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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981화 (981/1,064)

981화

가슴이 뛴다. 전에는 느껴본 적 없는 불안감. 두려움의 크기로 따지면 전에도 이런 적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때는 이유가 명확했다. 지금 실비아의 가슴을 뛰게 만드는 것은 미지의 불안이었다.

솔롬과 정기적으로 오가던 소식이 끊긴 지가 벌써 보름이 훌쩍 넘었다. 마지막으로 받았던 소식은 도처에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물들이 나타나고, 전에는 본 적 없는 기현상이 여럿 발생했다는 것이었다. 그때도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직감했지만, 설마 이렇게까지 빠르고 심각하게 번질 줄이야.

“콰바텐 마바우라!”

“……!”

뒤쪽에서 들려오는 시끌시끌하고 낯선 언어. 수백이 넘는 이들이 시장바닥의 상인처럼 저마다 주절주절 떠들어댄다. 비록 복색이라든지, 자유롭게 떠들어대는 모양새를 보면 군기를 찾아보기 힘들기는 하지만 저래 봬도 이 땅에서는 나름 힘 깨나 쓰는 전사들이었다. 본가에 힘을 보태기 위해 돌아가는 그녀를 위해 여러 도시국가에서 보내준 전력. 그 성의를 보아, 그리고 한손이라도 아쉬운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기는 했지만…저런 흐트러진 모습을 볼 때마다 슬쩍 후회가 됐다.

“괜찮을까요?”

실비아가 롬바드를 보며 물었다. 그는 여느 때처럼 그녀의 그림자라도 된 양 조용히 그녀의 뒤편을 지키고 있었다.

“예.”

“저를 위로하려고 하는 말은 아니겠지요.”

실비아의 목소리에 힘이 없었기 때문일까. 롬바드는 그답지 말을 길게 가져갔다.

“보여주기 위한 군기는 쓸모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싸워야 할 때 싸울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저들이 그렇다는 말인가요?”

“모릅니다. 다만, 겁쟁이는 없는 것 같습니다.”

실비아는 그걸 어찌 아느냐고까지는 묻지 않았다. 롬바드는 지금 그녀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가장 뛰어난 군인이었다. 그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다. 의심해봐야 나아질 것도 없지 않은가.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아가씨.”

롬바드처럼 그녀의 뒤편에 서 있던 또 다른 사내, 카인이 듣기 좋은 목소리로 그녀를 위로했다.

“아직도 반대하나요?”

“솔직히 말씀드리면…예. 아직도 생각은 같습니다. 상황이 보다 명확해질 때까지 기다리셨으면 합니다.”

실비아가 솔롬으로 돌아가겠다고 했을 때, 카인은 우려를 표하며 반대했다. 그러나 실비아는 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솔롬으로의 귀환을 밀어붙였다.

“매사에 신중해야 하지만, 신중을 기하느라 때를 놓쳐서도 안 된다고 배웠습니다.”

“어느 한쪽에만 치우치지 않도록 균형을 잡고 적절한 판단을 내리는 것. 결정자의 자질이요 덕목이지요.”

여전히 흐트러짐이 없다. 실비아 본인만 해도 생각이 많아져 잠을 설친 탓에 눈 밑에 희미하게 그늘이 졌건만, 카인의 모습은 평소와 전혀 다른 점이 없었다.

“공은 무엇을 원하나요?”

“예?”

카인이 드물게 살짝 당황한 빛을 띠었다.

“나를 따르는 이유 말입니다.”

“아가씨께서 제게 기회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무슨 기회 말입니까.”

“다시 올라갈 수 있는 기회지요. 속물적인 인간이라 실망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물으셨으니 숨김 없이 답하겠습니다. 저는…제가 가졌던 모든 것을 되찾고 싶습니다.”

“가문의 재건 말인가요?”

“일부지요. 이룰 수 있을지, 언제쯤 이룰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차분하게 늘어놓는 말에서 열기가 느껴졌다. 고개를 끄덕인 실비아가 다시 시선을 정면으로 돌렸다.

“공이 나를 돕는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돕겠습니다.”

“과분한 말씀입니다. 아가씨께서 손을 내밀어 주셨을 때부터 저는 끝까지 아가씨를 따르고자 마음먹었습니다.”

듣기 좋은 말이다. 아첨 같지도 않고, 충성스러운 수하의 마음을 그대로 표현한 것 같은.

그런데 왜일까. 전이었으면 흡족하게 느껴졌을 그 말이, 지금은 그리 와 닿지가 않았다. 상황이 상황이기 때문일까. 유치한 만족감 따위에 젖을 여유가 없기 때문에?

