿐이다.]

사연이야 제각각일 테지만, 그들 가운데 황제에게 충성하는 이는 하나도 없다 단언할 수 있었다. 충성은커녕, 황제를 증오하지 않는 이조차 없었다. 논한다면 그 증오의 크기를 논해야 하리라.

[황제는 우리에게서 자유를 앗아갔지. 그렇기에 언약비를 되찾는다는 것은 잃어버린 자유를 되찾는다는 것이며, 온전한 존재로 거듭난다는 의미다.]

[너무 거창하군.]

[아니. 덜하면 덜했지 더하지는 않았다. 너는 모른다. 언약비가 어떤 것인지. 당사자가 되어보지 않는 한 결코 알 수 없지. 그것을 손에 넣을 수만 있다면 우리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

[그럼 어째서 이제껏 찾지 않았나.]

[몰랐으니까.]

피처럼 붉은 두 눈이 보석처럼 빛나고, 불처럼 타올랐다.

[황제도 알았다. 우리가 그것을 얻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것을. 때문에 놈은 언약비를 누구도 찾을 수 없도록 숨겨두었지. 그렇기에 지금까지 포기하고 있었던 거다. 그런데.]

[지금 그것이 나타났다는 건가.]

[그래. 그런 것 같다. 아니. 틀림없이 그렇겠지.]

[그렇다면 당신과 아간투스베록이 그 언약비를 두고 다투는 건가?]

[만약 정말 이 땅에 언약비가 나타난 것이라면 그건 놈과 묶인 것일 거다. 놈은 내가 훼방을 놓을 것을 알고서 선수를 친 거겠지.]

[언약비가 하나가 아니란 말이군.]

[그래. 최소한 우리의 수만큼은 존재한다.]

줄카는 군터가 제국의 비사에 그리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럴 만도 했다. 자신이라도 그러했을 것이다. 이런 자잘한 이야기 따위야 아무려면 어떻다는 말인가. 아무리 대단한 사연이 있다 한들 당사자가 아닌 이상 공감할 수도, 그럴 이유도 없는 시시한 잡설일 뿐이다.

.[네 도움이 필요하다.]

[의외로군.]

[음?]

[당신이라면 홀로 아간투스베록을 베고 싶어할 것 같았다.]

그 담담한 말에 줄카는 실로 오랜만에 그의 감정을 온전히 드러냈다. 기쁨. 그리고 즐거움. 누군가에게 나 자신을 온전히 이해 받는다는 것은 그만큼 가치 있는 일이었다.

[그래. 그럴 만한 상황이 된다면 그리할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번은 그렇지가 않아. 내 적은 하나가 아니기 때문이지.]

[상대해야 할 적이 하나가 아니라는 말인가.]

[말했듯이 황제가 직접 언약비를 숨겼다. 누구도 찾을 수 없도록 철저하게. 그런데 그렇게 숨겨두었던 것이 황제가 사라졌다지만 갑자기 이렇게 나타났다고? 게다가 공교롭게도 그것이 그 멍청한 놈의 것이라니.]

배후에서 일을 꾸미는 자, 혹은 세력이 있다. 이는 충분히 합리적인 의심이었으며, 줄카는 그게 누구인지도 알 것 같았다.

[키리스트라고 생각하는군.]

[우리는 서로의 적이나 마찬가지지. 손을 쓸 수 있다면 망설이지 않을 것이다. 하물며 남의 손을 빌려 그리할 수 있다면 더더욱. 그래. 나는 확신한다. 왜냐하면 나라도 그랬을 테니까.]

[그렇다고 해도.]

군터와 줄카. 둘의 관계는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 대등한 존재로서 서로를 인정하고, 한편으로는 가벼운 호승심을 느끼기도 했다.

[내가 나서야 하는 이유는 되지 않는군.]

그들은 적이 아니었다. 하지만 친구도 아니었다. 나쁘지 않은 관계라고 해서 꼭 좋은 관계라고 할 수는 없는 법. 둘의 관계가 딱 그러했다.

아직까지 군터는 아간투스베록에게 특별히 적의를 갖지는 않았다. 대적해야 할 상대라는 확신에 가까운 강한 예감을 느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예감일 뿐이었다.

[서두르지 마라. 곧 알게 될 거다.]

[무슨 뜻인가.]

[네가 나설 마음이 없더라도 나서게 될 거라는 뜻이지. 그때는 준비가 되어 있었으면 좋겠군.]

감긴 눈의 형상이 허공에 다시 나타나고, 줄카는 나타날 때처럼 신비롭게 사라졌다.

군터는 줄카가 남긴 말을 한번 곱씹었으나 마음에 담아두지는 않았다. 줄카의 말처럼 일이 흘러가든 그렇지 않든, 어차피 그가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위험을 배제하고 혼란을 가라앉히는 것. 그러는 와중에 아간투스베록이나 다른 적과 부딪치게 된다면 그때 가서 대처하면 그만이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그 생각대로 되었다. 하지만 그 시기는 그가 막연히 예상했던 때보다 훨씬 빠르게 다가왔다.

