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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978화 (978/1,064)

978화

우려했던 대로, 괴물처럼 보이지만 이가로프가 정령이라고 부르는 존재들이 하나둘씩 튀어나왔다. 그나마 떼로 몰려나오지는 않았기에 상대하기 그리 어렵지는 않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쿵!

큼직한 불덩이가 떨어진 곳. 자욱한 연기가 피어오르는 불구덩이에서 거뭇한 형체가 일어선다. 위로도 높지만, 양옆으로 더욱 거대해 보이는 괴물. 자욱한 연기를 뚫고 불그스름한 날개가 펄럭인다. 불길 속에서 펄럭이는 것부터가 그렇기는 하지만, 돌을 조각해 만든 것 같은 날개는 어떻게 봐도 평범한 날개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그런 날개가 당장 보이는 것만 넷.

[이상하군.]

불길 속에서, 불덩이 속에서 두 쌍의 날개를 펄럭이는 저 괴물 하나만 놓고 하는 말이 아니었다. 아간투스베록이 이곳에 없다는 것을 안 후로 흥미를 잃은 듯했던 이가로프였으나 지금은 또 생각이 달라진 듯했다.

[실체를 가진 정령은 흔치 않다. 그런데 정령이 하나도 아니고 넷.]

불길 속에서 거대한 몸을 완전히 드러낸, 몸이 타오르는 돌로 이루어진 것 같은 붉은 괴조. 그 양옆에는 뱀의 몸통에 나비의 날개를 가진 괴물과 눈 없는 곰의 모습을 한 괴물이 나란히 섰다.

그들 모두가 정령이었다. 대체 왜 정령이 이렇게 기괴한 외형을 지닌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본래는 그렇지 않아. 지금의 모습은 뒤틀린 형태다. 본질은 유지하고 있으나 이 세계의 영향을 받고 있어. 하지만 대체 무엇이 이들에게 이 정도의 영향을 주었는지 모르겠군.]

군터는 숨을 쉬지 않는 말 위에 앉아 정령들과 마주했다. 앞을 가로막기는 했으나 아직 그들은 적의를 보이지는 않았다. 당연히 먼저 달려들지도 않았다. 더해서 그들의 존재감 때문인지 다른 잡스러운 것들은 주변에 접근도 하지 않았다.

[정령은 대개 사나운 존재가 아니다. 이들을 뒤틀리게 한 힘마저도 그들의 정신까지 지배하지는 못했던 것이겠지.]

[그렇군.]

양옆에 선 둘도 그렇지만, 중앙의 괴조에게서는 특히 강대한 존재감이 느껴졌다. 강렬한 빛을 발하는 적갈색의 눈에서는 심유하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마구잡이로 날뛰는 다른 것들과는 달랐다. 이곳에서 본 것들 특유의 사나움이 느껴지지 않았다.

[먼저 공격하지 않으면 저쪽도 달려들 생각은 없어 보이는데.]

정말 그럴 것 같지만, 어쨌거나 앞을 가로막고 선 이상 그럴 수는 없다. 덤벼들지 않는다고 해도 길을 터주지는 않을 것 아닌가.

말을 하지 않아도, 고삐를 당기거나 배를 차지 않아도 그를 태운 말은 그의 뜻을 헤아렸다. 그런데, 그것은 가만히 이쪽을 응시하던 괴조 역시 마찬가지였는지 말이 한 걸음을 앞으로 내딛자마자 두 쌍의 날개가 활짝 펴졌다.

“장군.”

바로 그때. 나직한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그리 크지 않은 목소리였음에도 그리 또렷하게 들린 것은 그만큼 군터와 세 정령 주변이 조용했던 탓이었다.

“보리스 크렘보르 공자가 신호를 보냈습니다.”

앞으로 기울어 있던 군터의 몸이 덜컥 멈췄다.

“확실한 것인가?”

“확실치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 같습니다.”

그 말에 군터가 미련 없이 말머리를 돌렸다. 괴조도 날개를 내렸다. 말머리를 돌린 군터는 그대로 돌아갔고, 괴조는 멀어지는 그 뒷모습을 가만히 지켜만 보았다.

* * *

자신을 보리스 크렘보르라고 주장한 낯선 인물. 그의 목소리를 들은 이는 로센이었다. 로센은 상대가 정말 보리스 크렘보르일 가능성이 크고, 그의 말이 신빙성이 있다고 생각하여 곧장 그의 동료들에게도 ‘보리스 크렘보르’의 말을 전했다.

“저놈들 간의 다툼은 계속 이어지지 않아. 정말 놈들이 우리를 우선적으로 의식하기 시작하면 끝장이야. 설령 사실이 아니라고 해도, 이렇게 전장의 한복판에 계속 머물 수는 없어.”