길을 재촉하는 실비아의 두 눈에 불안의 빛이 짙어졌다.

* * *

설산을 내려온 군터 일행을 기다리는 이가 있었다. 두꺼운 로브로 전신을 가렸지만 군터는 그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붉은 빛이 도는 눈은 흔치 않을뿐더러, 그 특유의 독특한 분위기와 기운 덕에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더 힘들었다.

“크렘보르 장군. 전하의 전언이 있소.”

그가 후드를 뒤로 넘겼다. 크지 않지만 얼굴까지 다 가리는 투구와 붉은 눈이 완전히 드러났다.

“말하라.”

용아. 줄카의 직속 수하들. 앞에 선 이의 행색을 보아 하니 이곳에서 꽤 오래 기다린 것 같았다. 필시 줄카의 안배이리라.

“전하께서 그대를 만나고자 하시오. 오늘 밤. 그분께서 그대를 찾으실 것이니 빛이 잘 드는 곳에서 기다리시오.”

“그게 다인가?”

“그렇소. 그럼 이만.”

수백이 넘는 인원을 앞에 두고, 짤막하게 제 할 말만 마치고서 돌아서는 병사. 그 당당함은 일개 전령을 마치 뒤에 수백 정도는 거느린 장수처럼 보이게 했다.

“전령이라도 군주의 전령이라 이건가.”

“내색하지 마십시오.”

“그런 것까지 말하지 않아도 된다.”

보리스의 사나운 대꾸에 로우렌이 멋쩍게 웃으며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그의 형, 그라모트가 나직이 물었다.

“몸은 괜찮으냐?”

“아직 불편한 곳이 있기는 하지만…그래도 이제 입 좀 놀릴 정도는 된 것 같소.”

“상처는 방심할 때 가장 크게 덧나는 법이다.”

“알았소. 알았어. 그런 것까지 말하지 않아도 되오.”

이번에 고집을 부려가며 보리스를 따라 나섰다가 개를 닮은 짐승에게 허벅지를 크게 물어 뜯긴 로우렌이었다. 덕분에 며칠 동안 사경을 헤매야 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돌아가는 상황에 대해서는 계속 귀를 열어 두었다. 그러다 어느 정도, 힘겹게나마 걸음을 옮길 수 있게 된 그는 보리스에게 이제 막 대략적인 자초지종을 전해 들은 참이었다.

“공자님의 심기가 불편하시니 괜한 말로 그분을 자극하지 말거라.”

“흐흐. 형님도 눈치는 있구려.”

동생이 음침하게 웃으며 대꾸하자, 그라모트가 눈살을 찌푸렸다.

“네가 아니라 공자님을 위해서 한 말이다.”

“물론 그렇겠지. 그나저나…새어 나가지는 않았겠지?”

“믿을 만한 녀석들이다.”

“믿음을 가지는 것도 나쁘지는 않지만, 가장 깔끔한 건 새어 나올 입을 없애 버리는 거요.”

“그 이상은 그냥 넘길 수 없다.”

“말이 그렇다는 거요. 말이.”

다시 한번 히죽 웃은 로우렌이 대뜸 인상을 구겼다. 허벅지의 상처가 안장에 크게 쓸린 탓이었다.

“빌어먹을. 역시 사람은 안 하던 짓을 하면 안 된단 말이지.”

“알면서 왜 그랬느냐.”

“머리로만 세상을 사는 사람이 어디 있겠소. 알면서도 이래저래 데이고, 그러면서 살아가는 게지. 사람은 다 그렇게 사는 거요.”

“노인네 같은 말을 하는구나.”

“하하.”

힘겨운 웃음을 흘린 로우렌이 가슴을 더듬었다. 갑옷 안쪽. 두툼한 무언가가 만져졌다. 그의 형제에게 부탁해 챙긴 물건이었다. 이게 보물이 될 수 있을지, 아니면 그냥 쓰레기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기대감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렇게까지 했는데, 헛고생으로 끝나서야 쓰나.’

아직 보리스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주변에 눈과 귀가 많기도 하고, 무엇보다 그의 심기가 무척 불편해 보였기 때문이다.

‘순진하신 분 같으니.’

이제는 좀 적당히 때도 타고, 교활해질 때도 되었는데 여전히 어렸을 때의 순진함이 남아있다. 어쩌면 타고난 성정일지도 모른다. 그런 면이 매력적이라고 생각하지만, 때로는 답답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그래도 판이 하나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아셨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세상에는 세 개의 판이 있다.

내가 주도할 수 있는 판. 끼어들 수 있는 판. 끼어들 수 없는, 끼어들어서는 안 되는 판.