* * *

솔롬에 돌아온 후. 군터는 곧장 성주 대리직을 맡았던 보리스에게 그간의 일들을 보고받았다. 급히 처리해야 할 일들(주로 군사적인)을 처리하고, 동시에 성주 대리로서 부족함 없이 일을 처리해온 보리스의 공을 치하했다.

그것이 후계자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한 요식행위라는 것을 알 만한 이들은 다 알았으나,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더 열렬히 크렘보르의 젊은 후계자를 칭송했다.

“무대 위의 광대가 된 기분이군.”

보리스는 자신을 주인공으로 한 이 우스운 연극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피할 것도,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차라리 즐기시지요.”

“말은 언제나 쉽지.”

“공자님. 순진함은 이제 그만 덜어내시지요.”

“뭐?”

보리스가 사나운 눈으로 로우렌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어지간한 사람은 절로 몸을 움츠릴 법한 눈빛을 마주하고서도 로우렌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사실 다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알면서도 볼멘소리를 늘어놓는 것은 아이의 칭얼거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

“장군께서는 공자님을 위해 충분히 힘을 써주고 계십니다. 대가 없이 주어지는 것은 괜히 툴툴대지 말고 그냥 감사히 받으십시오.”

“네놈이 날 가르치다 못해 조롱까지 하는구나.”

내용에는 날이 섰지만 보리스의 표정은 어느새 평소처럼 풀려 있었다. 애초에 금방 로우렌을 죽일 듯 노려봤던 것도 진심이 아니었기에 분위기가 바뀌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솔직히 말씀해 보시지요. 이번에는 뭐가 또 걸리십니까.”

“걸리는 것은 없다. 그저…나 자신이 보잘것없고 무력하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보리스의 조용한 고백에 로우렌이 한숨을 내쉬었다. 짐작했던 대로였다. 이 혈기왕성한 공자님은 세상의 꼭대기에 선 이들을 보며 또 한번 가슴을 태우고 있었던 것이다.

“이 도시의, 아니 이 판니른의 거의 모든 이들이 공자님을 보며 비슷한 생각을 할 겁니다.”

“위로 봐도 끝이 없고 아래로 봐도 끝이 없다는 말을 하려는 거냐.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라고 말이다.”

“아니면 어쩌시겠습니까?”

“…….”

보리스가 침묵하자, 가만히 그를 지켜보던 로우렌이 넌지시 입을 열었다.

“사실, 방법이 없지는 않지요.”

“뭐라고?”

“큰일이 이루어지려면 그만한 계기가 필요한 법 아니겠습니까.”

“또 무슨 소리를 하려고…….”

“실은, 제가 그곳에서 챙긴 것이 있습니다. 공자님께 말씀드리려 했습니다만, 당시에는 듣는 귀가 많아 그럴 수 없었지요.”

로우렌이 품속에서 주먹보다 조금 큰 크기의 주머니 하나를 꺼냈다.

“그건.”

“그곳에 갇혀 있었던 존재. 그의 유해 내지는 잔해 정도 되겠군요. 일전에 술사들에게 신비로운 존재의 유해 같은 것은 일부라 할지라도 큰 가치가 있다고 들은 적이 있어서 말입니다.”

“…그렇다고 치고, 그게 네가 말한 그 방법이라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지?”

“나짐이라는 술사를 기억하십니까?”

“음?”

낯설지만 또 한편으로는 어딘가 귀에 익은 것 같기도 한 이름. 보리스가 한동안 기억을 더듬다가 눈을 가늘게 좁혔다.

“내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모페이브님과 함께 무슨 연구 같은 것을 함께 했던 자가 아니냐.”

“예. 맞습니다. 당시 장군께서 일개 술사를 따로 쓰시는 것을 알고서 이상하다 생각했었지요. 해서 그자에게 접근했었고, 대충이나마 그자가 무슨 일을 했었는지 알게 됐습니다.”

“그게 네가 말한 것과 관계가 있는 모양이구나.”

“아직은 짐작이고, 기대일 뿐입니다. 구하기 쉽지 않은 물건일 터인데, 최대한 가치 있게 쓸 수 있다면 좋지 않겠습니까?”

히죽거리는 로우렌은 재미있는 장난감을 손에 넣은 아이 같았다. 보리스는 그의 손에 들린 주머니를 물끄러미 보다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별 기대는 되지 않지만, 그래. 네 뜻대로 해보아라.”

두 사람이 그런, 나름 비밀스러운 대화를 주고받던 그때. 군터는 그의 집무실에서 가죽을 덮은 석재 의자에 앉아 군수품에 관련된 보고서를 읽고 있었다.

“…….”

누가 본다면 제대로 읽고 있는 것인지 의심할 정도로 휙휙 종이를 넘기던 군터가 갑자기 움직임을 멈췄다. 닫힌 창문을 통해 흐릿한 연기 같은 것이 흘러 들어옴과 동시였다.

[음?]

영혼 감옥 속에서 스스로 잠에 빠져 있던 이가로프도 반응했다.

