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4화
“명을 따르겠습니다.”
입맛이 썼다. 이렇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은 했지만, 달갑지 않은 예상이 맞아떨어졌을 때는 웃을 수 없는 법이다.
‘여기까지 와서 짐이 되다니. 수치스러운 일이로군.’
아드리안이 이곳에 있었더라면, 지금의 그와 같은 입장이 되었더라면 납득할 수 없다며 길길이 날뛰었을 것이다. 하지만 시어문드는 아드리안보다는 훨씬 이성적인 사내였다. 그는 만약 앞으로의 싸움이 이번과 같다면 정말 짐밖에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변명을 대보자면, 준비가 부족했다. 이번에 귀족들과 교단에서 전폭적인 협조를 받기는 했으나 그것으로도 충분하지는 않았다. 적어도 그의 상관은 그렇게 여기는 듯했다. 그리고 시어문드는 상관의 그런 판단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최대한 빠르게 준비를 마치고 뒤따르겠습니다.”
추태는 한 번이면 족하다. 오랜만에 시어문드의 의욕이 최고조로 치솟았다.
* * *
추리고 추렸다. 그렇기에 군터가 이끄는 병력은 얼마 되지 않았다. 고작해야 이백 남짓. 위세 높은 적포장군이 거느린 군대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초라한 규모였지만 그 면면까지 살펴보면 그렇게까지 떨어지지는 않았다.
일단 신의 축복을 받았다는 선택받은 자가 셋이나 함께 했다. 거기에 하잘에서 나름대로 이름을 알린 술사들이 수십 명이나 있었다. 그들 모두 장래가 기대된다는 이야기를 듣는, 한창인 나이대라는 점에서 더욱 특별했다. 게다가 그들은 모두 전투에 소질이 있는, 소위 전투 술사라 일컬어지는 자들. 나이 지긋한, 하루 대부분을 연구실에만 틀어박혀 있는 ‘평범한 고위 술사’보다 훨씬 귀한 인재였다.
“이미 한참 전에 휩쓸린 것 같습니다.”
병사의 말이 있기도 전에, 보울룬은 그러리라 짐작했다. 한때 마을이었던 곳의 모습은 그만큼 을씨년스러웠다. 이곳에서는 사람의 온기는커녕, 그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이곳은 대체 얼마나 오래전에, 얼마나 흉악한 재난에 휩쓸린 것일까. 눌어붙은 핏자국 하나 보이지 않는 마을의 잔해를 보며, 보울룬은 이곳에서 벌어진 일을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인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사실 이미 알고, 아니 짐작하고 있었다. 판니른에 먹구름이 막 드리웠을 당시에나 하잘로 오는 피난민들이 있었지, 며칠이 지난 후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 밖에서 오는 인파가 끊겼다. 이미 도망칠 사람은 다 도망쳤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하잘이 아닌가. 판니른의 주도다. 가장 큰 도시다. 가장 많은 병력이 상주하고 있는 도시이기도 하다. 그런데 하잘로 모여든 인파는, 그런 것을 다 고려하면 확실히 적었다. 전에는 그 부분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지만,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모두 이곳처럼 휩쓸린 거다. 피난을 갈 틈도 없이 순식간에.
‘끔찍하군.’
이 모든 것이 주께서 내려주신 시련임을 알고 있다. 신자로서 그분의 행사에 의문을 품지는 않지만, 사람으로서 이런 참극 앞에 비통함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시련에 휩쓸렸다고 해도 이곳에 살았던 이들에게는 죄가 없을 것이며, 설령 있다 해도 이렇게 처참한 꼴을 당할 정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머릿속이 복잡해진 보울룬은 남들보다 한참 높은 눈높이로 마을의 잔해를 훑어보고 있는 군터 크렘보르에게 향했다.
“장군.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는 듯합니다. 사람도, 흔적도…….”
듣는 둥 마는 둥,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찬찬히 시선을 돌리던 그가 툭 한 마디를 뱉었다.
“짙다.”
