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7화
“장군!”
“이건 또 무슨!”
뒤따라 온 수하들이 느닷없이 펼쳐진 전장을 보고 기함했다. 그중 냉철한 몇몇은 놀란 와중에도 상황을 파악하려 애썼으나 그들도 눈이 핑핑 도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한 번에 받아들일 수 있는 충격의 양에 한계가 있다고 한다면, 지금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은 그 한계를 한참이나 넘어선 것이었기에.
“이건…현실입니까?”
얼핏 봐도 수천은 넘어 보이는 군대도 그렇지만 하늘을 수놓는 불덩이며 내리치는 벼락, 기괴한 형상의 괴물들은 그야말로 비현실적이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조용한 설산을 이동하고 있었건만, 한 걸음 내디뎠을 뿐인데 이런 비현실적인 광경이라니. 이게 꿈은 아닌지, 현실인지 의심부터 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반응이었다.
“일부는.”
짤막하게 답한 군터가 창을 휘둘렀다. 궤적 끄트머리에 아슬아슬하게 걸린 병사 하나가 목이 잘리고, 연기처럼 흩어져 사라졌다. 그것을 똑똑히 지켜보고 있던 모페이브가 저도 모르게 탄식했다.
“이런 것은 들어본 적도 없습니다. 이건…마치 현실과 환상이 뒤엉킨 것 같군요.”
현실과 환상이 뒤엉켰다? 글쎄. 지금 보이는 것 중 일부가 환상일 수는 있겠지만, 현실도 섞여 있을까?
[그럴 리 없지. 이 중에 진짜는 아무것도 없다.]
이가로프가 코웃음 치며 말했다.
[어떻게 알지?]
[저곳을 봐라 장군.]
군터가 이가로프의 의지가 가리킨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전장의 한복판. 안을 들여다볼 수 없을 정도로 일그러진 공간에서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졌다. 그것은 힘이었고, 동시에 존재감이었다.
[절대 잊을 수 없지. 거인왕이다. 저 안에서 느껴지는 것 중 일부는 거인왕의 것이야. 하지만 그는 이곳에 없지.]
[그렇다면?]
[이곳에 진짜는 없다는 뜻이지. 이곳의 모든 것은 가짜다.]
이가로프는 그렇게 이야기했지만, 군터는 동의하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은 가짜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생생했다. 눈도, 귀도, 영적인 감각으로도 그렇게 느껴졌다. 진짜가 아니라고 해도 이 정도 수준이라면 가짜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으리라.
하지만 이가로프의 눈썰미는 인정할 만했다. 그는 군터보다도 빠르게 이 작은 세계의 중심축을 간파했다. 거인왕에 대한 집착과 분노가 빚어낸 결과이리라.
[단번에 가는 것은 불가능해. 그렇지 않나 장군?]
[그래.]
짧은 순간 군터는 가늠해보았다. 지금 그가 있는 위치에서 저 일그러진 ‘중심’을 향해 나아간다. 그 사이에 있는 것들은 형태와 상관없이 모두 적이다. 저 적들은 아직까지는 불청객에 대해 특별히 적의를 드러내거나 하지는 않았으나 중심으로 다가가려 해도 계속 그럴지는 알 수 없다. 그러므로 마주치는 모든 것과 싸우며 나아간다고 가정한다.
‘쉽지 않다.’
환영과 어느 정도 실체를 지닌 것의 구분을 할 수 없는 이상 무작정 부딪칠 수밖에 없다.
부오오오-!
웅장하게 느껴지는 포효. 거대한 그림자가 머리 위에 드리웠다. 군터는 그제야 슬쩍 고개를 들어 상대를 확인했다.
양옆으로 높이 솟은 사슴의 뿔. 늑대와 호랑이를 반쯤 섞어 놓은 것 같은 얼굴. 그런데 땅을 디딘 다리는 두 개뿐. 흡사 사람처럼, 혹은 원숭이처럼 두 팔을 길게 늘어뜨렸다. 갈고리 같은 손톱은 그 자체로 흉험함을 풍겼고, 입은 늑대의 그것처럼 툭 튀어나와 있었다.
뚝. 뚝.
날카로운, 맞물리지 않은 이빨 사이에서 흘러나온 진득한 침이 땅에 방울방울 떨어져 내렸다.
치익-
저 지저분한 입에서 흐른 것이 침이 아니라 불똥이었을까. 검게 물든 땅을 일견한 군터가 창을 고쳐 쥐었다.
