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9화
“사람의 손길이 닿은 장소입니다. 하지만 누가, 왜 이런 곳을 만들어놨는지는 모르겠군요. 어쩌면 우리와 같은 처지였던 이들이 마련한 피난처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보리스와 재회하고서 모페이브의 얼굴에 드리웠던 그늘은 상당부분 사라졌다. 이제 그는 술사 특유의 탐구심을 드러내며 이 정체불명의 지하공간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의 호기심이 주로 발휘되는 부분은 이 커다란 동굴의 구조보다, 지하 광장 바닥에서 피어 오르는 연기였다. 보리스와 함께 움직인 술사들은 그것을 매개라고 표현했고, 모페이브도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그것만으로는 조금 부족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이 연기야말로 이곳의 비밀을 파헤칠 수 있는 열쇠일지도 모릅니다.”
확신에 가까운 추측이었다. 그는 시간만 충분히 주어진다면 이곳의 비밀을 모두 알아낼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에 찼다. 하지만 이 호기심 많은 술사에게는 안타깝게도, 군터는 그들이 연구를 마칠 때까지 가만히 앉아 기다려줄 생각이 없었다.
“한번은 두고 보지.”
보리스의 말에 따르면 모든 것이 처음부터 시작되는 시기가 다가왔다. 그들이 ‘주기’라고 부르는 기간이 가까워졌다니, 반복이라는 것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한 번 정도는 직접 확인할 생각이었다.
“곧 시작될 겁니다.”
보리스는 차분해 보였다. 말투도 그렇고, 행동거지도 그랬다.
‘이쪽도 보통은 아니군.’
남 모르게 그를 살피던 로센은 내심 감탄했다.
보리스 크렘보르의 소식이 끊긴 지 꽤 됐다고 하지 않았나? 그가 이 정신 나간 곳에서 보낸 시간이 결코 적지 않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한계에 달했다고 해도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실제로 그의 수하들은 아군의 합류에 기뻐하면서도 지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반쯤 정신이 나간 것처럼 보이는 이들도 있었다. 그런데 보리스 크렘보르는 전혀 그런 기색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정말 멀쩡한 것이라면 말할 필요도 없고, 숨기고 있는 것이라 해도 대단하지 않은가.
‘총독도 눈치를 보는 크렘보르라더니.’
특별히 귀를 열어두고 살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닫고 살지도 않았다. 들으려고 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들려오는 이야기가 있었다. 현 총독이 실은 전임 총독이 세운 허수아비에 불과하다는 둥, 전임 총독마저 크렘보르의 눈치를 살폈다는 둥.
‘이 난리가 끝나고 나면, 그때부터는 크렘보르의 세상이겠군.’
현 총독이 전임 총독의 허수아비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가 크렘보르를 어려워한다는 것만큼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군터 크렘보르의 앞에서 그의 아랫사람인 것처럼 저자세를 보이던 총독의 모습을 직접 이 두 눈으로 확인했다.
‘당대 가주는 말할 것도 없고, 후계자도 보통을 넘는 것 같다. 크렘보르의 미래는 적어도 수십 년은 보장되었다고 봐도 무방하겠지.’
신전의 주교들에게 선택 받은 자라고 인정받고, 천 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칭송 받을 때는 잠깐 어깨에 힘이 들어가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 흐른 후. 로센은 보다 냉정하게 현실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닥쳐왔을 때 움직이기 시작하면 늦는다.’
지금이야 선택 받은 자라는 신분이 귀족과 같은, 어쩌면 그 이상으로 대접받지만 그건 상황이 그만큼 급하기 때문이다. 선택 받은 자가 지닌 힘과 명분. 그것이 최고조로 빛을 발할 수 있는 것은 작금의 상황이, 판니른에 드리운 암운이 그만큼 짙기 때문인 것이다.