“예?”
“이곳에 남은 광기가 짙다. 이틀 전에 보았던 것보다 더.”
그가 이 사내를 따르며 알게 된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중 하나는 이 사내가 때때로 뜬금없는 말을 할 때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뜬금없는 말은 대부분 타인에 대한 무관심과 배려 없음에서 튀어나오곤 했다. 그 혼자만 이해한 것을 과정은 생략한 채 결론만 툭 던지는 것이다. 그 특유의 화법은 듣는 이들을 매번 당황스럽게 만들곤 했는데, 지금도 그랬다.
“철저하게 파괴됐다. 의도한 바는 아니지. 제 분을 이기지 못하고 날뛴 거다. 아무것도 남지 않을 때까지. 이전까지는 이 정도는 아니었지.”
아무래도 그는 이 파괴의 흔적에서 처참함 이상의 뭔가를 읽어낸 듯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궁금하긴 했지만 의심하지는 않았다. 이 사내는 주께서 이 시련을 이겨낼 수 있도록 안배하신 그분의 사도였으니.
“그 말씀은…이곳에서 날뛰었던 괴물들이 이전까지 봤던 녀석들보다 더 강력하다는 뜻입니까?”
“글쎄.”
* * *
더 강력하다? 더 미쳤다는 말이 더 강하다는 말과 같은 의미는 아니다. 하지만 더 위험하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곳을 파괴한 놈들은 말 그대로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 그런데 우습게도, 흐릿하게 남은 흔적에서는 그 어떤 악의도 느껴지지 않았다. 놈들은 그저 본능적으로 행했을 뿐인 것이다.
‘가까워지고 있다.’
그게 거인왕 아간투스베록일 수도, 신주일 수도 있다. 뭐가 됐든 이 난리의 핵심적인 부분에 다가가고 있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퍽-! 퍼퍽-!
“으앗!”
묘하게 색이 바랜 것 같은 지면을 살펴보던 병사들이 기겁하며 거리를 벌렸다. 방금까지 그들이 살펴보던 그 색이 바랜 지면에서 뭔가가 튀어 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피 같기도 하고 기름 같기도 했다. 병사들이 황급히 색이 다른 땅에서 거리를 벌리는 가운데, 군터는 오히려 그것에 가까이 다가갔다.
‘뭐지?’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물론 그의 감각을 속이고 숨어있을 수 있는 놈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푹!
군터가 창을 거꾸로 쥐고서 빛바랜 땅을 깊숙이 찔렀다. 뭔지 모를 액체가 더 높이, 더 많이 튀었다. 군터는 그것이 거의 그의 눈높이까지 튀어 올랐음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거칠게 땅을 헤집었다.
“장군. 위험할지도 모릅니다!”
술사들이 만류했으나 듣지 않았다. 잠시 후. 군터는 땅에 창대 일부까지 파고든 창을 빼냈다. 그렇게 거칠게 다뤘으나 예기가 조금도 죽지 않은 창끝에는 번들번들한 무언가가 묻어 있었다.
‘피? 아니. 그보다는…….’
그것에서는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창끝에서 머무는 생기의 잔재를 느낄 수 있었다. 분명히, 이것은 한때 생명의 일부였다. 지금은 아니지만.
[알 것 같군.]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스쳤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이가로프가 말을 꺼냈다. 그는 감옥의 안에 있었으나 군터의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었다. 특별히 그를 배려하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이가로프만이 지닌 특별한 재주였다. 아마 그의 영혼이 지닌 특별함과 관련된 것일 터. 물론 군터는 원한다면 언제든 이가로프의 영혼을 잠재울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이가로프의 조언은 종종 그가 생각지 못한 부분을 짚어주기도 했기 때문이다.
‘묻힌 건가.’
[자의는 아니었겠지. 이곳을 쓸어버린 놈들이 바란 바도 아니었을 것이고. 대지의 부름을 받은 것 같군.]
