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터-975화 (975/1,064)

975화

“뭐지?”

앞서가던 정찰병이 당황하며 말을 멈춰 세웠다. 그러자 뒤따르던 그의 동료들도 덩달아 멈춰섰는데, 그들도 이상을 눈치챘는지 무슨 일이냐고 묻는 대신 마찬가지로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않으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길이…?”

“그래. 달라졌어. 아니, 그게 아니라 이건 아예…….”

“사라졌다.”

그들이 이제까지 이용한 길은 아는 사람만 아는 샛길 같은 것이 아니었다. 행정구역이 세워지면서 지방 정부에 의해 계획적으로 만들어졌으며, 오랜 세월 동안 사람과 물자가 이동하면서 그 크기를 키워온 대로였다. 그런데 그 길이, 마차 여러 대가 나란히 이동해도 충분한 대로가 갑자기 뚝 끊겨버렸다. 본래 길이 이어져야 할 곳에 전에는 본 적이 없는 수풀이 우거져 있었다. 어디까지 이어져 있는 것인지 알 수도 없을 만큼 울창한 수풀이.

“이게 무슨……. 숲인가?”

정말 작은 숲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 같았다. 말을 타고 있음에도 고개를 들고 올려다 봐야 할 정도로 큰 나무들도 적잖이 보였고, 그 너머엔 또 꽤나 높아 보이는 산봉우리가…….

‘산? 산이라고?’

꿈을 꾸고 있나 싶었다. 고개를 한번 세차게 좌우로 휘저은 그가 뒤를 돌아보았다. 지나온 길이 보였다. 적잖이 부서지고 지저분해져서 본래의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였으나, 그럼에도 분명히 길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래. 잘못 온 것은 아니다. 꿈을 꾸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지금 보이는 모든 것은 틀림없는 현실이다.

‘믿기지 않는군.’

그가 두어 번 멍하니 눈을 끔뻑이는 사이, 뒤편의 동료들이 말했다.

“돌아가지.”

“그래. 보고해야 하네.”

그래. 그래야지. 당장 돌아가서 보고해야 한다.

“미친놈 취급이나 안 당했으면 좋겠군.”

솔직한 속마음이 무심코 입으로 튀어나왔다.

“장군께서 그러실 리가 없지 않은가.”

그래. 그러실 테지. 하지만 다른 이들은 분명 비웃을 것이다. 이곳에 직접 와서, 이 비현실적인 광경을 눈으로 직접 보기 전까지는 분명 그럴 것이다. 자신이라도 그랬을 테니.

“돌아가세.”

그들은 그렇게 난데없이 나타난 숲 앞에 더 나아가기를 포기하고 돌아갔다. 예정보다 훨씬 빠른 귀환이었다.

* * *

분명 기억 속에 있는 곳인데, 기억 속 모습과는 전혀 다르다. 설령 기억 속에서 몇 년이 지났더라도 이렇게까지 바뀌지는 않았을 것이다. 불과 몇 년 사이에 없었던 숲이, 산이 생기지는 않을 것 아닌가.

그런데 이 급작스러운 변화에 부자연스러움은 없었다. 마치 시간이 거꾸로 돌아간 것 같았다. 그는 보지 못한 언젠가, 인간의 손이 닿기 전으로.

“사실이었군.”

“이게 대체…….”

그들은 여기까지 오면서 온갖 기이한 것들을 질리게 목격했다. 기이한 것으로만 따지면 지금 눈에 보이는 것보다 더한 것도 봐왔다. 그런데도 지금 느끼는 충격이 더 큰 것은, 이곳이 솔롬으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곳이기 때문이었다. 길을 재촉한다면 이틀 안에 닿을 수 있을 정도.

“장군. 이건…….”

보울룬은 판니른에서 나고 자랐지만 단 한 번도 솔롬이나, 솔롬 근방에도 가본 적이 없었다. 따라서 이곳도 초행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의 눈에도 이곳은 너무나 이질적으로 보였다. 길의 끄트머리에 나타난, 인간의 손이 닿은 것 같지 않은 울창한 삼림이라니.