하지만 하늘을 뒤덮은 먹구름은 언젠가 걷힌다. 그때가 되면 잘 쳐줘봐야 그럭저럭 쓸만한 술사 이상은 되지 못하는 알량한 힘은 그리 큰 가치를 지니지 못할 것이다. 신께 선택 받았다는 상징성이야 그럭저럭 인정받을 수도 있겠지만, 그것도 고작 해봐야 판니른 내에서나 통용되는 수준일 터.
생각을 거듭할수록 현실을 바라보는 시선은 냉정하게 변해갔다. 로센의 생각이 점점 깊어져 가는 이유였다.
‘저 녀석은 이미 마음을 정한 것 같고.’
로센의 시선이 보울룬 쪽을 향했다. 저 녀석은 군터 크렘보르에게 단단히 빠진 듯했다. 진정 선택 받은 분이니 뭐니, 영문 모를 소리를 늘어놓는 것은 이해가 가지 않지만 어쨌거나 지금의 모습만 놓고 보면 영락없는 군터 크렘보르의 부관이었다. 적어도 밖에서 보기에는 이미 확실히 길을 정한 모양새였다.
‘모르겠군. 모르겠어.’
다른 쪽의 고민이 깊어가는 와중에, 로센은 자신이 어느 순간부터 이 우중충한 세계에 갇힌 부분에 대해서는 전혀 걱정하지 않고 있음을 의식하지 못했다.
* * *
갈라진 땅에서 흘러나온 연기가 시야를 가리자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것과는 확연히 달랐다. 하지만 모든 것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사람과 사람이 아닌 것들이 뒤엉키고 있는 전장, 그 이상을. 그것은 특유의 감각을 통해 전장의 흐름을 읽는 군터에게도 색다른 경험이었다.
어느 한쪽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까지 그치지 않을 것 같았던 전투는 한 순간 끝을 맞이했다. 내리치던 칼날이, 목줄기를 씹던 이빨이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움직임을 멈췄다. 단 한 순간이었으나, 시간이 멈춘 듯했다.
그리고 바람이 불어왔다.
수북이 쌓여 있던 먼지가 한줄기 바람에 씻겨 사라지듯, 모든 것이 산산이 흩어졌다. 그리고는 바람을 따라 어딘가로 흘러 들어갔다.
이곳의 중심. 들여다볼 수 없을 정도로 일그러지고 뒤틀린 곳. 군터는 모든 것을 집어삼키고서 나직이 꿈틀거리는 그 뒤틀림을 응시했다.
연기를 통해 이 작은 세계를 한눈에 관찰할 수 있었지만, 확실히 보리스의 말처럼 중심부의 뒤틀림 너머만큼은 엿볼 수가 없었다.
억지로 들여다보려면 볼 수 있을까? 군터는 뒤틀림에 한걸음 다가갔다. 가까이 가고자 마음먹었을 때, 그는 이미 뒤틀림의 바로 앞에 와 있었다.
바로 앞에 와 있음에도 여전히 이 너머는 보이지 않았다. 군터는 한 걸음을 더 내디뎠다. 방금은가까이서 보겠다는 마음이었다면, 지금은 안으로 들어서겠다는 마음이었다.
“……”
그런데, 그리 마음을 먹었음에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뒤틀림의 앞에 있었으며,오히려 시야가 더 흐릿해진 느낌이었다.
‘한계로군.’
가만히 현 상황을 관조하던 곧 군터가 상황을 파악했다.
여기까지가 연기, 그러니까 매개의 한계였다. 작은 그릇 하나로 우물의 물을 전부 담을 수 없듯, 갈라진 땅에서 흘러나온 연기로 볼 수 있는 것도 여기까지가 한계인 것이다. 보리스가 볼 수 없었다고 한 것도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녀석이 말한 압박감은.
[당연한 일이지. 장군의 후계자가 꽤 괜찮은 자질이기는 하나, 평범한 인간의 테두리 안에 있으니.]
[느껴지나?]
[나는 장군에게 속해 있으니까. 장군이 허락하는 한, 장군이 느끼는 거의 모든 것을 나 또한 느낄 수 있지.]
