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0화
한 걸음을 내디뎠을 뿐인데 모든 것이 달라졌다. 처음 설산에서 반복되는 전장에 들어섰을 때와 같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정반대였다. 시끄러운 소리가 모두 사라지고, 적막만이 감돌았다.
비틀림 너머, 아니 비틀림 속의 공간은 뜻밖에도 그리 넓지 않았다. 바깥에서 가늠했을 때는 어지간한 광장 정도는 되는 것 같았으나, 막상 넘어와보니 보이는 것은 큼지막한 석벽 하나.
[거인. 그리고 용. 이제는 뭐지? 시체인가? 아니. 조금 다르군.]
그리고 그 석벽의 중앙에 매달려 있는…….
[요정? 아니. 평범한 요정이 아니군.]
이가로프가 중얼거렸다.
[기이하군. 넌 뭐지? 왜 나를 찾았나?]
한장으로 몸 전체를 가릴 수 있을 정도로 큼직한 두 쌍의 날개. 전신을 휘감고 일렁이는 불꽃. 그 신비로운 외관을 본 군터는 밖에서 보았던 정령을 떠올렸다. 불덩이 속에서 걸어 나오던 불꽃의 괴조. 이 자는 그 녀석과 동족이라도 되는 것일까.
[널 찾아온 것이 아니다.]
[그럼 왜 이곳에 있지?]
군터는 답하지 않았다. 그저 거대한 석벽과 요정, 아니 요정왕으로 추정되는 자를 보았다.
사실 정령과 요정의 경계는 모호하다. 혹자는 정령과 인간의 혼혈이 요정이라고 했고, 또 어떤 이는 정령이 변질된 것이라고도 했다. 그 외에도 숱한 이론, 혹은 주장이 존재했으나 어느 것 하나 명확하게 두 존재를 규정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의견이 분분한 이들조차 그들이 무척이나 신비롭고 강력한 존재라는 데는 이견이 없었다. 이제는 오래된 이야기속에서나 간간이 등장하는 그들은 하나같이 평범한 인간으로서는 감히 대적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초월적인 존재로 묘사되곤 했다.
[왜 답하지 않지?]
정령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감정적이고, 평범한 요정이라고 하기에는 느껴지는 존재감과 힘이 너무 막대하다. 정령이니 요정이니 하는 것들을 제법 보고, 베어온 군터는 저 존재의 격이 다른 것들과 명백히 구분된다는 것을 확신했다.
[요정왕.]
[왕이라고? 그래. 분명…그런 존재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있지. 그러고보니 평범한 요정과는 사뭇 다르군. 하지만 요정왕씩이나 되는 존재가 왜 이런 곳에 저런 꼴로.]
[알고 있지 않나.]
요정왕을 제외하고, 이곳에서는 두 가지의 강렬한 기운이 느껴졌다. 하나는 석벽에서, 하나는 요정왕의 가슴 한복판을 꿰뚫고 그를 벽에 박아 넣은 거검에서.
[저 벽. 거인왕의 힘이 느껴지는군.]
[그래.]
이가로프와 그의 수하들이 갇혀 있던 기둥. 그 봉인에서 느껴졌던 기운과 똑같았다. 그러나 군터의 눈길이 쏠린 쪽은 석벽이 아니었다.
[밝혀라. 나를 조롱하기 위함이 아니라면, 왜 이곳에 온 것인가. 무도한 용처럼 내 몸에 칼을 박아 넣기 위해서인가? 응?]
탁하기만 하던 두 눈에 광기가 떠올랐다. 두 쌍의 날개가 펄럭이며 불길이 치솟았다. 그러나 사방으로 퍼져 나갈 듯 넘실거리던 불길은 순식간에 석벽으로 빨려 들어갔다.
[으아아아! 용서 못해! 용서 못한다! 잔혹한 놈! 교활한 놈!]
영혼에 퍼지는 분노. 그 광포한 포효가 작은 폭풍을 일으켰다. 흙먼지가 자욱하게 흩날리면서 거대한 석벽이 무너질 듯 흔들렸다.
그러나 무너질 듯 흔들리면서도 석벽은 무너지지 않았다. 심지어 약간이라도 기울거나 금이 가지도 않았다.
[…….]
이가로프가 조용해졌다. 요정왕의 거친 기세에 넉살 좋은 유령 왕자마저 압도당한 듯했다.
조용해진 것은 이가로프만이 아니었다. 군터는 발광하는 요정왕에게 말을 붙이거나 만류하는 대신 그에게서 피어 오른 불꽃을 끝도 없이 빨아들이는 석벽을 유심히 보았다.
‘흘러 들어 가는군. 아니.’
흘러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모기가 피를 빨듯이 빨아들이고 있다. 이제 보니 석벽의 용도는 본래부터 그런 것인 듯했다. 요정왕의 힘을 흡수하고, 그 힘을 다른 곳으로 옮기는.