이가로프의 소리가 들렸다.
[예전에는 이런 것들이 적지 않았지.]
[예전?]
[카라누르가 오기 전. 그때는 이런 정령들이 꽤 있었지.]
[정령이라고?]
무슨 건축물이라도 된 것처럼 가만히 선 채 침만 질질 흘리고 있는 괴물에게서는 음산함만이 느껴졌다. 이런 것이 정령이라?
[정령이란 세상이 스스로 잉태한 존재를 말한다. 카라누르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그런 존재를 정령이라 불렀지. 그리고 이건 틀림없이 내가 기억하는 정령이다.]
[그렇군.]
정령이든 괴물이든 무슨 상관이겠나.
뚝-
그런 소리가 들린 듯했다. 눈알만 한, 탁한 액체 한 덩이가 느릿하게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위에서 내려온 그것이 눈높이 정도까지 다다랐을 즈음. 군터가 느슨하게 늘어뜨리고 있던 창을 번개처럼 휘둘렀다. 그와 동시에 사람 하나 정도는 통째로 집어삼킬 수 있을 것 같은 거대한 아가리가 역한 냄새를 풍기며 다가왔다.
카앙!
허공을 가르던 창이 중간에 막혔다. 괴물의 왼쪽 앞발. 아니, 손. 갈고리 형태의 발톱 세 개가 뚝 부러져 튀었다. 그러자 부러진 발톱이 있던 자리에서 거무튀튀한 줄기 같은 것이 날카롭게 뻗어 나왔다. 순간 군터의 미간에 굵은 주름이 잡혔다.
창은 이미 발톱 세 개를 부러뜨리고 위쪽으로 뻗고 있었다. 군터는 창을 회수하는 대신 비어있던 왼손을 뻗어 다가오는 줄기의 끄트머리를 쥐었다.
[정말 놀라운 힘이야.]
이가로프가 삽시간에 말라비틀어지는 줄기를 보며 감탄했다.
죽음은 사람이 다루기 힘든 힘이다. 죽음이라는 개념의 난해함을 떠나, 사람이 생명이기에 그렇다. 마치 강 속에서 불꽃이 피어오르는 것과 같다. 죽음은 생명의 대척점이며, 그렇기에 생명을 지닌 존재가 죽음을 다루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불가능이 아니라 불가능에 가깝다 함은, 바로 여기에 예외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
정령이 방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형언하기 힘든 괴성을 토하며 아가리를 벌렸다. 군터와 그가 탄 군마를 통째로 삼켜버릴 것처럼 아가리를 들이대는 정령. 그에 군터는 줄기를 붙들고 있던 손을 떼더니 침착하게 다시 내질렀다. 정면이 아니라 머리 위를 향해.
푸욱-!
끔찍하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벌어졌던 아가리가 덜컥 흔들렸다. 위로 뻗은 군터의 손이 정령의 턱밑을 정확히 파고든 것이다.
“흐읍!”
우드득! 뼈 부러지는 소리가 들리고, 정령의 거체가 훌쩍 떠오르더니 한 바퀴 뒤집혀 그대로 땅에 처박혔다.
[말 못 하는 짐승이 계속해서 고통받는군.]
타박 섞인 한탄. 군터는 무시하고 몸을 일으켰다. 그를 태운 군마가 네 다리가 모두 부러진 채 숨넘어가는 소리만 불규칙적으로 흘려대고 있었기 때문이다. 군터의 피 묻은 손이 경련하는 군마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었다. 그의 손이 떠나갔을 때, 불쌍한 군마의 숨이 멎었다. 동시에 반쯤 감겼던 눈이 번쩍 뜨였다.
[이쯤 되면 괜찮은 놈으로 하나 거두는 것이 어떤가?]
[시답잖은 소리나 늘어놓을 거면 잠들어 있어라.]
아간투스베록이 이곳에 없다는 것을 확신한 후, 이가로프는 흥미를 잃었는지 시시콜콜한 말이나 늘어놓았다. 지금까지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만, 이제부터는 달라질 수도 있다. 저 중심으로 다가가는 동안 계속해서 이런 것들이 튀어나온다면 말이다.
* * *
“어서 성수를!”
다급히 외친 모페이브가 손으로 땅을 짚었다. 그의 호흡과 대지의 호흡이 일치했을 때, 무형의 일렁임이 주변으로 퍼져나갔다.
“지금이다!”