군터가 손을 뻗었다. 그러나 역시 닿지 않았다. 그가 손을 뻗는 만큼 뒤틀림도 더 멀어졌다.
[이 너머에 뭔가 있다. 정령인가?]
[글쎄. 정령일 수도, 그 이상의 존재일 수도 있겠군. 아마 일찍이 거인왕에게 패한 존재겠지. 그리고 이 세계는 아마도 그 존재의 미련일 테고.]
미련. 이가로프는 그렇게 표현했다.
[너희처럼 말인가.]
군터는 뻗은 손을 회수했다.
[불쾌하고 슬프군. 부정할 수 없기에 더더욱.]
이 너머에 있는 존재가 품은 미련은 이가로프와 그의 수하들보다 훨씬 더 강렬하다. 이가로프와 그의 수하들은 고작해야 해가 떨어지고 나서야 잠깐 봉인 밖으로 뛰쳐나와 설쳐댔을 뿐이지만, 이 너머에 있는 존재는 아예 작은 세계를 만들어 끝없이 반복되는 전쟁을 벌이고 있지 않은가. 단순하게 따져도 규모의 차이가 너무나 크다.
[훔쳐보는 것은 여기까지다. 직접 확인하는 수밖에 없어.]
[그럴 생각이다.]
훔쳐본다는 표현이 조금 거슬렸지만, 군터는 굳이 책잡지 않고 넘어갔다. 지금은 시키지도 않은 말을 수시로 지껄이는 망령보다는 이 너머의 존재에게 흥미가 갔기에.
* * *
‘다르군.’
그들이 연기를 통해 들여다보고자 할 때는 한 줌의 연기만이 잠시 머무를 뿐이었다. 그렇기에 볼 수 있는 시간도 짧았고, 때로는 보이는 것조차 흐릿하기도 했다.
하지만 부친은 달랐다. 그가 연기 속으로 걸어 들어가자 기다렸다는 듯 연기가 그를 중심으로 뭉쳐 한층 더 짙어졌다. 마치 그가 연기를 통제하고 있는 것 같았다.
‘너무도 달라.’
성주 대리로서 최선을 다했다. 모두가 두려워하는 재난이 닥쳐왔을 때도 호기롭게 앞장선 것도 책무를 다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결국 그 끝은 이렇다. 집 나온 아이 같은 모양새.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아비의 도움에 기대는 꼴불견.
참기 힘든 무력감이 치밀었다. 소리 없이 긴 한숨을 뱉은 보리스가 걸어오는 부친에게 다가갔다.
“보셨습니까?”
“아니.”
정말 이상하고 한심하게도, 그 순간 아쉽기보다는 안심이 됐다.
“직접 볼 생각이다.”
하지만 곧바로 이어진, 대수롭지 않은 듯 뱉는 한 마디에 보리스의 표정이 저도 모르게 굳었다.
“위험합니다. 주기가 됐으니 쓰러졌던 것들도 모두…….”
“안다. 그러니 지금이다.”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부친의 무심한 시선과 눈을 마주쳤다. 그 시선에서는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다못해 책망하는 기색조차도. 자신을 의식하지도 않는 것 같은 그 무심한 시선이, 보리스에게는 무겁고 두렵게 다가왔다.
“주기가 가까워질수록 통제력이 약해진다. 놈들이 의식하기 시작하는 것도 그 때문이지. 끝까지 가지 않고 중간에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는 것도 그 때문일 거다.”
부친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보리스는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을 부친은 알고 있다. 정확히는, 방금 알아차렸다. 연기에 휩싸여 있던 그 짧은 시간 동안.
여기서 또 한 번 무지를 드러내서는 안 된다. 그리 생각한 보리스는 침묵했다. 다행히 부친은 대꾸를 강요하지 않았다.
“그러니 지금이다.”
* * *
군터는 누구에게도 따르라 명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명하지 않았음에도 기다렸다는 듯 따라붙는 이들이 있었다. 가장 처음 보울룬이. 그 다음에는 로센과 모페이브가 뒤따랐다. 그러자 병사들도 엉거주춤 일어나 모여들었다.