대지의 부름. 군터는 그게 무엇이냐고 묻지 않았다.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땅에서 난 것이 다시 땅으로 돌아간 것뿐이다. 자연스러운 순환이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이곳에서 일어난 일은 그 모든 것이 너무 빠르게 흘러갔다는 것뿐.
[역시 이해하는군.]
군터가 미련 없이 몸을 돌리자 많은 시선이 따라붙었다. 군터는 그들의 의문을 해소해줄 생각이 없었다. 왜 그래야 하는가. 설령 설명해준다고 해도 이들은 쉽사리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가까워지고 있어 장군. 나는 느낄 수 있네.]
[나 역시 그렇다.]
어느덧 해가 저물고 있었다. 말에 오르는 병사 중 일부는 가볍게 몸을 털었다. 그들이 이곳에서 느꼈던 음산함을 털어내려는 듯이.
하지만…글쎄.
모든 것이 파괴된 이곳에서, 군터는 음산함 대신 고요한 평온만을 느꼈다.
* * *
와아아아-!
평야를 가득 메운 군대가 일제히 함성을 내질렀다. 그중 말끔한 몰골을 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흙바닥에서 몇 바퀴를 구른 것처럼 흙먼지를 덕지덕지 묻힌 이들도 있었고, 피 칠갑을 한 이들도 있었으며, 심지어 제대로 서지도 못해 한쪽 무릎을 꿇고 있거나 피가 샘솟는 몸 어딘가를 움켜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 모두, 이 순간만큼은 모든 것을 잊고 함성을 토했다. 그들이 느끼고 있는 고통마저도 다 토해버리려는 듯이.
황자 자콥 트라소프는 바람을 등지고 선 채 피로 물든 땅을 눈에 담았다.
“승리를 감축드립니다 전하!”
“감축드립니다!”
기쁨을 억누르지 못하는 자들이 그에게 축하를 건넸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그 누구도 대승이라는 말을 입에 담지는 않았다. 그들도 아는 것이다. 이 처절한 승리는 결코 깔끔한 뒷맛을 남길 수 없다는 것을.
지금의 짧은 기쁨이 지나가고 나면 그때부터는 많은 것을 걱정하고 고민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기뻐해야 하리라. 그것만이 이곳에서 스러져간 이들에 대한 위로일 테니.
“전하.”
비교적 말끔한 차림의 무관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자콥 트라소프의 시선이 향하자 그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바시스가 움직였습니다. 대협곡의 소식이 끊긴 것으로 보아, 뚫린 듯합니다.”
자콥 트라소프의 입매가 비틀렸다.
“이번에는 제대로 작정한 모양이군.”
“대의회가 소집되었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만.”
“기억한다. 석 달 전이었지.”
아바시스의 머리는 하나가 아니다. 아바시스의 국운을 건 중대사는 오직 대의회를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그렇기에 그들은 늘 느리지만, 그렇기에 한 번 움직이면 그만큼 확실하게 움직인다.
“아말로페가 놈들과 내통했으리라 생각했었는데.”
“스스로 문을 열어준 것일지도 모르지요.”
“글쎄.”
제국에 대한 아바시스의 증오는 제국이 아바시스에게 품은 것과 비할 바가 못 된다. 아바시스라는 연합국가 자체가 제국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니까 말이다. 특히 제국 황실에 대한 그들의 뿌리 깊은 증오심은…특별하다. 아무리 아말로페가 이름값을 못하는 얼간이라고 해도, 그들은 그 몸에 흐르는 피를 의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동부의 소식은 없나?”
동부. 정확히는 판니른의 소식이 끊긴 지도 벌써 여러 날이 지났다. 그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든 간에, 지금쯤이면 어떤 식으로든 이야기가 들려와야 했다.
“별다른 소식은 없습니다. 아무래도…….”
조곤조곤하지만 거침없이 말을 이어가던 무관이 처음으로 말끝을 흐렸다. 그 의미를 짐작한 자콥 트라소프가 나직이 혀를 찼다.
(다음 화에서 계속)