게다가 삼림 속, 그리 멀지 않은 것 같은 곳에서 생소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새소리 같기는 한데, 날카로운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흐릿한 울림이 느껴졌다. 머리와 마음 모두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신비롭다는 생각이 절로 드는, 독특한 울음이었다.

보울룬은 방금 ‘장군’에게 말을 걸었으면서도 무심코 고개를 돌려 작아지는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번거롭게 됐군.”

“예?”

퍼뜩 정신을 차린 보울룬이 고개를 돌렸다. ‘장군’은 그를 보고 있지 않았다. 보울룬은 그 시선이 자신은 따라갈 수 없는 먼 곳을 향해 있는 것 같다고 느꼈다.

“돌아갈 수는 없습니까?”

그 물음에 대한 답은 옆에서 들려왔다.

“지체되는 것도 문제지만, 돌아가는 쪽도 이렇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지.”

“로센.”

“그렇지만…역시 찝찝하기는 하군.”

로센이 듬성듬성 짧게 자란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본래 인간의 손에 부서지고, 깎이고, 다져졌을 땅이 이런 원시림으로 변해버렸다. 이곳에 대체 어떤 일이 일어났단 말인가. 이것도 어떤 마물이 부린 조화일까? 그렇다면 그 마물은 얼마나 강력한 존재일까.

거기에까지 생각이 미치자 저 고즈넉한 삼림이 괴물의 아가리처럼 보였다.

‘어찌할 생각인가.’

로센의 시선이 조용히 군터 크렘보르에게 향했다. 그는 여전히 전방의 숲을 바라보고 있었다. 요 며칠 동안 그를 주의 깊게 관찰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

“그대로 간다.”

“예. 하지만 길이…….”

“없으면 만든다.”

한번 결정한 것은 무르는 법이 없다. 수하들의 의견을 존중하는 듯하지만, 때로는 어이가 없을 정도로 과격한 모습도 보인다. 변덕스럽다고도 표현할 수 있겠지만, 그 정도로는 충분하지 않다.

단 한 가지 확실한 점은, 이 사내의 속내를 짐작하는 것은 무의미하며 어쩌면 위험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로센에게 있어서는 그 점이 가장 골치 아픈 점이었다. 보울룬은 대체 어떤 면모에 홀린 것인지, 군터 크렘보르가 불구덩이에 뛰어들라면 정말 뛰어들기라도 할 것처럼 맹목적으로 굴었지만 로센은 그와 달랐다. 그가 생각하고 판단하는 기준은 오직 하나뿐. 그건 바로 자신에게 이득이 되느냐 그렇지 않으냐 하는 것이었다.

군터 크렘보르는 정말 이 재난을 평정할 수 있는가? 로센은 아직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이 이름 높은 장군이 적어도 이름값은 하는 인물이라는 점만은 의심하지 않았다. 볼가이엔을 무너뜨린 마물도 그의 앞에서는 무력하게 쓰러지지 않았던가. 이 재난의 중심에는 십중팔구 그보다 훨씬 더 강력하고 위험한 무언가가 도사리고 있을 테지만, 그렇다 해도 군터 크렘보르가 쉬이 무너질 것 같지는 않았다. 그 정도만 해도 따를 이유로는 충분하다. 지금으로서는 말이다.

‘하지만…….’

그래도 한숨이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길이 없으면 만들면 그만이다. 말이야 시원시원하다만, 글쎄.

“내가 앞장선다.”

그러나 생각이 많아진 로센을 비웃기라도 하듯, 군터 크렘보르는 누가 말릴 틈도 없이 무작정 숲속으로 들어갔다. 보울룬을 비롯한 몇몇이 그를 만류하려 들었으나 이제까지 그래왔듯, 그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장군. 차라리 제가.”