쿠르릉!
석벽이 이전보다 한층 더 강하게 흔들렸다. 멀쩡한 석벽 대신 땅이 갈라지며 열기가 흘러나왔다. 군터는 모든 것이 흔들리고, 부서지는 와중에 요정왕의 가슴 한복판을 꿰뚫은 거검만이 미동도 하지 않았다.
[잔혹하구나. 너무나 잔혹한 형벌이다.]
방금 광란이 마지막 몸부림이었던 듯, 요정왕의 기세가 누그러졌다. 그의 몸에서 끝없이 솟구치던 불길도 불씨 하나 남기지 않은 채 사라졌다. 벽의 요동이 멈추고, 흉하게 여러 갈래로 갈라졌던 땅이 상처가 나은 살처럼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그 검. 줄카의 것이군.]
[그래. 그 용의 것이지. 그 자가 이곳을 찾았고, 나를 보고서 이 칼을 꽂았다.]
요정왕이 제 가슴에 꽂힌 거검을 내려다보며 답했다.
[왜 그를 용이라 부르지?]
[우스운 물음이군. 용을 용이라 부르는 데 이유가 필요한가?]
[그가 용인가?]
[껍데기만 작을 뿐, 안에 깃든 것은 용의 그것이다. 나는 잘못 보지 않는다. 모든 것을 정확하게 볼 수 있지. 아니. 모든 것은 아니군. 오직 내 운명만을 보지 못했다. 그래 보지 못했어.]
가만히 놔두면 혼자만의 세계로 파고들어갈 기세였다. 그를 막기 위해, 군터가 다시 물음을 던졌다.
[넌 누구지?]
[오혼 테라무옌. 네 끝 봉우리의 왕이자 여름바람의 인도자다. 하지만 이제 그 이름을 기억하는 이는 없겠지. 당연히 그럴 것이다. 나조차도 내 이름이 흐릿하게 느껴지니.]
오혼 테라무옌. 당연하지만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이름이었다. 그 자신의 말처럼 이미 오래전에 잊힌 이름일 터였다.
[거인이 날 쓰러뜨리고 가뒀다. 그 후에 용이 와 검을 박았지. 그리고 이제는 네가 왔구나. 그렇구나. 네가 나의 죽음인가?]
[죽고 싶은 모양이군.]
[나는 지쳤다.]
축 처진 날개들이 미력하게 펄럭였다.
[승자는 살아남고 패자는 죽는다. 그러나 나는 패했음에도 죽지 않고 이곳에 붙들려있지. 이 고통에 참혹함 외 다른 의미는 없다. 그렇지 않은가?]
[글쎄. 패자에 대한 처우는 승자의 권리 아니던가.]
[아아. 또 하나의 잔혹한 승자로군.]
요정왕이 힘없이 웃었다.
[좋아. 그렇다면 서로 주고받도록 하지. 내가 바라는 건 오직 하나. 안식이다. 네가 원하는 것은…그래. 거인, 아니면 용. 혹은 둘 모두에 대한 이야기겠지? 내가 보고 들은 것 말이야. 그렇지 않나?]
힘이 다 빠지고 나서야 요정왕의 두 눈은 총기를 되찾았다. 어쩌면 분노와 광기에 잠시 가려져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이 오랫동안 고통받은 요정왕은 거래라는 것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다.
군터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먼저 물어라. 내가 안식을 얻고 나면 네 질문에 답해줄 수 없을 테니.]
[널 이곳에 가둔 것은 아간투스베록이다. 맞나?]
[흐릿한 이름이군. 하지만 그 이름이 거인의 것임을 잊지 않았다. 그래. 거인이 내게 승리했고, 나를 이곳에 가둬 두었지. 내 비통함을 곡조 삼고 내 정기를 이 땅의 양분으로 쓰기 위해서.]
[그를 본 것은 그게 마지막이었나?]
[아니. 다시 보았다. 그는 이곳을 다시 찾았고, 나를 깨웠다.]
깨웠다고? 군터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그는 요정왕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가 있는 그대로를 말하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요정왕은 아간투스베록의 의도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다만 그가 다시 이곳에 와서 자신을 깨웠다는 사실만을 기억할 뿐이었다.
[그 후에는?]
[용이 찾아왔다. 그는 나를 보고 분노했다. 그리고 내 가슴에 이 칼을 꽂은 후에 돌아갔지.]
요정왕의 말에 따르면 전후사정은 간단명료하다. 아간투스베록이 굳이 이곳에 다시 걸음해서 요정왕을 깨웠다. 그리고 그 후에 줄카가 이곳에 왔고, 분노하며 요정왕에게 칼을 꽂았다.
[미끼였군.]
[그래.]