이 셋을 명확히 구분할 수 있다면 적어도 괜히 다칠 일은 크게 줄어든다. 하지만 그러지 못한다면? 여러모로 피곤해지는 거다. 지금의 보리스처럼.

‘제발 좀 받아들이십시오.’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지 못하면 다치니까.

받아들인 후에는? 그때는 결정해야 한다. 욕심을 버리고 눈을 돌리거나, 더 몸집을 키운 후에 다시 한번 기웃거리거나.

로우렌은 보리스가 절대 전자를 택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일단은 받아들여야 한다.

“이크!”

그런 의미에서, 이 저주스러운 고통도 받아들여야 하리라. 이 고통이야말로 끼어들면 안 되는 판에 낀 대가 아니겠는가.

* * *

먹구름이 갠 하늘. 달과 별의 빛이 어둠을 밝혔다.

군터는 전령이 말했던 대로 빛이 잘 드는 곳에 홀로 서 있었다. 보리스가 옆을 지키겠다고 했지만 군터는 허락하지 않았다. 그것은 군터 나름의, 줄카에 대한 존중의 표시였다. 그가 보자고 한 것은 자신이지 보리스가 아니었으니.

“…….”

만남은 갑작스럽게 이루어졌다. 은은하게 내려오던 빛에 일순간 열기가 감도는가 싶더니 긴 선 하나가 허공에 생겨났다.

곧이어 하나였던 선이 위 아래로 벌어지더니 눈동자 같은 형상으로 변했고, 동시에 묵직한 위압감을 풍겼다.

[용의 눈은 모든 것을 꿰뚫어 본다더군. 그 눈이 있기에 그들은 경계를 넘나들 수 있다고.]

[용을 본 적이 있나?]

[아니. 아주 오래된 이야기를 우연히 주워들었을 뿐이야.]

이가로프의 생전. 온갖 신비롭고 초월적인 존재들이 이 땅을 누비던 그때에도 용에 대한 이야기는 전설로만 여겨졌었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이야기는 으레 과장되고 변질되기 마련이지. 그런데 지금 보니 적어도 내가 들었던 그 이야기가 아주 헛소리는 아니었던 모양이야.]

만약 육신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이 신비로운 광경을 보고 얼간이처럼 입이라도 벌렸을까? 두려움에 떨었을까? 의미 없지만, 제법 재미있는 상상이었다.

[요정왕이 했던 말이 이제 이해가 가. 용의 능력을 지녔다면 용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지.]

용에 대한 온갖 허무맹랑한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용은 저마다 모습이 달랐다. 어떤 이야기에서는 용이 새처럼 하늘을 날 수 있는 날개와 산양처럼 우람한 뿔을 지녔다고 했고, 또 어떤 이야기에서는 뱀처럼 긴 몸과 차가운 비늘을 지녔다고 했다. 그렇다면 어떤 용은 사람과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을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우리가 다시 마주하는 그 순간이 칼을 맞대는 순간이었으면 좋겠다고 했었지.]

허공에 떠오른 눈이 한 차례 번뜩였을 때. 한 사내가 뒷짐을 진 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 바람이 틀어졌으니 애석해야 할 터인데, 지금은 네 그 재미없는 얼굴이 반갑게 느껴지는구나.]

아간투스베록에게 한방 먹었으니 분노해 있으리라는 예상과는 달리, 줄카는 마지막으로 봤을 때와 달라진 부분이 없었다. 그는 여전히 느슨할 정도로 여유로웠고, 시답잖은 헛소리를 농담이랍시고 해댔다. 스스로도 그게 아무 의미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거인왕이 당신보다 한발 앞서갔지.]

[왕이라는 표현은 과하다. 옛 시대의 잔재일 뿐.]

둘 사이가 한 걸음 더 가까워졌다. 군터는 이가로프가 스스로 감옥속으로 물러나는 것을 느꼈다.

[어쨌거나 네 말이 맞다. 녀석이 나보다 한발 앞섰지. 하지만 덕분에 나는 녀석이 뭘 노리는지 알게 됐다. 그러니 서로 하나씩 주고받은 셈이지.]

늘어놓는 말 속에서 느껴지는 것은 약간의 초조함. 약간의 분노. 그리고 약간의 즐거움.

[놈이 내 목을 노리는 줄 알았다. 그래서 기다렸지. 그런데 이런 수작을 부리다니. 놈답지 않은 행동이지. 더 일찍 눈치챘어야 했는데.]

[그 자가 원하는 게 뭐지?]

[자유.]

순간 줄카의 두 눈에서 피처럼 붉은 빛이 번뜩였다.

[놈이 노리는 건 언약비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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