그나마 보울룬이 냉랭한 분위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붙였으나, 그조차 곧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군터 크렘보르의 앞을 가로막고 있던 초목들이 그의 그림자가 드리우자마자 검게 썩어 문드러졌다. 불에 타기라도 한 듯, 삽시간에 푸석푸석한 재처럼 변했다. 장애물은 사라지고 길이 생겨난 것이다.

“아…….”

말문이 막힌 보울룬이 조용히 입만 달싹였다. 그러는 사이 군터 크렘보르는 그의 앞에 생겨난 길을 따라 천천히 나아갔다. 보울룬을 비롯한 모든 이들은 곧 입을 다물고서 그 뒤를 따랐다.

* * *

이 작은 숲은 유난히 생기가 넘쳤다. 사람으로 치면 한창 자라나는 아이처럼.

그 왕성한 생기를 통해, 군터는 이 숲이 계속 자라나는 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만약 이대로 조금만 더 시간이 흐른다면 이 숲은 ‘작은’이라는 표현이 어울리지 않는 곳이 되리라.

군터가 이 생기 넘치는 숲에 들어선 것은 막 덩치를 키우던 불씨에 찬물을 들이부은 것과 같았다. 그는 갈무리하고 있던 그의 힘을, 죽음의 기운을 의도적으로 분출했다. 그의 시선, 작은 숨결 하나하나에 짙은 죽음의 기운이 흘러나왔다.

“…….”

지시하지 않아도 알아서 앞으로 나아가는 말 위에서, 군터는 비스듬히 고개를 들었다.

숲이 내지르는 소리 없는 비명과 거기에 묻어나오는 분노가 느껴졌다.

“주의해라.”

무언가 온다.

뒷말은 덧붙이지 않았으나, 감각이 좋은 이들은 바로 알아차렸다. 숲의 분위기가 일변했다는 것을 느낀 것이리라. 보울룬을 비롯한 선택받은 자들이 가장 빨랐고, 술사들이 뒤를 이었으며, 병사들 가운데에도 몇몇이 표정이 변했다.

그리고 잠시 후.

“뭐야!”

“아래! 아래를 봐!”

밟는 대로 뭉개지던 풀들이 뱀처럼 말의 다리를 휘감고 올라왔다. 고작해야 손가락 두어 마디 정도 길이였던 풀들이 그 배 이상으로 길쭉해지며 휘감기는 모습은 그 자체로 섬뜩하게 다가오는 부분이 있었다. 게다가, 사람보다 훨씬 예민한 말이 풀이 제 다리를 휘감기 시작했음에도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꼴불견이로군! 당황하지 마라!”

날카롭게 외친 로센의 머리 위에서 거대한 석상이 나타났다. 거상, 바르둑은 로센의 의지에 따라 큼지막한 돌주먹을 땅에 내리쳤다.

쿵!

영적인 감각이 트인 이들만이 들을 수 있는 굉음과 함께 땅이 뒤집혔다. 끝도 없이 길쭉해지던 풀들이 실 끊어진 인형처럼 힘을 잃고 흘러내렸다.

“오오!”

“역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알아차린 이들과 그러지 못한 이들 모두 ‘신의 기적’에 감탄하며 눈을 빛냈다. 흐릿한 거상이 나타나 땅에 주먹을 내리치던 모습을 눈으로 본 이들은 더욱 그랬다.

하지만 정작 그 일을 해낸 로센의 안색은 밝지 않았다.

‘이런.’

신경을 잔뜩 곤두세운 그였기에 알 수 있었다. 음습한 공기는 잠깐 흔들렸을 뿐, 흩어지지 않았다. 엉겨 붙는 풀 따위가 전부가 아닌 것이다.

그런 로센의 확신과도 같은 추측은 곧 현실로 나타났다.

“적이다!”

짙은 그늘 속에서 거뭇한 형체들이 점점 크기를 키웠다.

“나무?”

점점 다가오는 거뭇한 형체를 노려보던 보울룬이 눈살을 찌푸렸다.