[이건…….]

그는 어느새 군터의 앞까지 다가온 희미한 무언가를 알아보았다. 모를 수가 없었다. 그 역시도 감옥에 묶인 영혼이었기에.

[할렌.]

군터의 영적인 목소리가 그 희미한 영혼에 닿았다. 그러자 금방이라도 흩어질 것처럼 위태롭게 흔들리던 영혼이 군터의 손 위에 내려앉았다.

[이게 어찌…….]

이가로프가 하던 말을 도중에 끊었다. 거대한 분노. 그가 깃든 영혼 감옥이 통째로 흔들릴 정도로 강하게 일어난 군터의 분노가 그를 침묵케 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보여다오.]

희미해진 할렌의 영혼이 그가 속한 곳으로 힘겹게 들어섰다. 그리고 그 순간, 군터는 할렌이 마지막 힘을 다해 짜낸 그의 기억을 읽었다.

* * *

[미련한 놈. 용감한 것과 무모한 것은 다르다. 네놈이 이런다고 해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아.]

소리는 높은 곳에서 들려왔다. 할렌은 자신이 이 강대한 적을 막아낼 수 없음을 알았다. 처음 그의 말이 들려오던 순간부터.

“…….”

호흡은 가빠지지 않았다. 굳이 숨을 쉴 필요가 없는 몸이 지쳤다고 해서 숨이 거칠어질 리가 없다.

다만 고통은 느껴졌다. 이상한 일이었다. 아무리 영혼이 몸에 잘 녹아 들었다고 해도 이 몸은 기본적으로 죽은 몸이었으니까. 죽은 자가 고통을 느낀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모페이브도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육체에서 느껴지는 고통은 아니었다. 영혼이 깎여 나가는 것 같다고 해야 할까. 할렌은 상대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자신을 없애 버릴 수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우득!

기이하게 비틀린 팔에서 듣기 싫은 소리가 들렸다. 그래도 억지로 무기를 쥐었다. 날 한 쪽이 부서진, 그래서 이제는 외날이 되어버린 양날 도끼였다.

[푸흐흐. 그래. 그것도 좋지. 어디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봐라.]

저자의 말이 맞다. 이것은 만용이다. 하지만 그래도 싸워야 한다.

“…….”

롬바드, 아니 할렌의 눈이 조용히 움직이며 전장을 훑었다. 땅 속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거대한 괴물들. 함께 온 병사들과 동쪽 땅의 전사 절반 이상이 이미 저것들의 뱃속으로 사라졌다. 남은 이들도 제대로 싸우고 있기보다는 죽기 싫어 필사적으로 발버둥을 치고 있을 뿐.

그러나 그들 가운데 여인은 없었다.

[무의미하지는 않다. 그렇게 자위하고 있군. 그렇지?]

그가 한 발을 앞으로 내디뎠다. 그 커다란 발은 정신없이 살코기를 탐하고 있던 외눈박이 괴물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콰직!

병사 둘과 전사 하나의 머리를 통째로 씹어 삼켰던 괴물의 머리가 단박에 무른 흙처럼 뭉개졌다. 할렌은 피와 살점으로 범벅이 된 발을 힐끔 보다가 그 주인의 얼굴을 확인했다.

그 얼굴을 보기 위해 한참이나 고개를 들어야 했다. 사람 둘을 이어 붙여 놓은 것 같은, ‘크다’보다는 ‘거대하다’는 표현이 떠오르는 사내였다.

그는 웃고 있었다.

[재미있군. 그 녀석의 냄새나는 인형보다도 훨씬 나아. 아깝기는 하지만 별 수 없지. 그 몸뚱이를 부순 후에 네 영혼을 취해주마.]

거인.

까마득한 높이에서 내려오는 거대한 철퇴. 그 움직임을 놓치지 않기 위해 집중하며 외날 도끼를 들어올리는데 뜬금없게도 갑자기 그 단어가 떠올랐다.

왜 더 일찍 떠올리지 못했을까. 이렇게 특이한 자가 세상에 얼마나 된다고.

쾅!

뭐, 더 일찍 떠올렸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었을 것 같지만.

[뭐지?]

흐려지는 시야. 끔찍한 고통이 밀려오는 와중, 내내 자신만만하던 소리가 처음으로 변했다. 할렌은 그가 당혹스러워하고 있다고 느꼈다. 그것도 무척이나.

[이건…그래. 그렇군. 당연히 주인이 있겠지. 하지만.]

갑자기 지금까지 느꼈던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될 정도로 끔찍한 고통이 몰려왔다. 동시에 섬뜩한 악의가…….

* * *

“…….”

군터는 그가 들고 있던 서류가 사라졌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아무것도 없이 깨끗한 손을 거둬들이고 슬쩍 아래를 보니, 새까만 재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장군. 무엇을 본 건가?]

이가로프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는 그 어느 때보다 더 긴장하고, 두려워하고 있었다.

“…….”

바닥에 쌓인 재를 지르밟으며, 군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적.]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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