로센과 그의 동료들이 보리스 크렘보르의 조언에 귀를 기울였다면, 솔롬의 인사들은 보리스 크렘보르 자체에 집중했다.

“저기 보이는 검은 협곡. 저쪽으로 길을 뚫으라 했습니다.”

로센은 군터 크렘보르의 앞에서 최대한 침착함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지금 느껴지는 압박감은 여느 때와는 또 달랐다. 금방 전한 후계자의 소식 때문일까. 이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은 사내 역시 부모는 부모라는 건가.

“그 외에는?”

“말을 길게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하여 제가 들은 것은 거기까지입니다.”

“그렇군.”

군터는 로센이 말한 협곡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리 멀지 않다. 그런데도 방금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는 저런 곳이 있는지도 몰랐다. 사방에 가득한 적들에 정신이 팔려서? 그럴 수도 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의식하지 않았을 때는 몰랐는데 지금 보니 저곳은 유독 흐릿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안개가 낀 것처럼.

“길을 열겠다.”

군터는 길게 생각하지 않았다. 함정이라고 해도 상관없다. 함정 따위에 발목을 잡히지는 않을 자신이 있었으니.

착각도, 오만도 아니었다. 아무 말도 없이 가장 앞에서 길을 열기 시작한 군터는 단 한 번도 멈추지 않았다. 환영이든 아니든, 앞을 가로막는 것들은 모두 베었다. 때로는 피와 살점이 튀었고, 때로는 연기 같은 것이 퍼져나가기도 했다. 뒤따르는 병력은 그저 앞만 보고 달리면 됐다. 간간이 옆에서 달려드는 적들은 보울룬을 비롯한 선택받은 자들이 손쉽게 처리했다.

곧 그들이 검은 협곡에 다다랐을 때, 그들의 뒤를 쫓는 적은 소수에 불과했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그들을 우선적으로 의식하는 적은 많지 않았다.

“이곳입니다!”

무딘 칼로 거칠게 깎아낸 것 같은 협곡의 안쪽. 아무것도 없던 평범한 벽이 일렁이더니 네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군터를 비롯한 몇몇은 복색을 통해 그들이 솔롬의 병사들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장군.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그들은 즉시 군터를 군례를 취하며 고개 숙였다.

“보리스는?”

“안쪽에 계십니다.”

군터는 어째서 보리스가 직접 나오지 않았는지 묻지 않았다. 어차피 곧 알게 될 테니.

“이쪽입니다.”

그들은 그들이 나온 곳으로 일행을 인도했다. 뒤따라오던 적은 이미 처리했기에 협곡 내에 들리는 소리는 그들의 발걸음 소리뿐이었다.

“저들은 이곳에 접근하지 않습니다. 이곳에 깃든 힘이 저들을 본능적으로 떨어지게 만든다고 하더군요. 강제력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들었습니다만.”

병사 한 명이 아무것도 없이 막혀 있는 것처럼 보였던 벽 속으로 사라졌다. 그들이 처음 이곳에서 모습을 드러낼 때부터 한눈에 알아보았지만, 역시나 눈속임이었다. 관련 분야에 지식과 소질이 있는 술사라면 누구나 어렵지 않게 펼칠 수 있는 간단한 환영. 병사가 말했듯 적이 어지간하면 이곳에 접근하지 않는다 하니, 이 정도 간단한 눈속임만으로도 충분하다고 판단한 듯했다. 아니면 이 이상의 조치를 할 수 있는 여력이 없었거나.

벽 속은 제법 길게 이어지는 동굴이었다. 동굴 내부는 횃불을 놓지도 않았건만 어둡지 않았다. 동굴 천장과 벽에 간간이 박혀 있는, 뭔지 모를 돌들이 미약한 빛을 발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그들은 벽에 손을 짚지 않고서도 똑바로 걸을 수 있었다.

“용케도 이런 곳을 찾았군.”

로센이 작게 중얼거렸다. 그러자 앞서가던 병사 한 명이 답했다.

“공자님이 찾으셨소. 그분께서 우리를 이곳까지 이끄셨지.”

로센은 말단 같은 병사가 자신에게 제법 건방진 투로 말을 했음에도 개의치 않았다. 정확히는, 그럴 겨를이 없었다. 사실 그는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 그의 영혼에 깃든 정령이 조금 전부터 그 어떤 미동도 없이 잠잠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곳에 무언가가 있다. 정령마저 침묵하게 하는 무언가가.

“장군.”

어느 순간 통로가 넓어졌다. 널찍해지는 통로를 지키고 서 있던 병사들이 군터를 알아보고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소리없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이들이 대다수였다. 로센은 그들 사이에 빠르게 번지는 안도감을 읽을 수 있었다. 이제 살았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우리도 도망치듯이 이곳까지 온 건데 말이지.’