[충성스러운 용자들이로군.]
이가로프에게 육신이 있었다면 그는 분명 장난스레 휘파람을 불었으리라.
“중앙으로 간다.”
아무도 되묻지 않았다. 그저 각오했다는 듯 굳은 얼굴로 눈을 빛낼 뿐.
“저희도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그때, 보리스가 그의 수하들을 이끌고 옆으로 따라붙었다. 여기저기 해지고 더러워진 갑옷을 걸친 채.
“아니. 그럴 수 없을 거다.”
“그렇다면 나오실 때까지 앞을 지키고 있겠습니다.”
“그래. 맡기마.”
군터가 말을 달렸다. 썩은 내를 풍기는 말은 살아있는 그 어떤 말보다 빠르게 달려나갔다. 툭 튀어 나가는 그 뒤를 보리스와 나머지가 바짝 뒤따랐다.
* * *
전장은 그리 넓지 않았다. 단지 그 넓지 않은 전장에서 벌어지는 전투가 너무나 격렬하기에 한발자국을 떼기도 어려웠을 뿐.
그러나 지금. 마음먹고 달리기 시작한 군터 일행은 빠르게 전장을 주파해 나갔다. 처음 이곳에 들어섰을 때와 달리, 그들은 누구에게도 붙들리지 않았다. 마주치는 적들이야 많았지만, 그들은 이전과 달리 들러붙지 않았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인 양, 일단 거리가 조금이라도 벌어지면 가장 가까이에 보이는 또 다른 적에게 달려들었다.
“정말 아버지의 말씀대로군요!”
보리스가 피 묻은 검을 털며 외쳤다. 그에 군터 대신 이가로프가 대꾸하듯 외쳤다.
[제법이군! 소싯적의 내 모습을 보는 듯해!]
물론 그의 말은 보리스에게 닿지 않았지만, 이가로프는 누구보다 거칠게 검을 휘두르는 보리스를 보며 만족스러운 감탄을 거듭했다.
[상당하군. 정령과 붙어먹은 놈들보다도 낫지 않은가.]
이가로프의 감탄은 과장이 아니었다. 보리스는 실제로 보울룬을 비롯한 선택 받은 자들보다 더 많은 적을 베었다. 보리스에게는 정령도, 다른 신비로운 능력도 없었지만 타고난 신체능력과 이제껏 갈고 닦은 전투기술이 있었다.
한때 크렘보르의 후계자이면서도 선봉에서 적을 상대했던 보리스였다. 주변의 만류에 용맹을 자랑하는 일은 되도록 자제해왔지만, 그렇다고 그 실력이 퇴색되지는 않았다. 선봉의 군터와, 그 뒤를 바짝 따르는 보리스의 활약 덕에 일행의 속도는 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대단해!”
보리스의 실력에 감탄한 이는 이가로프만이 아니었다. 외지인, 특히 선택 받은 자들은 평범한 사람이라고는 보기 힘든 용맹을 뽐내는 보리스를 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곧입니다!”
그렇게 크렘보르 부자의 활약에 힘입어, 일행은 유독 어둡게 느껴지는 전장의 중심에 다다랐다.
전장의 중심. 술사들은 물론, 술사가 아니더라도 기감이 뛰어난 이들은 자연스레 부조화를 감지할 수 있었으며 그렇지 않은 이들도 집중한다면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한 폭의 그림을 반으로 자른 후에 다시 붙인 것 같은 광경. 얼핏 보기에는 뭐가 잘못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집중해서 보면 어느 한 부분이 어그러져 있다.
군터는 그 비틀림의 앞에서 말을 멈췄다.
“이곳에서 대기하도록.”
“무운을.”
무심히 고개를 돌리던 군터의 시선이 한순간 보리스에게 머물렀다. 하지만 때마침 살짝 고개를 숙이고 있던 보리스는 그 한순간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래.”
숨쉬지 않는 말의 앞발이 비틀린 경계를 넘어섰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