보면서도 믿기 힘들지만, 그것들은 영락없는 나무였다. 다만 땅에 박혀있어야 할 뿌리가 땅 위로 빠져 나와 다리처럼 땅을 딛고 있었으며, 쭉 뻗어있어야 할 가지들이 아래로 처진 채 흐느적거리고 있다는 점이 달랐다.

“이제는 별…….”

혀를 차며 바짝 굳은 몸을 풀던 한 병사가 말끝을 흐렸다. 이미 빼곡하게 늘어서다시피 한 ‘나무들’ 뒤에, 거뭇한 형체가 또 한가득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으음.”

이곳까지 온 병사들은 하나하나가 엄격한 선별을 거친 정예였다. 그런 만큼 그들은 그 어떤 적을 앞에 두더라도 결코 주눅 들지 않는 강심장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들조차 일순간 숨이 턱 막힐 정도였다. 전후좌우, 어디로 시선을 돌리더라도 보이는 광경은 같았다.

분명 나무다. 나무에 눈이 달려있을 리 만무하건만, 그들은 시선을 느꼈다. 노골적이고, 선명한 적의가 담긴 시선.

* * *

푸욱!

창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숙이 땅을 파고들었다. 사방을 에워싼 적을 앞에 두고 무기를 내려놓는 모습은, 일견 전의를 잃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당연히, 군터는 그런 이유에서 창을 내려놓은 것이 아니었다.

[후우.]

길게 내뱉는 숨결. 단순히 숨을 내뱉었을 뿐이지만, 그 안에는 극도로 응축된 그의 힘과 의지가 담겨 있었다.

이 고즈넉한 숲을 깨끗한 연못이라고 한다면, 지금 군터가 내뱉은 한줄기 숨결은 그 연못을 검게 물들일 수 있는 한 방울의 극독과 같았다.

[그만!]

그 무엇보다 짙은 죽음이 숲을 망가뜨리기 직전. 숲의 생기가 응집하며 거대한 형상을 이루었다.

우득! 우드득!

그 변화는 영적인 세계에서만 이루어지지 않았다. 정면을 가득 채우고 있던 수십, 수백 그루의 나무들이 실타래처럼 서로 뒤엉키며 거대한 무언가가 되어갔다.

[어째서?]

자그마한 언덕만 한 크기. 그 거대함에 위축되어 제대로 살피기 힘들지만, 그 무형의 압박감을 이겨내고 다시 살핀다면 그것이 두루뭉술하게나마 눈과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어째서 우리를 괴롭히지?]

흡사 자그마한 언덕에 큼직한 눈 하나가 달려있는 것 같은 형상. 군터는 그 큼지막한 눈을 바라보며 답했다. 아니, 되물었다.

[너는 누구냐.]

[나는 나다. 우리는 우리지. 우리를 괴롭히지 마라.]

[신주에 갇혀있던 것들인가? 아간투스베록이 너희를 풀어주었나?]

[우리는 갇혀있었다. 거인이 우리를 풀어줬지. 하지만 우리는 그를 기억해. 그가 우리를 가뒀다. 그리고 다시 풀어줬지. 우리는 자유다.]

눈 달린 언덕이 꿈틀거리자 숲이 요동쳤다.

“…….”

군터는 이 뭔지 모를 것과의 의사소통이 별 의미가 없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이것은 아주 단순하며, 감정적이었다.

[물러나라.]

[우리를 괴롭히지 마라. 왜 우리를 괴롭히지?]

[지나가려던 것뿐이다. 너희가 길을 내준다면 서로 다툴 필요도 없지.]

[우리는 너와 다투고 싶지 않다. 너는 두렵고 강하다. 거인처럼.]

눈 달린 언덕은 순순히 길을 내주었다. 수백 그루의 나무가 흩어지고, 빽빽했던 초목이 양옆으로 갈라지며 길을 형성했다.

“이 무슨…….”

보울룬을 비롯하여, 눈 달린 언덕을 목격했던 이들은 모두 경외 어린 눈으로 군터를 흘깃거렸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구도 이게 어찌된 일인지 묻지는 않았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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