물론 저들의 희망이 어디서 기인한 것인지는 안다. 아마도 신뢰겠지. 그는 군터 크렘보르가 그의 병사들에게 얼마만큼 신뢰받는지 전부터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그들은 과장을 조금 보태자면, 군터 크렘보르오 함께라면 그 어떤 적이든 무찌를 수 있다고 확신하는 듯했다.

그들은 널찍해진 통로를 따라 조금 더 걸었다. 거기서부터는 걸음이 조금씩 아래로 이어졌다.

“이건…기묘하군요. 그렇지 않습니까?”

로센이 슬쩍 모페이브에게 다가가 말을 붙였다. 그는 이 나이 지긋한 사내가 군터 크렘보르의 측근이며, 동시에 실력 있는 술사라는 것을 알게 된 후부터 틈이 날 때마다 그와 말을 섞으려 노력했다. 그런 그의 노력이 헛되지 않아, 지금은 이렇게 스스럼없이 말을 걸 수 있을 정도에 이르렀다.

“예. 그렇군요.”

“이곳이 저 밖에서 벌어지고 있는 난리와 연관이 있을까요?”

“그럴 수도 있겠지요.”

“아니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군요.”

모페이브는 침묵했고, 그게 그의 답이었다. 나직이 한숨을 쉰 로센은 다시 정면으로 시선을 던졌다.

명백히 지하까지 다다랐음에도 공기는 달라지지 않았다. 지하 특유의 음습함도 없었다. 얼마간 이어진 걸음 끝에 어둑한 광장이 나타났을 때까지도 그러했다.

“아버지.”

광장에는 족히 수십, 어쩌면 백 명 정도 될지도 모르는 인원이 있었다. 그리고 그중 한 사람. 체구가 조금 크기는 하지만 그 외에는 딱히 특별한 구석이 없어 보이는 사내 한 명. 이상하게 시선이 가는 그가 군터 크렘보르를 아버지라 부르며 다가왔다. 로센은 그가 보리스 크렘보르임을 알았다. 그의 입에서 아버지라는 말이 나오기 전부터.

* * *

“이런 곳에서 뵙는군요.”

“그래. 설명이 필요할 것 같은데.”

부자간의 재회에 애틋함 따위는 없었다. 뭐, 기대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 곳, 이런 상황에서조차 변함이 없는 부친의 모습에 보리스는 일말의 안도감까지 느끼며 쓰게 웃었다. 그는 일행을 광장 안쪽으로 이끌었다.

“모페이브님에게 이야기는 들으셨을 테니, 이곳에서 겪었던 일들만 말씀드리겠습니다.”

보리스는 말을 길게 하지 않았다. 내용도 간단했다. 군터 일행과 같았다. 그는 수하들과 함께 이곳에 이르렀고, 저 위의 혼란스러운 전투에 휩쓸렸다. 차이가 있다면 보리스 일행은 군터 일행보다 더 빠르게 한계를 맞이했고, 살기 위해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려야 했다는 것.

“이곳까지 온 것은 우연이었습니다. 하지만 이곳에 이르자마자 알아차렸지요.”

광장의 중앙. 바닥에 난 큼직한 균열에서 희끄무레한 연기 같은 것이 끊임없이 피어올랐다. 술사로 보이는 몇 명이 그 연기 앞에서 눈을 감은 채 집중하고 있었다.

“저 연기. 매개라고 하더군요. 아무튼, 저것을 통해서 이곳의 모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모든 것?”

“예. 덕분에 알게 됐지요. 우리가 어떤 곳에 갇힌 것인지 말입니다.”

보리스가 손을 뻗어 균열에서 흘러나온 연기를 훔쳤다.

“이곳의, 저 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투는 일정한 시간마다 반복됩니다. 죽었던 것들, 사라졌던 것들이 멀끔한 모습으로 살아나 다시 싸웁니다. 지금까지 정확히 6번 반복됐습니다. 그러니까, 직접 본 것만 그렇다는 겁니다.”

보리스는 침묵하고 있는 일행을 힐끗 보고는 말을 이었다.

“이 매개를 통해 출구를 찾으려고도 했지만, 찾지 못했습니다.”

묵묵히 보리스의 말을 듣고만 있던 군터가 입을 열었다.

“모든 것을 볼 수 있다고 했지.”

“예.”

“가운데 있던 것도 보았느냐?”

“…보지 못했습니다. 일그러진 너머를 보려고 하면 정신이 타격을 입습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무언가에 짓눌리는 느낌이 들더군요.”

보리스는 군터가 무엇을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모를 수가 없다. 이곳의 모든 것을 봤으나 오직 하나 보지 못한 것. 이곳에서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분명 그 일그러짐 너머에 존재하리라.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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