이 요정왕은 줄카를 낚기 위한 미끼였으리라. 줄카는 미끼를 물었고, 자신이 아간투스베록의 함정 내지는 속임수에 당했다는 것을 즉시 깨닫고 분노했으리라.
‘뭘 노리고 있는가.’
아간투스베록이 줄카를 이곳으로 꾀어낸 이유가 무엇일까. 분명 줄카를 피하기 위해서일 터. 하지만 그게 그를 두려워하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줄카 스스로도 인정했듯, 그와 아간투스베록은 숙적이라 해도 무방한 관계다. 둘의 지위와 힘이 대등했기에 죽일 듯 으르렁거리면서도 끝장을 보지 못했을 뿐. 서로에게 품은 증오는 어느 한쪽도 밀리지 않는 수준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아간투스베록이 줄카를 피했다? 필시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당장 생각나는 답은 하나뿐이었다.
‘시간을 벌기 위해서.’
군터가 시체마의 안장에 걸려 있던 활을 꺼내 들었다.
‘아간투스베록이 한발 앞서가고 있는 건가.’
예측대로, 그 둘은 이 땅에서 서로를 적대하고 있었다. 어쩌면 지금쯤 어딘가에서 맞붙고 있을지도 모른다.
[드디어.]
화살을 시위에 건 군터가 홀가분한 기색의 요정왕을 흘깃 보았다. 그리고 시위를 당기기 전, 한 마디를 던졌다.
[복수하고 싶지는 않은가?]
요정왕이 우스운 농담이라도 들은 것처럼 어깨를 들썩였다. 그러다 활의 시위가 아직 당겨지지 않은 것을 보고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이어지는 삶은 승자의 것이지 패자의 것이 아니다. 그리고 나는 패자지. 난 이미 오래전에 돌아갔어야 했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가야 할 곳으로 가야하지 않겠나.]
[가야 할 곳?]
[너도 알고 있지 않은가. 이 땅의 모든 것들이 결국 돌아가야 할 곳. 멈추지 않는 강. 모든 것들의 고향이지.]
[그래. 알 것 같군.]
군터는 더 말하지 않고 시위를 당겼고, 놓았다. 어떤 소리도 없이 시위를 떠난 화살은 가늘게 늘어져 있던 생명의 실을 끊었다.
화르륵!
요정왕의 고개가 떨어졌다. 동시에 두 쌍의 날개가 불이 되어 그를 감싸 안았다.
[요정왕의 최후치고는 심심하군.]
이가로프의 말과는 달리, 요정왕의 최후는 꽤나 요란했다.
쿠구구-
그가 고개를 떨어뜨리기 무섭게 석벽과 땅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어두컴컴하던 하늘에서 빛이 새어 나오는가 싶더니 갑자기 빗물이 쏟아져 내렸다.
“아버지!”
이상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바깥도 마찬가지였다. 자초지종을 묻는 보리스에게 나중에 알려주겠다고 답한 군터는 주기가 반복될 때와 비슷하게 연기가 되어 사라지는 병사와 정령 등을 힐끗 일견했다.
“곧 문이 열릴 것이다. 그전에 굴에 숨어있는 자들을 데려와라.”
“그리 하겠습니다.”
묻고 싶은 것이 많은 듯한 보리스였지만, 그도 무엇이 더 중요한지는 알았다.
* * *
온통 하얗기만 한 동토의 풍경이 이렇게까지 반갑고 아름답게 보일 수가 있는 것인가. 보리스는 몇몇 수하들처럼 몸을 숙여 눈을 움켜쥐는 추태를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여러 감정이 교차하는 표정을 굳이 감추지도 않았다.
적당히 감정을 추스른 후. 보리스는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은 부친을 보며 말했다.
“이제 설명해주시겠습니까.”
“네게는 버거운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감당하겠습니다.”
“좋다.”
이어진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하는 부친은 몰라도, 보리스에게는 그랬다.
군주 아간투스베록. 군주 줄카. 이 땅의 모든 것은 그 둘의 싸움에 휘말렸을 뿐이라는 이야기는, 나름 마음의 준비를 하고 들은 보리스로서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다. 누구라도 그렇지 않겠는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 무대 위의 인형이 되어, 실을 쥔 자들의 뜻대로 이리저리 흔들렸다면 말이다. 그것도 몇 개 중 하나가 아닌 수만, 수십만 개의 인형 중 하나가 되어서.
“아무것도 모른 채 휩쓸리고, 죽어간 이들이 얼마나 될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고작 둘의 싸움에 휘말렸기 때문이라니.”
보리스가 실소를 머금었다.
“초월자란 그런 존재입니까? 어째서 그런 이들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겁니까?”
보리스는 자신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멍하니 물었다.
* * *
“글쎄.”
군터가 말끝을 흐렸다.
“나도 모르겠구나.”
그 뒤에 희미하게 이어진 말을, 보리스는 듣지 못했으리라.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