술사들의 기감은 뛰어난 수준을 넘어 특별하다. 게다가 미리 말을 맞추기까지 했다면 손발을 맞추는 것은 손쉬운 일이었다. 모페이브의 술법이 발동되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 보조를 맞추는 다른 술사들의 호흡은 수년간 어깨를 맞댄 병사들의 그것 이상이었다.
화르륵!
땅이 뒤집히고 성수가 선을 그었다. 그 위에 불씨가 떨어지니 불의 장벽이 삽시간에 높이 솟구쳤다.
“흐트러지지 않는 것들을 노려라!”
성수를 땔감 삼아 일어난 불은 평범한 불이 아니었다. 높이 일어난 불의 벽은 몰려오는 적들을 막지는 못했으나 환영과 실체를 지닌 진짜 적을 구분해주었다. 환영은 불의 벽을 넘지 못하고 흩어져 사라졌으며, 오직 실체를 지닌 적만이 불에 그슬리면서 벽을 넘어 들이닥쳤다.
“물러나시오!”
그때부터는 칼을 든 자들의 차례였다. 보울룬은 그중에서도 가장 먼저 앞으로 나섰다. 하지만 당당한 겉모습과 달리, 그는 내심 당황하고 있었다.
‘오히나.’
때로는 심드렁한 태도를 보이기도 하지만, 단 한 번도 적을 앞에 두고서 꺼리는 모습을 보인 적이 없는 정령이 지금은 주저하고 있었다. 뱀의 모습을 한 정령과 영혼에서부터 연결돼있는 보울룬은 그 망설임이 어떠한 아련한 감정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 감정이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지까지는 알 수 없었다.
‘오히나. 설령 네가 망설이더라도, 나는 싸워야 한다.’
이를 악문 보울룬이 검을 들어 올렸다.
술사들의 활약으로 이제야 적을 식별할 수 있게 됐지만, 그뿐이었다. 여전히 적은 시선을 돌리는 곳마다 가득했다. 그나마 한 가지 위안거리가 있다면.
“저주스러운 것들! 죽어라!”
그들의 적들은 서로에게도 적인 것 같다는 점이었다. 정확히는 사람의 형상을 한 적들과 그 외의 형상을 적들이.
생각해보면 처음 이곳에 왔을 때부터 저들은 서로를 죽여대고 있었다. 말하자면 그들은 저들의 싸움에 끼어든 불청객인 셈이었다. 어쩌다 보니 이곳에 들어섰고, 얼떨결에 저들의 싸움에 휩쓸려버렸다.
“자리를 지켜라! 버티기만 하면 된다! 놈들이 서로를 죽이게 내버려 둬!”
조금만 생각해보면 누구나 떠올릴 수 있는 생각. 그러나 그 생각을 적절한 때에 떠올릴 수 있는 이는 몇 되지 않는다. 로센은 그 몇 되지 않는 이들 중 하나였다. 그는 연신 자리를 지키라 소리치며 흥분한 병사들을 진정시켰다.
“잘 짚었지만, 안타깝게도 악수(惡手)다.”
모든 소리가 뒤섞여 바로 옆에서 하는 말도 잘 알아듣기가 힘든 와중에 유독 또렷하게 들리는 나직한 한 마디.
“누구냐!”
로센이 인상을 일그러뜨리며 외쳤다.
“나는 보리스 크렘보르다. 처음 보는 얼굴이지만, 자네는 내 이름을 알고 있을 테지.”
“보리스……?”
로센의 날 선 태도가 누그러졌다. 보리스 크렘보르? 당연히 안다. 여기까지 온 이유가 바로 그 보리스 크렘보르를 찾기 위해서가 아니었던가.
자신을 보리스 크렘보르라고 주장하는 자는 로센의 반응에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제 말만 이어갔다.
“지금은 저들끼리 싸우고 있지만, 놈들은 곧 이방인의 존재에 집중할 걸세. 그렇게 되면 자네들은 꼼짝없이 포위당한 채로 싸워야 할 거야. 내 아버님이 계시지만, 그분도 자네들을 모두 지켜주시지는 못할 테고.”
“잠깐. 정말 당신이 보리스…….”
“그러니 지금 바로 움직여야 하네. 이렇게 말을 전할 수 있는 것도 잠깐뿐이야. 침식이 더 심해지면 나도 도와줄 수 없어.”
“아니, 도대체가.”
남의 말에는 귀를 닫는 것이 크렘보르 가문의 특징인가? 로센은 당황한 와중에도 이어지는, 자칭 보리스 크렘보르의 말에 집중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